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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복 찾기 (시 8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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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찾기 (시 84:1-6)







얼마 전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던 사진 몇 장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에게 그 중 몇 개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중국 랴오닝(遼寧)성의 선양(瀋陽)이라는 곳에 살고 있는 한 젊은이의 가정입니다.<사진1> 조그마한 공간에 살림살이를 차려놓고 아내와 이제 갓 돌이 지난 아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사진2> 그 좁은 공간에는 침대와 컴퓨터, 냉장고와 TV 등 생활에 필요한 가구들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집에 특이한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 사진을 보면서 이 집에서 특이한 점을 발견하셨습니까? 집 안에 남자화장실에나 있어야 할 소변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한 개가 아니라 2개나 말입니다. 원래 이곳은 한 호텔의 화장실이었습니다. 정링쥔(曾令軍)이란 청년이 이곳에 살게 된 사연은 이렇습니다.

지린(吉林)성 퉁화(通化)시가 고향인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업대학에 가려했지만 한해 5000위안(약 90만원)이나 되는 학비를 감당할 수가 없어 진학을 포기하고, 돈을 벌기 위해서 선양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특별한 재주도 없던 그는 그곳에서 구두닦이를 시작으로 구두수선과 열쇠수리를 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수선공의 수입으로 집을 마련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보다 더 어려웠습니다. 그러던 중 6년 전인 지난 2006년 한 친구의 소개로 사용하지 않는 호텔 화장실에 싼값에 세 들어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곳에 살면서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게 되었고, 이 화장실 집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하게 되었고 아들까지 낳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화장실이 즐거운 나의 집이다. 아내를 만나 이곳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건강한 아기도 태어났다. 난 가진 것이 많은 행복한 사람이다.”

이 이야기를 접한 네티즌들은 그 젊은이를 응원하는 댓글을 많이 올렸습니다. “욕심이 가득한 세상에서 그의 모습을 보니 반성하게 된다.” “가진 것 없이 살아도 행복하고 긍정적인 모습이 대단하다.” “정링쥔보다도 그를 사랑해준 아내가 더 대단한 것 같다.”는 등 많은 사람들이 그 젊은이와 그의 가정을 축복해 주었습니다.

여러분, 정링쥔이라는 이 젊은이가 남들 앞에 내 세울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학벌이 좋은 것도 아니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좋은 직장에 다니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부자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을 가리켜 ‘난 가진 것이 많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행복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또 한 사람을 소개해 드립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강영우 박사입니다. 그는 췌장암으로 투병하다가 지난 2월 23일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에게 붙여진 많은 수식어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시각장애인 박사’ ‘미국 백악관 정책보좌관’ ‘UN세계장애위원회 부의장 겸 루즈벨트 재단 고문’ 등 장애를 갖고서도 남들이 하지 못하는 엄청난 일들을 했던 분입니다. 14살 때 축구공에 맞아 실명한 이후 그가 그런 자리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시련을 겪었을지는 우리가 가히 다 짐작하기 힘들 것입니다. 또 사람들이 흔히 말한 대로 ‘성공한 사람’이지만, 시각 장애를 가진 그가 그 모든 일을 감당하며 산다는 것도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더욱 감동시킨 것이 있습니다. 그건 그가 임종을 앞두고 쓴 유언과도 같은 편지 때문입니다. 그는 아내에게 이런 편지글을 남겼습니다.

“아직도 봄날 반짝이는 햇살보다 눈부시게 빛나고 있는 당신을 난 가슴 한 가득 품고 떠납니다... 당신을 처음 만난 게 벌써 50년 전입니다. 햇살보다 더 반짝반짝 빛나고 있던 예쁜 여대생 누나의 모습을 난 아직도 기억합니다. 손을 번쩍 들고 나를 바래다 주겠다고 나서던 당돌한 여대생, 당신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보내주신 날개 없는 천사였습니다... 지난 40년간 늘 나를 위로해 주던 당신에게 난 오늘도 이렇게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미안합니다. 더 오래 함께 해주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내가 떠난 후 당신의 외로움과 슬픔을 함께 해주지 못할 것이라서...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그리고 고마웠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이렇게 썼습니다. “이제 너희들과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내가 너희들을 처음 품에 앉은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너희들과 이별의 약속을 나눠야 할 때가 되었다니, 좀 더 많은 것을 나누고 좀 더 많은 것을 함께 하지 못한 아쉬움이 밀려온다... 하지만 너희들이 나에게 준 사랑이 너무나 컸기에, 그리고 너희들과 함께 한 추억이 내 맘 속에 가득하기에 난 이렇게 행복한 마지막을 맞이할 수 있단다.”

여러분, 54년 동안 시각장애인으로 살아온 세월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또 췌장암으로 죽음을 앞두고 있는 그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고통스러운 죽음을 앞두고서도 너무나도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무엇이 강영우 박사로 하여금 행복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까?

