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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을 쓰신다 (출 4: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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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믿음의 사람을 쓰신다 (출 4:10-17)

사람들은 대부분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에 만족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돈만 있으면 고치고 싶어한대요. 그래서 요즘 성형외과 병원이 잘 된다고 합니다. 성형수술을 못하면 화장이라도 열심히 해서 예쁘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 여자들 마음 아닙니까? 오늘 아침에도 여러분은 거울을 보고 나오셨을 것입니다. 자신의 얼굴과 모습에 만족하십니까? 저는 지금의 내 얼굴과 내 모습에 만족합니다. 

그렇지만 사실 저도 예전에는 제 모습과 얼굴에 만족하지 못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저의 얼굴을 거울로 보면 하관이 넓습니다. 그래서 이발을 할 때 옆 머리를 짧게 깎지 않습니다. 언젠가 머리 깎으러 가서 깜빡 조는 사이에 이발사 아저씨가 옆 머리를 바싹 쳐버렸습니다. 스스로 볼 때 얼마나 보기 싫던지 불평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부터 이발소를 바꾼다든지, 처음 가는 곳에서 머리를 깎을 때는 꼭 말을 합니다. 그리고 또 제 머리카락이 곱슬머리입니다. 그래서 젊은 시절, 머리를 기르고 다닐 때 머리카락이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그래서 싹 밀고 다니고 싶었는데, 그러면 두상이 또 위의 머리가 앞이 꺼져있어서 이상해지기에 그러지도 못하고... 하여튼 머리 두상부터 머리카락, 얼굴형,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두 개의 얼굴을 가졌습니다. 하나는 외형적인 얼굴이고, 또 하나는 내적인 얼굴입니다. 여기서 내적인 얼굴은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자화상입니다. 내적인 자화상이 바로 자기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싫어합니다. 남들이 자신을 무시하고 천대하면 화를 내면서도 사실은 자기가 자기를 더 무시하고 더 멸시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자신의 외적인 얼굴도 싫어하고 자기 인생의 자아에 대해서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즉,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성격이나, 가문, 자라난 환경과 배경, 학력, 등 이런 모든 것을 다 싫어하는 부정적인 자아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열등감을 가지고 자신을 무가치하게 생각하고, 자신을 멸시하는 속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것을 ‘낮은 자존감(Lowself-esteem)’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자기 자신을 너무 무시하고 낮추는 감정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들을 보면서 슬퍼하고 분노하십니다. “내가 네 얼굴을 만들었는데 네 자신이 스스로 싫어한다면 그것은 나를 싫어하는 것이다. 내가 너를 이 땅에 태어나게 했는데 네 자신에 대하여 부정하고 싫어하면 그것은 나를 부정하는 것이다”, 

여러분, 우리는 열등감이나 낮은 자존감을 극복해야 합니다. 열등감은 자기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심리적인 질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속에 잠재된 낮은 자존감이나 열등감을 치유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치유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은 사람들 중에도 낮은 자존감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본문의 모세가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40년 광야에서 양치기로 생활한 모세에게 어느 날, 하나님이 호렙산 불붙은 가시떨기나무에 나타나셔서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고 하시니까, 모세가 ‘제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겠습니까? 하나님, 저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쓸모없는 존재입니다’ 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너는 가서 먼저 이스라엘 장로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내 말을 전해라’ 고 하십니다. 

그러자 또, ‘하나님, 그들이 나를 믿지 않고 내 말도 듣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말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3가지의 표적을 보여주십니다. 지팡이가 뱀이 되고 뱀이 지팡이가 되는 표적, 손에 나병이 생기고 또 그 나병이 치유되는 표적, 나일 강물이 피가 되는 표적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은 ‘오직 주만 믿으라’는 뜻으로 이 표적들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이 정도까지 보여주셨으면 ‘예’하고 출발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모세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모세가 말합니다. 

(10절)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 저 못합니다. 저는 말을 못합니다”,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태어날 때부터 말을 잘 하지 못했대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주님이 말씀하신 다음인 앞으로도 그러할 거래요. 그 말을 듣고 하나님이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11~12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하나님께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서 내가 할 말을 가르쳐주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선지자 중에 예레미야가 어느 날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내가 너를 성별하여 선지자로 세웠노라’, 그러자 예레미야가 대답합니다. (렘1:6)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하나님, 저는 말을 잘 못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1:7) “...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이 말씀은 ‘너는 그냥 나만 믿어라 내가 너에게 무엇을 말할지 다 알려줄게, 그냥 믿기만 해라’ 하는 말씀입니다. 

