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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화목제와 속죄제 (레 3: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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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목제와 속죄제 (레 3:1-4:35)


우리나라 사람은 온갖 미신적 제사에 매우 익숙하고 특히 죽은 조상에게 올리는 제사를 아주 중요시 여기는 민족입니다.
그런 까닭에 기독교인이 되면 불신 가족들과 부딪히는 대표적인 문제가 바로 제사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자는 죽은 조상 앞에 제사를 드려서는 안 된다.'라는 기독교 신앙은 '자식으로서 돌아가신 부모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기리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뭐가 나쁘냐?'라고 주장하는 유교적 전통과 첨예하게 대립되기 마련인 것입니다.
  
물론 '부모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 자체야 조금도 잘못된 일일 수가 없고 오히려 당연한 자세일 뿐입니다.
하지만 돌아가신 부모에 대한 감사를 왜 제사라는 형식을 통해서 표현해야 합니까?
아무리 맛있는 음식들을 제사상에 가득 차려 놓는다 해도 돌아가신 부모는 그것을 단 한 입도 먹을 수 없고 그 대신에 그 부모에 대하여 감사를 드린다는 자식들만 몽땅 다 먹습니다.
그러니 설혹 죽은 사람이 귀신이 되어서 그 자리에 온다손 치더라도 그저 입맛만 다시고 침만 흘릴 수 있을 뿐이니 사실상 그 '죽은 부모의 혼령'이라는 것을 약만 올리는 일이 될 뿐이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그 모든 것은 다 허례허식일 뿐이며 '제보다 젯밥'이라는 말까지 생길 수밖에 없으며, 얼마 전에는 그 제사상 차리는 비용 문제로 남편과 갈등을 겪어 오던 끝에 자살을 한 아내마저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제사'라는 것은 바로 제사를 드리는 그 시간 그 자리에서 그것을 '받는 신'과 '올리는 사람' 사이에 어떤 구체적인 '교통'이 일어나야만 의미가 있습니다.
우선 돌아가신 부모는 어디까지나 사람이지 신이 아닙니다.
또한 제사상을 차려 놓았다고 해서 그 자리에 부모의 영혼이 찾아올 수 있는 것도 결코 아닙니다.
그러니 부모가 그 자리에 귀신으로 찾아올 것이라고 믿고 제사상을 차리는 행위는 결코 '효성'이 아니라 오로지 '우상숭배 행위'에 불과한 것입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께만 '제사'를 드릴 수 있고 또한 드려야만 한다고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제사를 받으실 수 있는 '참 신'이시며 또한 하나님만이 당신께 제사를 올리는 자리에 실제로 '임재'하시며 그 제사를 드리는 사람과 '교통'해 주시는 살아 계신 신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레위기의 서두에 나오는 구약의 4대 제사들 가운데서 '화목제'와 '속죄제'를 통하여 우리 기독신자들이 어떠한 마음자세로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올려 드려야 하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기독신자는 예배를 통하여 사람과의 교제가 아니라 먼저 '하나님과 교통하는 화목제'를 드려야 합니다.

레위기 3장 1절부터 5절에 "1사람이 만일 화목제의 희생을 예물로 드리되 소로 드리려거든 수컷이나 암컷이나 흠 없는 것으로 여호와 앞에 드릴지니 2그 예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회막문에서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제단 사면에 뿌릴 것이며 3그는 또 그 화목제의 희생 중에서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곧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4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근방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취할 것이요 5아론의 자손은 그것을 단 윗 불 위에 있는 나무 위 번제물 위에 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고 기록했습니다.

"화목제"(peace-offering)의 '화목'이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평화, 온전함'의 뜻을 가진 '샬롬'에서 파생된 '셀렘'이라는 단어로서 '구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화목제'라고 하면 언뜻 '사람 사이의 화목'이라는 개념부터 떠오르기 쉽지만, 실제로 이 제사를 드리는 근본적인 의미는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총에 대한 감사'(삼하 6:17)나 혹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풀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삿 20:26)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화목제'는 '구원제'라고 번역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 화목제에 사용되는 제물은 "수컷이나 암컷이나" 구별 없이 "흠 없는 것"이기만 하면 되었으며, 짐승의 종류도 "소"(1절)나 "양"(6절) 혹은 "염소"(12절) 중에서 무엇이든지 제사 드리는 사람이 원하는 대로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단지 화목제를 드리는 경우에 따라 그 이름은 세 가지로 세분되었는데, 
구원과 축복에 대하여 감사함으로 드리는 '감사제'와 서원의 예물로 드리는 '서원제', 그리고 자원함으로 드리는 '낙헌제'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체적 의미는 역시 화목제라는 이름 그대로 이스라엘 백성 중 누구든지 '하나님과의 교제를 기뻐하는 마음'으로 언제든지 드릴 수 있는 자발적인 제사였던 것이었습니다.

