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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든든히 서 가는 성도 (살후 2: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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든든히 서 가는 성도 (살후 2:13-17)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태양이 뜨겁게 내려 쪼이는 어느 여름 날 오후였습니다. 두 사람의 행인이 나무 한 그루가 없어, 잠시 쉬어갈 그늘도 없는 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굉장히 덥군요’라고 한 사람이 말을 하자, 같이 걷던 나그네도 답하기를, ‘말도 마시오. 걸을 기운도 없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를 가다가 보니까, 길 저편에 하늘을 찌를듯이 커다랗게 치솟아 있는 오리나무가 보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 말하기를 ‘이런 곳에서 오리나무가 이처럼 크게 자라다니, 이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면서, 나무 아래까지 달려갔습니다. 가보니 과연 그 나무 아래에는 넓고 시원한 그늘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됐어, 이젠 됐다구. 우리 이 밑에서 잠시 쉬었다 가세,’하고는 뛰다시피 나무 그늘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한참 동안 말도 없이 쉬고 있다가 한 사람이 말을 꺼내기를, ‘이보게, 나무란 본래 어딘가에 쓸모가 있는 법이 아닌가? 그런데 이 오리나무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네. 정말 있으나마나 한 게, 이 오리나무야!’라고 합니다. 그러자 그 말을 들은 다른 사람도 맞장구를 치기를, ‘듣고 보니 정말 그렇습니다, 이 나무는 참으로 쓸모가 없는 나무입니다.’ 라고 하더랍니다.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 두 사람은 이 오리나무 그늘이 없었으면, 전혀 그늘이 없는 길에서 편히 쉬는 것은 고사하고, 잘못하면 길에서 더위에 지쳐 쓰러져, 낭패를 볼 뻔했는데도, 그 고마움은 잊어버리고, 오리나무는 쓸데가 없는 나무라고 비평만 늘어놓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모습을 봅니다. 잠간 동안이나마 자신들을 그 무서운 더위로부터 쉬게 해준, 그늘이 어디서 낳는지 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덕 없는 이야기만 늘어놓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지금까지의 나의 생활은 어떠한가? 한번 겸손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받은바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할 줄 알고, 받은 은혜에 대한 보은, 다시 말해서 은혜를 갚는 일에 성실해야만 합니다. 보은할 줄 모르는 인생은, 가정에서는 불효자요, 직장과 사회에서는 불성실한 자요, 나라에서는 불충한 사람이 됩니다. 요즈음 이 사회의 문제를 가만히 보면, 문제와 갈등이 있는 곳곳마다에,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이 자리잡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보은이란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니, 갈등이 생기고, 원수를 맺게 되고, 갈라지고, 같이 사는 길을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고마움을 모르는 것을 배은망덕이라고 합니다. 우리말 사전을 보면 ‘배은망덕’을 설명하기를 ‘남한테 입은 은덕을 잊어서 저버림"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 없이 흠 없이 십자가를 지시고, 그 위에서 여러분과 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고난을 당하시고,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 나사렛사람 예수께서 흘리신 거룩한 피 때문에,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와 사망의 심연에서부터 구원을 받고, 영원한 희락과 생명을 얻었습니다. 

