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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보다 큰 사람이 되라 (요 2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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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큰 사람이 되라 (요 21:1-19)


I. 주도적인 사람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가 예수님께서 살아생전 죽은지 사흘만에 부활하실거라는 말을 믿지 못하고, 가까운 동사무소로 사망신고를 하러 갔더랬습니다. 
마리아: “저, 사망신고 하러 왔는데요.” 
마침 동사무소 직원이 신참이었던 모양입니다.
“본인이세요?”
마리아가 고래를 갸우뚱하면서 묻습니다.
“본인이 와야 하나요? 본인이 무덤에서 사라졌는데 어찌해야 하나요?”
누군가 만든 유모어이겠지요?

오늘은 부활절후 두 번째 주일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찾아오신 사건을 통해 
「보다 큰 사람이 되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인간은 주어진 환경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똑같은 환경속에서도 환경에 매여살고 환경에 짓눌려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환경을 극복하고 창조적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어지는 자극에 이끌려 살아가는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사람이 있고 그 자극을 긍정적인 에너지로 바꾸어 살아가는 창조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에 파도가 일 때 파도 속에 파묻혀 몰락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히려 파도를 타고 인생을 즐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은 환경에 짓눌려 사는 사람이 아니고 환경을 극복하는 사람, 환경을 초월하는 사람, 아니 멋진 환경을 만들어 내는 사람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알콜 중독자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형제가 있었습니다. 이들이 자라면서 본 것이라고는 술에 찌든 아버지가 싸움을 하는 것이나 착한 어머니를 구타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이 형제중 형은 자라서 아버지처럼 알콜 중독자가 되었고 동생은 금주 운동가가 되었습니다. 같은 아버지 밑에서 자란 두 형제의 서로 다른 인생길에 대해 호기심을 가진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먼저 형에게 “당신은 어째서 알콜 중독자가 되었습니까?” 
이에 대해 형은 대답합니다. “그럴 수 밖에 없지 않습니까? 내가 자라며 배운 것이라곤 술 사오는 것이요 본 것이라곤 술 마시는 것 뿐인데 내가 알콜 중독자가 되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동생의 대답을 보십시요. 똑같은 대답을 합니다. 
“그럴 수 밖에 없지 않습니까? 내가 자라며 보고 배운 것이 아버지가 술마시고 주정하는 것 뿐인데 내가 어떻게 그 지긋지긋한 술을 가까이 하겠습니까? 내가 금주 운동가가 된 것은 당연한 것 아닙니까?”

여러분은 똑같은 환경에서 자란 두 형제의 똑같은 대답! 
그러나 극명히 다른 대답의 이유에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두 사람이 다 “그럴 수 밖에 없지 않느냐?”라고 불가피성을 말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운명에 삼켜진 못된 인생을 살아야 했고, 다른 한 사람은 운명을 삼켜버린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삶을 개척할 수 있었습니다. 이 두 형제의 서로 다른 모습은 오늘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즉 환경에 짓눌려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환경을 극복하고 멋진 환경을 만들어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환경이나 운명에 갇혀 사는 사람이 아니라 환경보다 큰 사람, 운명보다 큰 사람입니다. 

II. 아무 것도 잡지 못한 사람

오늘 21장 1절 시작하는 말씀 “그 후에”란 바로 20장의 사건 그 후에 일어난 일이란 뜻입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당신을 배신하고 떠난 제자들의 무너진 신앙과 인격을 회복시키시고 치유하시기 위해 다시 찾아오십니다. 지금 주님의 수제자를 자처하던 베드로는 분명 부활하신 주님을 이미 만나뵈었습니다. 

