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내 귀에 들린 대로 (민 14:26-30)

첨부 1


내 귀에 들린 대로 (민 14:26-30)

가수 100명을 대상으로 그 가수의 히트곡이 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조사한 결과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 결과는 놀랍게도 91명의 가수가 자신의 히트곡에 나오는 가사와 삶이 같았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요절한 가수들은 한결같이 죽음과 연관된 노래를 불렀다는 것입니다. 제가 대중가요를 잘 알지 못하지만,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성악가였던 윤심덕(1897-1926)은 <사의 찬미>를 불렀다가 서른 살의 나이에 애인 김우진과 함께 현해탄에 몸을 던져 자살함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1957년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로 시작하는 <산장의 여인>이란 노래를 부른 권혜경(1931-2008) 씨는 그 가사의 내용처럼 60년대 말 위암과 자궁암에 걸려 깊은 산속에서 외롭게 요양을 해야 했습니다. 나중에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교도소와 소년원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다가 말년에는 충북 청원의 깊은 산골마을에 지어진 산장에서 찾아오는 이 별로 없어 쓸쓸하게 마지막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수덕사의 여승>이란 노래를 부른 가수 송춘희는 결혼을 하지 않은 채 불교 포교사가 되어 불교 포교를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원래부터 불자였던 것은 아닙니다. 그녀는 큰 아버지가 교회를 세울 정도로 신앙심 깊은 가정에서 태어났고, 그녀 역시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그런데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노래를 부른 이후 일약 스타덤에 오르긴 했지만, 결국 그로 인해서 불교에 빠져들어갔고 결국 신앙을 버리고 불교도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흑점>이란 노래를 부른 가수 양미란은 그 노래를 부른 지 얼마 되지 않은 1980년 골수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흑점>이라는 노래에 ‘태양의 흑점처럼 어두운 내 가슴’이란 가사가 있는 것처럼, 흑점인 암에 의해서 생명을 잃게 되었습니다.  
  
많은 히트곡을 남겼던 배호(1942-1971)라는 가수는 그가 부른 <돌아가는 삼각지>처럼 불과 스물아홉의 나이에 영영 돌아오지 못할 길로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가 부른 <마지막 잎새>에 나오는 가사 ‘흐느끼며 떨어지는 마지막 잎새’라는 노랫말을 끝으로 그는 ‘마지막 잎새’가 되어 떠나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대중가요 작곡가들의 모임인 ‘노랫말연구회’에서도 비슷한 발표를 했습니다. ‘슬픈 노래를 부른 가수들은 일찍 죽거나 슬픈 운명의 길을 걷는다.’고 말입니다. 

반대로 좋은 가사로 노래를 불러 덕을 본 사람도 있습니다. 
  
<바다가 육지라면>이라는 노래를 부른 가수 조미미(1947-)는 35살까지 결혼을 하지 못했었는데, <바다가 육지라면>이라는 노래가 히트를 치면서 재일교포가 바다를 건너와 결혼이 성사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송대관 씨는 <쨍하고 해뜰 날 돌아온단다>라는 노래처럼, 그의 삶에 쨍하고 해가 떠 일약 스타가 되었습니다. 그는 구두닦이를 거쳐 음반회사에서 청소를 하면서 가수의 꿈을 키워왔는데, 그가 부른 노래처럼 그의 인생에 쨍하고 해가 떴습니다.
  
<난 참 행복합니다>라는 노래를 부른 윤향기 씨는 어려서 부모님을 여의고 동생 윤복희와 함께 외롭게 자랐지만, 그의 노래처럼 그는 누구보다도 행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목사님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학대학까지 세워 지금 예음음악신학교 총장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가수가 노래 한 곡을 취입하기 위해서는 같은 노래를 보통 3,000~5,000번이나 부른다고 합니다. 더구나 그냥 노래만 불러서는 안 됩니다. 그 노래에 자신의 감정을 최대한 실어야 합니다. 자신의 감정이 들어가지 않는 노래가 히트를 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 노래의 가사가 자신의 잠재의식 깊은 곳에 자리 잡게 되고, 그 노래의 가사대로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슬픈 노래를 부를 때에는 가사만 슬픈 것이 아니라 내 감정이 슬픔에 도취되기 때문에 내 삶이 슬픔에 휩싸이게 되고, 기쁜 노래를 부를 때에는 노래를 부를 때에도 기쁘지만 일상의 삶도 늘 싱글벙글 기쁨 가득한 모습으로 살게 됩니다. 그러기에 가수 박재란 씨의 말에 공감이 됩니다. “가수는 대개 자기가 가장 히트한 곡대로 된다.”

