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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벧세메스로 가는 소처럼 (삼상 6: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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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세메스로 가는 소처럼 (삼상 6:7-16)


히브리서 기자는 4장 16절에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자."  그렇습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오십시오.  그리고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십시오.  사람에게는 일용할 양식이 필요하듯이 일용할 은혜도 필요합니다.  우리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필요한 때에 베풀어주시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지나간 옛적의 은혜를 되새기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다가올 미래에 주어질 막연한 은혜를 기대하면서 살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이곳에서 제때에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주 앞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지금 필요한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지금 내 삶의 자리에서 가장 필요한 도움의 손길을 구하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시지만 그러나 그 하나님은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한지를 우리 보다 더 잘 알고 계십니다.  나의 형편과 처지를 누구보다 더 잘 알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서 보십시오.  상처가 났으면 상처 난 모습 그대로, 마음이 아프면 마음이 아픈 모습 그대로, 감사할 일이 있으면 감사할 모습 그대로 서 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내 삶을 그대로 드러내놓고 그분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이시지만 구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주시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어떤 자리나 상황에서 느껴지는 기분을 가리켜서 분위기라고 합니다.  이 분위기는 모든 자리, 모든 상황에 존재합니다.  문제는 그것이 어떤 분위기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그 분위기에 지금 내가 어떻게 반응을 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아무리 주변 환경을 바꾸어본다고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생명의 근원이 마음에 있기 때문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하나님의 은혜로 마음을 새롭게 하십시오.  사단이 가라지처럼 던지고 간 어두운 분위기에 짓눌리지 말고, 성령의 능력으로 그 분위기를 떨치고 일어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분위기는 창조하는 자의 것입니다.  그 사람의 마음이 어떠하면 분위기도 그렇습니다.  솔직히 사람은 분위기의 피해자가 아니라 자기 마음의 피해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낙심의 분위기에 짓눌리면 안됩니다.  실망의 분위기에 넘어지면 안됩니다.  절망의 분위기에 무너지면 안됩니다.  그런 분위기가 내 마음 한 쪽에서 강하게 밀려올 때 즉시 일어나 주님 앞에 나와 기도하십시오.  주님을 의지하고 찬송하십시오.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분위기를 창조해 나가십시오.  내 안에 있는 어두움의 영들을 몰아내고 성령으로 충만하십시오.  기억하십시오.  힘들고 어려울 때 정말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를 가리켜서 다원주의적 시대라고 합니다.  다원주의 사회의 모습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이라고 할 것입니다.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습니다.  안 믿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믿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다원주의적 시대에서는 절대적 가치관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절대적 신앙을 거부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기독교적 가치관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향한 절대적 가치관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적 신앙은 하나님만을 인정하는 절대적 신앙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상대적 가치관을 가지고 세상과 하나님을 상대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상의 다른 종교들 가운데 하나로 생각하는 상대적 신앙을 저주하십시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된 우리가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향한 절대적 가치관과 신앙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보게 되는 것은 일어나는 나라가 있는가 하면, 무너지는 나라도 있습니다.  일어나는 기업이 있는가 하면, 무너지는 기업도 있습니다.  일어나는 자손이 있는가 하면, 무너지는 자손도 있습니다.  그와 같은 수많은 인간의 흥망성쇠를 보면서 깨닫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인도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도우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은 놀랍게도 사명과 함께 옵니다.  이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내기를 원하는 사람은 지금 하나님이 주시는 그 사명을 먼저 자기의 생애에 부여하십시오.  내 가정이 잘 되기를 원하신다면 내 가정 속에 하나님의 사명을 부여하십시오.  내 자녀가 잘 되기를 원하신다면 내 자녀의 생명 속에 하나님의 사명을 부여하게 하십시오.  하나님은 하늘의 복을 이 땅에 주시기 위해 사명자를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사명을 붙잡은 자와 함께 일하십니다.  모든 하나님의 축복과 인도하심은 사명이 없이 온 적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때 삶이 상품이 아닌 이상 어차피 완제품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완전한 인간은 없습니다.  완벽한 인간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완전하게 만들겠다고 계속해서 비판과 판단을 하면 결국 자신을 죽이고 맙니다.  인생은 상품이 아니기 때문에 불완전한 상태, 불완전한 환경, 불완전한 사람들 속에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의를 볼 수 있는 눈이 열려야 됩니다.  비판하지 마십시오.  판단하지 마십시오.  남을 비판하지 마시고 나도 비판하지 마십시오.  남도 판단하지 마시고 나도 판단하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한 평생을 달려갈 때 남들이 좀 어정쩡하다고 보면 어떻습니까?  좀 고개가 삐딱하다고 하면 어떻습니까?  손이 좀 이상하게 저으면 어떻습니까?  인생은 어차피 마라톤입니다.  폼을 잡고 달리는 마라톤 선수는 없습니다.  인생은 완벽한 폼을 겨루는 장소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비판하지 마십시오.  남도 판단하지 마십시오.