예수의 대속의 희생 때문에 내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믿고 감사하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구주로 믿는 사람이 감사할 줄을 모른다면, 그것은 마치 물에 빠져 죽어 가는 사람을, 온갖 노력을 다 기울여 구원해 주었더니, 살아난 이가 구원해준 이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감사하다는 말은 고사하고, 내 보따리 어떻게 되었는가? 라고 하면서, 호들갑을 떠는 사람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에게 속한 사람은 받은 구원과 은혜를 인하여, 언제나 감사하고 기뻐하는 생활을 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전서 5:16-18에서 말씀하시기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감사하는 생활 자세가 있어야합니다. 그래야 믿음의 덕을 세우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충성하고, 담대히 복음을 증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극작가 세익스피어는 말하기를, ‘불테면 불어라, 겨울 바람아! 눈보라 섞여 치니 사정도 없다마는, 감사를 모르는 인생보다 모질지는 않구나!"라고 했습니다. 사정없이 몰아치는 겨울 바람과 같은 역경보다도, 감사할 줄 모르는 인생이 더욱 모질다고 말한, 세익스피어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감사할 줄을 모르는 인생이 남겨 놓은 삶의 자리를 보면, 참으로 매정하고 사람답지 못한, 짐승만도 못한 짓거리를 흔히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30년 이상을 정성껏 키워 미국 유학까지 보냈더니, 돌아와서 재산 때문에 부모를 살해하는 인간들, 그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다 감사할 줄을 모르는 인생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본문 데살로니가후서 2:13-17의 말씀을 중심하여  몇 가지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본문은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한 두 번째 편지의 일부분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데살로니가 교인에게 말하기를 ‘주님의 사랑을 받는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의 일로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여러분들 때문에 감사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시고, 진리를 믿게 하여, 구원받게 하시려고, 처음부터 여러분을 택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구원을 받게 하려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전한 복음으로, 여러분을 부르시고, 여러분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데살로니가 교회 교우 여러분, 든든히 서서, 우리의 전한 말이나 편지를 통하여 배운, 전통을 굳게 지키십시오. 그리하면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은혜 가운데서 영원한 위로와 선한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친히, 여러분의 마음을 격려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건하게 하시기를 원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진리에 든든히 선,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어찌해야만 하겠습니까? 오늘은 그 점에 대하여 본문을 중심으로 몇 가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로 믿음에 든든히 서려면, 범사에 감사하는 믿음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믿음에 든든히 선, 신앙인이 되려면, 먼저 범사에 감사하는 믿음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바울 사도도 말씀하기를, ‘내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는 이유는, (1) 하나님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에 (2)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택하여주셨기 때문에 (3)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바울 사도는 자신의 믿음 여정에서, 감사의 조건이 항상 충만하고, 분명한 믿음 생활을 감당했습니다. 믿음에 든든히 서려면, 감사하는 생활을 감당해야만 하고, 언제나 생활 속에 감사가 넘쳐나야만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살전 5:18에서 말하기를,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여러분은 한 주간 동안을 살면서 얼마나 감사한 마음을 가져보았습니까? 지난 한 달 동안에는 얼마나 감사했나? 한 번 자신의 삶의 과정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혹시 감사보다는 시비와 원망, 불평, 책임전가, 그리고 탄식이 많지는 않았는지, 자신의 신령상 형편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감사는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생활자세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시 95:2에서 노래하기를,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로 그를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감사는 아무나,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감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사는, 가치관이 바뀌고 안목이 변화되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와 섭리를 보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은, 전혀 감사를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흑인 인권운동가였던 마르틴 루터 킹 목사가 워싱턴 시를 지나가다가 한 흑인 청년 청소부가, 있는 대로 욕을 하면서, 짜증을 부리면서, 청소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곁에 다가가서 등을 두드리며, ‘여보게, 자네는 하나님이 자네에게 맡기신 지구의 한 모퉁이를 쓸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질 수가 없는가?라고 하면서, 이어서 말하기를, ’청소를 할 때에 마치 베에토벤이 교향곡을 작곡하듯이, 미켈란젤로가 조각을 하듯이, 괴테가 시를 쓰듯이, 그렇게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힘쓰게,‘라고 했답니다. 

사람이 일을 하는 동기가 선할  때, 그리고 올바른 목표에 일의 촛점을 맞추었을 때에, 자신이 하는 일에 보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들이 보기에는 하찮은 일을 하는 것 같아 보여도, 그 일을 하는 사람 자신은 고백하기를, '오! 주님, 나에게 이 일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똑같이 하는 일이요, 지겨운 일이지만, 주께서 내 마음에 긍지를 심어 주시면, 그 순간부터 내 입에서는 휘파람 소리가 나오기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가 마음속에서부터 흘러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하면, 아침에 일어나서 처음에 하는 말이, ’주님, 오늘도 일어나서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라고 하게 됩니다. 

이처럼 새로운 가치관을 가지고, 일을 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생각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성령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므로, 그리스도인에게는 항상 감사가 있고, 소망이 있으며, 마치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가는 것과 같은, 조용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추진력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형편은 어떠하신지 한번, 자신을 신령상 형편을 살펴보기 바랍니다. 진실로 나는 성령님의 도움을 받고 살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자기의 힘만 믿고 의지하다가, 지치고, 고단한 형편에 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보세요, 자기의 능력만을 의지하지 않고, 비록 소문으로 들었어도, 자기의 힘이 아니라 예수의 능력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감사하는 생활을 감당할 뿐 아니라 희망이 있는 생활을 감당했습니다. 