우리 옛말에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백번 옳은 말입니다. 말은 그 사람의 생각이고 넋입니다. 말 속에는 그 사람의 사상과 인격과 신앙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 생각과 인격과 신앙이 담겨 있는 그 말이 씨앗이 되어 나를 만들어갑니다. 어제 뿌린 말의 씨앗이 오늘의 나를 만들고, 오늘 뿌린 말의 씨앗이 내일의 나를 만듭니다. 
  
오늘 본문은 그 말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아주 잘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은 민수기 13장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종살이하던 애굽에서 탈출하여 시내광야를 거처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렀을 때입니다. 바란광야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렀을 때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셨습니다. 각 지파에 한 명씩, 모두 12명의 정탐꾼이 40일간에 걸쳐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가나안 땅을 정탐하도록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이 얼마나 좋은 땅인지를 미리 알려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정탐꾼들을 보내면서 정탐을 마치고 돌아올 때에는 반드시 ‘그 땅의 실과를 가져오라’(민수기 13:20)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40일 동안 정탐을 마친 정탐꾼들은 에스골 골짜기에서 포도송이가 달린 포도나무 가지를 꺾어서 두 사람이 막대기에 꿰어 메어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석류와 무화과도 함께 가져옵니다. 
  
그리고는 정탐한 결과를 보고합니다. 그 첫 번째 보고내용이 오늘 본문 바로 앞장인 13:27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그 땅에 젖과 꿀이 흐르는데, 이것은 그 땅의 과일이니이다.” 거기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한 말은 두려운 마음으로 한 말입니다. ‘그 땅에는 아낙 자손이라는 거인들이 살고 있고, 살만한 곳은 모두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다’고 보고합니다. 
  
거기까지 보고하자 백성들 사이에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저기에서 서로들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느라고 소란스럽기까지 했습니다. 아마도 어떤 사람은 ‘그렇게 살기 좋은 땅이니 빨리 들어가고 싶다’고 말했을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그 땅에 아낙 자손이 살고 있다는데 우리가 그 땅에 들어갈 수 있을까? 그 아낙 자손들과 싸워 이길 수 있을까?’ 하는 회의적인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 때 갈렙이 사람들 앞에 나서면서 사람들을 조용히 시킨 후에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민수기 13:30) 

그러자 다른 정탐꾼들이 거세게 반대합니다. ‘우리는 그 땅 백성을 이기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그리고는 그 땅에 대해서 악평을 합니다. 처음 보고할 때에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보고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 땅을 악평합니다. ‘악평했다’는 말은 ‘모욕했다’ ‘중상했다’ ‘나쁘게 말했다’는 뜻입니다. 그 땅이 전혀 쓸모 없는 땅이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앞에서는 너무너무 좋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말해놓고선, 불과 몇 분 만에 그 땅은 사람 살만한 곳이 못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13:32절에서는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라고 말합니다.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조차 집어 삼킬 정도로 악조건의 땅이라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백성들은 밤새도록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올라가서 그 땅을 차지하자’는 갈렙의 말은 이제 귓전에서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땅은 네피림의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절대로 그 땅 백성을 이기지 못한다.’는 정탐꾼들의 말을 전적으로 믿어버렸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도 살기 힘들다는데, 그리고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네피림의 후손인 아낙자손 거인들이라는데 그 땅에 들어가 그 땅을 차지한다는 것은 죽음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밤새도록 통곡했습니다. 심지어 애굽 땅에서 일찍 죽은 사람들이 복된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다가 아낙 자손의 칼에 죽느니, 차라니 애굽 땅에서 죽은 사람들, 광야에서 죽은 사람들이 훨씬 더 낫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모의를 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다시금 ‘그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14:7)이라고,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시니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우리는 그 땅으로 인도해 들이실 것’이라고,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할 것 하나도 없다’고 아무리 설득하려 해도 그들은 그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말한 여호수아와 갈렙을 돌로 쳐 죽이려고 달려들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신 하나님께서 오늘 말씀을 모세에게 들려 주셨습니다. ‘그들이 지금까지 한 모든 말은 나를 향한 원망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한 그 원망의 소리를 내가 다 들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하나님은 우리의 말에 귀 기울여 들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하는 말만 들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는 모든 말을 들으십니다. 