정링쥔이라는 중국 청년의 모습과 강영우 박사의 모습에서 공통점을 하나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평범하게 사는 다른 사람들보다 어렵고 힘든 삶을 살았고, 또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자신을 사랑해준 사람들이 곁에 있었습니다. 중국 청년에게는 호텔 화장실에 신혼살림을 차릴지라도 함께 해 준 사랑하는 아내와 사랑하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강영우 박사에게도 앞을 보지 못한 자신을 위해서 평생 그의 눈이 되어 함께 해 준 사랑하는 아내가 있었습니다. 아내는 늘 한결같은 사랑으로 강영우 박사가 힘들 때면 위로가 되어 주었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랬기에 그 고통스러운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날 때에도 ‘행복했노라’고, ‘감사했노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은 그만큼 큰 힘을 줍니다. 사랑은 관계성입니다. 사랑에는 대상에 있어야 합니다. 대상이 없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대상이 인격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면 그 사랑은 허무로 끝나고 맙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을 사랑합니다. 때로는 가족보다도 돈을 더 사랑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나 가족보다도 돈을 더 사랑하면 그 돈의 허무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될 때가 반드시 찾아옵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했다 하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그 모든 세상의 성공과 출세가 허무한 것이 되고 맙니다. 우리 주변의 많은 이야기들이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때로는 자신이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 포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영국의 에드워드 8세(Edward VIII, 1894-1972)가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는 1894년 영국 왕 조지 5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왕실에서 귀여움과 사랑을 받고 자란 그는 1936년 1월 42세의 나이에 에드워드 8세란 이름으로 영국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그 때까지 그는 결혼을 하지 않는 독신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한 여성이 있었습니다. 심프슨 부인(윌리스 워필드)입니다.

그런데 에드워드 8세는 사랑하는 여인 심프슨 부인과 결혼할 수가 없었습니다. 영국 내에서 반대가 워낙 강했기 때문입니다. 심프슨 부인은 미국 출신인데다 이미 결혼한 유부녀였고, 이혼한 경력도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을 왕비로 맞아들이고자 했을 때 영국 왕실은 물론이고 국회와 영국 국교회가 거세게 반대했습니다. 그러다가 왕위에 오른 지 11개월이 지난 1936년 12월 11일, 그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나는 사랑하는 여인의 협력과 도움 없이는 왕으로서의 의무를 다할 수 없다.”고 선언하며 왕위를 동생인 조지 6세에게 물려주겠다는 발표하게 됩니다.

그는 왕의 자리에 남을 것이냐, 사랑하는 한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일 것이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서 왕위보다는 사랑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 후 그는 에드워드 8세라는 존엄한 칭호 대신에 윈저 공작이라는 칭호로 불리게 되었고, 그 다음해인 1937년 6월 3일 사랑하는 여인 심프슨 부인과 프랑스에서 결혼하게 됩니다. 결혼한 후 윈저 공작 부부는 주로 프랑스에서 살았고, 스페인, 독일, 포르투갈 등을 전전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동생인 조지 6세의 장례식과 어머니 메리 왕비의 장례식 등 불과 몇 차례만 조국 영국을 방문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영국 국왕이라는 자리는 온갖 부와 명예를 다 가지고 있는 자리입니다. 또 그런 왕의 자리에 있다면 얼마든지 조건이 좋은 아가씨를 왕비로 맞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오직 하나, 사랑을 선택했습니다. 사랑하는 여인을 선택했습니다. 부귀영화보다도, 또 사랑 없는 결혼보다도 사랑하는 여인과 평생 함께 하는 것이 최고의 행복임을 알기에 그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세상의 부귀영화보다도 더 소중한 사랑을 나눌 대상이 있습니까? 오늘 본문의 시인은 그 대상이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상사병이 걸린 사람처럼, 하나님을 너무너무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특히 시인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 저미는 사랑을 느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에 ‘주의 장막,’ 2절에 ‘여호와의 궁정,’ 3절에 ‘주의 제단,’ 4절에 ‘주의 집’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들은 모두 성전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해 계시는 성전, 그곳에 가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하나님의 성전을 가리킵니다. 그러기에 ‘주의 장막이 사랑스럽다’는 1절의 고백도, ‘여호와의 궁전을 사모한다’는 2절의 고백도 모두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모한다는 고백입니다.

시인이 왜 ‘주의 장막이 사랑스럽다’고 고백했겠습니까? 예루살렘 성전이 아름답고 화려하게 지어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름답게 지어진 성전에만 계시는 분은 아닙니다. 작고 초라한 성막에도 하나님께서 임재하셨습니다. 심지어 오벳에돔의 집에 법궤가 머물러 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거기에 계셨습니다.

