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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안디옥교회 (행 11: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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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디옥교회 (행 11:19-30)


오늘날 소위 대형교회라고 불리는 교회들이 특히 우리나라와 미국에 많이 세워져 있습니다.
수천 명에서부터 몇 만 명에까지 이르는 교인들이 크고 화려한 예배당에 주일마다 모여서 장엄한 파이프 오르간 소리에 맞추어 찬송을 부르고 텔레비전으로 방송까지 되는 설교를 들으면서 예배를 드리는 교회들입니다.
우리나라의 대형교회들이 거의 다 대도시에 소재하고 있듯이 미국의 대형교회들도 대부분이 다 주민의 수가 급성장하고 있는 신흥도시에서 세워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큰 교회들은 자연히 작은 교회들로부터는 선망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데, 때로는 불공평한 비난의 대상도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교회가 질적으로 잘못되어 있을 때에야 크든지 작든지 비판을 받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그저 양적으로 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비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부당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대형교회라는 것은 작은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이미 초대교회 시절부터 등장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첫 신약교회인 예루살렘교회만 해도 등록교인이 무려 삼천 명이나 되는 대형교회로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예루살렘교회는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큰 박해를 받고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으며, 그 결과 그처럼 큰 교회로서 본격적인 기능과 능력을 제대� 발휘해 보지도 못한 채 점점 더 약해져 갔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욥바와 같은 시골에서는 역시 작은 교회가 생긴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반면에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안디옥교회는 큰 도시에 세워진 큰 교회였습니다.
이 안디옥은 당시 로마제국 산하에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다음가는 세 번째 대도시였습니다.
그런 대도시에 참된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을 때 그것은 곧 급성장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 세워진 안디옥교회는 나중에 가서는 예루살렘교회의 바통을 이어받아 다른 초대교회들의 모교회가 되었을 뿐 아니라 특히 이방 지역의 선교 사역을 위한 본부로서 크게 쓰이는 대형교회가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안디옥교회는 내면적으로 어떤 교회였습니까?
무엇이 안디옥교회를 그처럼 많은 교인들이 모이는 대형교회로 만들었으며 또한 무엇이 안디옥교회를 그처럼 크게 쓰임 받는 진정 '큰 교회'가 되게 만들었습니까?
우리는 이 시간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안디옥교회가 보여 주는 교회 성장의 원리들을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성장하는 교회는 부지런히 전도하는 성도들이 세우는 교회입니다.

본문 19절부터 21절에 "19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20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21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 즉 예루살렘교회가 박해를 당함으로써 생긴 여파가 안디옥교회 설립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 때 "흩어진 자들" 즉 박해를 피해 가던 예루살렘교회 교인들이 가는 곳마다 전도를 했습니다.
"베니게"는 현재 레바논에 해당되는 지역이며, "구브로"는 오늘날의 사이프러스로서 사도 바나바의 고향이기도 했습니다.
이 지역들에 일찍부터 기독교인들이 있었다는 것은 역사적 기록으로도 남아 있습니다.

그처럼 '흩어진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이 "안디옥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정치적 상업적으로 로마 제국에서 매우 중요한 도시였던 안디옥에는 오래전부터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흩어진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은 거기에 가서도 그 "도"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했었습니다.
순교자 스데반 집사가 흘린 피는 이처럼 먼 곳에까지 미치면서 전도의 씨앗이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초기 전도 활동은 제한적인 것이었습니다.
그 전도는 오직 "유대인에게만 전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역시 같은 민족이고 말도 잘 통하고 인맥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그 예루살렘교회 성도들로서는 유대인에게 전도하는 것이 이방인에게 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쉽고 자연스러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제한적인 전도 활동은 어떤 폭발적인 결과를 낳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들이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아주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 '구브로와 구레네에서 온 유대인 기독신자들'은 예루살렘 출신의 신자들보다는 훨씬 더 헬라 언어와 문화에 익숙한 소위 '헬라파 유대인'에 속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안디옥에서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전까지는 오직 '유대인에게만' 전파되던 복음이 이 몇 명의 선구자적인 전도자들을 통하여 '헬라인에게도' 전파되기 시작했던 것이었습니다.

이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였던 새로운 전도 전략은 전혀 예상 밖의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즉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는" 놀라운 성과가 나타났던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 출신의 교인들에게 있어서 그 헬라인들은 전도를 해도 별 효과가 없을 것으로만 보였던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선입관을 깨뜨린 몇 명의 신자들이 과감하게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했을 때 바로 거기에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는" 큰 구령의 역사가 일어났던 것이었습니다.
안디옥교회의 큰 부흥의 시발점은 이처럼 몇 명의 신자들이 전도의 마음 문을 활짝 열었던 데에 있었습니다.

