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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 부활 나의 부활 (고전 15;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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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부활 나의 부활’.com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15;21-22)

오늘은 ‘고전15;21-22’절 말씀을 통해서 ‘예수부활 나의 부활’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선포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에 성령의 기름 부으심과 감동이 넘쳐나기를 소원합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복음(福音)이란 ‘복 있는 소리’입니다. 뭐가 복 있는 소리인가요?  바울은 고린도 교인에게 그들이 받은 복음을 요약하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고전 15;3-4)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입니다. 

** 복음의 첫 단계는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대속(代대신 할 대, 贖속바칠 속)의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 복음의 두 번째 단계는 그리스도가 장사(葬事)지낸바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분명히 죽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무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기절이나, 가사상태를 말합니다. 죽지 않았고, 장사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장을 해야 부활이 없어집니다.  

** 복음의 세 번째 단계는 그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죽음에서 살아나신 부활의 그리스도가 복음의 세 번째 핵심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첫 번째만을 복음이라고 전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만을 전도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반쪽 복음입니다. 대속((代贖)과 장사(葬事)와 부활(復活), 이 세가지 사실은 하나라도 뺄 수 없으며, 빠지면 안 되는 무너질 수 없는 기독교의 핵심이요, 근거이며,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영접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특별히 바울은 부활의 많은 증인들이 있으며, 자기도 ‘부활의 증인’ 으로 주의 사도가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전15;6-8)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7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할렐루야!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2000년 전에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죽으신 분이 아니라 지금 이 시간에도 살아 계셔서 우리의 찬양과 영광을 받으시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도 가능한 것입니다. 죽어서 끝나버린 예수님이 아니라 죽음을 이기고 당당하게 부활하신 살아 계신 예수님을 우리 다 같이 찬양합시다. 

만약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의 일생이 끝났다면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슬픔의 종교요, 무덤으로 끝나야만 하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사흘 만에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시므로 기독교가 생명의 종교요, 구원의 종교임을 증명해 보여 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반드시 부활신앙으로 무장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부활의 신앙은 첫째로, 예수님의 부활이 잠자는 자들(=예수 안에 죽은 성도들)의 첫 열매가 된다고 하십니다. 

두 번째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도의 부활을 보증한다고 하십니다. 
셋째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도의 삶에 변화를 주신다고 하십니다.
 
이제 오늘 본문을 통해 주시는 말씀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부활이 잠자는 자들(=예수 안에 죽은 성도들)의 첫 열매가 된다고 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을 확실하게 믿는 것이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얼마나 영향을 끼치는지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해마다 부활절을 맞이합니다. 각 교회마다 부활절 예배도 드리고 거창한 행사도 치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거창한 행사를 치루면서도 예수님처럼 ‘나 자신도 부활할 것’ 이라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은 부활 신앙이 견고해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이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보시길 바랍니다. 확실한 부활의 신앙을 갖고 사는 성도가 얼마나 있는가요? 부활 신앙을 가지고 사는지 아닌지는 그들의 삶의 방식과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復活 信仰의 반대는 現世 信仰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 물질 중심의 신앙에만 머물러 잘 사는 것, 여기서 즐겁게 사는 것에만 초점 맞춥니다.  그러나 부활 신앙을 가진 성도는 永遠한 世界, 천국(天國)을 바라보며 하늘 중심으로 소망중심으로  살게 됩니다.
 
성도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은 정말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잠자는 자들(=예수 안에 죽은 성도들)의 첫 열매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20절).  

첫 열매가 되신다는 것은 계속 이어지는 열매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 계속 이어지는 열매는 바로 ‘나의 부활’ 을 말합니다.  

(21-22절)을 보십시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죽음이 사람(=아담)으로 말미암았습니다. 아담은 사망의 첫 열매입니다. 아담 이후로 모든 사람이 죽습니다. 그러니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아야 마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 보좌에서 내려오셔서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의 죄를 위해서는 반드시 인간이 그 죄 값을 담당해야 합니다. 

“네 눈이 긍휼히 여기지 말라 생명에는 생명으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손에는 손으로, 발에는 발로이니라” (신19:21)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부활도 사람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되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죽음을 두려워하며 일생동안 종노릇하는 인간들을 사망에서 해방하기 위하여,  마귀가 가지고 있는 사망의 권세를 빼앗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마귀가 가지고 있는 무기는 사망(死亡)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우주 만물을 만드시고 아담과 하와에게 모든 것을 다스리며 살도록 맡겨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사탄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기를 선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생명입니다. 하나님이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할 때는 생명에서 끊어집니다. 그것이 사망입니다. 사망은 소멸이 아니라 생명이신 하나님과 끊어지는 것입니다. 천국은 하나님과 영원히 같이 사는 것이요, 지옥은 하나님이 없이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망, 곧 죽음이란 인간이 죄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표시이며, 그 죽음을 주장하는 것은 사탄입니다. 성도여러분, 불순종을 통해서 사망이 이 세상에 들어 왔습니다. 불순종을 통해서 사망이 모든 사람들을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인간이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죽음을 이길 수 없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정해진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내주는 엄청난 값을 지불하고 우리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이 사건이 예수님의 십자가요, 부활입니다. 좋으신 우리 예수님은 이 사망의 권세를 파괴시키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예수님이 오시는 길을 막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막았던 것입니다. 구약 시대 때는 메시아가 오실 길을 끊고자 이런 저런 수단을 다 썼습니다. 다윗의 혈통을 타고 온다는 것을 알고 ‘아하시야’ 라 왕의 모친인 ‘아달랴’ 라는 반역자를 사용하여 다윗의 혈통을 전멸시키고자 시도하였습니다. 