폼은 좀 부족해도 모든 고통을 뛰어넘은 지구력과 인생을 아름답게 사는 재미에 취하는 그런 것이 우리 내면에 나타나기를 축복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내 삶에 하나님의 주신 사명을 부여하십시오.  내 생명에 하나님의 사명을 부여하십시오.  사명을 붙잡고 있는 사람은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내 생명에 부여한 사람은 결코 방황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사명자의 삶의 자세는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사명자가 걸어가야 하는 삶의 자세에 대한 최고의 상징은 아마도 블레셋 땅에서 벧세메스로 향하여 올라가는 암소의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시대적인 분위기에 상관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을 충성되게 감당했던 이름 없는 소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렇다면 벧세메스로 향하는 이들 소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사명자의 자세는 어떠해야 합니까?  사명자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까?

첫째로, 사명자는 자신이 걸어가야 할 목표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 12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따라 가니라."

본문에서 '바로 행하여' 라는 말은 두 마리의 암소가 벧세메스로 올라가는 오르막길을 한눈 팔지 않고 똑바로 올라갔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매우 기이한 광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법궤를 빼앗은 블레셋 사람들은 그 빼앗은 법궤를 자기들이 섬기는 다곤 신당에 갖다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에 가서 보니까 큰 다곤 신상이 엎어져 목뼈가 부러지고 허리가 잘라지고 팔다리가 부러져 박살나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법궤를 갖다 놓은 블레셋의 아스돗이라는 마을에는 온역이 번져서 여기 저기서 사람들이 죽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아스돗 사람들은 너무 급한 나머지 하나님의 법궤를 가드라는 마을로 옮겨 놓았습니다.  그런데 가드에도 역시 무서운 독종이 임했습니다.  그래서 법궤는 다시 에돔이라는 마을로 옮겼습니다.  거기에도 무서운 재앙이 임하여 많은 사람들이 독종으로 죽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잔뜩 겁을 먹은 블레셋의 통치자들이 모여서 의논했습니다.  이 심상치 않은 일이 정말 이스라엘 백성들이 섬기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내린 재앙인지, 아니면 우연한 일로 생긴 것인지 좌우간 흑백을 가려보자.  그래서 그들은 이제 갓 새끼를 뗀 암소 두 마리를 구해서 새 수레에 메워서 그 위에 법궤를 싣고 이스라엘의 벧세메스로 가게 합니다.  그래서 그 소가 곧장 벧스메스로 가면 정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내린 재앙이고, 소가 좌우로 치우치면서 그 길로 가지 아니하면 이것은 우연히 일어난 것으로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머나먼 길이었습니다.  가보지 않은 길이었습니다.  험한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소들은 목표로 정해진 벧세메스 길로 향하여 곧장 나아갔습니다.  두 암소는 미물이라고 하기에는 놀라울 정도로 목표지인 벧세메스로 향하여 난 대로를 따라 바로 갔습니다.  그리고 13절에 보면, "벧세메스 사람들이 골짜기에서 밀을 베다가 눈을 들어 궤를 보고 그 본 것을 기뻐하더니"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9절에 의하면 이 소들은 자신들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벧세메스로 향하여 가야만 하는 소들이었습니다.  이 소들은 먼저 목표가 정해진 후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블레셋 땅에 임한 재앙이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그곳 벧세메스로 가야만 했습니다.

