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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 후의 사십일을 기억하라 (민 13:25-27, 행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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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후의 사십일을 기억하라 (민 13:25-27, 행 1:3-5)

49재(齋)라는 불교의식이 있습니다. 원래 우리나라의 전통신앙과 불교사상이 혼합된 의식입니다. 망자의 한을 달래주어 구천을 떠돌지 않고 갈 곳으로 안내하는 천도의식입니다. 죽은 영혼이 49일 동안 중유로서 다음 생애에 받을 연을 정한다고 합니다. 7일 간격으로 49일간 재를 올립니다. 윤회사상에 근거한 의식으로 다음 생에 좋게 태어나게 하기 위하여 이 의식을 합니다. 

초칠재 부터 칠칠재까지 재가 끝나면 비로소 죽은 영혼이 떠나간다는 것입니다. 죽은 영혼이 떠나지 못하고 머물고 있다는 불교의 사상은 주님이 부활하신 다음 40일동안 머무셨다는 것과는 근본이나 차원이 다릅니다. 49재는 자기의 한 때문에 떠나지 못하고 머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40일은 잠시도 머물고 싶지 않은 곳이지만 우리를 위해 더 머무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6:17에는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가시는 것이 유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0일을 더 머무신 것은 중요한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40이란 수는 세상적 만수입니다. 꽉 찬 수라고 합니다. 더함도 모자람도 없는 수입니다. 동서남북을 상징하는 땅의 수인 4를  열배를 곱한 수가 40입니다. 성경에는 40이란 수가 상당히 많이 나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간화는 하나님의 놀라운 세상을 사랑하신 방법이었습니다. 세상에 오심과, 죽으심과 모든 수치와 고통을 부활한 다음에 또 기억하고, 이 땅에 더 계시고 싶겠습니까? 심하게 고생한 곳이나, 좋지 못한 기억이 있는 곳이나, 보기 싫은 사람이 있는 곳은 다시 쳐다보기도, 생각하기도 싫은 것이 인간의 상정인데 이 땅에 뭐가 좋아서 더 머물고 싶겠습니까?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 같으면 머물고 싶은 곳이 아니겠지만 예수님은 머물고 싶은 곳이 맞습니다. 
  
갈릴리에서 보리라고 하신 예수님은 가르침을 복습하게 하셨습니다. 그 가운데 40일은 가르침의 가장 핵심인 하나님의 나라를 복습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인간이 되시는 인간화의 계획부터 모든 것이 인간 구원이며, 인간 사랑이며, 하나님의 나라이며, 복음전파였습니다. 그래서 이 일을 위하여 40일을 이 세상에 더 계신 것입니다. 
  
“인생은 나그네 길, 미련일랑 두지 말자”는 가요의 가사도 있습니다. 이 세상은 미련을  둘 만한 곳이 못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세상에 미련이 있었습니다. 왜 미련을 버리지 못하셨습니까? 이 땅에서 모진 고통을 당하셨지만 친히 말씀으로 창조하신 세상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미련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을 쏟았으니 미련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복음 13:1에는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하십니다.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러 오셨으니 어떻게 하든지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해야 했기에 미련을 두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후 40일 동안 이 세상에 더 계신 시간을 통하여 승천하시기 전 예수님을 다시 생각하고, 다시 만나고, 다시 말씀 듣고, 끝까지 사랑을 나누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살아 계신 확실한 증거를 보이셨습니다. 

사도행전 1:3 상반절에는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건은 우리의 부활에 대한 증거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이미 말씀하신 것을 다시 사심으로 이루신 것을 보여주어 확신하게 한 40일입니다. 
  
요한복음 2:19에는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사람들은 이 성전은 46년 동안 지었는데 어떻게 3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고 오해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에 사람들은 살아나신 주님을 보고 진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은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 동안 이해하지 못했던 말씀을 알게 하신 40일이었습니다.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두개인에게 부활을 증거하셔서 보게 하셨습니다. 부활이 없다고 하지 말고 살아난 확실한 증거를 보라고 하셨습니다. 부활이 거짓이라는 유대인들에게 살아서 보이심으로 자기들이 십자가에 못 박고 부활이 거짓이라고 하며,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갔다고 한 사실을 똑똑히 보라고 하셨습니다. 부활을 부정하려는 로마군인들에게도 부활하신 모습을 통하여 부활을 보고 믿게 하셨습니다. 로마인 총독인 빌라도의 재판이 얼마나 잘 못된 것인지 보게 하셨고, 무덤을 지키던 세계 최강 군인들이 지켜도 필요 없음을 살아난 주님을 통하여 보라고 하셨습니다. 
  