전도하기 쉬워 보이는 대상, 전도하면 믿을 만하다고 예상되는 대상만 골라서 전도하려는 것은 이미 전도자 자신의 마음속에 제한의 선을 긋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처럼 '이 사람은 가망성이 있겠다.'라든지 '이 사람은 내가 전도를 해도 그렇게 망신을 당하지는 않겠다.'라는 따위의 예상을 미리 세우고 전도하는 것은 실상은 '주님께서 친히 하실 일'을 자기가 나서서 가로막는 행위가 되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구원하실 자를 선택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는 것인데 사람 편에서 미리 선별하려는 것은 실로 어리석고도 무례한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이 전도가 성공할까, 못할까?'를 자기가 미리 예상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택자라면 반드시 '주의 손이 함께 하실 것'을 확신하는 가운데 자신의 눈에 믿을 것처럼 보이든지 혹은 전혀 믿을 것처럼 보이지 않든지에 상관없이 그저 만나게 되는 모든 사람에게 무조건 전도하는 것만이 전도의 유일한 방법이며 최고의 전략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 4:2)고 명령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한 자가 누구인지를 자기가 지레짐작해서 전도 대상에 제한을 두려 하는 마음의 장벽을 깨어 버리고 오직 만나게 되는 모든 사람에게 완전히 열린 마음으로 전도함으로써, 그런 소수의 부지런한 전도자들을 통하여 '큰 교회'를 세우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성장하는 교회는 교인들이 말씀을 통하여 성화되는 교회입니다.

22절부터 26절의 말씀에 "22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23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24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25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안디옥교회의 이와 같은 예상 밖의 급성장의 "소문"은 곧 예루살렘교회에도 전해졌는데, 그 이유는 안디옥과 예루살렘을 수시로 오가는 유대인들이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비록 핍박을 받아 많은 교인들이 흩어지기는 했지만 베드로를 위시한 사도들과 소수의 성도들은 그대로 남아 있었으며 여전히 초대교회의 모교회로서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그 예루살렘교회의 사도들은 안디옥교회의 설립 소식을 듣고 즉시 반응을 했는데 그것이 바로 "바나바"를 그리로 파송한 것이었습니다.
바나바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구브로 출신'이었기 때문에 헬라파 유대인들이나 헬라인들과 훨씬 더 잘 통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런 까닭에 안디옥 같은 이방 지역의 교회에서 사역하기에 딱 맞는 인물이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가 '12사도'와 같은 유대인 출신의 사도를 보내지 않고 바나바를 택한 것은 그만큼 안디옥교회의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가운데 그들이 도와줄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을 취한 아주 적절한 조치였던 것이었습니다.

이 바나바 사도는 안디옥에 가자마자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그가 하나님께서 그 안디옥교회의 설립을 위하여 크게 역사하신 사실과 앞으로 더 부흥시켜 주실 조짐까지 확실히 깨달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는 지금 안디옥교회에 꼭 필요한 일이 무엇인지도 즉시 정확하게 판단했는데 그것은 곧 그 안디옥교회 교인들로 하여금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바나바 사도는 그들이 일단 제대로 영접한 예수 그리스도를 끝까지 잘 따라 가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안디옥교회에서 자기가 해야 할 사명이라고 자각한 것이었습니다.

