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조화될 수 없는 관계 (고후 6: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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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될 수 없는 관계 (고후 6:14-18)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다양한 관계 속에서 살게 됩니다. 부모와의 관계에서부터 형제자매와의 관계, 일가친척과의 관계, 또래 친구들과 관계, 선후배와 상사와 부하직원의 관계, 혹 동업자와의 관계 등이 있습니다. 여기서 조금 범위를 넓혀 민족 혹 국가와의 관계, 다른 나라나 다른 나라의 사람들과의 관계 등, 정말 그물망처럼 다양하고 복잡한 관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한 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여러분과 다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의 수는 얼마나 됩니까? 그리고 그 중에서 여러분과 가장 가깝고 친밀하고 변치 않을 관계에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우리는 이처럼 다양하고 복잡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지만, 그렇다고 모든 관계들이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좋은 관계가 있는가 하면 나쁜 관계도 있습니다. 어떤 관계는 행복이나 기쁨을 주는가 하면, 반대로 슬픔과 좌절을 안겨주는 관계도 있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이러한 무수한 관계들 속에서 사람들을 만나왔고, 또 앞으로도 다양한 관계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관계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입니다. 우리에게는 특별한 관계가 많지만 하나님과 성도,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만큼 특별한 관계는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 16절 중반에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나의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출 6:7절 말씀에도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고 했으며, 레 26:11-12절에서도 “내가 내 성막을 너희 중에 세우리니 내 마음이 너희를 싫어하지 아니할 것이며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백성 삼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장자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구원과 생명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삼아 주신 것처럼 오늘 우리 모두를 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로 삼아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18절 말씀에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네게 자녀가 되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요일 3:1절 말씀에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고 했고, 요 1:12절에서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갈 4:6절에는 더 놀라운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친히 자녀 삼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의 자녀 되는 자격을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가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또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다는 것은 한마디로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 삶의 귀한 문제는 어디에서 사느냐 보다 누구와 함께 사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여러분의 인생길에 누구와 함께 살고 싶습니까? 잠깐 스쳐지나 가는 인연 말고 정말 함께 오래 오래 살고 싶은 분이 누구입니까?
이 세상에 부부의 만남이 가장 긴 만남인데 이것도 잠깐 스쳐지나 가는 것처럼 가버립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영원히 우리를 사랑하시며 위로하시고 도우시는 분이 함께 계십니다.
우리의 행복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나를 변함없이 사랑해 주신 분과 함께 사는 것이 행복 아닙니까? 우리는 지금 그런 분과 함께 동고동락하고 있습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된 우리 성도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오늘 본문 14절 말씀에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고 했습니다.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는 말은 신 22:10-11절을 인용하고 있는 말씀으로 “너는 소나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고 양 털과 베 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말지니라”고 했습니다. 종류가 다른 짐승으로 한 겨리를 이루어 밭을 갈게 하면, 그것들의 서로 다른 본성 때문에 일치된 걸음을 걷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농사일을 망치게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믿지 않는 자’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입니까?
