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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급진적인 복음의 삶을 사는가? (롬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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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적인 복음의 삶을 사는가? (롬 1:8-17)


급진적 본질을 생각한다!

이번 주에 [거룩이 능력이다]라는 게리 토마스가 쓴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 책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프란시스야, 네가 육신 안에서 사랑하던 모든 것을 이제부터는 멸시해야 하고, 전에 혐오하던 것들에서 깊은 아름다움과 한없는 기쁨을 들이마셔야 한다.”

로마서는 특히 기독교의 핵심 진리에 대하여 논리적으로 잘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아마도 자신이 갈 수 없었지만,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 대한 사도 바울의 마음이 잘 묻어납니다. 아마도 로마서를 보면 우리의 신앙이 얼마나 본질에서 벗어났는가를 잘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데이비드 플랫이 쓴 [래디컬]이라는 책에 보면 ‘radical’이라는 단어를 이렇게 해석합니다. 아주 ‘급진적인’이라는 뜻으로 말입니다. 즉, 우리가 복음을 이해하게 된다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급진적인 일임을 깨닫게 될 것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아니, 오늘날의 교회가 얼마나 본질에서 벗어나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는 현재 미국에서 잘 나가는 목회자 중의 하나입니다. 전형적인 미국의 대형교회 목회자로 가장 어린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에게 관심을 두는 것은, ‘얼마나 모이는 목회를 할 것이며, 어떤 교회를 지을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아마도 세상이 목회를 그렇게 판단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느 날 방문했던 아시아의 지하 교회에서 정말 충격적인 경험을 합니다. 아무 시설도 없는 열악한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모인 교인들의 열정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4장 26절 말씀,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는 아주 충격적인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평생을 목회했지만, 결국은 모두 떠나갔고, 십자가에 달리실 때는 12명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젊은 나이에 대형교회를 맡은 그에게 아주 근본적인 목회를 생각하게 하죠.

예수님은 세계에서 제일 작은 교회의 리더였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고 말씀하셨고, 십자가를 져야 하는 상황이 올 때마다 사람들은 하나둘씩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복음이 전파되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로마교회는 래디컬한 교회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찰스 스윈돌의 [로마서 주석]에 보면, 당시 로마에서 약 100만가량의 사람들이 있었고, 그중에 반 정도는 노예였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당시 로마의 사회적 불안함은 언제 폭동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이었고, 당시 로마의 정책에 의해 같은 민족끼리 모여 살면서 불안한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런 사회 질서와 사회가 제공하는 안전에 도전하는 것이요, 유대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모두에게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종종 가족이나 친족을 잃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누구에게나 고달픈 삶이었지만, 그런 환경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더더욱 고달픈 삶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 교회가 본질적인 교회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지, 정말 조금의 안락함도 포기하거나, 조금의 손해도 보려고 하지 않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이 된다.”라는 치열함이 이해될 수 있는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로마서를 이해한다는 것은 아주 도전적입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1장 8절은 그런 치열함 가운데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구절입니다.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사도 바울이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이라는 감사는 일상적인 인사의 차원이 아니라 생명을 내걸고 신앙 생활하는 로마 교인들에 대한 감탄과 찬사이기도 하며, 그 시간을 견뎌내야 하는 교인들을 향한 위로의 말이기도 합니다. 그 어려움 가운데서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복음이 전파됨으로 교회가 부흥하고, 그 부흥으로 누릴 기득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으로 그들의 삶이 더욱 곤고해 지고, 복음이 세상에 알려짐으로 그들의 생명이 위협을 받을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복음을 지키고, 전하는 로마 교인들을 향한 목회자의 마음이 드러납니다. 

9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사도 바울의 마음으로 이 말씀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기도할 때마다 로마의 교인들을 위해 쉬지 않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에 대하여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그 교인들을 위해 기도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래디컬한 신앙 공동체를 보면 기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는 것이죠.

우리가 흔히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신다!”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어떤 신앙생활을 하느냐? 본질적으로 충실하냐를 물어야 할 것 같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할 수 없는 공동체가 교회는 아닌가?
우리가 물어야 하는 것, 복음의 본질 가운데,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쉬지 않고 간구해야 하는 급진적 신앙생활을 하는가?
우리가 잘 아는 사건,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칼을 들었을 때, 급하게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부르시면서 그의 손을 멈추게 하시는 긴박함이 있는가?

사도 바울 자신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감옥에 있다는 사실, 그가 예수님을 믿기로 했을 때,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배설물을 여겨야 했던 “급진성” 그리고 로마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그들 인생에서 얼마나 급진적인 결정이었는가를 생각할 때, 사도 바울의 마음이 절절하게 묻어납니다.

본문 10-12절입니다.
“10.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11.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12.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로마 교인들에게 다가가 그들을 위로하고 싶은 마음, 그들에게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줌으로, 어려움 가운데서도 견고하게 만들기를 원하는 마음, 그리고 그 만남을 통해 피차 ‘안위함’을 얻었으면 좋겠다는 마음.