12해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을 보세요, 자기 힘만 의지했을 때에는, 많은 재산을 허비하고, 육체적으로 치료의 고통을 겪어야 했지만, 예수의 소문을 듣고 예수에게 나아가, 그의 겉 옷자락을 붙들었을 때에는, 자신을 괴롭게 했던 문제인 혈루병을 고침받았을 뿐 아니라, 구원까지 얻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가버나움의 중풍병자를 보세요, 그의 친구들이 그를 예수 계신 곳으로 데려 갔으나 주님을 만날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은 낙심하지 않고, 예수께서 계신 집의 지붕을 뜯고는 중풍병자인 자신의 친구를 침상에 누인 채로 예수 앞에 달아 내렸습니다. 이때에 주님은 그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고쳐주셨다고 했습니다. 

엘리사 선지자를 기회 있을 때마다 선대한, 수넴 지역의 귀부인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하나님의 사람을 선대한 것 때문에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이 아버지를 따라 타작 마당에 갔다가,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고 하여 집에 들어와 어머니의 무릎에서 죽었습니다. 그러자 수넴 여인은 다른 방법을 취하지 않고, 엘리사 선지를 찾아가서 구하므로 엘리사 선지가 자신의 몸을 던져 기도하는 투체 기도를 통하여,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을 살려줍니다. 

이처럼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고, 그 뜻을 따라 행하는 사람은 언제나 감사하고, 소망이 있는 생활을 감당합니다.(믿으시면 아멘)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오직 주님만을 믿고 의지함으로써, 감사가 충만한 생활을 감당하고자, 마음과 정성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감사는 구원받은 자가 사용하는, 하나님 나라의 방언입니다. ‘감사합니다.’라는 짧은 말에도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1) 감사는 영혼이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렇습니다, 감사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이 살아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 감사생활입니다. 그래서 선지자 이사야는 사 38:19에서 예언하기를, ‘제가 주님께 감사하듯, 오직 살아 있는 사람만이 주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주님의 신실하심을 알려줍니다’라고 했습니다.

2) 감사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표시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살전 5:18에서 말하기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했습니다. 범사 곧 형통할 때든지, 곤란 중에 있을 때에든지, 기쁠 때든지 슬플 때든지 언제나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은, 모든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선하게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친히 뜻을 이루신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이 있어서, 순종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3) 감사는 겸손의 표시입니다. 그렇습니다, 자기가 잘 나서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감사할 수 없습니다. 마귀가 가장 잘 쓰는 공격방법이, 바로 인생들에게 교만한 마음을 넣어주고,  자긍 하는 마음을 넣어주는 것입니다. 감사는 은혜 받은 자가 아니면 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은혜를 받는 자는 겸손합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벧전 5:5에서 말씀하기를,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감사하는 생활을 감당하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께서 당신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시 50:23에서 노래하기를,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했고, 시 50:14-15에서는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영광스러운 일을 불러옵니다. 왜냐하면 감사는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보게 하기 때문에, 부정적인 것이 자꾸 없어지고, 좋은 것으로 변화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세계에는 감사가 없습니다. 감사는 하나님이 좋아하시고, 불평불만은 마귀가 좋아합니다. 감사해야할 때 감사하지 않는 자는 이미 마귀에게 정복당한 자요, 감사할 수 없을 때 감사하는 자는 마귀를 물리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감사하는 사람을 놀랍게 붙들어 쓰십니다. 
사도 바울을 보세요, 바울은 빌 4:11-12에서 말하기를,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했습니다. 역경 속에서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어디서도 감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고난이나 역경에서 해방된 안전지대란, 이 세상 어디에도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은 그 곳, 그런 삶의 자리에서 더 많이 감사할 수 있는 새 사람으로 변화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찾을 수 없는 그곳에서,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는 자의 감사는 기적을 일으킵니다. 특별히 환난 가운데서의 감사는 놀라운 역사를 이룹니다. 사도행전 16장은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증거하다가 로마관원에게 붙잡혀서 공평하지 못한 재판을 받고, 태형을 당한 후에 빌립보 감옥에 갇힌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서 매를 맞아 등이 터져 상처투성이가 된 채 착고에 묶여 있었습니다. 고통과 두려움이 다가오고 있는 밤에 감사할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바울과 실라는 깊은 밤까지 소리를 합하여 하나님께 기도와 찬양을 쉬지 않았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구원의 손을 뻗치셔서 빌립보 감옥의 터전이 지진으로 뒤흔들리고 감옥문이 다 열리고 모든 죄인에게 채웠던 착고가 풀리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원수 마귀의 쇠사슬에 묶여 신음하고, 악한 권세로 인하여 감옥에 갇힌 것과 같은 고통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마귀에게 지지 말고 도리어 전능하신 주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환난을 영광으로 변화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여러분들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믿으시면 아멘)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시비하고 원망하기보다는 감사하는 생활을 감당하므로 주안에 든든히 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끝으로 그리스도인이 든든히 서려면, 믿음의 전통에 성실해야만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배운 믿음과 말씀의 전통에 성실하게 서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본문에서 말하기를,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든든히 서서, 우리의 말이나 편지로 배운 전통을 굳게 지키십시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법과 전통을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속한 세계의 법을 지키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누구의 법을 지키는가를 살펴보면, 그 사람의 사람됨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첨단의 장비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 장비를 운용하기 전에 우상의 법을 따라 고사를 지내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우상의 자식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예수의 법을 지키는 자는 예수에게 속한 자입니다. 깡패나 건달들의 법을 지키는 사람은 깡패나 건달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법을 귀중히 여기고, 지키고, 살고 있는지, 자신을 한번 겸손히 살펴보기 바랍니다. 

