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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다 (요 11: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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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다 (요 11:21-27)
   
영국에 리틀스톤 경과 길버트 웨스트라는 무신론자가 있었는데 두 가지 장애물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부활의 사실이요, 다른 하나는 사도바울의 변화였습니다. 무신론을 변호하고 두 가지 사실을 반박하기 위하여 연구에 들어갔습니다. 얼마동안 연구하던 두 사람이 만나서 “우리는 더 이상 반대자로 머물러 있을 수가 없네, 우리는 이 연구를 통하여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라는 것을 발견했을 뿐 아니라 우리는 잃어버린 죄인임을 발견하였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네”라고 고백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사건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며 출발이 되었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역사적으로 말하면, 기독교사의 출발점이 된 사건입니다. 특히 예수의 부활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신앙의 출발점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기에 그의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는 대속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셨기에 그의 공생애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을 구원하러 오신 메시아의 생애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셨기에 그의 탄생 곧 성육신은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기에 구약에 예언된 모든 메시아에 관한 예언은 예수님에게 그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 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기에 세상의 종말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가장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기독론을 세운 ‘판넨베르그’라는 신학자는 예수님의 부활을 ‘원기회복’ 내지는 ‘소생’과 혼돈하지 말라고 합니다. 부활은 원기회복도 아니고, 소생도 아닙니다. 죽었지만 아직 썩지 않은 육신에 단지 생명이 되돌아온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이요, 새로운 몸으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이라는 말은 우리 기독교만의 특별한 용어입니다. 부활한 몸도 분명히 몸이지만, 육적인 몸이 아니라, 영적인 몸-신령한 몸으로 살아난 새로운 생명입니다. 

분명히 썩을 것이었는데, 다시는 썩지 않는 몸으로, 예전에는 죽을 몸이었는데 죽지 아니할 몸으로 살아나셨습니다. 사도바울은 고전15:53에서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기 전이나 죽은 후의 예수님은 한 분 예수님입니다. 죽기 전에 살아 활동하시던 예수님이셨고, 분명히 죽으신 예수님이셨는데, 부활하신 몸은 완전히 변형된 몸, 영적인 몸, 신령한 몸,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나셨습니다. 죽은 몸과 부활한 몸 사이에는 동질적인 연관성이 있지만 전혀 새로운 몸으로 변형되셨습니다. 부활이란 신비 중의 신비입니다. 신비해야 영원한 진리와 생명을 담아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기에 그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하늘과 땅을 가르시고 새로운 구원을 이룩하시는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봄철에 씨를 뿌립니다. 채소의 씨도 뿌리고, 나무의 씨도 심었습니다. 그런데 그 씨앗은 볼품이 없고, 아주 작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푸르고, 생기가 넘치고 크고 웅장한 나무가 되었습니다. 그 작은 씨앗이 하늘을 덮을 큰 나무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하였습니다. 씨는 흙에 묻히고 그 껍질이 벗겨지고 썩어버렸지만, 그 껍질 속에 담겨진 씨앗은 새로운 생명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래서 큰 나무로 자라나게 되었습니다. 씨와 나무 사이에는 역사적인 연속성이 남아 있습니다. 나무는 분명히 씨로부터 나왔습니다. 씨와 나무는 연속성을 생각하지 않으면 어느 것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라난 나무에는 옛날 작은 씨앗의 형태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마치 부활이 그렇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창조주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리고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본문 23절에서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죽은 사람, 죽은 나흘이나 되어 썩어 냄새나는 시신인데, 다시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는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피조물입니다. 죽으면 흙에 묻히고 썩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우리와 다릅니다. 물론 예수님은 참 인간이시지만, 참 하나님이 되십니다. 죽은 자를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베다니로 오신다는 말씀을 들을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가 예수님을 마중 나왔습니다. 동생 마리아는 집에 앉아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행동하고, 사고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마르다가 예수님에게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21-22)고 했습니다. 마르다의 신앙이 아주 귀한 신앙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로와 함께 있었다고 하면 죽을병도 고쳐주셨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나사로 죽었다고 하여도 자기 가정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해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이 고백도 여간 신앙이 아닙니다. 아주 귀한 믿음입니다. ‘그러나’의 신앙이어야 합니다. 모든 상황이 종료된 것 같아도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불가능한 일이라고 하여도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습니다. 

