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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인의 회복탄력성(7) : 열악한 환경 극복 (삿 4: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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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의 회복탄력성(7) : 열악한 환경 극복 (삿 4:1-10)

한국의 스티븐 호킹이라고 불리는 이상묵 서울대 교수님이 계십니다. “0.1그램의 희망”이라는 책의 저자입니다. 그는 해양학자가 되는 꿈을 품고 서울대학교와 MIT를 나와 세계적인 해양학자가 되었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미국 캘리포니아 주 카리조플레인 국립공원에서 지질조사를 하던 중 자동차 전복 사고를 당하였답니다. 한창 일한 45세 나이에 사고로 목 아래가 완전히 마비된 것입니다. 함께 차에 있던 제자 5명 중 한 제자가 현장에서 숨졌답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자신의 처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제자 생각으로 괴로운 날이 계속되었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당하면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우울해하며 현실을 부정하다가 평균 3년 이상 지나야 현실을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장애를 극복하고 6개월 만에 일상생활로 복귀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할 수 없는 일에 매달리고 집착하기보다는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나에게 닥친 사고를 불운의 시작이라고 보지 않고, 몰랐던 다른 세계를 볼 수 있는 새로운 인생 방향의 전환”이라고 말합니다.

역경을 만났을 때 바닥에 던져진 유리컵처럼 깨져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2/3은 그렇다고 합니다. 그러나 고무공처럼 튀어 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회복탄력성이 강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변화하는 환경에 잘 적응하고 그 환경을 스스로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용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13척의 함선으로 나라를 건진 이순신 장군처럼 역경 덕분에 오히려 위대한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살인하고 도망자가 되어 40년 동안 광야에 묻혔다가 민족지도자로 일어선 모세처럼, 수많은 세월 수배자로 도망 다니다가 왕이 된 다윗처럼 열악한 환경에 굴하지 않고 뚫고 나가는 사람을 회복탄력성이 강하다고 합니다.

작년에 사업 잘하시는 우리 교회 집사님 회사에서 인명 사고가 났습니다. 대학을 갓 졸업한 친구 집사님 아들이 죽은 것입니다. 친구를 돕기 위해 친구 아들을 취직을 시켜 주었는데 이제 막 졸업한 아들이 어느 순간 싸늘한 시체로 변했으니 얼마나 애통하겠습니까? 그 청년의 실수였지만 집사님도 무척 괴로워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인생의 태풍이 다가 온 것입니다.

집사님은 그 문제를 지혜롭게 풀기 위해 새벽에 나와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법대로 하면 되었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물었다고 합니다. 어떤 조건이든 유족이 원하는 대로 다 해 드리자는 마음이 들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법대로 하자고 했지만 유족이 원하는 대로 다 보상을 해 드리고 위로해 주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참 잘 했다고 위로해 주고 기도해 드렸습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어느 날 예측 못한 일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아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 살아가는 신앙인은 이 땅에 사는 동안 어떤 환경이 다가 와도 그것을 유익하게 이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위대한 신앙의 인물들이 다 회복탄력성을 가지고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였습니다. 우리는 부분만 보지 말고 전체를 보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결과만 보지 말고 원일을 보아야 합니다. 땅만 보지 말고 하늘을 보아야 합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드보라도 모든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고 승리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선지자 드보라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5장에서 승리의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5장 2-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찬양하는 승리의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도 이렇게 살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생각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렘 29:11)"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신앙인으로 어떻게 하면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고 승리의 노래를 부를 수 있겠습니까?

1. 하나님은 변화시킬 수 없는 열악한 환경이라면 내가 변해 승리하길 원하십니다.

우리 인간은 환경을 떠나 살 수 없습니다. 환경하면 일반적으로 인간을 둘러쌓고 있는 외계를 말합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자연적 환경, 인문적 환경으로 나눈다고 우리는 학교에서 배웠습니다. 자연적 환경은 사람이 만들지 않은 땅이나 공기 같은 것을 말하고 인문적 환경은 사람이 만들어내 도시나 고속도로 등과 같은 것을 말합니다.