바나바의 그와 같은 영적 식견과 판단은 안디옥교회의 성장에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습니다.
본문에서 누가는 이 바나바를 가리켜 "착한 사람"이라고 밝혔는데, 사도행전에서 어떤 사람을 가리켜 '착하다'라는 표현을 쓴 곳은 여기밖에 없습니다.
바나바는 그처럼 성품만 좋았던 것이 아니라 거기에 "성령과 믿음이 충만"함으로써 진정 훌륭한 목회자의 조건을 완벽히 갖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바나바가 자기가 그 교회에서 해야 할 사명을 정확히 깨닫고 섬기기 시작했을 때 안디옥 교회는 "큰 무리가 주께 더하는" 본격적인 부흥의 역사가 따라오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나바 사도는 그처럼 급속도로 성장하는 안디옥교회를 자기 혼자서 다 감당할 수 없음을 곧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울을 불러 오게 됩니다.
그 당시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의 회심' 사건 이후에 예루살렘교회가 유대인들의 위협으로부터 그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하여 다소로 일단 피신시켜 놓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하지만 안디옥은 예루살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사울이 큰 위험 없이 본격적인 복음사역을 시작할 수 있는 적시적지라고 바나바는 판단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둘이 함께" 안디옥교회에서 일 년 동안 교인들을 "가르치는" 소위 '공동목회'를 하게 되었는데, 이 '가르치다'는 말은 물론 성경을 가르쳤다는 뜻입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또 하나 더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곧 안디옥교회에서 "제자들이...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된 일이었습니다.
그 전까지 기독신자들은 스스로를 가리켜 주로 '제자' 혹은 '형제자매'라는 단어를 썼었습니다.
그런데 이 안디옥교회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는 저 유명한 명칭이 생겼던 것이었습니다.
여기 "일컬음을 받게 되었다"라고 한 것은 이 이름이 안디옥교회 교인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단어가 아니라 바로 불신자들이 그들을 그런 명칭으로 부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그리스도인'(Christianos)이라는 단어의 헬라어의 뜻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로서 비꼬는 어조로 사용된 것이 명백합니다.
즉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불신자들이 기독신자들을 가리켜 '예수쟁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어조로 부른 말이 바로 '그리스도인'이었던 것입니다.
마치 '예수쟁이'란 말이 '예수 믿는다고 별나게 미쳐 있는 사람'이라는 뉘앙스를 품고 있듯이, '그리스도인'이란 명칭 역시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별나게 설치는 사람'이라고 조소하는 뜻으로 불신자들이 신자에게 붙여준 별명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안디옥교회의 교인들은 그런 별명을 얻게 될 정도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생활에 있어서 불신자들의 눈에 '별나게 표가 났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것은 오직 그들이 사도 바나바와 사울 즉 바울을 통하여 말씀을 배우고 성장한 결과였습니다.
그들은 배운 말씀을 그 생활을 통해 그대로 실천한 '제자'들이었고, 그 결과 불신자들의 눈앞에서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 아예 공인될 정도로 뚜렷한 성화의 성장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안디옥교회가 유대인들과 헬라인이 뒤섞여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교회 역시 세상적으로 볼 때에는 온갖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모이게 됩니다.
하지만 그런 인종, 언어, 문화, 출신 배경, 사회적 지위, 성격 등등의 수많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교인들에게는 딱 하나의 공통적인 이름, 바로 '크리스천'(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만 붙게 됩니다.
이것은 원래 불신자들이 붙여 준 별명이었지만 참된 신자에게는 오히려 영광스러운 이름임에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멋진 명칭은 오직 열심히 말씀을 배우고 그대로 신행일치의 성화생활을 하고 있는 참된 신자에게만 붙게 되는 '증명 도장'과 같은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교인이 성장하는 비결이란 결코 비밀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교인은 오직 성경 말씀을 통해서만 성숙하고 더 강해질 수 있습니다.
교회 명부에 이름이 올라간다고 자동적으로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말씀을 듣고 배우고 그대로 실천할 수 있을 때부터 비로소 '기독교인'이란 이름을 제대로 달고 있는 성도가 될 수 있는 것이며, 그런 진짜 '크리스천'들이 모이는 교회만이 진정 성장할 수 있음을 꼭 기억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성장하는 교회는 처음부터 밖으로 주는 봉사에 힘쓰는 교회입니다.

27절 이하 30절에 "27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28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가 크게 흉년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29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30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초대교회 시절에는 아직 "선지자"라 불리는 직분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특히 구약 성경을 연구하면서 거기 예언된 말씀이 신약 시대에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교인들에게 가르쳤으며, 때로는 하나님의 직접 계시를 통하여 '예언'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신약 성경이 완성된 후에는 이 직분 역시 사도 직분과 마찬가지로 더 이상 계승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을 방문하기 위해 왔습니다.
이것은 안디옥교회가 예루살렘교회에서 파송해 준 바나바 사도를 중심으로 크게 성장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두 교회 사이에 원활한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 주는 한 장면입니다.
그 선지자들 중에 한 명인 "아가보"라는 사람이 "천하가 크게 흉년 들리라"고 "성령으로" 예언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실제로 "글라우디오"라는 로마 황제의 재위 중에 몇 년에 걸쳐 큰 흉년이 일어났던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안디옥교회의 성도들은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했습니다.
안디옥은 큰 상업 도시였으니 그 교인들의 평균 생활수준도 높았을 것이고, 반면에 예루살렘을 비롯한 유대 지방의 교인들은 원래 빈곤한 데다가 이제 흉년까지 들게 되었으니 그 처지가 얼마나 더 어려워졌을지는 명백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안디옥교회 교인들은 지체하지 않고 즉시 특별 구제헌금을 예루살렘교회로 보내 주기로 작정했던 것이었습니다.

