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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속죄소 (출 25: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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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소 (출 25:17-22)

“순금으로 속죄소를 만들되 길이는 두 규빗 반, 너비는 한 규빗 반이 되게 하고 18금으로 그룹 둘을 속죄소 두 끝에 쳐서 만들되 19한 그룹은 이 끝에, 또 한 그룹은 저 끝에 곧 속죄소 두 끝에 속죄소와 한 덩이로 연결할지며 20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 21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22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출25;17-22)

요한복음 8장을 보면, 간음한 여인을 현장에서 잡아 끌고 와서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요8;5)하면서 예수님을 시험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때 명분으로 내세운 것이 모세의 율법입니다. 여러분, 법이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하고 그 법은 누구를 막론하고 공정하게 지켜져야 합니다.
 
한국 사회의 수많은 문제들이 법을 무시하고 법을 지키지 않는 것에서 옵니다. 특히 상류층일수록 더욱 위법, 탈법, 초법이 심해서 서민들이 분노하고 실망합니다. 심지어 ‘有錢無罪 無錢有罪’ 라는 말까지 합니다. 법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공정성입니다. 차별없이 집행되어야 법입니다.  
 
그러나 성도여러분, 법(=율법)은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율법에는 눈물이 없습니다. 오직 정죄하고, 비판하고, 삶을 무겁게 합니다. 간음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잡아와 심판을 내려 달라는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이 사건이 주는 의미를 구약의 속죄소(贖罪所)를 중심으로 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히9:1-5)의 말씀을 같이 찾아보겠습니다.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 2예비한 첫 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잔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으니 이는 성소라 일컫고 3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4금 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 5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 

거룩한 장소인 성전은 크게 3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는 바깥뜰이 있고, 성전 안으로 들어오면 ‘성소와 지성소’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성소도 구별된 사람인 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레위 제사장이 아닌 사람이면 죽음입니다. 성소에서 제사장들은 진설병(餠)을 갈아 놓아야 하고, 촛대도 늘 불을 밝혀 놓는 일을 맡아 했습니다. 

그러나 지성소에는 일 년에 한 번씩 오직 대제사장만이 들어가서 백성들 전체 죄를 속하기 위하여 속죄 제사를 드리는 곳입니다.  이 지성소에는 몇 개의 거룩한 물건이 있습니다.  먼저 ‘금 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입니다. 언약궤는 다른 말로 ‘법궤’라고 합니다.  이 언약궤 속에는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 이 들어 있습니다. 

그 다음 말씀이 중요합니다.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언약궤의 두 끝에는 천사를 만들었는데 그 천사의 이름은 ‘그룹’입니다. 여기서 그룹이라는 것은 천사의 개인 명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직분 명칭인데 ‘친위대’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친위대이므로 그룹이 있다는 말은 하나님이 거기 계신다는 뜻입니다.

(출25;22)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오늘 본문 말씀처럼 그룹들은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게 되어 있었고, 그 아래에 법궤가 놓여 있습니다. 즉 언약궤를 그룹들이 날개를 펴서 덮고 있습니다. 이것이 지성소의 모습입니다.       

이 지성소를 속죄소라고도 하고, 시은좌(施恩座), 즉 은혜를 베푸시는 장소라고도 말합니다. ‘속죄소’라는 말은 죄를 속해 주는 장소이고, ‘시은좌’는 은혜를 베푸는 장소이니 같은 말입니다. 

성도여러분, 사람은 죄를 짓습니다. 그러면 사람의 죄가 어떻게 해야 용서를 받는지 아십니까? 감옥에 들어가면 됩니까? 그것은 죄 값을 치루는 것이지 용서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죄를 짓지 않은 것처럼 깨끗해지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만 죄가 속해집니까?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레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사고가 났을 때, 사람이 죽는 것은 상처 때문이 아니라 피를 흘려서 죽는 것입니다. 피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죄를 용서 받는 것도 누군가의 피 흘림이 있어야 합니다.  

(히9;7,12)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에 한 번 들어가되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12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피를 흘렸다는 것은 생명을 버렸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자기의 피, 자기의 생명을 버리사 죽음으로 다른 사람을 살리셨기에 시은(施恩) 곧, 은혜를 베푸신 분이라는 말이 타당합니다. 
 