수년 전, 아들 상우와 대화 중에 나누었던 말입니다. 이 아이가 그래요. “아빠, 나는 목사님은 못할 것 같애”, “왜?”, “나는 아빠처럼 말을 잘 하지 못해요”, 그래서 그랬습니다. “응~ 이 아빠는 네 나이 때 너보다 훨씬 말을 못했어”... 실제로 그랬습니다. 저는 남들 앞에 서서 말을 하는 것을 잘 못했습니다. 초등학교 5~6학년 때 줄곧 반장을 했는데, ‘차렷~ 경례~ ’, 하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아이들 앞에 나가서 말을 해야 할 때가 있었는데, 그것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지금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설교를 하고 있는 내가 너무 신기합니다. 

여러분, 말을 유창하게 잘해야만 하나님이 크게 쓰시는 것은 아닙니다. 선교사님들을 보십시오. 선교지에 가면 먼저 말을 배웁니다. 그런데 현지에서 태어나서 자란 현지인들처럼 그 나라 언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습니까? 그냥 어눌하게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복음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왜요? 말을 유창하게 못하니까 쓸데 없는 말을 안 하는 것입니다. 말을 잘 못하니까 가슴으로 핵심만 이야기 합니다. “GOD loves you, you know?”, 사람들이 감동을 받습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온 맘을 다해 전하니까 능력이 나타납니다. 오늘날 우리는 말을 못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말을 너무 잘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초대교회 시절 사도 바울이 가는 곳마다 복음이 전해져서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에베소, 빌립보, 고린도, 데살로니가... 그런데 헬라(그리스)의 아덴(아테네)에 가서는 복음을 전했으나 교회가 세워졌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사람의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으로 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도와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핵심을 성령의 능력으로 전하지 않고 인간의 말과 지혜로 전하다 보니까 실패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고전2: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말 재주가 아니라 능력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설교하는 목사로서, 여러분들의 격려를 받고 용기를 얻습니다. ‘목사님, 설교에 은혜 받았습니다, 요즘 출애굽기에 은혜 받습니다’, 제가 저를 볼 때 그렇게 뛰어난 설교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격려를 받으면 부담을 갖습니다. ‘다음 주에는 더 잘 해야지’... 그렇지만 설교가 말로만 화려하고, 말로만 좋은 수사력을 써서 포장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만져주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고, 설교를 위해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매일 설교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는 부족한 사람인데, 나 때문이 아니고, 나를 위해서도 아니고, 우리 교회, 우리 교회의 성도들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달할 수 있게 해 주옵소서. 하나님, 목사가 드러나는 설교가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위로가 되는 말씀을 주옵소서. 우리 교회 성도들 중에 고통가운데 있는 분들에게 위로가 되는 말씀, 새로운 일을 앞에 두고 있는 분들에게는 용기를 주는 말씀, 우리 모두에게 힘이 되는 말씀을 주옵소서. 본문을 통해서 저와 우리 교회에 하고 싶은 말씀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옵소서”라고 매일 기도합니다. 

아프리카 선교사였던 유명한 리빙스턴 선교사님을 아시죠? 그 리빙스턴 선교사님의 전기를 쓰게 된 한 작가의 이야기입니다. 리빙스턴 선교사님에 대한 여러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서 아프리카로 건너갔습니다. 그리고 리빙스턴을 아는 사람들을 인터뷰했습니다. “리빙스턴 선교사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의 대답이, “리빙스턴 선교사님이 무슨 말씀을 전하셨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리빙스턴 선교사님은 우리를 사랑했습니다”, 

우리가 말을 잘 하는 것보다 진실함과 주님에 대한 사랑, 그리고 영혼에 대한 사랑이 더 중요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모세가 ‘저는 말을 잘 하지 못합니다’ 하니까, 하나님이 ‘염려 마라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가르쳐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뭐라고 합니까?

(13절) “모세가 이르되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무슨 말입니까? ‘다른 사람을 택하시면 좋겠습니다’, 자꾸 회피하려는 것입니다. 이 말이 하나님을 열 받게 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출애굽기는 여기서 끝나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모세가 하나님께 맞아 죽었다~ 끝~ 이래야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14~15절)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하여 이르시되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가 말 잘 하는 것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그의 마음에 기쁨이 있을 것이라 너는 그에게 말하고 그의 입에 할 말을 주라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희들이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 

왜 하나님은 이렇게까지 핑계대며 거부하는 모세에게 집착하십니까? 그냥 처음부터 말 잘하는 아론을 부르셔서 보내시지 왜 굳이 안 가겠다는 모세를 보내시겠다고 하실까요? 왜 하나님은 고등학교 시절 그렇게 주의 종이 되지 않겠다고 하는 나를 그렇게 부르셨을까요? 여기에 큰 은혜가 있더라고요. 하나님은 다른 사람이 아닌 모세와 일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왜요? 모세가 좋아서... 얼마나 감사한지... 