이 화목제의 대표적인 특징은 이 제사를 일단 하나님께 드린 후에 그 제물 중의 일부를 그 화목제를 올린 사람들이 나누어 먹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3절과 4절에도 보면 화목제를 드릴 때 그 희생제물의 부위에서 하나님께 먼저 바쳐야 할 부분들이 정확하게 지시되어 있습니다.
"내장에 덮인 기름, 내장에 붙은 기름,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간에 덮인 꺼풀" 등 그 부위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소'뿐 아니라 '양'과 '염소'의 경우에도 역시 9절과 10절 그리고 14절과 15절을 통하여 똑같이 적용되고 있습니다.
대충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여기서 하나님께 바치게 되어 있는 부위는 그 제물의 육질 부분은 다 제외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화목제로 드릴 때 실제로 하나님께 화제(火祭)로 바쳐지는 부위는 별로 사람의 식용이 못 되는 부분들이고, 실제로 먹기 좋은 부위는 모두 다 화목제를 드린 사람들이 가족이나 친지들과 나누어 먹을 수 있도록 남겨 두게 해 주셨습니다.
이 화목제는 무교절과 맥추절과 장막절 등 삼대 절기 때 주로 드려졌는데, 그래서 이때에는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화목제를 먼저 하나님께 올린 후에 바로 그 남은 것을 서로 나누어서 먹으면서 잔치를 했습니다.
즉 화목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평을 누리는 데에도 한몫을 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결코 혼동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그 '화목제'라는 이름이 강조하는 화목의 '우선적인 의미'는 결코 사람끼리의 화목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목'이라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일단 하나님과의 화목이 먼저 성립되어야 그 다음에 다른 사람끼리의 화목 역시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화목제를 드리는 방법 자체가 이 사실을 아주 명백하게 강조하고 있지 않습니까?
  
화목제는 사람끼리 먼저 나누어 먹은 후에 남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드린 제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하나님께 먼저 드린 후에 그 남은 것을 가지고 사람들끼리 나누어 먹을 수 있는 제사였습니다.
비록 먹을 수 있는 고기의 양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많이 할애해 주셨지만, 순서는 어디까지나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먼저였습니다.
그래서 본문 3장에서도 화목제를 드리는 방법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오직 '하나님께 바치는 부분'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만 자세하게 설명을 하고 있으며, 그 나머지를 사람들끼리 나누어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나중에 7장에 가서 부차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화목제의 규례는 우리 기독신자들이 예배를 통하여 항상 최우선적으로 나타내야 할 마음자세가 무엇인지를 뚜렷하게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교통을 진심으로, 인격적으로 기뻐할 줄 아는 마음'입니다.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을 창조주께서 이처럼 친구처럼 사귀어 주신다는 사실은 얼마나 고맙고도 황공무지한 일입니까?
배은망덕한 탕자로 전락했던 나를 하늘 아버지께서는 여전히 기다려 주고 계시며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던 나를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두 팔을 벌리고 반갑게 맞아 주시니 이 얼마나 지고한 사랑입니까?

바로 이것이 예배를 통하여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감격이요 기쁨이요 은혜입니다.
죄인인 사람과 거룩하신 하나님 사이에 필연적으로 있을 수밖에 없는 장벽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깨어짐으로써 비로소 사람이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으며 이것이 바로 '화목제'의 본질이요 극치인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먼저 화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만 그런 성도들 사이에서도 또한 진정한 형제사랑을 통한 화목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순서가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오늘날 너무나 많은 가짜 목사들과 어리석은 기독교인들이 이 첫 번째 화목은 건너뛰어 버리고 막바로 두 번째 화목으로 갑니다.
무슨 '사해동포주의'라든지 '인간관계에서의 용서와 화평'이 기독교의 제일의 덕목이요 가치라고 착각하면서 그것을 '화목의 복음'이니 하는 미명으로 설교하고 믿는 사람들이 수두룩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소위 그 '화목의 복음'을 가지고 북한의 독재자와도 화목해야 한다고 실제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지금도 하나님의 교회와 그 백성을 핍박하고 죽이는 자들과 화목하게 교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거룩한 복음'을 '개에게 주며' '진주와 같은 복음'을 '돼지 앞에 던지는' 작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당신을 제쳐놓고 자기네들끼리만 사랑이니 화평이니 협동이니 이해니 관용이니 하면서 잔치하는 것을 결코 참된 '화목제'라고 인정하실 리가 없습니다.
주인에게는 인사도 하지 않고 손님들끼리만 인사하는 잔치가 있을 수 있습니까?
손님들이 정작 잔치를 차려 준 주인에게는 감사하지 않고 저희들끼리만 시시덕거린다는 게 말이 되겠습니까?
  
