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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변함 없는 사랑 (엡 6: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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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함 없는 사랑변함 없는 사랑 (엡 6:23-24)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을지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약1:16-18)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1. 조선의 3대 요부를 들면, 장녹수와 장희빈 그리고 정난정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드라마의 단골 소재가 될 정도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인물들입니다. 그 중 임금의 사랑스러운 애첩이었던 장녹수와 장희빈은 궁궐 깊숙한 곳에서 ‘왕실 정치’를 했다는 점에서 상당 부분 비슷합니다. 장희빈은 숙종의 총애와 세자의 어머니라는 이점으로 민비의 뒤를 이어 중궁전 주인자리를 꿰차기에 이르렀습니다. 

특히 장희빈은 정권의 묵인 아래 그 오라비 장희재와 더불어 포악함이 극에 달했습니다. 장희재의 집 앞은 뇌물과 각종 재물을 바치기 위한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뇌물의 값에 따라 벼슬이 나누어지는 매관매직에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참으로 장희빈과 장녹수 이 여인들은 사랑을 이용하여 조정을 좌지우지하는 권력의 중심에서 조선을 자신의 치마폭 속에 놀렸던 여인들이었습니다. 

기존에 출간되어진 역사 소설이나 TV에서 방영된 역사 드라마 속에서도 ‘장희빈’은 그야말로 교묘한 온갖 술수를 모두 동원하여 조선시대의 정치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했던, 대단 했지만 결과적으로 표독함의 상징으로 조차 표현되어진 부분이 거의 주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은연중에 매체 등을 통해 장희빈이 악녀였고, 죽는 순간까지도 철저하게 악녀였음을 기억하고, 또한 그렇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면 장희빈은 사극에 그려진 대로 정말 악녀였을까? 사극 <장희빈>에서는 장희빈의 타고난 성품이 사악했다고 보았습니다. 개인적인 성정에 주목해 표독스러운 장희빈의 이미지를 만들어냈을 뿐, 장희빈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주변의 사정이나 시대적인 배경은 크게 고려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매체 속의 장희빈은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배운 것이 없고, 덕이 부족했습니다. 따라서 거친 성정을 타고나서 요악(妖惡)을 일삼는 인물로 그려졌습니다. 이처럼 개인의 선천적인 품성을 강조하다 보니 역사적 배경이 모호한 사극이 만들어짐으로써, 장희빈이 살던 시대와 사회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즉, 매체는 장희빈의 한 면, 요부이고 악녀인 면만 들춰냄으로써 우리 일반 대중들의 눈을 고정시켜버렸고, 장희빈이 “악녀 장희빈”으로 각인시키는 데 한 몫 한 셈인 것입니다. 과연 장희빈은 약녀였을까? 그러나 장희빈, 그녀의 출생에서부터 후에 사약을 받기까지 근본적으로 장희빈이라는 인물 자체뿐만이 아니라,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정치적, 사회적 문제를 함께 살펴본 일부 사학자들은 장희빈이 ‘시대의 악녀’가 아니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시각에서 이러한 ‘장희빈’을 사랑이라는 시각에서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장희빈’은 바로 조선의 19대 임금인 숙종, 그 한 사람을 위한 변함없는 사랑을 쏟아 부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장희빈은 인형왕후를 살해하려다 발각되어 그토록 사랑했던 지아비인 숙종에 의해 사약을 받아 죽음을 당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어찌 생각하든 관여치 않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친 여인, 종국에는 사랑을 위하여 목숨까지 내놓으며 자신의 사랑을 지킨 여인, 참으로 애절하고 안타까운 사랑이라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치, 사회적 논리에 얽힌 사랑이라면 그 또한 지고지순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장희빈의 사랑은 사랑과 권력이 버물어진 역사의 흙탕물입니다. 사랑의 의미가 너무도 쉽사리 변질되고 있는 요즘 세태(世態)을 돌아볼 때, 어쩌면 숙종을 향한 ‘장희빈’의 변함없는 사랑을 어떻게 평가할까요? 너무도 쉽게 사랑을 하고 쉽게 이별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사랑의 가치가 추락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도 쉽게 뜨거워진 사랑이 쉽게 식어 버리는 것은 그나마 양호하다고 생각되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렵사리 사랑을 시작했던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얻기까지의 어려웠던 기간은 생각지도 못한 채 갖은 핑계거리를 들먹여 대며 각자의 길을 걷고자 하는 모습을 보면 한없이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2. 구약 호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결혼한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정한 호세아의 신부는 품행이 불량하고 음란한 여인 고멜이었습니다. 고멜은 신부라기보다는 창녀였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창녀와 결혼해서 자식까지 낳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식들을 낳자 하나님께서 직접 이름까지 지어 주셨는데 그 세 자녀의 이름을 ‘이스르엘’과 ‘로루하마’, ‘로암미’였습니다. 이들 이름은 각각 ‘하나님께서 흩으시다’, ‘사랑을 받지 못하다’, ‘내 백성이 아니다’라는 뜻으로 축복이 아니라 저주의 이름들입니다. 