사울을 사용하여 다윗을 죽이려고 시도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나시자마자 헤롯왕을 사용하여 아기 예수님을 죽이고자 시도했습니다. 수많은 어린아이들을 대량 학살하므로 메시야를 죽이려 했습니다. 또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서기관들을 동원하여 예수님을 낭떠러지에 떨어 뜨려 죽이려고 기회를 노렸지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마지막에는 예수님의 제자인 가룟 유다를 사용하여 십자가에 못박는 일에 성공했습니다. 십자가에서 로마 군병들을 사용하여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자 마귀는 승리한 줄 알고 성대한 파티를 열었을 것입니다. 이제 영원토록 사망의 권세를 가지고 모든 인류를 지옥으로 끌고 가 괴롭히며 왕 노릇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마 2일 동안 마귀는 최고의 기쁨과 승리의 쾌감을 누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승리를 거둔 줄 알고 좋아 했는데 죽은 지 3일 만에 무덤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는 그 순간부터 마귀가 가지고 있던 사망(死亡)의 권세(權勢)는 소용이 없게 된 것입니다. 사탄이 가지고 있던 사망의 권세가 이제는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된 것입니다. 

사망이란 죽은 자가 살아나지 못할 때 권세가 있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난다면 사망의 권세가 무슨 소용이 있나요? 마귀가 가지고 있던 사망 권세가 이제 가짜라는 것이 판정 난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독교에서는 부활이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부활이 없다면 죽은 시체와 같은 것입니다.    

한 때 석가모니의 뼈가 발견되었다고 인도를 위시한 불교 국가에서는 한동안 떠들썩 했습니다. 석가모니의 이 유명한 뼈들은 잘 진열되어 수백 만 인도 사람들의 경의 속에 시가행진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뼈 앞에 머리 숙여 절했습니다. 

그것을 지켜보던 한 선교사가 "만약 저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뼈 하나라도 발견할 수 있었다면 기독교는 가짜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기독교는 죽은 자를 믿는 종교가 아닙니다. 죽음을 이기고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또한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을 믿는 종교가 아니라 영원히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번 부활절을 맞이하여 마귀가 가지고 있던 사망의 권세를 제거하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예수님을 감사하는 부활절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도의 부활을 보증합니다.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으면 성도의 신앙은 헛것이 됩니다. 예수님이 전에는 부활이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도 부활한 적이 없습니다. 물론 구약에서는 죽은 사람이 다시 사는 것이 몇 번 있습니다. 신약에서도 나인성 과부의 아들, 나사로, 12살된 소녀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지금까지 살아있나요? 다시 다 죽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은 다시 죽음이 없는 영원한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영원한 부활을 보증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이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부활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제자 도마는 (요20;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예수님의 손바닥과 허리에 나있는 창 자국에 자기의 손가락을 찔러 확인해 보기 전에는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 정상입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자들이 전해 주었던 부활의 소식을 듣고도 믿지 못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죽으시자 허탈한 마음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고는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이었습니다. 그들은 가면서 서로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 일이 무슨 일인가요? (눅24;22-24)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23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24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을 듣고도 엠마오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소식을 전해 주었지만 말도 안 되는 허황된 이야기라서 믿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어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정도로 부활이란 인간들에게 처음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믿음은 거짓이 됩니다. 우리의 미래도 무덤에서 끝나고 말 것입니다.  로마 병정들은 사형을 시키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판정하는데 실수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죄수 하나를 도망치게 하면 자기의 목숨을 대신 내어 놓아야 하는 법’ 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죽은 것을 확인한 후에도 다리를 꺾어 재차 죽음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미 죽은 것을 확인하고 다리를 꺾는 대신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 피와 물을 다 쏟도록 했던 것입니다.  물과 피를 다 쏟은 예수님은 분명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죽은지 삼일 만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우리의 믿음은 생명의 주이신 예수님께 접붙임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이기에 우리가 예수님께 붙어 있으면 그의 생명이 우리에게 넘쳐흐릅니다. 