그런 식의 예배라는 것은 주인을 알지도 못하는 불청객들이 잔칫집에 몰려 와서 자기네 마음껏 제멋대로 즐기는 '파티'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배를 통하여 성도를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통하게 하지 않고 그저 사람들끼리만 교제하고 끝나게 하는 목사는 '제사장'이 아니라 기껏해야 '친목회장'일 뿐인 것입니다.

예배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러' 나아오는 자리입니다.
예배당은 사교적인 즐거움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통하는 기쁨'을 누리게 되는 장소입니다.
예배는 목사와 교인의 관계 유지를 위해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죄인이 하나님과 화목되며 그의 양자로 격상되는' 엄청난 영적 교통이 벌어지는 시간인 것입니다.
  
그 어떤 사람이든지 간에 먼저 하나님과 화목되어야만 성도 사이에도, 부모자식 형제자매 사이에서도, 이웃과 사회에서도 진정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화목할 수가 있음을 기억하면서, 예배를 드릴 때마다 항상 감사와 서원과 자원의 화목제사들을 통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통을 나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기독신자는 예배를 통하여 타인을 정죄하는 대신에 오직 '자신의 죄부터 용서받는 속죄제'를 올려야 합니다.

4장 1절 이하 12절에 기록하기를 "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2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여호와의 금령 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였으되 3만일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범죄하여 백성으로 죄얼을 입게 하였으면 그 범한 죄를 인하여 흠 없는 수송아지로 속죄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릴지니 4곧 그 수송아지를 회막문 여호와 앞으로 끌어다가 그 수송아지 머리에 안수하고 그것을 여호와 앞에서 잡을 것이요 

5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은 그 수송아지의 피를 가지고 회막에 들어가서 6그 제사장이 손가락에 그 피를 찍어 여호와 앞 곧 성소 장 앞에 일곱 번 뿌릴 것이며 7제사장은 또 그 피를 여호와 앞 곧 회막 안 향단 뿔에 바르고 그 송아지의 피 전부를 회막문 앞 번제단 밑에 쏟을 것이며 8또 그 속죄 제물 된 수송아지의 모든 기름을 취할지니 곧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9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근방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취하되 10화목제 희생의 소에게서 취함 같이 할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번제단 위에 불사를 것이며 11그 수송아지의 가죽과 그 모든 고기와 그 머리와 다리와 내장과 12똥 곧 그 송아지의 전체를 진 바깥 재 버리는 곳인 정결한 곳으로 가져다가 불로 나무 위에 사르되 곧 재 버리는 곳에서 사를지니라"고 했습니다.

"속죄제"(sin-offering)란 그 단어에서 쉽게 떠올릴 수 있듯이 '죄를 대속함 받기 위한 제사'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속죄'라고 번역되어 있는 '하타'라는 히브리어는 원래 '죄'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죄'와 '속죄'는 분명히 구별되는 개념이며 따라서 우리나라말에 되어 있는 것처럼 '죄'는 '죄'이고 '속죄'는 그 죄를 속한다는 의미에서 앞에 '속' 자가 하나 더 붙는 것이 자연스럽고 논리적입니다.
그런데도 히브리어에서는 같은 한 단어를 가지고 '죄'와 '속죄'라는 완전히 상반된 두 가지의 의미를 동시에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모순이 아니라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죄'를 속함 받기 위해서는 그 지은 '죄'와 똑같은, 즉 '정확하게 상응하는 것'으로 갚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완전한 속죄가 되기 위해서는 그 죄보다 결코 덜해서는 안 되는 어떤 대속의 보응이 필연적이라는 사실을 이 'sin-offering' 즉 '죄를 위한 제사'라는 의미의 '속죄제'가 강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속죄제에 사용되는 제물도 자연히 그 지은 죄의 경중에 따라서 달라져야 함이 또한 당연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이 레위기 4장에 나오는 속죄제들이 네 가지로 구분되어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선 오늘 본문에서 읽은 대로 첫 번째 속죄제는 '제사장이 지은 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 죄의 내용은 2절에서 밝히기를 "여호와의 금령 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였으되"라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금령'은 곧 율법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사람의 범죄를 정의하고 고발하는 유일한 기준이 됨을 강조해 줍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기독신자의 죄라는 것은 세상의 어떤 법이나 윤리를 기준으로 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의 법을 따라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릇 범하였으되"라고 한 것은 '부지중에' '실수로' 죄를 저지른 것을 가리키는 말로서, 사람이 고의로 하는 것뿐 아니라 무의식중에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범하면 여지없이 죄가 되는 것을 일깨워 주는 말씀입니다.