요즈음에 한국 교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거룩한 피를 흘리고, 마련한, 교회 안에서 세상의 상식과 법을 가지고, 모든 주님의 일을 좌지우지하려는 흐름이 있는 것을 봅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교회는 오직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법대로 움직이고 일을 해야만 합니다. 어찌 보면 사람의 방법이 옳고 신선해 보여도, 그대로 행하면 처음과 나중을 아시고 일하시는, 하나님의 길을 따라 갈 수가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법대로 살고자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어리석은 것 같아 보여도 주님의 법이 가장 선하고 온전하며 바르고 속한 길이요 방법임을 믿으시고, 기회 있을 때마다 주님의 법을 택하고 귀중히 여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그래서 모세는 신명기 28:1에서 말하기를, ‘너희가 주 너희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명령을 주의 깊게 지키면,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를 세상의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언제나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주님의 명령을 주의 깊게 지켜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 자들이 그렇게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들을 ‘세상 모든 민족들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믿고 주님의 법을 귀중히 여기고 지키는데 정성을 다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그리스도인은 모든 일에 성실해야 하지만 특별히 주님의 법을 지키는데 성실해야만 합니다. 
한번은 미국의 강철왕 카네기에게 기자들이 묻기를, '당신은 어떻게 해서 그런 성공을 했습니까?'라고 했을 때에, 그는 대답하기를, '나는 가난했습니다. 부지런히 배웠습니다. 끈질기게 일했습니다. 탈선하지 않았습니다.'라고 했답니다. 카네기의 인생을 성공하게 하는데, 다 중요한 조건들이었지만, 그 가운데서도 탈선하지 않았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람은 일반적으로 가난하면 도둑질하고, 힘이 들면 핑계가 많고, 조금 좋아지면 게을러지고, 사는데 여유가 생기면 탈선하여, 하나님께서 복을 줄 자리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사람은 성공할 수가 없습니다. 가난하더라도 복의 근원이 하나님이신 줄 믿고, 부지런히 배우고 일을 하고, 힘이 들어도 능력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열심히 최선을 다하여 일을 하며, 사는데 여유 있을 때에 다른데 바라보지 않고, 오직 주님의 법만을 따라가므로 탈선하지 않는 사람이 승리하고 성공하는 것입니다. 성공하는 삶의 길을 걷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무슨 일이든지 꾸준히 행할 때에 빛을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이팅게일이란 밤에만 노래하는 새가 있답니다. 이 새는 낮에도 지저귀지만, 낮에는 다른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에 묻혀서, 그 소리가 특별히 드러나지 않는답니다. 그러나 밤이 되면, 다른 모든 새들은 잠잠해집니다. 이때 나이팅게일의 지저귀는 소리는, 주위의 정적과 대조를 이루며, 자신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인생여정과 믿음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칭찬’과 ‘환호’의 낮이 지나고, ‘정적’의 밤이 되면, 진정한 ‘사랑’과 ‘아름다움’이 나타나는 것처럼, 언제나 주의 법에 성실하고, 믿음의 전통에 신실하면, 세상이 비록 더욱 악해지고, 불의해질수록, 든든한 믿음은 더욱 그 가치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주님의 법에 성실하여 든든한 믿음을 가지고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실한 사람은 언제나 모든 이에게 사랑을 받고, 귀중히 여김을 받을 뿐 아니라, 주님 앞에 든든히 서게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주님의 법에 성실한 생활을 하고자 정성을 다하므로 주안에 든든히 선 생활을 감당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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