마르다가 “나는 이제라도 예수님이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기도하신다고 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실 것이라”고 고백하였는데, 나사로가 다시 살려달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막연히 은혜를 사모하고 기대합니다. 오빠의 생명, 한 인간의 생명은 이제 끝났다고 보았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이 오셨다고 하여도 오빠 나사로 무덤에서 일어나 나오리라는 상상도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사람이요, 성령이 충만하시고 능력이 많으시지만, 병들어 아직은 죽지 아니하였다고 하면 병을 고치고, 아직 장사를 지내지 않았다고 하면 살리시지만, 이제 죽어 장사지냈는데, 끝났다고 하는 생각이 지배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이 하시는 말씀, 23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이 능력이 많으시다고 하여도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리신다는 것은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 24절에“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마르다의 신앙이 좋은 신앙이지만,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을 마지막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당시 유대의 바리새교단에서 주장하는 교리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 아나이다”라고 고백하였지만, “네 오라비가 살아나리라”고 하니, 마지막 부활의 시간에 살아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다르고, 현실이 다른 것을 보여줍니다. 기도는 간절하게 해놓고 부인하는 것과 같습니다. 

일본의 우찌무라 간죠라는 신학자가 있었습니다. 일본 땅에 심한 가뭄이 들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비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우찌무라는 어느 날 두 아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주여, 비를 주옵소서. 마른 땅에 단비를 주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두 아들이 학교에 가면서 “작은 아들이 아버지 우산 좀 내주세요”라고 했습니다. 그 때 아버지가 야단을 치면서 “이 놈아 청천하늘에 무슨 우산을 찾으냐”고 소리를 쳤습니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를 향하여 “그럼 방금 아버지가 비를 내려달라는 기도는 무엇입니까?”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우찌무라는 크게 회개하였다고 합니다. 어린 아들은 오늘 맑은 하늘이었지만 비가 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아버지가 기도하신 것을 그대로 믿는 신앙이었습니다. 기도한대로 믿어야 합니다. 믿을 때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하셨습니다. 

막11:24에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에 우리의 기도한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변적인 신앙으로는 더 이상 자라나지 않습니다. 머리로만 이해하고, 말만 앞세우는 신앙입니다. 마르다의 신앙이 좋은 신앙이지만, 우리의 신앙도 그 이상은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생각해보아도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는데, 다시 살아난다고 하는 말은 현실세계의 생각도 아니고,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그 자리에 있어도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하여도 마르다의 신앙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여러 많은 목회자들이 이 본문을 해석하거나 설교하면서 마르다의 신앙을 나무라고 모자라는 신앙이라 몰아붙이지만 우리의 믿음도 그저 그렇습니다. “이제라도”, “무엇이든지”라고 기도하면서 확신이 없습니다. 믿음이 부족합니다. 좋은 믿음의 한구석에는 의심이 도사리고 웅크리고 있습니다. 부활신앙에는 정말 그렇습니다. 믿음과 불신, 확신과 의심이 교차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주님이 마르다 앞에서 정말 심오한 말씀, 생명의 말씀, 영원한 진리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25-26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나는 ... 이다” 헬라어로 “에고 에미”라고 하는데, 영어의 "I am" 이라는 말씀이 7번 나오고 있습니다. 다섯 번째로 “나는.. 이다”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이요,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생명의 주님이 되시기에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부활을 주시고, 생명을 주시는 것은 예수님 자신이 부활이시고,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부활이 없이는 생명이 없고, 생명이 없으면 부활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기에 참 생명을 가지신 분이요, 그 생명을 내려주시는 분이요,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주님이 되십니다. 예수님이 살아나셨기에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의 구주이시고, 만민을 구원하여 주십니다. 

우리는 죽음에 대하여 새롭게 인식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시기에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을 모신 사람들은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요, 영원히 살아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살았을 때에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영접하고 고백하여 구원받은 사람은 영원한 죽음을 보지 않고, 우리의 몸이 신령한 몸으로 변화될 뿐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이시며, 생명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죽은 사람들의 부활이시고, 살아 있는 사람들의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죽음은 더 이상 죽음일 수 없고, 생명이요, 새로운 생명이요, 신령한 몸을 덧입는 것입니다. 

요일5:11-12에서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도요한이 말하는 ‘생명’은 ‘조에’라고 합니다. 목숨이라는 말이 ‘프쉬케’입니다. 생명은 단순한 목숨이라는 차원을 뛰어넘어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이요, 하나님의 생명- 신적인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생명, 아들이 가지신 생명,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생명, 그 생명이 아들 안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생명이신 아들 예수님을 우리 안에 모시고 영접하고 보니 우리 안에 생명과 부활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을 모시고 보니 영원히 죽지 않게 되었습니다. 

요8:51에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절대로 결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는다, 죽음을 겪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의 죽음은 고통스러운 죽음, 지옥의 형벌, 영원한 형벌이라는 죽음입니다. 그러나 부활이시며 생명이신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죽음이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영원한 형벌이 아니라, 신령한 몸으로 갈아입는 것이요, 우리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가는 관문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함께 죽는 강도를 향하여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을 모시고, 아버지의 집에 들어갑니다. 아버지의 집에는 거할 곳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요5:24 말씀을 즐겨 암송하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망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죽음은 신령한 몸으로 갈아입는 순간일 뿐입니다. 죽음이란 우리 주님의 손에 이끌려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가 영생복락을 누리는 새로운 생명, 천상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입니다. 우리도 죽음을 맛보게 될 것이지만 우리의 생명이 소멸되지 않고, 영원한 형벌에 들어가지 않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영원한 천국에 들어갑니다. 