그러고도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고기를 잡겠다고 바다로 나갔다가 보기좋게 실패하고 맙니다. 예수님을 뵐 면목이 없습니다. 베드로는 자기 자신을 도무지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나라는 인간은 도대체 무엇인가?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예수님과 죽는데까지 함께 가겠다고 큰소리 쳤는데, 정말 그때는 그럴수 있을 것 같았는데 조그만 여자아이가 두려워 내 주님을 세 번이나 배신하다니...” 누구에게 용서받기 전에 이처럼 못난 자신의 모습이 싫었습니다.

이날따라 갈릴리 호수에 배를 띄었건만 왜 고기는 이다지도 잡히지 않는지 베드로는 기가 막혔습니다. 이제는 물고기 잡는 기술마져 잊어 버렸는가? 이젠 평범한 어부조차도 될 수 없는가?

주님의 제자로서도 실패했고 고기잡는 어부로서도 실패한 베드로의 망가진 상황을 묘사하는 비극적인 한 기록이 3절에 있습니다.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마땅히 여기 3절은 이렇게 기록되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예수와 함께 나는 죽으러 가노라”
“나는 예수의 부활을 전하러 가노라”
“복음을 전하는 베드로의 인생은 만선으로 돌아오는 원양어선 같았다”

그러나 성경은 무엇이라 기록하고 있습니까?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주님은 이처럼 철저히 실패한 베드로를 찾아 오셨습니다. 피곤한 삶의 현장에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들은 피곤에 지친 인생이었으며 더 이상 어떤 희망도 포부도 갖기 어려운 형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일생동안 무엇을 잡으려고 발버둥치며 살아갑니다. 돈을 모으려고, 권력을 잡으려고, 명예를 얻으려고 애를 씁니다. 일시적으로는 붙잡는 것 같으나 결국은 다 놓쳐버리고 빈손으로 이 세상을 떠납니다. 사람이 평생을 통하여 잡아도 남는 것은 노쇠와 허무와 죽음 밖에 없습니다. “잡은 것은 아무것도 없나이다” 이 고백은 비록 베드로의 고백일 뿐만 아니라 인생의 현실이요 실존입니다.

헤밍웨이의 노벨 문학상 수상작 “노인과 바다”를 아시지요?
쿠바 해안에 살면서 낚시질로 살아가던 한 노인이 3개월이 가깝도록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하다가 어느날 ‘말린’이라고 하는 큰 물고기 한 마리를 잡게 됩니다. 삼일간의 사투 끝에 말린을 몰고 항구에 들어오기는 하였으나 잡은 고기는 상어떼들에게 뜯겨 뼈만 앙상하게 남았습니다.

이것이 인생이라는 겁니다. 무엇을 잡으려고 발버둥쳐도 잡히는 것은 순간적이고 남은 것은 앙상한 뼈다귀와 가시뿐입니다. 노쇠와 공허와 허무를 되씹게 됩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 물고기를 잡으러 많이 다녔습니다. 욕심이 많았던 저는 고기를 잡으러 갈 때마다 꼭 큰 그릇을 가지고 갔습니다. 그러면 어머니께서 “어디 눈먼 고기가 그렇게 많다더냐” 하십니다. “염려마시고 저녁 준비나 하세요” 그런데 정말 눈먼 고기가 어디 있어야지요. 고기들이 나 잡아달라고 기다려 줍니까? 큰 그릇을 가지고 자신있게 동네를 가로 질러서 나왔는데 이제 돌아갈 일이 큰일입니다. 빈 그릇을 들고 동네로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해가 넘어가길 기다렸다가 어두워진 후에 빈 그릇을 들고 집에 들어갔던 기억이 납니다.

사람들도 일생을 큰소리쳐 보지만 언제나 빈 그릇입니다. 그러나 빈 그릇은 우리가 실망하고 절망해야 할 상황이 아니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챤스입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시는 기회가 됩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육체적으로 약해질 때도 있고 세상 살이에 실패할 때도 있고 넘어질 때가 있지요. 그러나 그때가 낙심하고 좌절하고 포기해야 하는 시간이 아니라 인생의 본질로 돌아갈 때입니다. 예수님을 만날 때입니다. 자신이 가진 신앙의 위대성을 보여줄 때입니다. 