문자적으로 보면 불신자들, 비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후 문맥을 살펴보면, 불신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교회에 침투하여 거짓된 복음을 증거하고 있는 바울의 대적자들과 이 거짓 사술에 속아 넘어 간 성도들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을 사도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14-16절을 보시면 “불법을 행하는 자, 어두움에 속한 자, 벨리알 즉, 사단에 속한 자, 믿지 않는 자, 우상을 섬기는 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들과 함께 멍에를 메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좀 더 쉽게 이해하려면 고전 5:9-11절 말씀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숭배 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는 깊게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통하여 애초에 믿지 않는 불신자들이 각종 죄를 범한다고 해서 그들과 사귀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이미 믿는 성도들이 죄를 범하면 이런 자들과는 절대로 같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통해 고린도교회에 침투한 거짓 선지자들과 이 거짓 사술에 속아 넘어가 범죄한 자들과 더 이상 짝하지 말고, 교제하지 말고,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만일 불신자를 가리킨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적인 삶을 살지만 불신 세상에 발을 딛고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불신자들과 어울릴 수밖에 없고 그들을 사업의 파트너로 삼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불신자와 일체의 교류를 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독교인들만의 어떤 특별한 집단, 예를 들어 신앙촌과 같은 것을 만들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지상명령인 복음 전파와 영혼 구원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의 빛을 따라 사는 새 언약 백성인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여전히 옛 언약인 율법을 추구하며 구시대적인 삶을 사는 거짓 선지자들과 이에 속아 참된 복음을 부인하고 죄를 짓는 자들과는 결코 신앙생활을 같이 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 9:16-17절입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고 예수님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베조각이나 새 포도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도래한 새 시대의 삶의 질서와 복음의 능력을 말합니다. 그리고 낡은 가죽 부대나 낡은 옷은 예수 그리스도 이전의 옛 시대적인 삶의 질서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은 복음의 질서와 옛 언약적인 질서는 결코 서로 조화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철저하게 복음의 원리를 따라서, 새 질서를 따라서 새 언약 백성이 살아야 함을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은 결코 타협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타협을 하면 복음에 치명적인 상처와 손해를 가져옵니다. 복음이 복음대로 증거될 때에만 선포된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나는 법입니다. 복음이 철저하게 증거될 때 그 곳에 십자가의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복음은 결코 타협해서도 안 되고 타협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된 우리가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적극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약 4:4-5절에서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경고합니다.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하나님께서 세상과 가까이 하며 살고 있는 사람들을 이렇게 적으로 원수로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을 우리 속에 거하시는 성령님께서 세상을 가까이 하는 사람들에게 시기하신다고 하십니다. 시기심은 삼각관계에서 생겨나는 마음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데 너는 나를 외면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 할 때 내 안에서 시기심이 발동합니다. 즉 이 말은 하나님은 자녀된 우리를 사랑하시는 데 우리는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면 하나님이 시기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오늘 말씀에 연결하면 하나님을 믿고도 불의와 어두음에 거하며, 사단에 속하여 우상을 섬길 때 하나님과 원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점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우리가 악한 자를 가까이 하며 살게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원수 곧 적으로 간주하십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이러한 자들을 가까이 하며 살게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뜨거운 시기심을 느끼시고 우리를 향해 분노와 증오를 느끼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된 우리가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적극적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약 4:8절에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세상을 가까이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주님 사이의 거리는 어느 정도입니까? 한 발짝씩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세상을 가까이 하면 할수록 하나님은 멀어집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할수록 세상은 멀어지고 하나님은 가까워집니다.
교회가 시끄럽고 요란하고 복잡한 것은 세상이 교회 안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교회 안에서 날뛰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모든 다툼이 그치고 고요하고 평화로우려면 성도들이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할 때 세상이 멀어지는 것입니다.
“근묵자흑”(近墨者黑)이란 말이 있습니다. 먹을 가까이 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검어진다는 말입니다. 난초는 매우 향기가 좋습니다. 난초의 향기가 가득한 방안에 오래 있게 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짙은 향기가 몸에 베이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착한 사람과 오래 함께 있게 되면 모르는 사이에 동화되어 나도 그 사람처럼 착한 사람이 됩니다.