살아나신 예수님을 유령으로 생각했던 제자들에게도 유령이 아니라 다시 육체로 살아난 것을 보게 하셨습니다. 부활이 아니라 너무 보고 싶은 나머지 환각을 일으켰다는 사람들에게 한꺼번에 150명에게 나타나셔서 함께 보므로 환각이 아닌 것을 보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육체로 다시 사신 주님을 모두가 보게 하기 위하여 40일을 더 계셔서 부활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확실히 믿게 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28:6에는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 시체로 계시지 않고, 누워계시지 않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와서 보라”고 하셔서 예수님의 육체로 살아나심을 확인하게 하셨는데 40일 동안 이 일을 계속하시며 확인하게 하셨습니다. 
  
무덤이 빈 순간부터 예수님의 부활, 육체로 다시 살아나심을 확인하라고 천사를 통하여 말씀합니다. 와서 보고 믿으라고 말씀합니다. 도마에게는 손으로 만져보고 손을 넣어보고 믿지 못하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만져보라”, “넣어보라”고 하신 말씀은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살아계심을 확인시키신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15에서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심은 그에게 너무나 확실하였습니다. 그 확실한 부활을 보여주시려고 40일간 계셨고 모두가 그리스도의 살아계심을 믿게 하려고 하셨습니다.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를 믿을 때 네 가지 차원에서 그분과 불가분의 관계로 연합됩니다. 첫째는 그분의 죽음과 연합됩니다. 둘째는 그분과 함께 묻힙니다. 셋째는 그의 부활에 우리가 연합됩니다. 넷째는 지금도 살아계신 그리스도와 연합됩니다. 살아계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다는 것은 믿음의 가장 큰 차원이며 소득입니다. 
  
존 칼뱅 지적했듯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변화를 체험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참 지식이란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말미암아 변화와 갱신이라는 거역할 수 없는 물결에 휩쓸리게 되면서 신자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이르게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남이 신앙의 뿌리입니다.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만나고 듣는 모두가 참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시려고 40일을 더 이 세상에 머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살아나셔서 계시는 것은 가장 강력한 예수님의 메시지입니다. 말씀과 기적의 핵심이 부활로 증명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두루두루 모든 사람에게 보이시기 위하여 40일이 필요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며, 우리의 부활도 없습니다. 
  
‘부흥’이란 말의 영어는 ‘revival’입니다. 이 말은 “죽었던 것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활은 부흥입니다. 부활을 통하여 우리의 삶이 부흥합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삶이 부흥하는 은총을 누립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믿어야 부흥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살아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 근심 전혀 없네, 사랑의 주 내 갈길 인도하니 내 모든 삶의 기쁨 늘 충만하네”. 이 찬송은 얼마나 힘이 있고, 부를 때마다 은혜가 되는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살아계시고 보이심으로 가능한 찬송입니다. 주님의 살아계심으로 우리 삶에 기쁨이 늘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3 하반절에는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부활로 성취되는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었습니다. 다시 사심이 없으면 하나님의 나라도 없습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죽습니다. 그리고 다시 살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다시 사신 목적입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 자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오심, 예수님의 말씀하심, 예수님의 일하심, 예수님의 죽으심, 예수님의 살아나심, 예수님의 승천, 예수님의 다시 오심, 이 모든 것의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때문에 이 세상에 오시고, 말씀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40일을 세상에 더 계시고, 다시 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다락방 강화에서는 “다시 와서 너희를 나 있는 곳에 있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나 있는 곳”이 어디입니까?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주제이며 전 생애의 핵심인 하나님의 나라를 복습하게 하시려고 40일을 더 계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4:17에는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처음 선포하신 말씀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첫 선포는 가장 중요한 말씀이란 말입니다. 석가는 태어나서 첫 마디가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하였다는데 예수님의 첫 선포와 비교가 됩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마태복음 4:23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하나님의 나라 복음의 3대 사역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3대 사역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의 전파입니다. 왜냐하면 3대 사역 가운데 부활 후에 다시 복습하고 반복하신 것은 하나님의 나라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후에 다시 산상보훈 같은 말씀을 하셨다든지 기적으로 사람을 고치신 흔적이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나라만 전파하신 것으로 봐서 가장 귀한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유토피아’는 1516년 토마스 모어의 라틴어 공상소설에서 나온 말입니다. 소설의 원래 제목은 ‘국가의 최선 정체’이었는데 우리는 흔히 ‘유토피아’로 알고 았습니다. ‘유토피아’란 어원적으로 말하면 ‘좋은 땅’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의미로는 ‘어느 곳에도 없는 곳’이란 뜻입니다. 유쾌한 이야기 형식으로 당시 부패한 기독교 사회를 개혁하려고 했던 소설입니다. 그 후로 ‘유토피아’는 이상향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샹그리라’는 1933 제임스 힐튼이 쓴 소설 ‘사라진 지평선’에 나오는 지명입니다. 영국 남자가 티베트 ‘샹그리라’ 계곡에서 낙원을 찾았다는 내용입니다. 스페인 사람들은 전설적 황금의 나라 ‘엘도라도’가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나라 제주도 남방의 바다 속 꿈의 나라 ‘이어도’도 상상의 이상향입니다. 이 모든 이상향들은 인간이 만든 상상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께서 만일 부활하지 않으셨으면 막연한 상상의 나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셔서 살아계심을 보이심으로 확실한 나라임을 증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만든 그런 상상의 이상향이 아니라 실재하는 영원한 복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후 40일은 사도들의 평생의 힘이며, 확신이며, 신앙이 되었습니다. 다른 사도들이 다 그러했지만 특히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기 위해 생명을 버렸습니다. 로마까지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했습니다. 그가 죄인의 신분이었지만 이것 때문에 간 것이 아닙니다. 로마 시민권자였지만 이것 때문에 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가 고소를 당해서 갔지만 이것 때문에 간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로마에 간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8:30-31에는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고 합니다. 바울의 전파와 삶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직접적인 연관을 맺고 있는 이야기들입니다. 공생애 동안에 일어났던 일들을 다시 설명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의 이야기가 곧 하나님의 나라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주제일 뿐만 아니라 사도들의 선포의 주제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 자체가 생명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복음의 핵심인 것입니다. 