벧세메스는 여호수아가 아론 자손의 성읍으로 지정한 곳으로, 이곳에는 언약궤를 모실 제사장들이 거주하는 성읍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블레셋 사람들은 그 소들이 벧세메스로 가면 모든 재앙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지만 딴 곳으로 가면 우연히 발생한 것으로 생각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새 수레를 만들었고, 한 번도 멍에를 메어보지 않은 젖 나는 암소 두 마리를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소들이 오직 벧세메스를 향하여 곧바로 올라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벧세메스로 향하는 두 암소를 통하여 우리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고 가야할 십자가라는 것이 반드시 스스로 자원해서만 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내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십자가를 져야 할 때가 있습니다.  본문의 두 암소를 보십시오.  이들 두 암소는 어느 날 갑자기 끌려왔습니다.  젖을 먹여야 하는 새끼 송아지를 두고 끌려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사명자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란 두 암소가 끌고 가야 했던 수레와 같습니다.  자신의 능력, 의지, 승낙 여부와는 전혀 상관없이 메어주는 순간 져야 하는 것이 사명자의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선 헌신된 사명자라면 십자가를 지고 자신의 벧세메스를 향하여 똑바로 올라가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는 사명자의 길이 평탄한 길은 아닙니다.  그 길은 순교적 사명이 없이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나를 따라오려거든 십자가를 지라고 하시면서 우리가 걸어가야 하는 그 길은 좁고 협착한 길이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왜냐구요?  우리가 바로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명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길을 걸어가야 하는 중요한 이유는 그 길 끝에 우리 주님이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세상의 즐거움을 다 버리고, 세상의 자랑을 다 버리고 이 길을 걸어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지막날 사랑하는 우리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천국이 아무리 좋은 곳이라고 해도 그곳에 주님이 아니 계시면 그곳에 갈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만나고 주님과 함께 영원의 삶을 살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삶이 끝난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사명자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그 길을 걸어갈 때 많은 사람들에게 진정한 기쁨을 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3절에 보면 벧세메스 사람들이 골짜기에서 밀을 베다가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명자가 사명의 길을 걸어갈 때 세상은 기뻐합니다.  사명자가 묵묵히 부름의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 믿지 않는 사람들도 기뻐합니다.  사명자로 인하여 가정이 기뻐하고, 그 사명자로 인하여 믿음의 공동체가 기뻐하고 세상이 기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믿음의 권속으로 부르셨을 때 아무런 의미도 없이 그저 부르지는 않았습니다.  저마다 사명을 다 주셨습니다.  분명한 삶의 목적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모든 일들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사명자가 자신의 목표를 잃어버리게 될 때 그는 사명자가 아니라 사망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사명자가 자기의 길을 외면하고 방황할 때 세상은 절망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허락하신 벧세메스를 향해 신발끈을 꽉 매십시오.  그 길이 결코 평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힘든 오르막 길이 계속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너무 힘들고 외로워서 주저앉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명자는 자신의 벧세메스로 향하여 곧장 나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길 끝에 사랑하는 우리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그 길을 걸어갈 때 세상에 진정한 기쁨을 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나처럼 니느웨를 다시스로 바꾸려고 하지 마십시오.  바울처럼 뒤에 있는 것은 잊은 채 앞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복음의 사명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사명자는 자신이 걸어가야 할 목표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사명자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까?
두 번째로,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고 묵묵히 순종함으로 걸어가셔야 합니다.

본문 12절을 다시 한 번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따라 가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수레를 끌고 벧세메스로 향하여 가는 두 암소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암소들은 울면서도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묵묵히 벧세메스로 향하여 뻗은 길을 따라 계속 걸어갔습니다.  여기에서 '울고'의 히브리어 원형은 '까아'인데, 소가 우는 소리에서 유래한 의성어입니다.  우리말로 표현한다면 '음메 음메' 소리를 내면서 울고 또 울면서 걸어가고 있습니다.  소들은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잔인하게도 새끼 송아지들을 집에 가두고, 어미 소들에게는 강제로 수레를 끌게 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집에 갇힌 송아지들은 어미가 그리워서 울었을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 젖 나는 소를 선택한 데에는 그들의 잔꾀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젖 나는 어미 소들이 당연히 발걸음을 옮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것으로써 자신들에게 임했던 재앙이 끝까지 우연한 일이었음을 믿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갓 난 송아지를 둔 어미 소가 벧세메스로 향한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비록 미물이라도 어미 소는 본능적으로 새끼소를 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어미 소는 '음메' 하고 울면서도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새끼가 있는 반대편 방향인 벧세메스로 향해 뚜벅뚜벅 걸어갑니다.  새끼를 향한 어미 소의 본능!  그래서 이 소는 '음메' 하고 울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젖을 물리지 않아 젖이 퉁퉁 부어서 오는 그 고통으로도 울었을 것입니다.