썩은 생선은 고약한 냄새가 납니다. 썩은 생선의 냄새를 가까이 하면 그 냄새가 몸에 베이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악한 사람과 함께 있게 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감염되어 나쁜 사람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쉽게 영향을 받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누구와 가까이 지내느냐가 참 중요합니다. 올바르게 사는 사람과 가까이 지내게 되면 나도 올바르게 살려고 애쓰게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그릇되게 사는 사람과 가까이 지내게 되면 나도 그릇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기 쉽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삶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이 좋은 사람과 가까이 지내면 나도 신앙생활을 잘하려고 애쓰게 됩니다. 경건하게 사는 사람과 가까이 지내게 되면 나도 경건한 삶을 살려고 애쓰게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세속적인 삶을 사는 사람과 가까이 지내게 되면 어느덧 나도 세속적인 삶을 살게 되고, 잘못된 믿음을 가진 사람과 가까이 하면 나도 잘못된 신앙이 되기 쉽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가장 특별한 관계로 여기십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자녀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세상 그 어떤 관계보다 우선하고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을 가장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과의 관계된 일을 가장 우선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세상과 우리들은 사는 목적이 다르고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조화될 수 없는 관계를 버리고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믿음의 관계를 잘 만들어가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다양한 관계 속에서 살게 됩니다. 부모와의 관계에서부터 형제자매와의 관계, 일가친척과의 관계, 또래 친구들과 관계, 선후배와 상사와 부하직원의 관계, 혹 동업자와의 관계 등이 있습니다. 여기서 조금 범위를 넓혀 민족 혹 국가와의 관계, 다른 나라나 다른 나라의 사람들과의 관계 등, 정말 그물망처럼 다양하고 복잡한 관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한 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여러분과 다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의 수는 얼마나 됩니까? 그리고 그 중에서 여러분과 가장 가깝고 친밀하고 변치 않을 관계에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우리는 이처럼 다양하고 복잡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지만, 그렇다고 모든 관계들이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좋은 관계가 있는가 하면 나쁜 관계도 있습니다. 어떤 관계는 행복이나 기쁨을 주는가 하면, 반대로 슬픔과 좌절을 안겨주는 관계도 있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이러한 무수한 관계들 속에서 사람들을 만나왔고, 또 앞으로도 다양한 관계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관계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입니다. 우리에게는 특별한 관계가 많지만 하나님과 성도,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만큼 특별한 관계는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 16절 중반에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나의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출 6:7절 말씀에도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고 했으며, 레 26:11-12절에서도 “내가 내 성막을 너희 중에 세우리니 내 마음이 너희를 싫어하지 아니할 것이며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백성 삼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장자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구원과 생명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삼아 주신 것처럼 오늘 우리 모두를 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로 삼아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18절 말씀에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네게 자녀가 되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요일 3:1절 말씀에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고 했고, 요 1:12절에서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갈 4:6절에는 더 놀라운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친히 자녀 삼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의 자녀 되는 자격을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가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또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다는 것은 한마디로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 삶의 귀한 문제는 어디에서 사느냐 보다 누구와 함께 사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여러분의 인생길에 누구와 함께 살고 싶습니까? 잠깐 스쳐지나 가는 인연 말고 정말 함께 오래 오래 살고 싶은 분이 누구입니까?
이 세상에 부부의 만남이 가장 긴 만남인데 이것도 잠깐 스쳐지나 가는 것처럼 가버립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영원히 우리를 사랑하시며 위로하시고 도우시는 분이 함께 계십니다.
우리의 행복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나를 변함없이 사랑해 주신 분과 함께 사는 것이 행복 아닙니까? 우리는 지금 그런 분과 함께 동고동락하고 있습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된 우리 성도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오늘 본문 14절 말씀에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고 했습니다.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는 말은 신 22:10-11절을 인용하고 있는 말씀으로 “너는 소나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고 양 털과 베 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말지니라”고 했습니다. 종류가 다른 짐승으로 한 겨리를 이루어 밭을 갈게 하면, 그것들의 서로 다른 본성 때문에 일치된 걸음을 걷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농사일을 망치게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믿지 않는 자’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입니까?