우리 주님이 위대하신 선언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하셨습니다. 마르다의 신앙이 얼마나 좋은가 보세요. 마르다의 신앙이 이번 일로 확실해졌고, 더욱 알차게 성장하였고, 신앙의 핵심을 파악하였습니다. 27절입니다.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들도 마르다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고후5:1-3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죽음과 함께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으로 갈아입는데, 신령한 몸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갑니다. 우리의 영혼이 육체라는 집을 입은 것 같이 우리는 죽음과 함께 하늘의 영원한 집, 하늘의 육체를 입고 아버지의 집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됩니다. 

신약성경 안에서 말씀하는 부활은 세 가지 차원에 그 부활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첫째는 세례에서 일어나는 부활, 둘째는 죽음에서 일어나는 부활, 셋째는 역사의 마지막 날에 일어나는 부활입니다. 우리는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영접하므로 구원을 받고 부활과 생명은 시작되었습니다. 육체의 죽음과 함께 신령한 몸으로 덧입혀지고, 예수님이 마지막 날에 나팔 소리와 함께 재림하실 때에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부활은 완성될 것입니다. 

우리는 현존하는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육체의 부활이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 일어나고 신령한 몸으로의 부활이 죽음과 함께 일어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존하는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골2:12에서 보면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골3:1에는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고 우리는 뒤 따라 열리는 부활의 열매들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을 모시는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과 생명이 우리의 죽을 몸을 살리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있습니다. 

시인 구상(1919-2004)은 부활의 아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부활송 ”

죽어 썩은 것 같던/매화의 옛 등걸에/승리의 화관인 듯/꽃이 눈부시다. //

당신 안에 생명을 둔 만물이/저렇듯 죽어도 죽지 않고 /또다시 소생하고 변신함을 보느니 /당신이 몸소 부활로 증거한 /우리의 부활이야 의심할 바 있으랴! //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으므로/ 진리는 있는 것이며 /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으므로/ 정의는 이기는 것이며 /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으므로/달게 받는 고통은 값진 것이며 /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으므로 / 우리의 믿음과 바람과 사랑은 헛되지 않으며 /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으므로 / 우리의 삶은 허무의 수렁이 아니다. //

봄의 행진이 아롱진/지구의 어느 변두리에서 /나는 우리의 부활로써 성취될 /그 날의 누리를 그리며/황홀에 취해 있다. 


참 귀한 시이며, 소중하고 불굴의 의지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지금 살아계신 우리 주님이 내 안에, 나와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백 년 전에 영국 성공회의 감독으로 있는 유명한 목사가 중국의 선교사로 가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 때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중국에 간다면 그곳에서 목숨을 바치게 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이 때 감독은 말하기를 “그럴 줄 압니다. 그러나 나는 부활을 믿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으면 선교지에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영광입니다. 이러한 결단과 열정은 부활신앙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부활을 믿을 때에 과거와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를 죽음에서 이끌어내셨습니다. 사망의 무덤에서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 우리와 함계 계십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성격이 달라지고 가치관을 변화되고, 사는 목적이 변하고, 죽음에 대한 생각이 달라집니다.

주일 학교 교사를 한 10년 하시던 여집사님이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정말 천당과 지옥이 있습니까? 지금 더 이상 설명하려고 하지 말고, 간단하게 있다, 없다로만 대답해주세요.“ 그래서 목사님은 그 여집사님에게 왜 그런 질문을 하게 되었는지 물었습니다. 그 여집사님에게는 시어머니 문제, 남편과의 갈등, 아이들 문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사실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천국과 지옥이 분명하다면, 이제 세상의 문제는 아주 시시한 것이었습니다. 천국이 있다고 하면 얼마든지 참을 수 있고, 또 참아야 합니다. 천국을 바라보면서 능히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부활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면, 오래 산다는 것이 무엇이며,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이며, 누가 안 알아주면 어떻습니까? 오늘 웃었다고 웃은 것입니까? 오늘 힘들었다고 하여 과연 좌절할 것입니까? 부활신앙은 살아 있는 신앙입니다. 능력입니다. 확신입니다. 위대한 소명입니다. 부활신앙이 우리의 근본이어야 합니다. 부활신앙은 우리를 승리로 이끌어줍니다. 예수님의 다시 살아나심에 동참하고, 함께 하여 영원한 복락을 누릴 것을 확신하면서 주님을 위하여 잘 죽으시고, 부활에 참여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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