우리 교회가 새로운 예배당을 지었습니다만, 이 새 예배당에만 하나님이 계신 것 아닙니다. 이 예배당도 오랜 시간이 흐르면 낡고 초라해질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여기에 임재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고백 역시 시인의 고백과 다르지 않습니다.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라는 고백은 예쁘고 화려한 새 예배당을 바라보며 하는 고백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은 어디든지 사랑스러운 곳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사랑할 때도 그렇습니다. 예쁘고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아가씨를 볼 때에는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다가도, 그 여인이 낡고 초라한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을 본다거나, 화장도 하지 않은 쌩얼을 볼 때에는 사랑하는 마음이 사라진다면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그가 어떤 옷을 입었든지, 그가 어떤 집에 살던지, 그가 어떤 직업을 가졌든지, 그의 건강이 좋던 좋지 않던, 그런 모든 조건을 초월합니다. 조건에 따라 변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초라한 옷을 입고 있어도 내 사랑하는 여인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 사랑입니다. 남들만큼 돈을 벌어오지 못해도 내 사랑하는 남자가 세상에서 가장 믿음직스럽고 듬직해야 합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2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궁정을 사모하여 영혼이 쇠약해졌다’고 고백합니다. 이건 분명한 상사병의 징조입니다. 너무너무 사랑하기에 온 몸에 힘이 빠지고, 사랑하는 이를 만나지 못해서 의욕을 상실하고 살맛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2절에 나오는 ‘쇠약해졌다’는 말은 ‘끝이 났다’ ‘망했다’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상사병의 정도가 얼마나 심했던지 생명이 끊어질 것만 같은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그 사모하는 마음이 얼마나 큰 가를 3절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시인은 주의 제단에 집을 짓고 사는 참새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습니다. 자신은 성전에서 멀리 떨어져 살기 때문에 아무리 사모한다 하더라도 성전을 자주 찾아갈 수 없어 몸과 마음이 쇠약해질 정도가 되었는데, 성전에 둥지를 틀고 사는 참새는 언제든지 제단을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참새가 부러울 수밖에요. 성전의 처마 끝에 보금자리를 만들고서 거기에서 새끼를 키우는 제비도 부러움의 대상입니다.

시인은 성전에 찾아갔다가 성전을 마음대로 드나드는 참새와, 성전 처마 끝에 보금자리를 만들어 새끼를 키우고 있는 제비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생각해보니, 미물인 그 참새와 제비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있습니다. 4절에서는 성전에 살면서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이 너무너무 부러웠습니다. 그들은 큰 복을 받은 사람들처럼 여겨졌습니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성전에서 봉사를 합니다. 그들은 아침에 일어나면서부터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하나님을 찬양하며 봉사를 합니다. 그것이 부러운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을 얼마나 사모하십니까?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사모하고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계신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그보다 더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실 만큼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질병을 치료해 주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에 그분으로 인해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 주신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행복합니다.

여러분, 정말 그렇습니까?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모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내가 사모하고 사랑하는 그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해 주신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하십니까? 그 행복 안에 사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행복은 삶의 여건에 따라서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 안에 머물기에 행복한 사람일지라도 그의 길에 눈물골짜기가 있습니다.

본문 5-6절에서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주나이다.” 이 말씀에서 ‘복’이라는 말은 ‘행복’이라는 말로 바꾸어도 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신앙인이 가야하는 길, 신앙인이 걷고 있는 길에도 눈물 골짜기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예수 믿고 신앙 생활한다 해서 모든 고통과 어려움에서 열외(列外)된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기도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삶에 때때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눈물 골짜기를 지나고 있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어떤 때에는 실패의 골짜기를 지나기도 했고, 어떤 때에는 질병의 골짜기를 지나서 병상에 누워 눈물을 흘릴 때도 있었습니다. 어떤 때에는 자식이 속을 썩이면서 그곳이 눈물 골짜기가 되어버릴 때도 있었고, 어떤 때에는 남편이 가슴에 멍들게 해서 눈물 골짜기가 된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눈물 골짜기를 지나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그 눈물 골짜기에 하나님께서 샘물을 공급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바짝 말라버린 눈물 골짜기 같았는데 하나님께서 거기에 이른 비를 내려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눈물 골짜기가 우리의 무덤이 되지 않고, 그곳을 통과해 오늘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큰 위로와 힘을 줍니다. 왜냐하면 지난날 내가 지나왔던 눈물 골짜기에서 샘물과 이른 비를 내려 주셨던 그 하나님께서 지금 내가 겪고 있는 눈물 골짜기에서도 샘물과 이른 비를 내려 주셔서, 반드시 이 골짜기를 지나가게 해 주실 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지금 힘들더라도 우리는 그 힘든 상황으로 인해 행복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눈물 골짜기를 사는 우리의 삶에도 우리의 사모하는 주님,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여전히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자신이 성전에서 멀리 떨어져 살고 있기 때문에 성전을 자주 찾아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상사병이 생길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성전에 둥지를 만들어 사는 참새가 부럽고, 성전 처마 밑에 보금자리를 만들어 새끼를 먹이고 있는 제비가 너무너무 부럽습니다.