조금 세분하여 이것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물적인 환경(자연적 환경), 인적인 환경(인적, 정신적 환경), 문화적 환경입니다. 그런데 이런 환경들은 태어날 때 우리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아주 좋지 않은 열악한 환경에서 태어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부잣집에 태어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가난한 집에 태어난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남자로, 어떤 사람은 여자로 태어납니다. 그런데 인적, 문화적 환경은 스스로 만들어낸 산물입니다. 지금 드보라는 어떤 환경에 놓여 있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20년 동안 야빈 왕의 노예같이 되어 심히 학대를 받았습니다. 나라의 주권을 빼앗기면 얼마나 비참합니까?

일제 치하의 우리나라처럼 정치적 자유가 없습니다. 경제적 자유가 없습니다. 종교적 자유가 없습니다. 언론의 자유가 없습니다. 집회 결사의 자유도 없습니다. 무력으로 지배합니다. 공물을 빼앗아 갑니다. 수시로 철병거를 끌고 와서 약탈하고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아내를 빼앗아가고 딸을 빼앗아가고 곡식과 가축을 빼앗아 갑니다. 심히 학대합니다. 이스라엘이 사사 에훗과 삼갈의 활약으로 80년 동안 평화롭게 살다가(삿3:30) 나라가 망하여 야빈에게 20년 동안 심히 학대를 받고 있었습니다(2,3) 누가 만들어 놓은 환경입니까? 이스라엘 민족이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이런 어려운 환경에 처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두 가지입니다. 불순종과 불신앙입니다. 하나님만 섬기고 순종하며 가나안 땅에서 진정한 복을 받은 민족을 만들며 살라고 했는데 계속 불신앙과 불순종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민족적으로 이것이 계속 반복된 것입니다. 고질병입니다. 옷니엘이 사사로 나타나기 전에는 8년, 에훗이 나타나기 전에 18년 동안 징계하여 회개하고 돌아오길 원하는 것입니다. 징계를 당하여 경험을 했습니다. 이런 경험을 했으면 교훈을 받아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인간은 모이를 쫓는 닭처럼 쉽게 잊어버립니다. 은혜는 물에 세기고 원수는 돌에 새긴다는 말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쉽게 잊어버립니다. 또 20년 동안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불신앙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사기에는 7번이나 반복해서 나타납니다. 평화를 주면 다시 범죄하고 하나님이 범죄한 그들을 심판하는 것이 반복됩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내용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금 살만하니까 다시 배교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이 배교를 합니다. 그러자 2절에서 여호와의 징계가 임합니다. 그러자 3절에서 이스라엘이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습니다. 회개하는 것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여선지 드보라를 사사로 세우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십니다. 40년 동안 태평합니다(31). 그런데 이런 패턴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평화-배역(범죄)-징계(심판)-부르짖음-평화(사사를 통한 구원)-다시 배역 ...”의 사이클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계의 수단으로 오는 외적입니다. 하나님의 징계 앞에서 누가 피할 수 있겠습니까? 변화시킬 수 없는 거대한 환경으로 다가오는 징계 앞에서는 내가 변하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내 잘못으로 오는 열악한 환경은 내가 변하지 않으면 계속됩니다. 비오는 날 우산 쓰지 않고 비만 탓해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방안의 오물 치우지 않고 냄새만 탓해야 아무 소용없는 것입니다. 내 능력 없는 것 생각지 않고 월급만 작다고 탓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내가 변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3절을 보십시오. 부르짖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회개하는 것입니다. 내가 변하는 것입니다. 악순환을 끊으려면 내가 변해야 합니다. 술 중독으로 어려움 당하면 그것 끊어 버려야 합니다. 오랜 전에 술 중독인 청년이 있었습니다. 교회에 나왔습니다. 술을 끊고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또다시 도져 술을 먹은 것입니다. 결국 병원에 입원시켰습니다. 6개월 후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또 술을 먹는 것입니다. 결국 이혼하게 되었습니다.