아버지 목사님이 간암 선고를 받고 약 4개월동안 투병생활을 하며 아들 목사님과 주고 받은 글을 책으로 엮은 “빛, 색깔, 공기”라는 책에서 고통중에 아버지 목사님이 한 말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기독교인이나 비기독교인이나 고통을 겪는 것은 다 똑같다. 
그러나 고통에 임해서 기독교인이 가지는 자세는 사뭇 다르다. 
기독교인의 고통은 육체의 고통으로 끝나야 한다. 
우리는 고통이 올때, 신음할 수 있다. 이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고통이 불평과 절망이 되고, 그 고통이 허무로 연결된다면 그것은 불신앙이요 부끄러운 것이다.”

우리도 실패할 수 있고 고통을 당할 수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 기독교인들이 비기독교인들보다 더 힘들 수 있습니다. 
우리도 육체의 한계를 지니며 삽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들은 고통을 희망으로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별명이 있다면 운명을 바꾸는 사람, 주어진 삶의 환경을 바꾸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III. 원수보다 큰 사람

첫째, 무엇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무엇에 갇혀 살지 말란 말입니까? 
무엇보다 큰 사람이 되라는 말입니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찾아 오셨습니다. 
“너는 나를 배신했지만 난 너를 용서했다. 그러므로 너도 이제부터 배신자보다 큰 사람이 되어라. 원수보다 큰 사람이 되라” 말씀하십니다. 

원수의 한계에 갇혀서 살지 말란 말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하면 그 사람의 한계에 갇혀서 그 사람보다 큰 인물이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승리에 반드시 필요한 일이 용서하는 일이요 용서받고 사는 것입니다.

미국에 크리스웰이라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목사님은 사냥을 매우 좋아해서 기회만 있으면 들로 산으로 사냥을 나갔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실수로 사람을 쏴 죽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목사가 사람을 쏴 죽였다는 소식으로 교회와 언론이 온통 들끓었습니다. 죄의식과 좌절감에 사로잡힌 크리스웰 목사님은 교회를 떠나기로 마음먹고 사표를 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목사님의 사표를 받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죽인 이력을 갖게된 목사를 어느 교회에서 받아드릴 것인가? 우리 교회에서 용납하지 않으면 목사님은 갈 곳이 없다”라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그후 크리스웰 목사님은 43년간 그 교회에서 목회를 하였고, 그동안 교회는 세계에서 제일 은혜스런 교회, 제일 큰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크리스웰 목사님은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대해서 용서에 대하여 설교할 때마다 강단에서 눈물을 쏟았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용서받은 자만이 용서할 수 있고 사랑받은 사람만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고 예수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베드로를 찾아오신 부활의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너는 원수에 파묻혀 사는 사람이 되지 말고 원수보다 큰 사람이 되라.  
너는 환경에 짓눌린 사람이 되지 말고 환경보다 큰 사람이 되어라.

여러분 모두 당신을 괴롭히는 그 어떤 환경 보다 큰 사람이 되십시다.
당신을 괴롭히는 그 어떤 상처 보다 큰 사람이 되십시다.
당신을 괴롭히는 그 어떤 원수 보다 큰 사람이 되십시다.
용서하는 자가 큰 자입니다. 
배신자, 원수에 갇혀 사는 사람이 아니라 원수보다 큰 사람이 되십시요.

IV. 실패보다 큰 사람

두 번째, 사랑하는 베드로를 실패보다 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예수님께서 친히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 베드로가 빈 그릇 들고 실패한 채 살아가기를 원치 아니하셨습니다. 갈릴리 바다에 실패한 제자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윌리엄 A패드는 “실패는 우리의 선생이지 장의사가 아니다. 실패는 조금 기다리라는 뜻이지 패배한 것이 아니다. 실패는 잠시 후퇴하는 것이지 막다른 골목이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미국의 리더십 훈련의 대가 존 맥스웰(John Maxwell)은 실패보다 큰 사람이 되는 비결 5가지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 실패가 아닌 성공에 초점을 맞추어라는 것입니다.