흔히 법궤를 상상하면 고상하고 거룩하고 멋있는 것같이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성소에 있는 법궤는 ‘인간은 죄인이다’ 하는 것을 고소(告訴)하는 증거품들입니다. 법궤 안에 있는 만나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십계명의 돌판은 인간이란 얼마나 죄인이며 희망이 없고 한심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지적하는 역사적인 고소장들입니다.  

* 십계명의 돌판이야 두 번 생각할 것도 없는 사람의 범죄를 고발하는 율법의 상징입니다. 
*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민16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민16;1-3) “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할의 아들 고라와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과 벨렛의 아들 온이 당을 짓고 2이스라엘 자손 총회에서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 가운데에서 이름 있는 지휘관 이백오십 명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르니라 3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슬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냐” 

권위에 대한 반역을 보여주는 인간모습입니다.  이들은 심지어 하나님에 대한 막말도 합니다. 

(13-14절) “네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이끌어 내어 광야에서 죽이려 함이 어찌 작은 일이기에 오히려 스스로 우리 위에 왕이 되려 하느냐 14이뿐 아니라 네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도 아니하고 밭도 포도원도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니 네가 이 사람들의 눈을 빼려느냐 우리는 올라가지 아니하겠노라” 배신도 이런 배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론의 지팡이에 싹이 나게 하셨습니다. 권위를 침범하는 인간의 행동에 대한 고발입니다.
 
* 만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여러분, 인간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일까요?   먹거리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먹거리입니다.  어린아이에게 가장 급하고 중요한 것은 먹을 것입니까? 부모입니까?  부모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에게는 먹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수백만명을 40년 동안 농사나 장사없이 만나를 통해서 먹이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사람은 자꾸 먹거리에만 집착을 합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이렇게 기도했던 분은 안 계십니까? '하나님 우리 아들을 합격만 하게 해주신다면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그래놓고 막상 합격을 하고 나면 목사한테 와서 묻습니다. '목사님, 제가요 그때 이런 기도를 하였는데 꼭 신학교에 보내야만 하나님께 바치는 것인가요? 돈을 많이 벌어서 헌금도 많이 내고 좋은 장로가 되면 안 될까요?'  

먹거리가 마음에 걸리는 것입니다!!! 아마 목사가 세상적으로 월급(=사례)를 많이 받는 직업이라면,  교사나 공무원보다 더, 의사나 변호사보다 급료를 더 받는다면... 이런 고민 절대 안할 것입니다.   어쨌든지 목사 시키려고 많은 부모들이 애를 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경제적으로 어렵게 해서 사명자가 목회하도록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인간을 잘 이해해야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출16:1-3)을 같이 찾아보십시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둘째 달 십오일이라 2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3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출애굽기 16장은 홍해를 건너서 찬송을 부른 바로 뒷장입니다. 15장이 홍해를 막 건너와서 기쁨과 감사를 하는 장이라면, 16장은 그 찬송의 후렴이 끝나기도 전에 일어나는 원망(怨望)입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하나님의 열 가지 재앙을 자기 눈으로 보았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큰 능력으로 홍해 바다를 육지같이 직접 건넜던 사람들입니다.  뒤쫓아 오던 애굽의 군사들이 홍해에 수장되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 놀라운 구원의 감격과 기쁨에 환호성과 감사와 찬송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좀 지치고 배가 고프니까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합니다.   얼마나 웃지 못할 기막힌 마음씨입니까?    

여러분은 절대로 여러분의 신앙을 기적과 체험에 기반을 두지 마십시오. 기적과 체험은 분명히 우리를 힘있게 하고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믿음의 근거로서는 부족합니다. 신자치고 기적과 경험과 간증거리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신자가 가장 잘 흔들리는 곳은 일상생활이 있는 곳입니다. 큰 문제로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끼니 문제 때문에 흔들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뭐라고 합니까? 비록 노예이긴 했지만 우리는 고기 가마 곁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나서 맨 처음으로 요구하는 것이 무엇이냐... ‘예수를 믿었으면 이전보다 더 나은 것이 있어야 할 것 아니냐’ 는 것입니다. 먹거리 불평입니다. 예수를 믿는데 왜? 더 부자가 안 되는가? 왜 아이들은 더 똑똑해지지 않는가? 아픈 것이 왜 싹 낫지 않느냐!!!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봤자 해답을 얻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아예 질문조차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더 잘못된 것이지요.
 