  
결론 

아프리카 마사이족의 용맹은 익히 알고 있습니다. 원래 이들은 순한 사람들이었지만 항상 다른 부족에게 당하기만 하니까 어느 추장이 부족에게 생고기를 먹게 하여 점점 포학해지고 싸움을 잘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로마제국은 마사이족의 힘을 이용하여 제국을 확장하였다고 합니다. 마사이들은 소를 키우는데 이들은 모든 소가 자기들 소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소는 중요한 그들의 삶의 도구입니다. 
  
한 번은 마사이의 소가 젖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도 젖이 없었습니다. 믿기 어려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무슨 일 때문에 소가 젖을 만들지 못하는지 궁금하였습니다. 한 번은 젊은 마사이가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지켜보았습니다. 한 밤에 선녀가 하늘에서 바스켓을 들고 와서 소의 젖을 다 짜서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다음날에도 또 와서 젖을 짜서 가지고 갑니다. 젊은 마사이는 덫을 놓아 선녀를 잡기로 하고 덫을 놓아 선녀를 잡았습니다. 
“왜 우리 소 젖을 훔쳐갑니까?” 
“하늘나라에 먹을 게 없어서 가지고 갔습니다. 나를 풀어주면 원하는 것을 다 해드리겠습니다”. 

젊은 마사이는 선녀에게 자기와 결혼해 달라고 했습니다. 선녀는 삼일 동안만 시간을 주면 하늘나라에 가서 작별을 하고 돌아와서 결혼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삼일이 지나자 선녀가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결혼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있다고 하면서 통 하나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 통은 절대로 열어보면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젊은 마사이는 절대 보지 않겠다고 약속을 하고 결혼하였스니다. 약속은 했지만 그 통 안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하고 보고 싶었습니다. 

어느 날 선녀가 없는 동안 통을 열어보았습니다. 그런데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젊은 마사이는 화가 나고 실망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밖에 나갔던 아내 선녀가 들어오자마자 눈치를 챘습니다. 벌써 남편의 인상이 이상했습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이 통을 열어봤지요?”라고 하였습니다. 남편은 “봤는데 아무 것도 없었고, 나는 아무 것도 가지지 않았소”하고 말했습니다. 

아내는 “아무 것도 없는 게 아니라 하늘나라의 공기, 냄새, 색깔이 가득합니다. 내가 하늘나라가 그리울 때마다 열어봤습니다. 나는 당신과 함께 살 수 없습니다. 상자를 열어봤기 때문이 아니라 내게는 생명 같은 것을 아무 것도 없다는 당신과는 살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사랑하시던 생명 같은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여기고 살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그렇게 전하기를 원했던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야 우리가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그것 때문에 하늘로 올라가시지 못하고 40일을 더 계셨던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해야 참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다시 사신 우리 주님께서 전하신 하나님의 나라의 그 공기, 냄새, 색깔을 우리도 전하며 40일의 감격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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