잠언은 우리의 생각이 우리 자신을 결정한다고 말합니다.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잠23:7)  
따라서 우리가 실패만 생각하고 있으면 실제로 우리 자신은 실패하는 인생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실패보다 큰 사람이 되기를 원하면 실패가 아니라 성공에 초점을 맞추십시오.

둘. 실패를 적이 아닌 친구로 여기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실패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실패를 악랄한 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공하는 사람들은 실패는 위대한 성공의 어머니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실패가 좋은 경험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의 실패를 감추려 하지 마십시오. 그것을 인정하고 실수를 통해 배우고 성장하십시오. 이미 실패했습니까? 그렇다면 그 실패를 친구로 만들어 다시는 실패하지 않는 겁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실패보다 큰 사람입니다.

셋. 실패를 영원한 것이 아닌 순간적인 것으로 여겨라.

때때로 실패는 사람들에게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게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한 번의 실패를 일시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내 인생을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게 방해하는 영원한 기념비로 만들어 버립니다.

처칠은 말했습니다.  “우리가 정말 두려워 해야할 것은 실패 자체가 아니라 두려워하는 마음이다.”

넷. 실패한 성공을 하지 말고 성공적인 실패를 하라.

멋있게 실패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내가 실패한 자가 되었다고 나를 버리거나 배척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나를 더 불쌍히 여기시고, 측은히 여기셔서 나를 찾아와 주시고 만나주십니다. 훌륭한 목수는 부러진 나무라고 버리지 않고, 오히려 다듬어서 잘 사용합니다. 

어떤 시인이 이런 글로 우리에게 용기를 심어줍니다.
< 난 괜찮다 > 라는 글입니다.

한번 실패했다고 낙담하지 마십시요. 링컨은 다섯 번이나 선거에서 패배했고, 

헨리 포드도 수차례 파산했으며, 리차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은 18번이나 출판 거절을 당했으며, 베이비 루스는 714개의 홈런을 치기 위해 1,330번이나 스트라이크 아웃을 당했습니다. 실패는 성공으로 가는 디딤돌일 뿐입니다. 
최선을 다한 실패는 요행이 따른 성공보다 훨씬 값진 것입니다. 
시험에 떨어졌습니까? 친구가 가버렸습니까? 그러나 좌절하지 마십시오. 
다시 한번 방망이를 힘껏 휘둘러 보십시오. 
다음번엔 담장을 훌쩍 넘길지도 모르잖아요. 할렐루야!

인생의 처절한 실패를 숱하게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역전의 명수가 된 A. Lincoln은 이렇게 역설합니다. “내가 실패할 때 악마는 끝장났다고 내게 말한다. 그러나 내가 실패할 때 하나님은 이 실패의 경험을 가지고 더 커다란 일에 도전하라고 내게 말씀하신다. 나는 악마의 이야기보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다.”

다섯. 실패를 마지막 패배가 아니라 새로운 기회로 생각하라는 겁니다.

실패를 불행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새로운 기회로 보십시오.
멜리데에서 조난을 당했을 때, 바울은 사람들에게 설교할 기회로 생각했습니다. 체포되었을 때도 그는 그것을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로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빌1:12)

그렇습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친구로 생각할 때,
실패를 영원한 것으로 인정하지 아니할 때에,
실패를 오히려 새로운 배움의 기회로 이용할 때,
당신은 실패보다 큰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V. 세상보다 큰 사람

부활하신 예수님, 우리로 하여금 무엇보다 큰 사람이 되라 말씀하십니까?

