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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 (딤전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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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에게 보낸 편지 (딤전 1:1-2)

오늘부터 바울 사도가 믿음으로 낳은 참된 아들이라고 부르는 당시 에베소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던 목회자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의 말씀을 가지고, 디모데전후서를 겸손한 마음으로 읽어가면서, 여러분과 함께 그 말씀 가운데서 교훈을 얻고, 말씀의 진전한 의미를 배워보도록 하겠습니다. 

디모데전서는 신약성경에 들어 있는 27권의 책들 가운데 디모데후서, 디도서와 함께, 그 책의 성격을 말할 때에「목회서신」이라고 분류되는 책입니다. 이 책들이 목회서신으로 불리는 것은, (1) 이 서신의 수신자가 디모데와 디도인데, 그들은 다 사도 바울의 제자입니다. (2) 디모데와 디도는 당시 일정한 지역에서 ‘주님께서 머리가 되신 믿음공동체인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입니다. (3) 이 서신의 내용이 교회를 어떻게 세워나가고, 어떻게 교인을 지도하고, 가르치고, 섬길 것인지, 등을 포함한, 교회 지도자로서의 믿음생활 자세에 대하여, 아주 세심하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서신의 내용이 목회자가 감당할 부분에 관한 교훈이 많이 담겨져 있는 서신이라는 점에서, 성경학자들이 이 책들을 목회서신이라고 분류를 하고, 부른 것입니다. 

디모데전서는 당시 소아시아지역의 수도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대도시인, 에베소에 세워진 교회인, 에베소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젊은 목회자 디모데에게, 목회적인 측면에서도 선배이지만, 모든 부분에서 디모데에게는 아버지와 같은 심정을 가지고, 지도하는, 지도자 바울이 주는, 목회적 지침이자, 교훈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바울 사도의 이 서신은, 지금 여기서 치열하게 믿음생활을 하면서 교회를 섬기고 있는 모든 목회자들과 신실한 교인들을 권면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목회자에 대한 교훈은 목회자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 교인들에게로 전달되어 가는 것이기에, 저를 포함한 성도 여러분이 함께 정성껏 배워야 할 말씀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오늘부터 여러분은 디모데전서로부터 시작해서 디모데후서까지의 말씀을 함께 읽고 공부하면서 바울 사도의 말씀 속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음성을 듣도록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1. 디모데전서의 배경입니다.

여러분이 디모데전서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디모데전서의 배경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한 사람을 아는데도, 그 사람의 ‘삶의 자리’인 ‘휴먼히스토리’인, ‘삶의 배경’을 아는 것은 아주 중요한 요소입니다. 여러분이 알고자 하는 사람의 출신배경과 성장과정, 가족관계, 학연과 지연과 혈연적 관계를 등, 여러 가지 사항에 대하여 알게 되면, 아는 것만큼,  그 사람을 더 잘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책의 저자나, 그 책을 기록하게 된 배경 등을 알게 되면, 전체의 내용을 여러분이 더 쉽고 빠르게 이해하고,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먼저 바울 사도가 디모데전서를 쓰게 된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디모데전서를 쓰기 전에 바울 사도는, 한 때, 이 에베소란 대도시에서 바울의 전도 사역기간에 전체를 통털어서 살펴보아도 바울이 한 지역에 머물러서 전도사역을 한 가장 긴 기간인, 약 3년 동안, 열심히 복음을 전한 적이 있습니다. 바울의 에베소 선교를 통하여 당시 에베소뿐만 아니라 에베소를 중심하여, 에베소의위성도시라고 할 수 있는 넓은 지역에까지 복음이 전하여져서 당시 소아시아 일대에 영적으로 엄청난 충격과 영향력을 끼쳤던 적이 있습니다. 바울이 가장 긴 기간 동안 머물면서, 복음을 전한 에베소는 당시 로마제국 안에서, 소아시아의 수도라고 불리는 큰 도시였고, 에베소가 어떤 영향을 받으면, 그 영향이 에베소 주변의 도시로까지 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의 선교사업의 결과로 에베소에 교회가 세워지면서, 에베소를 중심으로 한, 주변 지역으로 복음이 전파되어, 주변 지역에 또 다른 교회들이 세워졌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교회가 바로 루카스 계곡을 따라서 세워진 골로새교회와 라오디게아교회, 히에라폴리스교회 등입니다. 이 교회들은 전도자 바울 사도가 직접 그 지역까지 전도를 간 것이 아니라 바울이 에베소의 두란노 서원이란 곳에서 자리를 잡고 선교사업을 하면서 복음을 가르칠 때에, 에베소에 다니러왔다가, 그곳에 들러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변화를 받은 이들이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서, 복음을 전하여 세운 교회입니다. 그런 대표적인 사람이 골로새 교회의 지도자인 에바브라 디도와 같은 사람입니다.
         