예수님은 살아나셔서 제자들에게 보이셨습니다. 베드로와 그리고 사도 바울에게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한번에 500명의 성도들 앞에서도 나타내 보여 주셨습니다. 그분은 살아나셔서 곧장 하늘나라로 가신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했다면 부활 하신 것을 의심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 하신 후 40일 동안 지상에 계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함께 계시다가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외칩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벧전1:3).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산 소망을 줍니다. 죽은 소망이 아닙니다. 여러분 모두 이 부활의 산 소망을 갖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도의 삶에 변화를 줍니다.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우리가 가장 불쌍한 자” 라고 했습니다. 왜 가장 불쌍한 사람일까요?  없는 천국을 있다고 믿으니 속고 있는 것이요, 없는 천국 때문에 이 세상에서도 즐겁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인생이게 됩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삶을 산다 해도 소망이 있는 사람은 소망 때문에 살아 갈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아니 인간은 좋은 환경이라도 소망이 없는 사람은 스스로 죽어 갑니다.  주님을 믿는 것이 삶의 원동력이 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사랑하는 그 분과 영원히 살 소망을 품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성도는 부활의 소망이 삶의 원동력입니다.  

1967년 6월 30일 열일곱 살의 ‘조니 에릭슨’은 다이빙을 하다 사고를 당했습니다. 목 아래부터 전신이 마비된 그녀는 고통, 좌절, 원망, 분노, 자살하고 싶은 충동까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감정에 휩싸였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재활 훈련 및 치료를 통해, 그리고 부모 형제와 친구들의 후원을 통해 점차 깊은 블랙홀에서 빠져 나왔습니다. 

그녀는 입으로 그림을 그리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후원하는 모임도 만들었습니다. 그녀의 변화의 중심에는 성경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기처럼 ‘움직이지 못하고 무력하며 마비된 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 대한 환상을 보면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녀에게 가장 큰 도움을 준 것은 부활이었습니다. 

“나는 이제 미래에 대한 소망이 있다. 성경은 우리의 몸이 하늘에서 ‘영화롭게’된다고 말한다. 그때는 내가 내 발로 춤을 출 것이다. 비록 지금 내 손가락은 오그라들어 구부러지고, 근육은 쇠약해지고, 무릎은 비틀리고, 어깨 아래로는 아무런 감각이 없지만, 내가 언젠가는 가볍고 밝으며 강력하고 눈부신 의로 옷 입은 새로운 몸을 가지게 될 것이다.” 

어떤 종교나 철학이 이처럼 척추를 다치고, 뇌가 손상되어 우울증이 걸리고 아무런 소망이 없는 사람에게 이런 소망을 줄 수 있습니까? 세상에 다른 어떤 것도 새로운 몸과 새로운 미래를 약속하지 못합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부활의 복음 안에서만, 소망이 없는 사람이 놀라운 소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나라가 OECD 국가 중에서 이혼(離婚) 1위입니다. 음란(淫음란할 음, 亂어지러울 난)이 세계최고라는 말과 비슷합니다. 자살도 1,2등을 놓치지 않습니다. 당연히 청소년 범죄도 세계최고를 달립니다.  

그런데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는 우리나라에 교파별로 다 있습니다. 국민의 1/5이 기독교인이라고 합니다. 국회의원의 1/2이 기독교인입니다. 이런 나라가 왜 이렇게 타락하고 음란하고 부패할까요? 부활신앙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신앙속에 천국이 없습니다. 기복신앙(祈福信仰), 구복신앙(求福信仰)이 신앙의 주된 모습이라고 합니다.  모두 다 현실에서 부자로 살기만을 원합니다.  부활신앙이 있다면 영원한 천국에서의 상급에 마음을 집중할 것입니다. 거룩한 삶, 경건한 삶을 살려고 애쓸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술을 마실까요? 마십니다. 예수님께서 담배를 피실까요? 피십니다. 예수님께서 음란한 동영상을 보거나 실제로 음란한 행동을 하실까요? 하십니다.  

(계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하셨습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내 속으로 영접해 모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내 안에, 나와 함께 계십니다. 

(고전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하십니다. 그러니 예수 믿는 내가 술을 마실 때, 예수님도 같이 술을 마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신 내가 담배를 핀다는 것은 예수님이 담배를 피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모신 내가 음란한 동영상을 빠꼼히 들여다 볼 때 예수님도 같이 내 눈을 통해 음란한 동영상을 보십니다. 성령님의 전(殿)인 내가 몸으로 음란한 행동을 할 때 예수님도 같이 음란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나와 예수님은 둘이 아닙니다. 하나입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입니다.  지금도 살아계신 예수님이 나와 함께, 내 안에서 영원히 같이 계시는 것이 부활신앙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부활의 신앙은 

첫째로, 예수님의 부활이 잠자는 자들(=예수 안에 죽은 성도들)의 첫 열매가 된다고 하십니다. 
두 번째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도의 부활을 보증한다고 하십니다. 
셋째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도의 삶에 변화를 주신다고 하십니다.
 
이번 부활절을 맞이하여 여러분들 모두가 부활의 의미를 확인하며 부활하사 지금도 살아계신 예수님과 항상 동행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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