문자적으로 보면 불신자들, 비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후 문맥을 살펴보면, 불신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교회에 침투하여 거짓된 복음을 증거하고 있는 바울의 대적자들과 이 거짓 사술에 속아 넘어 간 성도들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을 사도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14-16절을 보시면 “불법을 행하는 자, 어두움에 속한 자, 벨리알 즉, 사단에 속한 자, 믿지 않는 자, 우상을 섬기는 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들과 함께 멍에를 메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좀 더 쉽게 이해하려면 고전 5:9-11절 말씀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숭배 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는 깊게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통하여 애초에 믿지 않는 불신자들이 각종 죄를 범한다고 해서 그들과 사귀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이미 믿는 성도들이 죄를 범하면 이런 자들과는 절대로 같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통해 고린도교회에 침투한 거짓 선지자들과 이 거짓 사술에 속아 넘어가 범죄한 자들과 더 이상 짝하지 말고, 교제하지 말고,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만일 불신자를 가리킨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적인 삶을 살지만 불신 세상에 발을 딛고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불신자들과 어울릴 수밖에 없고 그들을 사업의 파트너로 삼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불신자와 일체의 교류를 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독교인들만의 어떤 특별한 집단, 예를 들어 신앙촌과 같은 것을 만들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지상명령인 복음 전파와 영혼 구원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의 빛을 따라 사는 새 언약 백성인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여전히 옛 언약인 율법을 추구하며 구시대적인 삶을 사는 거짓 선지자들과 이에 속아 참된 복음을 부인하고 죄를 짓는 자들과는 결코 신앙생활을 같이 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 9:16-17절입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고 예수님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베조각이나 새 포도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도래한 새 시대의 삶의 질서와 복음의 능력을 말합니다. 그리고 낡은 가죽 부대나 낡은 옷은 예수 그리스도 이전의 옛 시대적인 삶의 질서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은 복음의 질서와 옛 언약적인 질서는 결코 서로 조화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철저하게 복음의 원리를 따라서, 새 질서를 따라서 새 언약 백성이 살아야 함을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은 결코 타협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타협을 하면 복음에 치명적인 상처와 손해를 가져옵니다. 복음이 복음대로 증거될 때에만 선포된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나는 법입니다. 복음이 철저하게 증거될 때 그 곳에 십자가의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복음은 결코 타협해서도 안 되고 타협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된 우리가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적극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약 4:4-5절에서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경고합니다.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하나님께서 세상과 가까이 하며 살고 있는 사람들을 이렇게 적으로 원수로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을 우리 속에 거하시는 성령님께서 세상을 가까이 하는 사람들에게 시기하신다고 하십니다. 시기심은 삼각관계에서 생겨나는 마음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데 너는 나를 외면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 할 때 내 안에서 시기심이 발동합니다. 즉 이 말은 하나님은 자녀된 우리를 사랑하시는 데 우리는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면 하나님이 시기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오늘 말씀에 연결하면 하나님을 믿고도 불의와 어두음에 거하며, 사단에 속하여 우상을 섬길 때 하나님과 원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점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우리가 악한 자를 가까이 하며 살게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원수 곧 적으로 간주하십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이러한 자들을 가까이 하며 살게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뜨거운 시기심을 느끼시고 우리를 향해 분노와 증오를 느끼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된 우리가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적극적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약 4:8절에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세상을 가까이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주님 사이의 거리는 어느 정도입니까? 한 발짝씩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세상을 가까이 하면 할수록 하나님은 멀어집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할수록 세상은 멀어지고 하나님은 가까워집니다.
교회가 시끄럽고 요란하고 복잡한 것은 세상이 교회 안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교회 안에서 날뛰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모든 다툼이 그치고 고요하고 평화로우려면 성도들이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할 때 세상이 멀어지는 것입니다.
“근묵자흑”(近墨者黑)이란 말이 있습니다. 먹을 가까이 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검어진다는 말입니다. 난초는 매우 향기가 좋습니다. 난초의 향기가 가득한 방안에 오래 있게 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짙은 향기가 몸에 베이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착한 사람과 오래 함께 있게 되면 모르는 사이에 동화되어 나도 그 사람처럼 착한 사람이 됩니다.
썩은 생선은 고약한 냄새가 납니다. 썩은 생선의 냄새를 가까이 하면 그 냄새가 몸에 베이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악한 사람과 함께 있게 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감염되어 나쁜 사람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쉽게 영향을 받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누구와 가까이 지내느냐가 참 중요합니다. 올바르게 사는 사람과 가까이 지내게 되면 나도 올바르게 살려고 애쓰게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그릇되게 사는 사람과 가까이 지내게 되면 나도 그릇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기 쉽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삶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이 좋은 사람과 가까이 지내면 나도 신앙생활을 잘하려고 애쓰게 됩니다. 경건하게 사는 사람과 가까이 지내게 되면 나도 경건한 삶을 살려고 애쓰게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세속적인 삶을 사는 사람과 가까이 지내게 되면 어느덧 나도 세속적인 삶을 살게 되고, 잘못된 믿음을 가진 사람과 가까이 하면 나도 잘못된 신앙이 되기 쉽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가장 특별한 관계로 여기십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자녀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세상 그 어떤 관계보다 우선하고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을 가장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과의 관계된 일을 가장 우선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세상과 우리들은 사는 목적이 다르고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조화될 수 없는 관계를 버리고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믿음의 관계를 잘 만들어가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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