몇 년이 지난 후 교회 관리 집사님으로 들어갔다고 그분의 형수님으로부터 중매를 해 달라는 전화가 왔습니다. 그 내용을 알고 있는 사람이 중매를 해 주겠습니까? 열악한 환경을 만든 문제는 내가 가지고 다닐 때가 많습니다. 꽃밭에서는 향기가 나고 쓰레기장에서는 냄새가 나는 것입니다. 교회가 분당에 있을 때 어느 젊은 자매가 새벽기도회에 나와 울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주에 등록을 하였습니다. 등록 심방을 해 보니까 남편이 마약 중독으로 감옥에 가 있는 것입니다.

얼마 후에 감옥에서 풀려나 교회에 같이 나왔습니다. 교회에서 도와주면 새 사람 만들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심방을 가자 남편이 없는 것입니다. 다시 업소에 나갔다는 것입니다. 월세를 벌기 위해 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월세를 내어 줄 터이니 당분간 나가지 말고 새벽기도를 나오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며 극복하라고 했습니다. 어느 날 이사를 가야한다고 비용이 없다고 돌을 빌려 달라고 했습니다. 하도 안타까워서 아내가 돈이 없어 마이너스 통장으로 빌려 주었습니다. 그 후 그 돈 가지고 교회를 떠난 것입니다. 나중에 양심에 가책이 왔는지 죄송하다고 전화하며 남편이 또 다시 감옥에 갔다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 앞에 나와 철저하게 회개하고 변화해야 되어야 합니다. 환경 탓만 하고 있으면 더 심각한 고난이 닥쳐옵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살아남는 종(種)은 가장 강한 종도, 가장 똑똑한 종도 아닙니다. 변화에 가장 잘 적응하는 종이 살아남는 것입니다.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자연의 질서입니다. 예수님은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5:32)”라고 말씀합니다. 나로 인해 발생하는 열악한 가정환경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시기 바랍니다. 어차피 예수 믿고 교회 다니며 짧게 한 평생 사는 것입니다.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말씀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2. 하나님은 열악한 환경을 변화시킬 대안이 우리가 되어 승리하길 원하십니다.

열악한 환경을 만나면 남 탓만 하며 원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선조들이 잘못해서, 부모님이 가난해서, 지도자가 무능해서, 사장님이 방향 제시를 잘못해서, 교회가 세속화되어, 목사님이 문제가 있어서... 끝없이 남 탓만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어떤 일을 시켜 놓으면 끝없이 남 탓만 하시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분은 되도록 지도자로 세우려 하지 않습니다. 저 뿐 아니라 누가 그런 직원을 원하겠습니까? 어디에 가서 그런 사람이 환영받겠습니까? 문제만 보고 대안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 환영받지 못합니다. 가정도 내가 만들어 가고, 교회도 내가 만들어 가고, 회사도 내가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구경꾼이나 비판자가 아닙니다. 내가 참여자이고 주인공입니다.

열악한 환경을 변화시킬 대안이 내가 되어야 합니다. 대안이 없다면 침묵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누구나 보는 것입니다. 무더운 날 무더움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추운 날 춥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럴 때 하나님 원망해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대안이 없으면 침묵하는 것입니다. 봄이 올 때까지 참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물은 흐르는 것입니다. 바람은 멈추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극한 환경을 변화시킬 대안으로 누구를 택합니까? 4절을 보십시오. 그 때입니다. 민족이 고난을 당할 때입니다. 극한 환경에서 어찌할 수 없는 그 때입니다. 철병거 구백 승 앞에 어찌할 수 없을 그 때입니다. 가정환경이 열악할 때입니다. 교회 환경이 열악할 때입니다. 회사 환경이 열악할 때입니다. 심히 학대를 당하면서도 손을 쓸 수 없을 그 때입니다. 그 때 그 문제를 해결할 대안으로 누구를 부르십니까? 드보라 입니다.

