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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시 6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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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시 68:19)
 

아담의 타락 이후로 사람은 수고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누구 한 사람 예외 없이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우리 영혼과 관련된 짐도 있고, 일상적인 생활과 관련된 짐도 있습니다. 인생의 짐은 외적인 원인으로 주어진 것도 있고, 우리 자신이 원인이 된 것도 있습니다. 날 때부터 장애를 타고 나는 사람은 자기의 의사와 상관없이 인생의 짐을 지게 된 사람입니다. 

술이나 도박, 방탕한 생활 등 좋지 않은 습관이 무거운 짐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서로에게 무거운 짐이 되기도 합니다. 인생의 행복은 우리가 진 짐을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면 인생의 무거운 짐을 벗고 쉼을 얻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일까요? 

첫 번째로, 우리의 죄 짐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인생의 가장 무거운 짐은 죄의 짐입니다. 죄는 모든 불행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인생의 모든 불행은 죄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죄 때문에 인간들은 하나님과 불화하게 되었고, 삶에 죽음과 저주가 생겨났습니다. 자연인은 누구나 하나님과 불화한 상태에 있는 사람입니다. 육신의 부모와 불화해도 마음이 편치 못하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불화하고서야 어찌 편키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과 불화한 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창조주 하나님 곧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 호흡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거역하는 죄는 결코 가볍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가슴에 손을 얹으면 심장의 박동이 느껴집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누가 우리의 심장을 쉼 없이 뛰게 하십니까? 우리의 의지로 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십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말하기를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심장이 나를 교훈하도다”(시 16:7)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으신 하나님을 부인한다면, 어찌 그것이 작은 죄라고 하겠습니까? 

예레미야 2장 19절에 이르기를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패역이 너를 책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떠난 것이 악이요 바로 여기서부터 모든 고통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불행의 원인을 다른 데서 찾습니다. 법과 제도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거나, 배경이나 돈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을 오해한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법과 제도가 있으면 무엇 합니까? 사람들이 지키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배경이나 돈도 마찬가지로 인생의 행복을 보장해 주지 못합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로 인해 그 심령이 죄책감과 정죄 의식에 눌리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영의 아버지가 없으므로 고아와 같이 버림받은 심령이 되어 살아갑니다. 술을 마시고 노래하고 즐기지만 그 다음 순간 공허감에 사로잡힙니다. 찰나를 즐기는 것 외에 모든 것이 무의미합니다. 이집트의 미라를 담은 관을 보면 얼마나 아름답고 찬란한지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관 뚜껑에는 죽은 자의 전신을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조각해서 황금색으로 칠해놓았습니다. 그러나 관속을 들여다보면 붕대에 감긴 채 누워있는 앙상하게 말라빠진 시신이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화려한 물질문명과 그 이면에 있는 인간들의 영적 실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겉모양은 세련된데 그 내면은 죄와 탐욕이 가득하고 썩는 냄새가 진동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죄의 짐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일까요? 먼저 알아둘 것은 인간의 힘과 지혜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깊은 수렁에 빠진 사람이 혼자의 힘으로 빠져나올 수 없는 것과도 같습니다. 누군가가 그 사람을 건져주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죄의 수렁에 빠진 인생이 구출 받으려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믿는 것이 곧 우리의 죄 짐을 맡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 짐을 지고 수고하는 인생들을 향하여 “28)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8-30)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을 믿는 성도들이 행복한 까닭은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에서 해방되었고 하나님과 화해를 이룬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성도들 사이를 가로 막고 있었던 죄의 담이 무너졌고 원수 사이가 변해서 사랑하는 부자지간이 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고 하였습니다.

지난날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바로의 압제 아래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자손을 크신 능력으로 해방시켜주셨습니다. 영적으로 볼 때에, 애굽은 죄악 세상을, 바로는 마귀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죄 가운데서 마귀의 종이 되어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마귀를 멸하시고 죄인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성도들은 더 이상 죄의 짐을 질 이유가 없는 것일까요? 맞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 짐을 대신 져 주셨습니다. 성도들은 이제 멸망에 이르는 죄 곧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죄를 짓지 않습니다. 그뿐 아니라, 성도들은 죄에 대하여 민감한 양심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도시 사람들은 웬만큼 공기가 탁해도 견디지만, 공기가 맑은 시골에서 사는 사람들은 도시에 오면 금방 공기가 탁한 것을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성도들은 그 심령이 살아있으므로 죄에 대하여 민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하여 작은 죄를 지어도 고통을 느끼고 괴로워합니다. 다윗은 밧세바의 일로 범죄하였을 때 그 심령이 지옥처럼 변했습니다. 그는 고백하기를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할 수 없나이다”(시 38:4)라고 했습니다. 시편 32편은 그가 회개한 직후에 지은 것으로 그의 심정을 잘 보여줍니다. 