새끼를 두고 떠나야 하는 슬픔! 아무리 미물이지만 뒤에 새끼가 남아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대 방향으로 가야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고통스런 일입니다.  그러나 두 암소는 왕방울만한 눈에서 눈물을 쏟아내면서도 좌우로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의 슬픔을 안으로 곱씹을지언정 소들은 가야할 길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좌우로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멈추지도 않았습니다.  눈에서는 눈물이, 입에서는 울음이 그치지 않았지만 사명의 걸음을 잠시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벧세메스로 향해 걸어가는 이 암소들이 우리들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사명자는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고 목표를 향하여 묵묵히 걸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벧세메스로 향하는 이 암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철저히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했습니다.  대로에서도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앞만 보고 갔습니다.  목적지로 가는 데에는 여러 가지 악조건이 있었지만 참고 소들은 묵묵히 나아갔습니다.  이들은 젖먹이 새끼를 뒤에 두고 왔습니다.  동물의 본능 중에 가장 강한 모성애가 이 소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고 있었습니다.  이 암소들에게는 멍에를 전혀 메어보지 않은 데 따른 고통이 있었습니다.  암소들이 끌어야 할 수레는 길이 나지 않은 것이었고, 벧세메스로 가는 길은 계속적인 오르막길이었으므로 상상하기 어려운 고통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두 암소는 혼자 가는 길이 아닙니다.  혼자라면 그래도 어떻게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 암소들은 훈련이나 연습이 전혀 없이 보폭을 함께 맞추어 가야 했기 때문에 그 길은 고통의 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벧세메스에 당도하기까지 좌우로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오늘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우리가 최악의 상황에서도 어떠한 자세로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다 보면 좋은 여건에서 일하게 되는 경우보다 그렇지 못한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세상에서처럼 인적 물적 조건이 제법 갖춰진 가운데서 일을 하라고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지만 하나님의 일은 최소한의 여건조차 갖추지 못한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일하는 것이 대다수 사역자들의 현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시설과 인적 자원이 준비되어 있는 대형 교회에서가 아니라 열악한 시설과 일인다역을 해야만 하는 작은 교회에서의 사역이 때로는 우리를 지치게 만들기도 합니다.  거기에다 공중 권세를 잡은 어둠의 세력과 세상에서의 유혹은 우리로 하여금 온전히 사명자의 길을 걸어갈 수 없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참된 사명자는 그와 같은 악조건 속에서도 변함없이 주 앞에서 충성하는 사람입니다.  내게 주어진 십자가를 알고 그 십자가를 지고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묵묵히 걸어가는 자, 그가 바로 하나님이 찾으시고 복을 주시는 사명자입니다.

사명자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까?
마지막으로, 사명자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 가는 동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 7절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새 수레를 하나 만들고 멍에를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소에 수레를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고"