급진적 복음을 살아가는 믿음의 공동체가 느끼는 신앙의 감정이 아니었을까요? 이것은 급진적인 신앙의 삶을 사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마음이 아닐까요? 
여러분이 지금 이 땅 위에 급진적 복음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하여 무감각하다면 분명히 뭔가 잘못된 것이죠.

제가 믿기로, 복음의 특징은 급진적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이 들어가면 틀림없이 사람들을 급진적으로 만들어 버리고 맙니다. 이것을 경험한 자들이 은혜를 입은 자입니다. 
마리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을 때, 그의 삶이 얼마나 급진적이 되었습니까?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가진 것을 감수하겠다는 것입니다.


빚진 자의 심정으로

사도 바울이 끝까지 위대한 사도로 살 수 있게 했던 것은 바로 빚진 자의 심정이 아니었을까요? 위대한 사도로 사도 바울이 살았다는 것은, 그가 위대한 사도가 되어서 누릴 수 있었던 기득권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가 사도가 되었을 때, 가졌던 마음을 끝까지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가 변하지 않고 사명에 충실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빚진 자의 심정에서 나오는 것이 ‘성실성’인 것 같습니다. 빚을 다 갚았다면 나태해질 텐데, 빚을 다 갚고 이익이 이만큼 남았으니 내가 누려야 하겠다고 생각했다면, 그가 오늘 감옥에서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게 이런 편지를 쓸 수 있었을까요?

본문 14-15절입니다. 
“14.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빚’에 대하여 조금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도대체 누구에게 빚을 졌다는 것인가요?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은 사도 바울이 왜.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빚진 자라고 생각을 했을까요?
참 오랜 시간 이 부분에 대하여 묵상하게 하네요.
그런데 여기에 기독교의 본질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아마도 복음의 능력, 복음의 사랑이 흘러서 넘쳐 내려가는 것을 상상하게 됩니다.

그냥 우리 가정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금은 4남매가 다 성장했지만, 자라던 시절을 생각해보면 참 우애 있는 가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니, 제가 형과 누나에게 받은 사랑이 참 큽니다. 

제가 기억하는 초등학교 시절 형은 참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7살이나 차이가 나는 동생을 참 잘 돌봐줬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귀찮았을 것 같은데 잘 데리고 다녔습니다. 
조금 지나쳐서 고3때 당구장에 데려가서 저를 중독시키기도 했고, 초등학교 때부터 형 때문에 무협지에 심취하기도 했지요. 고3때는 형이 직장을 다닐 때였는데, 가는 길에 저를 학교까지 데려다 줬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시카고에 유학을 가게 된 계기는 딱 하나, 그곳에 형이 있었습니다. 형은 한국으로 돌아오고 자리 잡기에 쉽지 않았을 텐데, 저에게 카드를 주면서 집값을 내라고 했던 기억도 잊지 못합니다. 
형은 늘 형입니다. 지금도 식사하러 가면 형이 꼭 돈을 내지요.

또한, 저에게는 참 좋은 누나가 있습니다. 유학시절 미국에 살던 누나는 동생이지만, 목사라고 지극정성으로 잘 해줬습니다. 늘 김치를 담아줬고, 음식을 해주고 그랬죠. 누나에 대한 기억은 음식에 대한 기억이 제일 많은 것 같습니다.

형이 결혼을 하고 아들을 낳았습니다. 저하고 차이가 참 많이 나는 조카를 잘 데리고 다녔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형이 고3 때 저에게 해 줬던 친절로 5살 아래 동생에게 저도 잘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빚’은 형에게 졌는데, 그 빚을 조카에게 제 동생에게 갚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희 누나가 볼리비아 선교사로 간 후에 제가 도울 수 있는 것은, 조카들을 돕고 매형의 사역을 돕는 일입니다. 제 여동생 부부는 아이가 없습니다.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유산을 우리 아이들에게 남겨 준다고 합니다.

그냥 사도 바울의 마음을 그렇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님께 빚진 것을 갚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무엇으로 주님을 만족시켜드릴 수 있을까?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으신 주님에게 무엇으로 대신할 수 있을까?
아마도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그런데 그 사랑을 모르는 사람에게 내가 받은 은혜를 나누고 그들도 주님의 사랑을 알았으면 하는 것. 