말라기 3:1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사람들이 피차 말하는 소리를 여호와 하나님께서 분명히 들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2장에서는 ‘고된 노동으로 인해 힘들어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되고, 그들이 고통 중에 내뱉는 소리를 하나님께서 들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출애굽기 2:24-25)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소리에 귀 기울여 들으십니다. 우리의 신음까지도 들으시고 우리가 고통 중에 울부짖는 소리에도 귀 기울여 들으십니다. 우리의 기도 소리에 귀 기울여 들으신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썩은 고목나무나 돌로 만든 우상들처럼 아무리 외쳐도 듣지 않으신다면 우리가 기도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통성으로 소리 높여 기도하는 소리만 들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묵상까지도 다 들으십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큰 축복이요 감사한 일이지만, 우리가 불평하고 원망하는 소리까지 들으신다는 사실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왜 우리를 애굽 땅에서 해방시켜 여기까지 오게 했느냐?’고 말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다가 네피림의 후손 아낙 자손 거인들의 칼에 죽느니 차라리 애굽 땅에서 노예로 살다가 죽든지, 광야에서 죽는 것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실 것’이라는 여호수아와 갈렙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 그들을 돌로 쳐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실 것이라는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그 불평과 불신앙의 말을 다 들으셨습니다.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라.” 하나님께서 들으신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한 대로 그대로 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하며 한 말이 무엇입니까? 

14:2절에 나옵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가나안 땅에 들어가느니 차라리 광야에서 죽는 것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본문 29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너의 시체가 이 광야에서 엎드러질 것이라.” 그들이 말한 그대로 그들을 모두 광야에서 죽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단 아직 어려서 자신들의 말에 책임을 지지 않는 스물 아래의 어린아이들은 제외하고, 자기들이 한 말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을 져야하는 어른들은 모두 광야에서 죽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면서 ‘차라리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한 그들을 하나님께서는 광야 40년 동안에 다 죽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다 죽은 후에야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말은 우리 인생의 핸들(운전대)입니다. 자동차는 운전자가 핸들을 어느 쪽으로 트느냐에 따라서 그 진행방향이 결정됩니다. 앞으로 반듯이 가려면 핸들을 좌로나 우로 돌리지 않고 반듯하게 잡고 있으면 됩니다. 왼쪽으로 가려면 핸들을 왼쪽으로 돌리면 자동차는 자연히 왼쪽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오른쪽으로 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핸들을 오른쪽으로 틀면 자동차는 오른쪽으로 갑니다.
  
우리가 긍정적인 말을 하면 우리 인생도 긍정적으로 풀려지게 됩니다. 그런데 매사에 불평하고 원망하면 모든 일이 꼬이고 꼬일 뿐입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내 스스로 ‘이 일은 안 풀릴거야’ 그러면서 일하면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마음의 생각을 이미 들으시고는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에게 행하리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해야 할 말이 있고 해서는 안 되는 말이 있습니다.
먼저 우리 신앙인들은 불평하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대신 감사하는 말을 많이 해야 합니다. 불평은 또 다른 불평을 만들어낼 뿐입니다.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감사하는 말입니다. 

1907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영국의 소설가 키플링(Rudyard Kipling, 1865-1936)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정글북』이란 소설로 세계적인 명성과 함께 큰 부를 얻은 사람입니다. 그에 관한 일화가 있습니다. 한 신문사 기자가 그와 인터뷰를 하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키플링 씨, 어떤 사람이 당신의 수입을 자세히 계산해 보니 당신이 쓴 단어 하나에 약 100달러(약 12만원)의 가치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 기자는 자기 주머니에서 100달러짜리 지폐를 꺼내어 주면서 그 소설가에게 부탁을 청했습니다. “키플링 씨, 여기 100달러짜리 돈이 있습니다. 지금 제게 100달러의 가치가 있는 말 한 마디를 해 주십시오.” 그러자 키플링은 잠시 생각하더니 그 돈을 받아 주머니에 넣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Thanks!)” 감사하다는 말은 때로 100달러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말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비판하고 정죄하는 말 대신에 칭찬하는 말을 많이 해야 합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을 추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어깨가 축 늘어져 실의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해준 칭찬 한 마디가 그의 인생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역사를 만들어낼 것입니다. 비판하고 꾸중하는 말을 통해서 변화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칭찬하고 격려하는 말을 들을 때 사람은 용기를 갖게 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우리 신앙인은 저주하는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축복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저주할 수 있는 권한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축복하는 말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극심한 컴플렉스에 빠져 있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아홉 살 때 우연히 우물가를 지나가고 있는데, 우물에서 물을 긷던 아낙네들이 자기들끼리 ‘저 애는 참 못생겼다.’라고 험담하는 말을 우연히 듣게 됩니다. 

그 후로 그는 외모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버렸고, 그것은 단순히 외모에 대한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매사에 자신감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24살 때 미국 프린스턴 대학에 유학을 가서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머리는 명석한데 6년이 지나도록 박사학위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실의에 빠져 학교 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 앉아 있는데, 한 미국 여성이 조심스레 다가오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당신처럼 잘 생긴 동양학생은 처음 봐요.” 그 말 한마디에 그는 자신감을 회복하여 곧 박사학위를 받게 됩니다. 그가 바로 문익환 목사님의 동생인 문동환 박사입니다. 축복하고 칭찬하는 말 한 마디는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줍니다.

