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사람 쓰심 (왕상 19:9-14)

첨부 1


사람 쓰심 (왕상 19:9-14)
   
엘리야는 그 유명한 갈멜산 전투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싸웠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스라엘 왕 아합과 싸웠고, 왕후 이세벨과 싸웠습니다. 그런 그가 지금 로뎀나무 아래에 쓰러져 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귀를 기울여보니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라는 탄식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왕상 19:4). 그는 지금 죽기를 자처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가 죽기를 자청하고 있을까요? 

‘나는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났습니다.’ ‘오직 나만 남았습니다.’(왕상 19:10,14).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들이 우상 앞에 무릎을 꿇고 불의와 타협하며 세속화되어 버리고 비진리와 손잡는 상황에서 자신은 그렇지 않았고, 자신만은 바르게 올곧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홀몸으로 도대체 무엇을 하겠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뎀나무 아래에 쓰러졌고, 바로 이것이 그가 죽기를 자청하는 이유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부드러운 손길로 어루만지며, 나지막하게 속삭이십니다. ‘일어나서 먹으라’(왕상 19:5).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왕상 19:7). 엘리야는 먹고 또 눕습니다. 하나님이 일으키시면 일어났다가 또 깊은 굴속으로 들어가 몸을 웅크립니다. 이런 엘리야를 향해 ‘네가 어찌 여기 있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책망입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는 계속 ‘나는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났습니다.’ ‘오직 나만 남았습니다.’란 말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런 엘리야를 보면서 느끼는 점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그는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깁니다. 둘째, ‘나’를 강조하면서 드러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계속 ‘나’, '나‘를 읊조리고 있습니다. 셋째, 그는 죽을 생각이 애당초 없었던 것 같습니다. 주는 대로 먹고, 마셨습니다. 그러므로 죽겠다는 말은 오히려 자신의 존재감을 부각시키기 위한 액션과 충격요법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이런 엘리야를 향해 일절 반응을 보이지 않으십니다. 인정도 칭찬도 동의조차 하지 않으십니다. 먼저, 그를 향해 이렇게 답하십니다.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왕상 19:16). 

자기만 지금까지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나다고 생각했는데, 자기가 없으면 아무 일도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제 그만하고 저 논에서 밭 갈고 있는 엘리사에게 너의 일을 넘겨줘라. 인계해라. 이제 쉬어라’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다음을 다 계획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혼자 남았다는 엘리야를 향해 하나님은 또 답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왕상 19:18). 엘리야는 크게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어떻게 쓰시는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지 못한 채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쓰시는 대원칙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사람을 쓰십니다. 하지만 사람에게 결코 얽매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바울, 어거스틴, 루터, 칼빈을 쓰셨습니다. 한국교회의 주기철 목사, 조만식 장로, 손양원 목사, 한상동 목사, 한경직 목사, 옥한흠 목사, 하용조 목사를 쓰셨습니다. 저들의 능력, 열정은 그야말로 유별났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저들의 열정, 능력에 얽매이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쓰십니다. 하지만 사람 숫자에 얽매이지 않으십니다. 사사 기드온 시대에 메뚜기 떼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적군들이 쳐들어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22,000명을 돌려보내셨습니다. 남은 10,000명 중에서 결국 300명이 남아 그 300명으로 적군들을 다 물리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을 사용하셨습니다. 하지만 사람 숫자에 얽매이는 분이 절대 아니십니다. 

모세가 죽었습니다. 그의 열정은 예수님과 비교되고 있을 정도였습니다(히 3:1-2). 온 이스라엘은 충격과 비통에 휩싸였습니다(신 34:8). 하지만 하나님은 지극히 담담하셨습니다.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는 모세와 상대가 되지 않는 인물입니다. 그래서인지 성경 저자까지도 모세는 ‘여호와의 종’, 여호수아는 ‘모세의 종’으로 묘사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음 사람을 세우시고, 일을 계속하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담담하십니다. 모세 대신 여호수아를, 엘리야 대신 엘리사를, 바울 대신 디모데를 통해 일해 나가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를 일할 수 있는 자리에 세워주셨을 그때 엘리야처럼 열심히 일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제 쉬어라’ 하시면 후배들, 어설프고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지만, 그냥 맡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제 그를 사용하시며, 그를 통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전도서 기자는 3장에서 때에 관하여 말씀합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전 3:1). 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섬길 때, 때에 민감해야 합니다. 물러나는 용기, 내려놓는 자세, 침묵의 지혜, 더 나아가 모세나 엘리야처럼 눈앞에서 사라져버리는 과감함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을 쓰시지만 그 사람의 열정, 유별남, 그리고 숫자에 얽매이는 분이 결코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연출가이십니다. 우리는 배우일 뿐입니다. 그분이 무대에 올라가라 하시면 올라가서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죽도록 충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내려오라 하면 내려와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야 합니다. 자신의 존재감을 엘리야처럼 드려내려고 충격요법을 사용하고, 아등바등하며 죽겠다고 자살소동을 벌이는 유별난 행동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모두가 다 사명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사명자의 입에서는 이런 말이 나오면 안 됩니다. ‘나만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납니다.’ ‘오직 나만 남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는 분이십니다(고전 1:27). 

오늘 우리는 직분자를 선택하는 공동의회를 가집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쓰십니다.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하지만 사람의 열정, 사람의 숫자에 절대로 얽매이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만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나다’ ‘오직 나만 남았다’는 것은 교만 중의 교만입니다. 하나님은 시대 시대마다 일꾼들을 예비해놓고 계십니다. 약한 사람, 부족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나라를 건설해가시기를 원하십니다. 이 믿음과 확신 위에서 우리가 세울 자를 세우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옥성석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