에베소에 이런 영향력을 끼친 바울은 3년 가량의 에베소 교회 사역을 마치고, 다른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지역으로 복음을 전하러 갑니다. 바울이 에베소를 떠날 때, 바울은 자신이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정성으로 양육을 한, 에베소 교회가 앞으로 신앙적으로 혹은 사상적으로 어려움을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견을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0:25-35절에서, 바울은 밀레도란 항구에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붙들고 말하기를, ‘나는 여러분 가운데로 들어가서 그 나라를 선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나는, 여러분 모두가 내 얼굴을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압니다. 

여러분은 자기 스스로를 잘 살피십시오. 또 여러분은 양 떼를 잘 보살피십시오. 성령이 여러분을 양 떼 가운데서 감독으로 세우셔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피로 사신 교회를 돌보게 하셨습니다. 내가 떠난 뒤에 사나운 이리들이 여러분 가운데로 들어와서 양 떼를 마구 해하리라는 것을 나는 압니다. 바로 여러분 가운데서도 제자들을 이탈시켜서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것을 말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깨어 있어서 내가 삼 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각 사람을 눈물로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나는 이제 하나님과 그의 은혜로운 말씀에 여러분을 맡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분을 튼튼히 세울 수 있고, 여러분으로 하여금 유업을 차지하게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누구의 은이나 금이나 옷을 탐낸 일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아는 대로, 나는 나와 내 일행에게 필요한 것을 내 손으로 일해서 마련하였습니다. 나는 모든 일에서 여러분에게 본을 보였습니다. 이렇게 힘써 일해서 약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주 예수께서 친히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이 있다 하신 말씀을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자신이 세우고 양육한 에베소 교회 안에 분명히 불순한 세력이 들어와서, 그로 인해 에베소 교회가 신앙적으로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예견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예견대로 바울이 떠난 후에 에베소 교회 교인들이 이단의 도전으로 인하여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사도바울의 염려대로 여러 가지 이단들이 에베소 교회 안에 들어왔는데, 그 가운데서도 대표적인 것이 유대주의적 율법주의와 영지주의입니다. 

여기서 유대주의적 율법주의는 신본주의적인 구약전통의 신앙이 아니라 변질된, 곧 인본주의적이고도 민족주의적인 관점에서 구약성경의 일부만을 취한 후, 거기에다가 유대전승을 가미하여 만들어진, 단순히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 구원의 길이라고 주장하는 집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율법은 안식일법과 할례법이고,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 없이도 율법을 지키고, 행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자기의 의’ 사상을 주장하는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이런 율법주의자들은 주장하기를,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을지라도 구원을 얻으려면 율법을 다 지켜야만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니 구원을 받는데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받아들이는 것외에 그 어느 것도 필요한 것이없다고 가르치면서, 십자가의 은혜와 예수의 부활과 재림을 가르치고, 성령 아래 있는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을 겅험하게 하여, 복음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대부분의 이방인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유대주의적 율법주의자들의 가르침을 듣자, 요동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유대로부터 온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나사렛사람 예수와 복음을 인하여 세계 곳곳으로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이 흩어져 살고 있는 각 지역에다가 복음을 전하면서 ‘주님의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은 유대 땅에서 온 사람이라면, 특별히 예루살렘 교회에서 보냄을 받았다면, 그 원위를 인정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한 때는 히브리인이고, 바리새인출신이며, 율법학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유대전통을 지키면서, 복음을 믿고, 율법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말이 사뭇 일리가 있는 것같이 느껴졌고, 그래서 이방인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주의적 그리스도인의 주장에 흔들린 것입니다. 그 결과 이방인 출신의 그리스도인이 교인의 중심을 이루고 있던 교회 안에서 혼란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이단은 영지주의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당시 로마세계 안에서 가장 크고 동서양의 문물이 교차하는 국제도시인 알렉산드리아에까지 들어 온 힌두교 가운데서도 요가와 불교사상의 일부와 헬라철학의 영향을 받아서 만들어진 혼합종교사상으로써, 인간의 영혼만을 중시하고, 육체를 경시하여, 한편으로는 극단적인 금욕주의를 강조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육체적인 쾌락주의를 주장하고 따르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원론적으로 세상을 보고, 믿음생활을 하면서도, 육체적으로는 마음껏 쾌락을 즐기려는 그런 사상입니다. 그래서 영지주의자들의 미혹에 육체적으로 문란한 생활을 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유혹을 받아서 넘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예수님의 신성은 인정하지만, 인성은 인정하지를 않았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은 논리적으로 보면 그럴듯한 점이 있습니다. (1)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이 될 수 있느냐? 하는 점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을, 단지 ‘하나님이 사람의 형상처럼 세상에 오셨을 뿐이다.’라는 논리를 주장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미혹했습니다. (2) 금욕주의를 신비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영지주의자들을 따랐고, 거룩한 믿음생활과 함께 육체적인 즐거움을 누리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유재주의적 율법주의자들과 영지주의자들은 비단 에베소 교회 만이 아니라 주후 1세기경 가장 강한 힘으로 ‘주님의 교회’를 틈탔던 이단사상입니다. 신약성경 가운데 골로새서를 보아도 골로새 교회 안에도 이런 유대 율법주의와 영지주의가 틈탄 것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런 이단들의 선동에 대하여, 믿음의 아들이라고 여기는 목회자 디모데를 에베소 교회에 세우고서, 이런 문제에 대하여 적절한 조처를 취하도록 대비를 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에베소 교회는 대외적으로는 로마제국 안에서 서서히 일어나고 있는, 기독교에 대한 로마제국의 핍박에 대비하여, 제국의 조직적인 박해로 인하여, 교회가 약해지거나 무너지지 않도록 준비를 시켜야 했고, 대내적으로는 당시 사회적으로는 여성이 공적인 자리에 남성과 함께 참여하지 못하는 분위기 속에서, 여성이 남성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 문제로 인하여 발생하는 부정적인 이미지와 교회 안에서 문화적인 문제로 인하여 교회가 분열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남녀 성도간의 일치와 질서유지에 대해서, 특별히 여성교인들이 자제 해야만 할 문제들에 대하여 교훈을 함으로써, 교회를 더욱 견고하게 세워갈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바울 사도가 디모데에게 이런 편지를 쓴 것입니다. 