드보라는 어떤 사람입니까? 랍비돗의 아내입니다. 별로 이름도 없는 평범한 주부라는 말입니다. 여인입니다. 당시 문화적 풍습으로 보면 여인은 사람 취급을 하지 않을 때입니다. 인구 조사 수에도 들어가지 않을 때입니다. 예수님 당시만 해도 유대인들을 아침에 일어나면 세 가지 감사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첫째가 이방인으로 태어나지 않는 것, 둘째가 종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 셋째가 여자로 태어나지 않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문화적 배경에서 여성인 드보라가 대안이 되는 것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프로이드도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보았습니다.

왜 이 어려운 일을 내가 해야 하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여자라는 핑계로 회피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열악한 환경을 변화시킬 주인공으로 우리를 부를 때 회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한 가정을 만드는 대안이 내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를 부흥시킬 대안이 내가 될 수 있습니다. 주일학교를 변화시킬 대안이 내가 될 수 있습니다. 성가대를 부흥시킬 대안이 내가 될 수 있습니다. 열악한 환경이 기회입니다. 하나님의 부름 앞에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사실을 알려 주시고자 연약한 자를 불러 사용하십니다.

지난 목요일이 93주년 3.1절이었습니다. 3.1절은 1919년 3월 1일 일본의 식민 지배에 항거하고 독립 선언서를 발표하여 한국의 독립의사를 세계에 알린 날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일제의 무단통치 기간 동안 우리의 땅과 자원은 물론, 말과 교육, 신앙의 자유를 빼앗기고 억압을 당하였습니다. 유관순은 대안으로 일어났습니다. 만세 운동을 하다 학교가 휴교하자 17세 어린 나이에 고향에 내려가 독립 운동을 합니다. 새벽마다 매봉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이 민족을 위해서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유관순의 눈앞에서 부모가 일본 헌병의 칼에 찔려 죽습니다. 집은 모두 불타버렸습니다. 오빠와 삼촌도 형무소에서 복역하였습니다. 그러나 굴하지 않고 에스더처럼 기독교의 사랑에 입각하여 일사각오의 하나님 신앙으로 무저항적 구국운동을 펼쳤습니다.

3.1운동에 참여한 사람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약 4백만 명에 이릅니다. 이중 숨진 이는 7천 5백 여명, 실종자 1만 5천 여명, 부상자 1만 6천여 명, 검거된 이는 4만 7천여 명입니다. 또한 민가 7백 여 채, 학교 2개소와 교회당 47 곳이 불탔습니다. 기독교가 24%∼37%의 주동세력으로 활동하였습니다. 초기의 피체포자 1만 9천 4백여 명 중 기독교도 3천 3백 70여 명으로 17%에 해당하는 숫자였습니다.

당시 한국의 기독교도 약 30만 명이 전체 한국의 인구에 비하여 1.3%에 불과했습니다. 민족 대표 33명 중 16명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오늘날 타락하고 열악해진 환경만 탓하지 말고 우리 신앙인이 대안이 되어야 합니다. 부족하다고, 없다고, 많지 않다고, 능력 없다고 조건이 안 된다고 회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사기에 나오는 인물이 대부분 그렇습니다. 에훗은 왼손잡이였습니다. 오른 손은 불능(불구)자였습니다. 하나님이 오른 손이 되어 주었습니다(시44:3). 삼갈은 '소모는 막대기'로 불레셋 사람 600명을 죽여 이스라엘을 구원하였습니다. '소모는 막대기'가 무기입니까? 비록 마른 막대기 같을지라도 하나님이 쓰시면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정욕의 노예 삼손, 겁쟁이 기드온 하나님이 쓰신 것입니다.

실제 전쟁을 보십시오. 드보라가 바락에게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그들 네 손에 붙이리라(7)"고 말씀합니다. 누가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이(6)" 14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앞서 행하십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파하게 하십니다. 5장 2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넉넉히 승리의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나는 부족하지만 내가 대안으로 순종하면 열아한 거대한 환경을 변화시키는 주인공으로 하나님이 해 주시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권위 없는 여인 같지만 하나님이 그에게 지도적 권위를 부여해 주십니다. 5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들이 드보라에게 나아가 재판을 받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게 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바락에게 하나님의 명령이니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산으로 가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하게 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그를 네 손에 넘겨 주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말씀 붙들고 확신하며 나아가면 되는 것입니다(7절, 9절)