계속해서 3절에 보면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그런 범죄를 저질렀을 때에는 "그 범한 죄를 인하여 흠 없는 수송아지로 속죄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릴지니"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수송아지 한 마리는 두말할 것 없이 아주 비싼 것이었습니다.
제사장의 속죄제가 그런 수송아지로 드려져야 한다는 것은 그 제사장의 범죄가 그만큼 중하게 취급된다는 사실을 뚜렷이 보여 줍니다.

이것은 다른 속죄제들의 제물들과 비교해 볼 때 더욱 확실해집니다.
13절 이하에 나오는 것은 "이스라엘 온 회중"이 여호와의 금령을 어겼을 경우에 드리는 속죄제에 대한 규례인데, 놀랍게도 그때의 제물 역시 '수송아지' 한 마리였습니다.
즉 제사장 한 사람의 범죄는 하나님 앞에서 판단해 볼 때에는 전 이스라엘 백성의 범죄와 맞먹는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22절 이하에서 관원의 속죄제의 제물은 '수염소' 한 마리이고 27절 이하에서 일반 평민의 속죄제물은 '암염소' 한 마리에 불과한 것과 비교해 볼 때에 역시 더욱 돋보이게 됩니다.

왜 이처럼 제사장의 죄는 무겁게, 전 이스라엘 회중의 범죄와 동일하게 취급되었습니까?
본문 3절을 다시 보시면 바로 "제사장이 범죄하여 백성으로 죄얼을 입게 하였으면"이라고 했습니다.
즉 다른 관원들이나 평민들의 범죄와는 달리 제사장의 범죄는 그가 영적 책임을 맡고 있는 모든 백성들에게 그 나쁜 영향력이 미치게 되거나 혹은 아예 그 범죄행위를 전염시키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앞에서 보았던 '화목제'의 경우에도 '소'나 '양'이나 '염소' 등 다양한 제물로 드려졌지만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그 중에 무슨 제물을 정할지는 순전히 자율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속죄제'에서는 '어떤 사람'의 죄에 대하여 올리는 것인지에 따라서 '어떤 제물'을 바쳐야 하는지가 확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속죄제를 드리는 본인으로 하여금 자신이 저지른 죄가 어떤 죄인지, 얼마나 중한 죄인지를 분명히 자각하도록 했던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죄라는 것은 제사장부터 시작해서 일개 평민에 이르기까지 하나님 앞에서 '1대1'로 분명하게 자복하고 철저하게 용서받아야만 할 문제임을 이 속죄제의 규례가 강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 또한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릴 때마다 자신의 심령을 통하여 온전히 올려야 할 제사가 아니겠습니까?
수많은 예배자들이 한자리에 함께 모여 '공적인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바로 거기에서 '각자 자기에게 해당되는 속죄제'를 '각자 자신의 인격의 지성소'에서 드려야만 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목사는 목사 자신의 죄부터 회개하고, 장로는 장로 자신의 죄부터 자복하고, 평신도 역시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의 죄를 돌아보며 십자가 아래 엎드려 용서를 구하는 '각자의 속죄제사'를 올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목사가 장로보다 죄가 적어서 목사가 된 것이겠습니까?
장로는 평신도보다 죄를 조금이라도 덜 지어서 장로가 된 것이겠습니까?
보통 교인들보다 죄를 적게 짓고 선을 많이 행한 사람을 '성인'이라고 추앙하는 천주교라면 그럴지 모르겠지만, 우리 기독교인들은 결코 그런 식으로 '남의 눈에 있는 티'만 보고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는 자세로 하나님 앞에 나와서는 안 됩니다.
  