그리고 이외에도 에베소 교회 공동체의 원활한 운영과 과부와 같이 경제적인 자립능력이 없는 계층의 사람들을 위한 구제사업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교회가 감당해야만 하는 다양한 구제사업을 위하여, 재원조달이 시급했기 때문에, 바울은 이에 대한 대책을 세우는데 있어서도, 목회경험이 짧은 디모데에게 일러 줄 사항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다양한 이유들 때문에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를 쓴 것입니다.

사실 바울은 디모데를 에베소에 둔 채로, 자신은 마게도냐 지역의 여러 교회를 돌아본 후에 다시 에베소로 가서 디모데와 합류하려고 했었습니다. 하지만 선교사업이 바울이 계획한 대로 진행되지를 않아서 바울이 뜻한바 대로 에베소에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를 통하여, 소아시아에서는 지도자적인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에베소 교회의 담임목회자에게 목회자이기 때문에 감당해야만 하는 교회의 여러 가지 당면한 과제들을 해결하는데, 필요한 교훈과 그런 형편에서 젊은 목회자가 교회를 어떻게 섬겨야만 하는지에 대하여,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여러 가지 내용을 편지에 담아서 디모데에게 보낸 것입니다.  

2. 디모데 전서는 사도의 권위로 보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디모데전서는 바울이 사도의 권위를 가지고 보낸 편지입니다. 그래서 본문 1-2절에서 바울은 편지를 시작하면서 디모데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구주이신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된 나 바울은, 믿음으로 낳은 참된 아들 디모데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당신이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라는 점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자신을 사도로 세우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이 편지를 쓰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편지의 권위는, 사도의 권위를 넘어서, 하나님의 권위로 쓰여진 것입니다. 바울의 이 결연한 표현 속에서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에만 순종하는 하나님의 사람의 신실한 자세를 더 생각하고 유념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이런 믿음의 자세가 꼭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목회자와 목회자가 아니더라도 하나님의 일을 맡아서 감당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께서 내게 이 직분을 맡기셨다.’는 분명한 의식이 필요합니다. 간혹 교회의 임원들 가운데는 “능력도 안 되는데 그냥 교회서 씌워줬어!”라고 푸념하듯이 말하는 분이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일을 맡은 자의 마땅한 자세가 아닙니다. 교회가 여러분에게 어떤 역할을 맡기셨을 때에는, 거기에 보이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거룩하신 섭리가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보세요 꼭 능력이 되고, 자격이 되어야만 맡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중심과 미래를 보시고 일을 맡기기도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에게 주어진 직분에 대한 소중함과 신적권위를 재인식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장차 여러분에게 상주시는 분이신 그리스도 에수 앞에서 자기에게 맡겨진 역할을 감당하는데 언제나 신실하고, 최선을 다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3. 디모데전서는 진실한 동역자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디모데전서는 바울이 단지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안타까운 마음에서만 보낸 편지가 아닙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아들과 같이 여겼습니다. 그래서 본문 2절에서 바울은 말하기를, ‘믿음으로 낳은 참된 아들 디모데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와 자비와 평화가 그대에게 있기를 빕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아들이란 육신의 아들이 아니라, 영적인 아들입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영적인 아들’로 곧 ‘친아들’처럼 여겼습니다. 그러면서 디모데는 목회적으로는 바울의 제자이고, 선교사업으로는 동역자입니다. 이점이 중요합니다. 아들과 같은 제자이지만, 바울은 이런 디모데를 동역자로 여겼다는 점입니다. 자신과 동등한 권위를 지닌 사역자로 인정을 하면서, 디모데에게 목회적으로 필요한 권고를 담은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사실 바울과 디모데의 신앙경륜과 선교사업의 경험과 목회적인 경륜은 비교가 안 됩니다. 