블레셋 사람들은 새 수레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멍에를 메어보지 않은 젖 나는 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수레를 메웠습니다.  그런데 이 암소들은 어려운 악조건 속에서도 목적지를 향해 보조를 맞추어 나아갔습니다.  혼자 보다 둘이 어려운 것은 걸음의 속도를 맞추어야 합니다.  걸음의 폭도 맞추어야 합니다.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다면 결코 함께 걸어갈 수가 없습니다.  오늘 벧세메스로 향하여 가는 이들 암소에게서 우리는 사명자의 연합과 동역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달리기 경기 가운데 '이인삼각 경기'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두 사람이 발을 묶고 달리는 경기입니다.  이 경우 한 사람이 아무리 잘 달려도 소용이 없습니다.  두 사람이 보조를 맞추는 것이 승리의 관건입니다.  단독 플레이는 절대 용납될 수 없습니다.  잘 달리던 팀도 순간 보조가 깨지면 이내 땅에 내동댕이쳐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간혹 교회에서 혼자서는 열정을 가지고 열심히 일을 하는데 옆 사람과 협력하는 일에는 잘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단독 플레이에는 능란한데, 함께 일을 시켜놓으면 서로 싸우거나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히기가 일쑤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벧세메스로 올라가던 암소에게서 연합의 영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 2:2-4).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걸어가는 길에는 언제나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걸음걸음을 동행해 주십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우리 눈에 보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종종 혼자 걸어가는 사명의 길이 힘들고 어려워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함께 걸어가는 동역자를 주셨습니다.  그가 바로 교회 공동체의 성도들입니다.  교회는 본질상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처음 세상으로부터 불려 나와 하나님의 백성에 가입하는 순간부터 공동체로 존재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진정한 사명자는 주님께서 불러내신 다른 사명자와 언제나 연합하며 동역하는 자입니다.  벧세메스로 올라가는 두 암소가 사이좋게 보조를 맞추어 나아가던 것처럼,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들도 다른 성도들과 마음을 합쳐 주님의 사역을 감당하셔야 합니다.  건강한 사명자는 함께 하는 법을 아는 사람입니다.  믿음의 사명자는 상대방을 세워서 함께 갈 줄 아는 사람입니다.

벧세메스로 올라가는 두 암소는 마침내 사명을 완수했습니다.  두 암소는 새끼 송아지를 뒤에 두고 왔습니다.  벧세베스로 오는 길에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무거운 짐을 실은 수레를 끌면서도 구경거리가 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명의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주저하지도 않았고, 돌이킬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새끼 송아지 때문에 슬피 울면서도 사명을 위해서 앞으로 뚜벅뚜벅 나아갔습니다.  그래서 목적지인 벧세메스에 정확하게 도착했습니다.

이제 새끼 송아지에게로 돌려보낼 만합니다.  훌륭히 사명을 달성한 것에 대해 상급을 받을 만하고, 더 이상 눈물 흘릴 필요가 없을 만합니다.  그러나 본문에 보면 벧세메스에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소들을 잡아서 번제물로 드렸다고 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너무 몰인정한 처사입니다.

본문 14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암소들을 번제물로 여호와께 드리고."

오늘 본문 14절은 하나님께서 본문의 두 암소를 통해서 주시는 교훈의 절정이요 대미(大尾)입니다.  벧세메스로 올라갔던 이들 두 암소가 번제물로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이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사명자의 길은 자기의 생명을 주님께 드려지는 데서 끝이 난다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그 길을 걸어가셨습니다(마 20:28).  주님은 일생동안 섬김과 희생의 삶을 사셨고 당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드려짐으로써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완수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 길을 걸어갔습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사랑하는 여러분! 사명자는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해서 걸어가는 자가 아닙니다.  사명자는 자신이 존귀함을 받기 위해서 존재하는 자가 아닙니다.  사명자는 하나님께서 부르신 그 푯대를 향하여 묵묵히 순종함으로 걸어가서 마지막 목적지에서 자신의 생명을 주님께 드려지는데 그 존재의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봉사하고 헌신하는 동기와 목적도 결국에는 주님 앞에서 내가 죽어지는데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하는 사람입니다.

사명자의 길을 걸어가다가 힘들면 벧세메스의 암소들처럼 우십시오.  주 앞에 나와 목소리 높여서 우십시오.  그러나 기억하셔야 할 것은 함께 묵묵히 순종함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그 길을 걸어가셔야 합니다.

그래서 이 길은 눈물 없이는 못 가는 길입니다.  그래도 우리가 이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은 이 길 끝에 사랑하는 우리 주님이 면류관을 들고 우리를, 나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눈물 없이 못 가는 길 피 없이 못 가는 길
 영문 밖의 좁은 길이 골고다의 길이라네
 영생복락 얻으려면 이 길만은 걸어야 해
 배고파도 올라가고 죽더라도 올라가세."♬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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