그러나 그 부러움이 부러움으로만 끝나진 않습니다. 비록 몸은 성전을 찾아가지 못할지라도 마음은 이미 그곳에 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모하는 마음은 이미 하나님을 향해 달려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다”고 선언합니다.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다’는 말은 언제나 하나님을 항하여 달려갈 수 있는 마음이 되어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비록 물리적인 거리는 멀지라도 마음의 거리, 심리적인 거리, 영적인 거리는 결코 멀지 않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모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로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 마음을 하나님으로부터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한 말씀 속에서 우리는 그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로마서 8:38-39)

그렇습니다. 그 어떤 여건이나 그 어떤 사람이라 하더라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그 어떤 여건이나 그 어떤 사람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빼앗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영원히 빼앗기지 않는 사람 - 그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여러분, 행복은 결코 멀리 있지 않습니다. 행복은 우리의 가슴에 있고, 우리의 마음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에 하늘의 행복이 깃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랑 속에 행복이 깃드는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 하나님께서 주신 하늘의 행복이 가득 차게 됩니다.

미국 하버드대학교 의과대학의 니컬러스 크리스태키스(Nicholas A. Christakis) 교수와 캘리포니아대학교 정치학과 제임스 파울러(James H. Fowler) 교수가 쓴 『행복은 전염된다』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2009년 <타임>지가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선정한 의사이자 사회학자인 크리스태키스 교수는 의사로서 10년 동안 말기 환자들과 그 가족들을 돌보면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 배우자에게 얼마나 큰 충격을 주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1971년부터 2003년까지 32년 동안 12,067명을 추적해서 ‘행복의 생성과 확산’에 대해서 연구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연구결과를 ‘3단계 영향 법칙’이라고 불렀습니다.

‘3단계 영향 법칙’이라는 것은 3단계의 거리 안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고 또 영향을 준다는 이론입니다. 그 1단계는 친구이고, 2단계는 친구의 친구이고, 3단계는 친구의 친구의 친구입니다.

이런 관계성 속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주고받는 영향력을 수학적으로 분석한 결과, 1단계인 친구가 행복할 경우 내가 느끼는 행복감은 약 15%정도 높아지고, 제2단계인 친구의 친구가 행복할 경우에는 10%정도 높아지고, 3단계인 친구의 친구의 친구가 행복하면 나도 약 6% 정도의 행복 확산 효과를 얻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다 행복감을 느끼는 친구가 한 명씩 추가될 때마다 내가 행복해질 확률은 약 9%씩 증가하고, 불행한 친구가 한 명씩 추가될 때에는 내가 느끼는 행복감은 약 7%씩 감소한다고 합니다.

또 행복감을 느끼는 친구가 1마일(1.6km)안에 살고 있으면 나의 행복감은 25% 늘어나고, 행복감을 느끼는 이웃이 옆에 살고 있으면 나의 행복감이 34% 높아집니다. 그리고 형제 자매가 근처에 살고 있으면 그 자체로 나의 행복감은 14%나 높아진다고 합니다. 행복은 행복한 사람으로 인해서 전염된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한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주변에는 행복하게 살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내 주변에 행복한 사람이 많아지면 나도 더불어 행복해집니다. 혹 ‘내 주변에는 행복한 사람이 별로 없어’ 그렇게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 주위를 둘러볼 때 나에게 행복을 전염시켜줄 사람이 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행복한 미소를 지으시는 행복의 원천이신 우리 주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 주님의 행복한 미소를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 행복하고 싶으시지요? 그 행복을 어디에서 찾고 계십니까? 혹 환경이나 여건 속에서 찾고 있다면, 그리고 거기에서 찾아진 행복이라면 그 행복은 내 곁에 결코 오래 머물지 않을 것입니다. 행복은 관계성 속에서 찾아지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관계가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성 속에서 참된 행복이 찾아집니다. 그리고 그 관계성 가운데 영원히 단절되지 않는 관계는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은 영원히 잃어버리지 않는 행복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하늘의 행복이 우리의 마음에 있는 시온의 대로를 통해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공급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변하는 것들에서 행복을 찾지 마십시다. 여건이 변하면 행복도 불행으로 바뀌어지고 말 것입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만 행복을 찾으려 하지 마십시다. 사람의 관계도 언제나 한결같지 않습니다. 언젠가 단절될 때가 올 수도 있고, 변질될 수도 있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행복을 찾는다면, 우리는 영원히 마르지 않는 행복의 샘에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행복의 물을 길어 올릴 수 있습니다. 행복 찾기의 1순위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사모하는 주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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