바울은 율법으로는 흠이 없고, 율법에 대하여는 능통하면서도, 나사렛 사람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을 하였고, 부활하신 예수는 만난 체험을 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율법과 복음과의 관계에 능통한 실력자입니다. 오죽하면 현대 신학자 가운데는 ‘바울의 그리스도교’라는 표현을 사용할 정도입니다. 실제로 연령적으로 볼 때나, 경륜적으로 볼 때나, 실력으로 볼 때에 디모데는 바울과 비교가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자신의 제자인 디모데를 아들과 같이, 그리고 제자로서, 동역자로 진실하게 대하고, 디모데에게 목회사역이란 큰 역할을 맡겨줍니다.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사역의 관계는 이렇게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담임목사와 부교역자들의 관계, 목회자와 평신도 사역자와의 관계는, 계급으로, 나이로 묶여지거나, 그로 인하여 사역에 제한을 받는다면, 온전히 교회를 세워나갈 수 없습니다. 서로 신뢰하고, 의지하는 관계 속에서, 협력하고 힘을 모을 때, 건강한 교회를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복음서를 보세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훈련시키실 때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단지 어리고 모자라는 존재로만 보지를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훈련시켜서 당신이 감당한 일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둘씩 짝을 지어나가서 갈릴리 전지역을 다니면서, 가는 곳에서마다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벼으로 고생하는 이들의 병을 고쳐주고, 귀신의 억압 아래 있는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를 행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제자들을 동역자로 여기셨습니다.

제자들을 둘씩 짝을 지어 파송할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 뿐 아니라 당신이 가지고 계신 권능까지도 주시면서, 나아가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들을 고치게 하면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신 후에는, 승천하기 전까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은 후에는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제자들을 동역의 관계로 여겨주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과 제자, 바울과 제자, 목회자와 교인의 관계에는 분명한 선이 있습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이고, 성직자와 평신도의 관계라는 선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마음가짐과 자세는, 언제나 함께 하나님의 일을 행하고, 하나님의 뜻만을 이루는데 동참하는 존재라는 동역자 의식으로 엮어져 있어야만 합니다. 목회자와 교인들이 그렇게 인식하고 행동을 할 때에 교회는 더 큰 힘을 얻고, 창조적이면서도 생산적인 일을 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종은 창조성이 없습니다. 종의 의식이 충만해지면 생산성에 한계가 있습니다. 왜나하면 종은 언제나 주인이 맡긴 것만 생각하고,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역의 관계라면 창조성이 나옵니다. 시너지 효과에 의한 능력이 나옵니다. 과거보다는 더 큰 힘을 낼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서는 항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교역자와 성도들 간에는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동역을 하고 있다.’라는 의식을 가지고, 먼저 하나가 되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그런 마음을 가지고 디모데에게 안부와 축복을 함으로써, 디모데전서를 시작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앞으로 디모데전후서를 읽어나가면서 이런 의식을 가지고 디모데서를 보고 배우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교회를 세워나가야 하는 지, 개인적으로는 어떤 믿음자세를 가져야 하는 지를 바르게 배울 때에, 여러분은 더 성숙된 그리스도인으로, 교회는 더 온전한 교회가 될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주신 교회의 비전을 이루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동역하는 의식으로 하나가 되어서, 그것을 위하여 마음과 힘을 모으고, 하나가 되어서 동역을 한다면, 보다 놀랍고 큰일을 이룰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교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이제부터 그런 삶을 살기 위하여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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