군인 숫자로나 무기로 보면 황당합니다. 불가능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 확신을 가집니다. 아직도 확신이 없는 바락에게 여인의 손에 의해 시스라가 죽을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그대로 성취가 됩니다(13절, 21절)

미국 크라이슬러 자동차 회사의 회장 자리에서 은퇴한 리 아이아코카는 자서전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삶의 승패는 환경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확신으로 만들어진다. 인생의 성공과 실패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좋으냐! 나쁘냐! 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삶에 대해서 어떤 확신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일리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인도에 대한 확신을 가지십시오.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결국 승리의 노래를 부르게 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십시오. 집안이 더러우면 더럽다고 짜증만 내지 말고 내가 대안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어지러우면 남 탓만 하지 말고 내가 대안이 되면 환경이 바뀌는 것입니다.

지난 주 새벽 예배를 마쳤는데 이단들이 와서 교회 벽에 이상한 문구를 붙여 놓았습니다. 제가 그것 보며 부교역자들에게 왜 이런 것도 방어하지 못하고 그렇게 교회에 관심이 없어서 이렇게 붙여 놓고 있느냐고 야단치고 짜증을 부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한 장은 그날 즉시 제가 떼어 버렸습니다. 한 장은 잘 떼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 다음날 약을 뿌려서 떼어 버렸습니다. 휴지가 있으면 주우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 내가 할 일이 아니다라고 원망만 하면 안 됩니다. 보이는 자에게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로마시대 때 검투가 유행했습니다. 로마인들은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는 것을 보고 기뻐했습니다. 그 때 믿음의 사람 델리마쿠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검투사였습니다. 그는 신앙의 사람이었답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맞지 않는 검투를 끝장내야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는 검투장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잔악무도한 검투는 끝낼지어다."라고 외쳤답니다. 사람들은 비웃었답니다. 그는 가슴을 찔려 죽으면서 외칩니다. "다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잔악 무도한 검투는 끝낼지어다."

그의 죽어가는 진지한 모습을 보면서 사람의 마음에 흥분이 사라졌답니다. 한 사람 두 사람 떠나갔답니다. 그 후 로마에서 검투 경기 살아졌다고 합니다. 자신이 악한 관습을 제거하는 대안이 된 것입니다. 한 사람의 죽음이란 시련을 통해 하나님은 한 시대의 난제를 끝냈던 것입니다. 천년동안 지속된 로마 가톨릭의 부패를 수많은 사람들이 보며 원망했습니다. 루터는 자신이 대안이 되기로 했습니다. 95개 조의 반박문을 발표하고 종교개혁을 단행합니다. 루터 종교 개혁을 할 때 이제 최후 변론을 하기 위하여 웜스 공회에 나가야만 했답니다. 이 변론에서 정죄되면 그는 화형을 당하던지 추방되어야 했습니다.

그 때 루터는 고민하며 고통가운데 힘을 잃고 있었습니다. 루터에게는 참으로 신앙이 좋은 아내가 있었습니다. `카타리나 폰 보라'입니다. 그녀는 시토수도회의 수녀였습니다. 그러나 종교 개혁가의 주장에 공감하고 11명의 수녀와 함께 수도원을 떠나 1525년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신부인 루터와 결혼하여 루터와 함께 종교개혁의 불길을 지핀 사람입니다. 루터가 두려워 떨고 있자 그녀는 상복을 입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루터는 왜 우냐고 했답니다. "하나님이 돌아 가셔셔 웁니다." "왜 이런 망령된 소리를 하느냐"고 루터는 야단을 쳤다고 합니다.

그 때 그 부인은 "왜 하나님이 돌아가지지 않았는데 당신은 그렇게 고민하고 두려워하고 있느냐"고 했다 합니다. 이 말을 듣고 루터는 “웜스 공회의 모든 기와장이 다 마귀일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나아간다.”하며 소리치고 나가 종교개혁을 단행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열악한 환경에 처하게 한 것은 우리가 대안이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대안이 되면 세상은 바뀝니다.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하신 예수님께서 우리가 열악한 환경을 변화시키는 작은 예수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3. 하나님은 열악한 환경을 홀로 변화시킬 수 없다면 함께 변화시켜 승리하길 원합니다.