목사 자신부터가 먼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자기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사실에 뜨겁게 감격할 줄 모른다면 아무리 교인들에게 "'아멘' 하시오."라고 강요하고 "할렐루야"를 선창한들 그 설교에 무슨 은혜가 있겠습니까?
장로 자신부터가 '백성의 관원'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더욱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죄를 자복하며 통회하는 눈물 한 방울도 없이 예배 시간에 장로석에 앉아 있다면 그 자리는 그저 '사람에게 보이려고 앉아 있는 상석'이 될 뿐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물론 평신도 여러분에게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이 예배의 자리는 '목사가 인도하는 제사'를 여러분이 '구경하러' 나온 자리가 아닙니다.
이 예배의 시간은 '목사가 해 주는 축복기도'를 여러분이 '받으러' 나온 자리가 아닙니다.
이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제사를 통하여 다른 사람 아닌 바로 나 자신이 죄 사함을 받았다.'라는 기적적인 은혜를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스스로 확신하며 감격하는, 실로 인격적이며 체험적인 제사가 되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제사는 결코 '단체적으로 사죄를 베풀어 주는 속죄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든 죄인을 위하여 단 한 번 드린' 제사이기는 하지만, 그 속죄제는 오직 '그 희생제물 되신 예수님의 대속 공로를 믿고 의지하는 한 사람'을 위한 제사입니다.
그러므로 주일예배에 참석해서 '십자가 주제의 설교'를 들었다고 해서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단체적으로 구원의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은 절대로 아니며, '죄 용서를 구하는 목회기도'를 들었다고 해서 그 회중 전체가 한꺼번에 사죄의 은총을 입게 되는 것도 결코 아닌 것입니다.

오직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면서 그 복음의 선포를 자기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으로 받고 그 구세주 앞에 통회자복하는 각 '개인'에게만 '네 죄 사함을 받았으니 평안히 가라.'는 주님의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오늘도 예배자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속을 살피시는 하나님 앞에서 바로 자기 자신의 지난 한 주간의 삶 속에 '여호와의 금령을 그릇 범한 죄'가 없는지를 겸손히 돌이켜 보는 가운데 바로 그 자신의 죄를 위하여 주님께서 대신 드려 주신 십자가의 속죄제사의 은총을 뜨겁게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불신자들은 보통 '제사를 지낸다.'라고 말합니다.
그 말 속에 이미 그들의 제사는 그야말로 형식적인 것임이 여지없이 드러나 있지 않습니까?
그들이 죽은 조상 앞에 차리는 제사는 무슨 '영적 교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때가 될 때마다 의례적으로 치르는 행사'일 뿐인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옛 사람'의 버릇이 남아 있는 사람들은 기독교인이 된 후에도 '예배를 본다.'라는 실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속죄의 은총과 감격, 그리고 그에 대한 기쁨과 감사는 없고 오로지 무슨 '쇼를 보는 재미'나 '공짜로 받아먹는 만족'만 있는 예배라는 것은 결코 '올리는 제사'가 아니라 '지내는 제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처럼 '하늘 보좌 쪽'으로 열려 있지 아니하고 오직 '세상과 인간 쪽'으로만 연결되어 있는 예배는 '사신 하나님께 드리는 경배'가 아니라 그야말로 '사람이 눈으로 보고 즐기게만 해 주는 서비스'로 끝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살아 계신 하나님과 구체적인 관계를 맺고 실제적인 교제를 나누고 있는 참된 신자라면 반드시 '산 제사를 올리는'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는 '불로 태우는 화제'든지 '들고 흔드는 거제'든지 '액체로 부어 바치는 관제'든지 간에 모두가 다 위로, 하나님 쪽으로 '올리는 제사'일 뿐인 것입니다.
바로 그런 예배가 되어야 수평 방향으로 '사람끼리만 나누는' 것이 아니라 수직 방향으로 '하나님과 교통하는' 화목제가 될 수 있으며, '단체적으로 행하는 형식'이 아니라 '각 예배자 개인이 체험하는 은혜로운' 속죄제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참된 예배를 통하여서만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회복하고 누릴 수 있습니다.
그 예배의 중심에는 바로 우리를 대신하여 '화목제'와 '속죄제'의 희생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예배를 드리러 나올 때마다 바로 그 십자가 제사를 통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교통하는 기쁨'과 '거룩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의인으로 인침을 받는 감격'을 충만히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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