“1)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2)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3)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4)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5)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

성도들은 죄 용서 받았을 뿐 아니라 계속해서 죄 용서 받을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려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1서 1:9)라고 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들도 범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 용서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서 우리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께서는 즉각적으로 용서를 베풀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회개 생활에 힘씀으로 죄에 매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모든 죄의 짐을 하나님께 맡기고 날마다 사죄의 기쁨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근심과 걱정의 짐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마음에 걱정 근심이 있으면 마치 무거운 짐을 한 짐 진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더라도 걱정, 근심이 있으면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잠언 17장 22절에 이르기를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고 하였고, 다윗은 말하기를 “내 눈이 근심을 인하여 쇠하며 내 모든 대적을 인하여 어두웠나이다”(시 6:7), “여호와여 내 고통을 인하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근심으로 눈과 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시 31:9)라고 했습니다. 이 같은 말씀은 근심과 걱정이 우리의 심신에 얼마나 해를 끼치는지 일깨워 줍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걱정과 근심의 짐을 해결할 수 있을까요?

1) 탐욕을 버리고 자족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욕망이 좌절될 때 근심하게 됩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아합 왕은 사마리아 궁 근처에 있는 나봇의 포도원을 보고 욕심이 생겼습니다. 나봇을 불러 말하기를 “그대의 포도원이 내 궁 곁에 가까이 있으니 내게 주어 나물 밭을 삼게 하라 내가 그 대신에 그보다 더 아름다운 포도원을 그대에게 줄 것이요 만일 합의하면 그 값을 돈으로 그대에게 주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나봇은 “내 열조의 유업을 왕에게 주기를 여호와께서 금하실지로다”는 말로 거절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땅은 남에게 팔 수 없습니다. 혹 형편이 여의치 못해서 팔았더라도 50년만에 돌아오는 희년이 되면 원래의 주인에게로 돌려주어야 했습니다. 더구나 나봇은 그 포도원을 팔아야 할 정도로 형편이 궁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렇게 볼 때 나봇이 아합 왕의 청을 거절한 것은 조금도 잘못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칭찬 받을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아합은 이 일로 속이 상해서 궁으로 돌아와서 침대에 누워 얼굴을 돌이키고 식사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아내 이세벨이 묻기를 “왕은 무슨 근심이 있어서 식사를 하지 않으십니까?”하니, 아합이 대답하기를 “내가 나봇에게 포도원을 팔거나 내 포도원과 바꾸자고 했더니 그가 거절하였소”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세벨이 말하기를 “왕은 지금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임금님이 아니십니까? 일어나셔서 음식을 드시고, 마음을 좋게 가지십시오. 내가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임금님의 것으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세벨은 이스르엘 장로들을 충동질해서 나봇을 신성 모독죄로 고소해서 돌로 쳐 죽이게 하고는 그의 포도원을 차지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 아합의 집안은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멸절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탐욕으로 인한 근심은 그 자신과 남을 다 불행하게 만들기 때문에 백해무익합니다. 골로새서 3장 5절로 6절에 “5)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탐욕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면 불행한 결과를 낳습니다. 

그러면 탐욕을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족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면 무엇을 갖지 못해서 근심하는 일이 생기지 않습니다. 자족하는 마음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길 때 가질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4장 11절 이하에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11)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사람은 재물이 많다고 교만하지 않으며 없다고 비굴하지 않습니다.