열악한 환경을 홀로 변화시켜야 한다고 포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세상은 홀로 할 수 있는 일도 있지만 홀로 할 수 없는 일이 훨씬 더 많이 있습니다. 거대한 변화는 결코 홀로 할 수 없습니다. 드보라는 보십시오. 열악한 민족 환경을 변화시키는데 드보라 홀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드보라를 보완할 수 있는 사람을 보내 주십니다. 장군 바락입니다.

그는 어떤 사람입니까? 완벽한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부족하지만 드보라를 보완하여 열악한 환경을 변화시키게 합니다. 민족을 해방시키게 합니다. 난제를 해결하게 합니다. 불행의 원인자를 제거하게 합니다. 드보라가 그에게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7절을 보십시오.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그의 병거들과 그의 무리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내어 바락에게 넘겨주겠다고 확신에 찬 약속합니다. 그 때 바락은 어떤 반응을 합니까? 확신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드보라가 같이 가면 가고 같이 가지 않으면 자신도 안가겠다는 것입니다. 자신감이 없는 것입니다. 용기가 없는 것입니다. 자립심이 부족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를 따르는 1만 명의 군사가 있었습니다. 이것 따른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목숨을 내어 놓아야 할 일입니다. 20년 동안 숨죽이고 살았습니다.

그 때 드보라가 무슨 말을 합니까? 9절을 보십시오. 반절의 승리만 할 수 있다고 합니다. 확신 없는 생각의 결과입니다. 드보라는 반드시 같이 가지만 시스라는 바락이 죽이지 못하고 여인이 죽인다는 것입니다.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바락이 다볼산에 올라갔습니다. 그 때 시스라가 모든 병거를 기손강으로 모았습니다. 15절에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들을 혼란에 빠뜨립니다.

5장 21절을 보면 상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손강에 폭우를 쏟아 부으신 것입니다. 메마른 강바닥이 급류로 바뀌게 되니까 흙탕물이 넘쳐 금새 수렁으로 변한 것입니다. 병거가 수렁에 빠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러자 시스라는 병거에서 내려 도망을 하는 것입니다. 경무장한 이스라엘 군사는 큰 피해를 보지 않는 것입니다. 부족한 사람이지만 함께 동역하게 하여 열악한 환경을 변화시킵니다. 남편이 부족할 수 있습니다. 아내가 부족할 수 있습니다. 목사가 부족할 수 있습니다. 사장이 부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함께 사명을 감당할 사람입니다. 부족해도 원수가 아닙니다. 적이 아닙니다. 협력자이자 보완자이고 조력자입니다. 주도적인 일은 내가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함께 일할 사람으로 보내 주십니까?

신비합니다. 전혀 예측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의 장막에 이르렀습니다. 이 집안은 어떤 집안입니까? 11절을 보십시오. 모세의 장인 집안사람입니다. 이 집에서 나온 사람입니다. 잊힌 사람이며 전혀 뜻밖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사람입니다. 의도적으로 성경은 이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야엘이 그를 죽입니다. 이것은 결국 9절의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부족한 사람도, 잊힌 사람도 사용하여 함께 열악한 환경을 변화시키게 합니다.

18세기에 영국 국회의원이 된 윌리암 윌버포스(W. Wilberforce)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18세기 말 유럽 사회는 노예무역과 아동노동, 대중의 빈곤과 상류층의 타락 위에 세워졌습니다. 당시 영국은 세계 최고의 해군력과 상선을 갖추고 노예무역의 중심에 서 있었습니다. 영국의 선박들은 서아프리카를 통해 10만 명의 노예들 중 절반 이상을 실어 날랐으며, 1783년부터 1793년까지 리버풀의 노예선만 약 30만 명의 노예를 서인도 제도로 실어 날라 1천 500만 파운드(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약 2억 5천만 파운드)에 팔아넘겼다고 합니다. 영국에서의 노예무역은 1600년대에 국왕의 칙허와 의회의 법령으로 합법화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노예무역을 금하는 것은 반역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영국 하원의원 윌리엄 윌버포스는 사명감을 갖고 일어나 이 제도를 폐기 시키고 양심과 정의감이 살아 있는 나라 영국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독실한 신앙인이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잘 믿다 보니 세상이 싫어졌습니다. 국회의원이 되어 존 뉴톤 목사님을 찾아가 사임하고 싶다고 했답니다.