성경 출애굽기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인간은 철저히 눈앞의 현실중심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지나온 과거에 나에게 나타나신 하나님, 그래서 현재를 인도하실 하나님, 미래에도 계속 인도하실 하나님은 저 멀리 사라지고 없습니다.  당장 눈앞의 현실만 귀하게 여깁니다. 그러므로 때가 되어 배가 고프자 지금까지의 기적과 경험은 아랑곳하지도 않은 채 현재의 배고픔의 해결만을 원망을 퍼부으면서 요구합니다. 그래서 만나를 주신 것입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출16;4) 

하나님이 먹을 것을 주신 것은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 하시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편인가 아닌가 알아보겠다는 말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편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된 셈입니다. 그들은 40년 동안을 하나님이 주신 만나를 먹으면서 하나님에게 원망과 불펼ㅇ만을 하다가 다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외에는 한 사람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는 인간의 배신을 고발하는 증거품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해결만 해주신다면 나는 절대로 하나님을 떠나지 않을 것’ 이라는 생각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인간이 내세우는 핑계입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자발적으로 하나님 편에 속하려는 본성이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죄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나는 법궤 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만나는 만나고 법궤는 법궤다’ 가 아닙니다. 먹을 것만 해결해 주면... 하는 그들, 먹을 것을 해결해 주었는데도 하나님을 떠난 그들을 통하여... 인간의 만나는 법궤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배웁니다.  십계명의 두 돌판과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만나는 인간이 어떠한 존재들인가를 고발하는 증거로서, 인간은 죄인이라는 증거로서 법궤안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 법궤위에는 그룹들이 날개를 펴고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밑을 보고 있습니다. 법궤, 즉 인간의 죄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 법궤 위에 구약에서는 짐승의 피가,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흘린 피가 뿌려집니다. 그러면 법궤 안에 있는 것은 어떻게 됩니까? 열어 볼 것도 없습니다. 법궤 위로 피가 뿌려지고 부어지니... 속에 있는 것은 다 피에 잠기게 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에 대한 피의 대가를 치르신 것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흘려야 하는 피였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가 시행되는 속죄소이며, 동시에 시은좌입니다.
 
기독교에 대해서 분명히 이야기할 것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떡을 주기 위한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를 믿으면 모든 것이 잘 되어 밤이고 낮이고 할렐루야 찬송을 부르는 이상한 감정과 감격 속에 있는 종교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또 기독교는 도를 깨우치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무었을 스스로 깨닫는 것이 아니라, 해도 해도 스스로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마침내 주님께 항복하는 종교입니다. 성경이 거듭 강조하고 있는 것은 '너희는 죄인이다. 빛이 왔으나 빛이 빛인 줄을 모르고, 빛을 증거 하러온 사람도 죽였고 빛도 죽인 자이며, 너희는 장님이며 하나님에 대하여 관심도 감각도 없는 자'  하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신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죄값을 치르시는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으므로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는 죄악 중에 있으면서도 죄가 무엇인지 그 결과가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아무 감각없이 그저 먹고 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오셔서 법궤 위에 속죄소를 놓고 그 위에 피를 흘려 감싸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우리가 옛날에는 어떤 자들이었으며 무었을 하던 자들이었는가를 돌이키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회개케 하시고 헌신케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 앞에 나의 마음을 드리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피가 언약궤위에 뿌려지고 부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감격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이 시간 우리의 마음에도 예수님의 피가 뿌려지고 부어졌습니다. 이제 저와 여러분은 이 예수님의 피를 우리의 가족과 이웃들, 다른 사람들에게 뿌리고 붓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속죄(贖罪)와 시은(施恩)의 이 감격을 많은 사람들과 나누는 삶을 사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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