고린도후서 9장 7절에 보면 안디옥교회 교인들의 그 헌금을 두고 "즐겨내는" 헌금이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무슨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것도 기분 좋게 할 수 있는 일인데, 하물며 '주의 나라와 의를 위한 선한 일'에 즐겁게 헌금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안디옥교회 교인들은 그런 특별헌금을 작정했을 뿐 아니라 그대로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을 통해 예루살렘의 "장로들"에게 보내었습니다.
이때 예루살렘교회에 이미 '장로'들이 있었다는 언급은 처음 세웠던 '일곱 집사'에 이어서 장로 제도 역시 예루살렘교회에서부터 이미 정착되었음을 보여 주는 중요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하여튼 안디옥교회는 이때부터 이미 '밖으로 베풀어 주는 교회'가 되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초대교회의 모교회였던 예루살렘교회를 오히려 물질적으로는 도와주는 교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처럼 일찍부터 나누어줄 줄 아는 교회가 되다 보니 자연히 안디옥교회는 나중에 세계 선교의 교두보가 되는 진짜 '큰 교회'로까지 쓰임을 받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자기 교회 안에서 자기 교인들끼리만 나누어 먹는 것을 즐기는 교회는 절대로 큰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밖으로 나누어 주는 일은 우리 교회가 좀 더 커지면 그때 가서 하지.'라고 생각하는 교회에게는 그 '그때'란 영원히 오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머리 되신 주님께서 그처럼 처음부터 '자기 교회만' 생각하는 '욕심쟁이 교회'를 축복하실 리가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를 계획해 놓으시고 그 세계 선교에 쓰일 교회를 찾고 계시는데 오로지 '예루살렘'만 생각하고 있는 교회를 부흥시켜 주실 이유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교회는 시작할 때부터 밖으로 나누어 주는 일에 절대로 인색해서는 안 됩니다.
아니 교회가 아직 작을 때부터 '각각 그 힘대로' 자기 교회 밖으로 전도와 선교를 위하여 '보내는' 일에 전력을 다하는 연습을 하고 전통을 쌓기 시작해야만 진정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경향교회가 이런 대형교회가 되기 훨씬 전 아직 변변한 예배당조차 없이 남의 집 셋방살이를 하고 있을 때부터 이미 세계선교를 위하여, 신학교의 선지생도 양성을 위하여 힘을 다해 '즐거이' 바쳤던 것이야말로 오늘날 이런 큰 축복을 받게 된 이유임을 깨닫고 앞으로도 '생애 전부의 것'까지 바쳐 '밖으로 보내는 일'에 더욱 총력을 모으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예루살렘에서 첫 교회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초대교회를 확장하는 본격적인 복음 운동의 기지는 안디옥교회가 되었습니다.
수적으로는 어느 교회가 더 컸었는지는 모르지만, 복음 사역을 위한 능력 발휘와 성취 결과에 있어서는 단연 안디옥교회가 진짜 '큰 교회'였음이 분명합니다.

지역전도만 생각한다면 작은 교회들이 동네마다 많이 있는 것이 좋겠지만, 세계선교를 생각할 때에는 역시 큰 교회가 더 큰 힘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이 세상에는 '작은 교회'도 필요하고 '큰 교회'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큰 교회'란 사실상 등록교인의 숫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교회가 얼마나 열심히 전도와 선교를 위해 충성을 하고 또한 얼마나 많은 구령의 열매를 거두어 내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누구를 만나든지 자기 자신의 마음부터 활짝 열고 부지런히 전도하는 소수의 성도들만 있어도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들을 통하여 그런 양적으로 큰 교회를 세우고 계십니다.
모든 교인들이 마음과 정성을 다해 말씀을 배우고 뜻과 힘을 다해 그 말씀을 생활에서 체험하며 실천함으로써 확고부동한 '그리스도인'으로 성화되어 갈 때 그런 교회는 절로 질적으로도 큰 교회로 자라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예 시작할 때부터 모든 성도들이 선한 일을 위하여 바치는 것을 즐거워하고 바깥으로 보내는 일에 익숙해져야만 하나님의 구속사를 위하여 진정 크게 쓰임 받는 진짜 큰 교회로 성장하는 축복까지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경향교회가 지난 39년 동안 바로 이런 축복을 받아 지금까지 부흥해 온 것을 감사하면서 앞으로도 더욱 '부지런히 전도하고 성경을 바로 배우고 열심히 선한 일에 충성을 다하는' 가운데 진정 '이보다 더 큰 교회'를 함께 세워 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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