이 때 뉴톤 목사님을 국회에서 반드시 할 일이 있다고 그 일을 하라고 했답니다. 그는 영국에서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법안을 만들었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반대했지만 그의 독실한 친구였던 당시의 수상 피트(Pitt)가 그를 지지합니다. 그의 친구 그렌 빌(G. Grenville)이 그를 돕습니다. 다 반대하는 것 같지만 소수의 의로운 사람,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수많은 반대를 헤치고 “노예무역 폐지”라는 사명을 붙들고 투쟁한 지 20년 만에 노예무역 폐지안이 의회에서 통과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뜻을 세운지 56년 만에 무려 150번의 의회 논쟁을 통하여 노예제도가 영국에서 사라졌습니다.

깃발을 세우면 펄럭이고 그 깃발을 보며 모여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꽃이 있으면 나비는 모여듭니다. 좋은 뜻을 가지고 일어서면 홀로가 아닙니다. 모세 홀로 열악한 환경을 바꾼 것이 아닙니다. 같이 손을 붙들고 기도해 주는 아론과 훌이 있고, 전쟁터에 나아가 싸워주는 여호수아가 있습니다. 다윗 홀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를 사랑하는 요나단이 있고, 생명 걸고 따른 군사가 있는 것입니다. 나 홀로 만 있다고 슬픈 노래를 부르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돕는 사람을 하나님은 언제나 준비시켜 승리의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엘리야 자신 홀로 남았다고 절망할 때 하나님은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롬11:4)"고 말씀합니다.

하루에 절망으로 1100명이 자살을 시도하고 그 중 36,7명이 사망하고 있다고 합니다. 1년에 13000명이 사망합니다. 아무도 나를 도울 사람이 없다고 절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눈을 들어 보십시오. 우리를 돕는 자들이 어디엔가 있습니다. 앞에 소개한 이상묵 교수가 일어날 수 있는 동기를 제공한 분 중 하나가 이건우 교수라고 합니다. 상금 1억 원을 이상묵 교수에 기부함으로써 이상묵 교수의 문제를 공론화했답니다.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답니다. 그로 인해 자연대에서는 '공대 교수도 저렇게 하는데 우리도 나서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어났답니다. 그리고 학교로 돌아오는 데 걸림돌이 되었던 여러 가지 행정적인 문제가 순식간에 해결되었답니다. 이상묵 교수는 그 돈을 자신만을 위해 쓸 수없어 남은 돈과 개인돈을 보태 5000만 원 규모의 죽은 제자 이름으로 '이혜정 장학금'을 조성했고 책 인세를 모두 장학금으로 기증했다고 합니다.

바울 홀로 시대를 변혁시킨 것이 아닙니다. 자기 목숨이라도 내어 놓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있고, 관습을 무너뜨리면 위험을 감수하며 그를 지지해 주는 바나바가 있는 것입니다. 감옥에라도 같이 가고 어떤 경우에도 지지해주고 마지막까지 함께해 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열악한 환경일지라도 낙심 말아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20)”

열악한 환경에 처해 있습니까? 원망하거나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변화시키길 원하십니다. 쓸모없는 사람이란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열악한 환경에서도 승리하여 멋지고 아름답게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변화시킬 수 없는 열악한 환경이라면 내가 변해 승리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열악한 환경을 변화시킬 대안이 우리가 되어 승리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열악한 환경을 홀로 변화시킬 수 없다면 함께 변화시켜 승리하길 원합니다. (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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