셋째, 사랑하는 제자를 세상보다 큰 사람 만들기 위해 예수님 찾아 오셨습니다.  
빈 그물 들고 신음하는 베드로를 만나 주신 예수님, 베드로의 빈 그물을 가득하게 채워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잡은 고기로 제자들과 함께 아침 식사를 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이 15절입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과 “내 양을 먹이라”는 부탁의 말씀은 뉘앙스를 약간씩 달리하며 세 번씩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특별히 첫 번째 질문을 살펴보면,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했습니다.

① 이 말은 우선 네가 친구도 사랑해야 하고 가족도 사랑해야 하지만, 그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질문입니다.

② 두 번째로 옆에 있는 안드레도 나를 사랑하고 요한도 나를 사랑하는데, 이들 못지 않게 아니 이들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입니다.

③ 셋째는 “이 사람들”이란 말을 원문에서는 “이것들 보다”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 잡은 고기도 좋고, 배도 좋고, 갈릴리 바다도 좋지만 이것들 보다, 더 넓은 의미로 말하면 세상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질문입니다.

이 말은 “하늘 백성은 세상보다 큰 사람이다. 너는 세상보다 큰 사람이 되라”는 주님의 당부입니다.

세상 살다보면 온 세상이 텅빈 것처럼 허무해 질 때가 있습니다. 
중년 여성들에게 찾아오는 심리적 갈등가운데 「빈둥지 증후군」이란게 있습니다. 자식 낳아 길러 시집 장가 보내다 보면 자신은 껍데기만 남았다는 공허감 같은 것이 찾아오게 되는데 이를 두고 빈둥지 증후군이라고 합니다. 

때로 성공을 해도 실패를 해도 인생이 추수를 끝낸 빈 들 같다는 공허가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이때 이 공허에 갇혀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이 공허를 뛰어넘는 사람이 있습니다. 

VI. 받은 복 보다 더 큰 사람

끝으로 베드로는 받은 복보다 더 큰 사람이었습니다.
누가복음 5장에 보면, 베드로가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 빈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많이 잡힌 고기의 의미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쫓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153마리의 많은 고기를 잡았으나 그중 몇 마리로 주님과 더불어 아침식사 한끼 때우고 다시 주님을 따라 나섭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받은 축복을 타락이나 교만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복은 부패되지 않은 복이 됩니다. 많은 고기를 잡았으나 그 고기에 매이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고기보다 큰 사람입니다. 많은 돈을 가졌지만 그 돈이 주인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 그 돈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이 그 돈보다 더 큰 사람입니다. 큰 집을 가졌으나 큰 집의 노예가 되지 않고 과감히 셀을 위해, 이웃과 사랑을 나누기 위해 쓸 수 있는 사람이 집보다 큰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모리아 산에 내려 놓음으로써 이삭보다 큰 사람, 자식보다 큰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권세를 주었더니 권세에 눈이 가려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미련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는 권세보다 너무 작은 사람입니다.

부디 많은 복보다 더 큰 사람이 되어 더욱 큰 복을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땅의 것을 얻고 하늘의 것을 잃어버리는 미련한 사람이 되지 말고, 땅의 것으로 하늘을 보고 작은 보물로 큰 것을 얻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받은 복보다 더 큰 사람이 되라는 것이 주님의 당부입니다.

VII. 말씀을 맺으며

성경의 수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난 후 자신의 능력이나 자원보다 더 큰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들도 모두 우리처럼 실수 할 수 있고 문제점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노아도 술에 취했고 아브라함은 거짓말로 아내에게 상처를 주었습니다. 다윗도 실수했고 모세도 약점의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도 기질적으로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고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신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그런 베드로를 찾아오셨습니다. 이 시간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축복하십니다. 

환경에 갇혀 살지 말아라. 환경보다 큰 사람이 되어라. 
원수보다 큰 사람이 되어라. 실패보다 큰 인물이 되어라.
세상보다 큰 사람이 되어라. 받은 복에 갇혀 살지 말고 받은 복보다 큰 인물이 되어라.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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