욥은 그 많던 재산을 다 빼앗기고 열 자녀를 다 잃었지만 겸손히 땅에 엎드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하고 이 모든 일에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재물은 있다가도 없어질 수 있고, 없다가도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잃으면 모든 것 심지어 우리의 생명까지 잃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것을 욕심낼 것이 아니라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특히, 현대는 물질만능주의 시대가 되어서 돈의 위력이 대단합니다. 돈은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대상 중에서 언제나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돈 그 자체는 악이 아니지만, 돈을 사랑하는 것은 죄가 되고 그로 인해 불행한 결과가 생겨납니다. 성도들은 돈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6장 10절에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돈을 사랑하지 말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돈도 사랑하고 하나님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것은 곧 의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고 맡기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여 삶을 맡길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사랑하셔서 복된 인생을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2) 우리의 앞날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이 시대는 모든 것이 유동적이고 불확실합니다. 미래에 대한 확실한 계획을 세우기가 매우 곤란한 시대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불안한 마음을 안고 살아갑니다. 한창 아름다운 인생의 꿈을 꾸어야 하는 젊은이들이 좌절하는 것을 보는 것은 괴로운 일입니다. 성공적인 인생을 살려면 마음속에서 불안을 내몰아야 합니다.

요셉은 애굽에서 노예가 되었으나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자기 인생을 하나님의 손에 맡겼기 때문입니다. 일단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나니까 종살이를 하든, 감옥생활을 하든 언제나 쾌활하고 성실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시편 75편에 “6)대저 높이는 일이 동에서나 서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7)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앞날에 대하여 불안해하지 마시고 겸손히 하나님의 손에 맡기십시오. 아무리 성도님들의 나아가는 길이 칠흑같이 어두워서 장래를 예측할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께 성도님들의 생애를 맡기십시오. 그리할 때 요셉에게 복을 주셔서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게 하셨던 하나님께서 성도님들의 인생을 늘 형통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3) 무익한 생각을 버리고 믿음의 생각을 해야 합니다.

쓸 데 없이 걱정하는 것을 기우(杞憂)라고 합니다. 이 말은, 중국 기(杞) 나라에 살던 한 남자가 언제부턴가 하늘이 무너지면 어쩌나, 그것이 걱정이 되어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고 지냈다는 데서 생겨났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무익한 생각은 부질없는 근심을 초래할 뿐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고 했습니다. 구름이 자유자재로 피어나 여러 가지 형상을 만들어 내듯이, 우리의 생각을 그대로 방치하면 통제할 수 없는 헛된 생각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우리는 생각을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내버려두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믿음을 가지고 마땅히 생각해야 할 것만 생각해야 합니다. 

불신앙의 생각은 부정적이지만, 믿음의 생각은 긍정적입니다. 할 수 없다는 패배 의식에 사로잡힌 사람은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지만, 주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어떤 어려움도 극복하고 목적을 이룰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에서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이 성도님들의 믿음의 고백이 되시길 바랍니다.

4) 의식주로 인해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 생활 가운데 의식주(衣食住)의 문제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아침부터 밤늦도록 수고로이 일하는 것도 이 문제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아담에게 이르시기를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창 3:). 그 날부터 땀과 수고가 우리 인생의 동반자가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의식주 문제로 근심하는 우리에게 좋은 해결책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25)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28)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마 6:25-34)

이 말씀의 요점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 가운데 핵심은 “너희 천부께서”라는 표현입니다.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무서운 심판자가 아니시고 자기 자녀들의 필요를 공급해주시는 자상하신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므로 의식주의 문제 때문에 근심하지 말고 하나님 아버지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 24:1)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면 보리떡 다섯 개를 가지고도 오천 명이 넘는 무리를 배불리 먹이실 수 있습니다. 삼년 가뭄이 다하도록 통에 가루가 다하지 않고 병에 기름이 그치지 않도록 역사하실 수도 있습니다. 까마귀를 보내서 엘리야를 먹이셨듯이 기적적인 방법으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실 수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이삭이 한 해 농사를 지어서 백 배의 수확을 하였듯이, 성도들이 하는 모든 일에 형통한 복을 주실 수도 있습니다. 어떤 방법을 사용하시든지 그것은 하나님께서 뜻대로 행하실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 우리 삶을 온전히 맡기고 그 인도하심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6)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하신 대로, 기도로 하나님께 맡길 때 합력성선의 결과를 주실 것을 믿고 감사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경외하는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한두 번 우리의 짐을 져주시고는 그만 두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날마다 우리 짐을 져주시는 주님이십니다. 날마다 우리가 짐을 하나님께 맡기면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고 우리의 인생길을 인도해 주십니다.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다윗의 이 간증이 성도님들의 진심어린 신앙의 고백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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