신앙인은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책임지겠노라고 하는 책임적인 말을 많이 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어렵고 혼란 가운데 빠진 이유 가운데 하나는 서로 책임지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책임지려 하지 않고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하려다 하다 보니 남을 비판하게 됩니다. 
  
그리고 신앙인은 남의 허물을 들춰내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허물을 감추어주는 사랑의 말을 많이 해야 합니다. 책임을 내가 지려 하지 않고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하려다보니 남의 허물을 들춰내기 위해서 안달을 합니다. 그러나 그런 모습 속에서는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행복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남에게 상처주는 말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순간적인 감정을 참지 못하고 남에게 상처를 준다면 상처 준 사람은 금방 잊을지 모르지만, 상처 받는 사람은 그 아픔을 평생 안고 살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은혜를 끼치는 말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신앙인은 남을 업신여기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남을 높여주는 말을 많이 해야 합니다. 우리는 남을 업신여기면 내가 높아지고, 남을 높여주면 내가 낮아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남을 높여주면 나도 더불어 높아지고, 내가 남을 업신여기고 깎아내리면 내가 깎아 내린 것만큼 나도 천박해지고 낮아집니다. 

신앙인은 ‘안 된다’는 부정적인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말만 해야 합니다. 『긍정의 힘』이란 책을 쓴 조엘 오스틴(J. Osteen)은 그의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상황이 내 뜻대로 풀리지 않고, 문제가 더욱 심각해질수록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고통과 어려움이 있을수록 긍정적인 말을 해서 해결해야 합니다. 말을 복되게 할 때 성령께서 감동하셔서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안 된다고 말하면 하나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안 되게 하십니다. 그러나 ‘할 수 있다, 된다’고 말하면 하나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그 일을 되게 해 주십니다. 

여러분, 일이 잘 풀리지 않아 걱정이 많으십니까?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고 ‘나는 안 돼!, 이 문제는 안 풀릴거야!’라고 말하지 마십시다. 그러면 정말로 안 풀립니다. 그럴 때일수록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내게 하나님이 계시잖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까 문제없어. 곧 풀릴거야.’ 그렇게 말하십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그렇게 해 주십니다. 
  
건강이 좋지 않아 힘들고 피곤하십니까? 그렇다고 인상 쓰고 다니진 마십시다. 우리는 건강이 좋지 않을 때 ‘아프다’고 말해야 위로를 얻는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가 나의 아픔을 인정해 주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나에게 핑계거리를 주어 우리 스스로에게 위안이 됩니다. 그러나 아프다고 말하는 한 우리의 몸은 건강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건강하다고 말해야, 그 말대로 우리 몸은 건강을 되찾아갑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그 말을 들으시고 우리에게 건강의 복을 주십니다. 

늘상 부정적으로 말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긍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으로 바뀌어지지 않습니다. 운동선수들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훈련을 통해서 순발력을 향상시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한번 배운 기술을 남에게 보일 수 있는 수준은 100번 연습하면 되고, 자기보다 못한 상대에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1000번 연습하면 되지만 자신보다 나은 상대에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10000번 연습해야 한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부정적인 생각을 긍정적인 생각으로, 부정적으로 말하던 습관을 긍정적인 말을 하는 습관으로 바꾸기 위해서도 천 번, 만 번의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남들 앞에서 의식적으로 긍정적인 말을 하는 것은 100번쯤 연습하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속에 있는 부정의 생각을 긍정의 생각으로 바꾸어 무의식 중에서도 긍정적인 말을 하기 위해서는 천 번 만 번의 반복된 훈련이 필요합니다. 

시인인 이해인 수녀가 쓴 ‘나를 키우는 말’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행복하다고 말하는 동안은 
나도 정말 행복한 사람이 되어 
마음에 맑은 샘이 흐르고 

고맙다고 말하는 동안은 
고마운 마음 새로이 솟아올라 
내 마음도 더욱 순해지고 

아름답다고 말하는 동안은 
나도 잠시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 
마음 한 자락 환해지고 

좋은 말이 나를 키우는 걸 
나는 말하면서 
다시 알지.”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말을 들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한 말이 하나님의 귀에 들린 대로 우리에게 실행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행복하다고 말하는 동안은 나도 정말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고맙다고 말하는 동안은 모두에게 고마움을 가득히 담고 사는 사람이 됩니다. 아름답다고 말하는 동안 우리는 아름다운 세상에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 살아가게 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