거기에는 어떤 대상도 고려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려고 했던 자신을 피 값을 주고 사신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민족, 인종, 있고, 없고, 그 어떤 것도 제한적일 수 없죠. 그것이 사도 바울의 마음이었을 것 같습니다. 
본문 15절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그 빚을 갚기 위해 사도 바울은 늘 자신에게 다짐했던 것 같습니다. 그 사랑을 잊지 않기 위해서 몸부림쳤던 것 같습니다. 아니 사도 바울에게서 구원받은 감격도 있지만, 그에게 삶에 가시가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빚을 갚으려고 해도 값을 자격이 없는 자신을 늘 기억하게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빚을 갚다가 억울한 일을 당해도, 사람들에게 매를 맞아도 또 그렇게 살아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마치 빚을 갚는 인생은 매일매일 주어진 삶에 조각조각을 맞추며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사는 것 같습니다.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얼마 전에 읽은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로 “29,220 피스의 퍼즐”이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나는 인생을 스포츠보다는 모자이크 퍼즐에 비유하기를 좋아한다. 큰 ‘한 방’이 아니라 작은 ‘하나하나’가 쌓여야 하는, 대략 29,220 피스를 맞춰야 하는 커다란 퍼즐 말이다. 요즘 평균수명이 80세쯤 되니까, 365 곱하기 80은 29,200이고, 여기에 2월 29일을 20번 더해서 나온 숫자다.

많은 사람이 빨리 성공하고 싶어 한다. 젊은 나이에 빨리 출세하는 것이 예로부터 최고의 소원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얼마나 빨리 가는가를 점검하기 위해 자꾸만 시계를 본다.
하지만 시계보다 필요한 것은 나침반이다. 삶의 성공이란 퍼즐의 마지막 피스를 채웠을 때 판가름나는 것이다. 

인생의 성공이란 커다란 한 번의 성취가 아니라, 매일매일의 작은 승부로 직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획기적인 승부처, 전환점만을 기다리면서 하루하루를 낭비해서는 안 된다. 무능한 사람일수록 ‘이것만 되면, 이때만 오면.’이라는 가정을 자주 한다. 
그 시간의 빈틈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인생은 조금씩, 조금씩 달라진다. 기간은 영혼을 만드는 유일한 재료라고 했다.

인생에서 가장 하기 어려운 결심 중의 하나라는 담배 끊기도 마찬가지다. ‘1월 1일부터는 꼭 끊겠다.’라는 식으로 결의하는 사람은 대개 실패한다. 그것은 1월 1일에 끊겠다는 약속이 아니라, 12월 31일까지는 피워도 괜찮다는 자기 위안이기 때문이다. 대신 ‘딱 오늘 하루만이라도 담배를 참자!’라고 시작하는 사람들이 성공한다.

가장 위대한 인생은 하루하루의 퍼즐을 가장 성실하게 맞춰가는 사람이 아닐까요? 늘 오늘에 대한 책임을 지고, 결단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결단과 책임이라는 말 앞에서 누가 자신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기준이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17절을 보세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복음에는”이라는 말은 “in the Gospel”이라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므로 복음 안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납니다. 
책임 있는 삶이란 적어도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제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가? 라는 정의가 또 필요합니다. 

영어 성경 “New International Version'에 보면 “a righteousness that is by faith from first to last. . .The righteous will live by faith”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에 의해서만 하나님의 의가 드러납니다. 믿음은 씨를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 씨는 반드시 믿음의 결과로 나타납니다. 성경은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산다!”라고 합니다. 믿음은 의롭게 사는 표준이 되는 것뿐 아니라 우리를 살리는 것입니다.

지난 변화산 기도회에서 제가 이런 제목으로 말씀을 전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믿음을 보이라!”
믿음을 증명하는 것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가 가장 책임있는 결단을 하고, 그 결단의 결과로서 ‘의’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어떤 누구도 자신의 삶에 대하여, 그 결과에 대하여 핑계할 수 없습니다. 
흔히 우리의 삶에서 “나는 억울하다!”라고 생각하지만, 다 우리 인생의 결과일 뿐입니다. 믿음으로 뿌리면 믿음의 열매를 맺습니다. 
주차위반 딱지가 억울해도, 아무리 잠깐 불법 주차를 해도 결과일 뿐입니다. 아무리 우겨도 내가 뿌린 씨가 나타납니다.

지난해부터 변화산을 아침과 저녁 두 번으로 나누어 하면서 육신적으로 힘든 것도 문제지만, 똑같은 상황에서 다른 회중에게 설교를 하는데, 무슨 말을 했는지 모호한 상황이 있었습니다. 

새벽에는 믿음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어떤 엄마가 아이를 맞으러 차를 타고 유치원에 가는 길에, 잠시 불법 주차를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주차위반’ 스티커를 받았습니다. 화가 나서 딱지를 뒤에 던져 놓았습니다. 아이가 차에 타서 하는 말이 ‘엄마! 나는 희망 반인데, 엄마는 주차위반이네.’라는 이야기를 했죠.”
문제는 나는 새벽에 하고 저녁에 했다는 것이고, 예배시간마다 헌금 기도제목을 읽으며 나누는 시간이 있는데, 저는 분명히 읽은 것 같은데 안 읽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길 필요가 없습니다. 
“목사님 영상으로 틀어보면 다 나옵니다!”

그렇습니다.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서 다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믿음으로 한 행동인지 아닌지가 분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이 있다면,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도전이 무엇인가요? 
그렇습니다. 급진적인 믿음은 열매로, 결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김병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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