여러분, 여행도 친한 사람과 해야 즐겁습니다. 친한 사람과 같은 방을 써야 재미있습니다. 교회에서 성지순례를 가면 누구와 방을 쓰게 하느냐가 큰 문제입니다. - 하나님은 모세와 함께 일하고 싶어하셨습니다. 그래서 변명하는 모세를 끝까지 설득하면서 끌고 가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화를 내셨습니까? 속상하셔서 그러신 것입니다. 함께 일하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고 계속해서 ‘No\' 하니까 속상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맡기시는 사명을 안 한다고 하면 하나님의 마음이 아프심을 기억하십시오. 

(17절) “너는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 

모세는 별 볼 일 없는 평범한 양치기였습니다. 이것이 모세의 정체성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지팡이는 평범한 양치기의 지팡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양무리나 돌볼 때 쓰는 그 지팡이가 하나님의 지팡이가 됩니다. 모세가 이때부터 하나님만 믿는 사람으로 크게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머뭇머뭇하던 자, 말도 잘 못하고 어눌한 사람,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나가서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이 됩니다. 이후로 모세는 지금까지의 태도를 보이지 않습니다.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말 잘 하는 사람을 쓰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개인의 능력과 은사가 탁월한 사람만을 쓰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을 쓰십니다”, 할렐루야! 이때부터 별 볼 일 없던 모세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20절) “모세가 그의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모세의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는 믿음의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열등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나님 저는 말을 잘 못해요. 저는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해요. 저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겸손히 자신이 약한 존재라고 고백하는 겸손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겸손과 열등감은 다릅니다. 열등감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신의 존재가치를 부정하거나 낮게 평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열등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2) 가능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저는 연약한 존재지만 하나님의 일이니 가능하리라 믿고 나아갑니다’, 무엇이든지 주 안에서는 불가능이 없다는 의식은 중요합니다. 

(빌4:13)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3) 내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야 합니다. 
‘나는 비록 연약하지만 무한하신 주님의 능력을 믿고 나아갑니다’, 할렐루야! 

복음성가, “나는 비록 약하나 주의 힘은 강하다~ 어려울 때 도우시니 날마다 가까이 걷겠네 나를 허락하시어 주 가까이 하도록~ 날마다 더 가까이 가까이 주님 이시여”,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을 쓰십니다” 

돌아가신 한신교회 이중표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시골의 옥구교회에서 목회하다, 서울의 관악교회의 청빙을 받아 서울에서 목회를 하게 됩니다. 교회는 날로 부흥을 하여 크게 성장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장로님을 피택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겨서 교회가 큰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되고, 급기에 교회가 나뉘어져서 큰 시험에 들게 됩니다. 그 일로 인해 그 교회를 사임하고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군산시에 있는 한 중형교회에서 청빙을 받았습니다. 한 4~500명이 모이는 교회였습니다. 가서 목회를 잘 할 자신도 회복되었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그리로 가려고 하는데, 사모님이 절대 반대를 하는 것임. 기존교회에 가지 않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모님이 교회를 개척하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은 너무 자신이 없었습니다. 열등감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이유를 댔습니다. '나는 기장이라 안 돼. 시골 사람이라 안 돼. 학력이  낮아서 안 돼. 능력이 없어서 안 돼. 돈이 없어서 안 돼'하면서 반대했습니다. 

그런데 사모님은 “교회 개척을 돈 가지고 하나요? 학력 가지고 하나요? 주님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지” 그러면서 적극적으로 말하면서 목사님을 서울 강남의 신반포1차 단지로 데려갔대요.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셨다고 합니다. “내가 정녕 너와 함께 하리라”, 모세에게 들려주셨던 감동이 가슴을  뜨겁게 하면서 열등감을 극복하고 믿음을 가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한신교회가 생겼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을 쓰십니다”, 말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능력과 재능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을 쓰십니다. 여러분, 말 잘하고 특별한 재능이 있으면 물론 좋겠지만 말 잘 못해도, 특별한 재능이 없어도 오로지 하나님만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셔서 놀라운 기적의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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