호세아의 결혼은 한 마디로 비극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인지라 버릴 수도 없고, 사랑할래야 도저히 사랑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 여인과의 결혼생활이 어찌 행복할 수 있었겠습니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도대체 왜 거룩한 선지자에게 뼈아프고 비극적인 결혼을 명령하셨겠습니까? 고멜과 같이 음란한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슬프고 괴로운 마음을 체험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네가 하나님의 ‘아픈 사랑’을 실감나게 네 백성들에게 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픈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고서야 어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선지자가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온갖 우상숭배로 영적으로 음탕한 여인과도 같은 이스라엘 백성을 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아픈 사랑’을 가슴에 품고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로 인류에게 호소하는 하나님의 ‘아픈 사랑’, ‘아픈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또 명령하십니다. 자식들을 주렁주렁 낳고도 옛 생활을 끝내 버리지 못해 집을 뛰쳐나가 창기로 돌아간 고멜을 몸값을 지불하고 다시 데려오라는 것입니다. 고멜의 몸값으로 지불해야 할 비용이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이었습니다.(호3:1-3) 이 정도의 몸값은 천한 신분의 노예의 몸값이었습니다.(출21:32,레27:4) 그만큼 음란하여 사랑할 가치가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호세아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하나님 명령에 순종합니다. ‘몸값을 지불하고 데려오라’는 것이 바로 인류의 죄 값을 치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 값을 지불했다는 것은 그 죄를 없앴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순결한 처녀로 신부삼겠다는 것입니다. 이를 호세아2:19-20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호2:19-20) 내가 네게 장가 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 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여기, “내가 네게 장가들리라”는 것은 허물 없는 순결한 처녀와의 혼인을 의미하는 것이지 가출하여 탕녀가 되어버린 아내를 다시 받아들인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으로 백합화같이 순결하고 아름다운 처녀로 삼아 결혼하여 영원히 함께 살겠다는 것입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그가 과거에 어떠한 삶을 살았든지 불문하고 백합화같이 아름답고 순결한 처녀로 삼아 “새 언약”(혼인)으로 백년가약, 아니 영원한 가약을 맺겠다는 것입니다. 이를 아가서 4:7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나의 사랑 너는 순전히 어여뻐서 아무 흠이 없구나.” 

또한 아가서 2:2은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구나.” 며 노래하고 있습니다. 백합화는 아름다움과 순결을 상징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의 아름다움과 순결함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말미암아 고멜과 같이 더러워진 우리가 아름답고 순결한 처녀로 사랑을 받게 되었음을 말합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신앙 안에 있기만 하면 제 아무리 고멜같은 사람일지라도 아름답고 순결한 백합화가 될 수 있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영광스러운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믿음 안에 있으면 누구든지 과거의 더러운 모든 것을 깨끗이 씻어 버리고, 거룩하고 ‘새로운 혼인’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성도는 호세아가 그의 비극적이고 고통스런 고멜과의 결혼을 통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아픈 가슴, 아픈 사랑을 체험했듯이,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을 가슴에 안고 살아야 합니다. 성도는 그 사랑의 고통을 통해 이 시대의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아픈 가슴을 이해하고 그 아픈 가슴을 싸매며 치료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고통의 십자가 못자국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픈 사랑’을 증명해 보여주었던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손과 발에 못자국과 옆구리에 창자국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에 아파하고 고통당하는 우리의 이웃들은 여러분의 못박힌 손과 발, 창에 찔린 옆구리를 보여 달라고 소리 없이 절규하고 있습니다. 세상 모두 사랑 없어 냉랭함을 알아야 합니다. 곳곳마다 사랑 없어 들려오는 탄식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곳곳마다 번민함은 사랑 없는 연고입니다. 그들 모두 손을 펴고 사랑받기 원하고 있습니다. 고통과 근심 걱정 많지만 사랑 없는 까닭에 실망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에 대해 참으로 예수 사랑가지고 나타내지 않으면 저들은 실망하게 됩니다.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을 전하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호세아11:1-9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 내가 그를 내 아들처럼 사랑하여 애굽에서 불러내었느니라. 그러나 내가 그를 부를수록 그는 점점 더 멀리 나를 떠나 바알에게 제사하며 그 우상들에게 분향하였느니라. 그럼에도 내가 이스라엘에게 걷는 법을 가르치고 내 팔로 그를 안았으나 내가 그를 돌보고 있음을 그는 알지 못하였느니라. 그래도 내가 그 백성을 사랑의 줄로 이끌며 그들의 목에서 멍에를 벗기고 내가 구부려서 그들을 먹였느니라...이스라엘아, 내가 어떻게 너를 포기할 수 있으며 내가 어떻게 너를 버릴 수 있느냐? 어떻게 내가 너를 아드마같이 대할 수 있으며 어떻게 너를 스보임처럼 되게 할 수 있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니 네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불붙듯 일어나는구나. 내가 다시는 나의 분노로 너를 벌하지 않고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을 멸하지 않을 것이니라. 이것은 내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기 때문이니라. 나는 너와 함께 하는 거룩한 자이므로 내가 분노로 너에게 나아가지 않을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아들처럼 사랑하여 애굽에서 구원했지만, 그들은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음란하게도 우상숭배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들을 걸음마에서부터 가르치고 사랑의 팔로 안고 돌보셨지만 그 사랑 역시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아, 내가 어떻게 너를 포기할 수 있으며 내가 어떻게 너를 버릴 수 있느냐?”고 반문하신 것처럼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사랑으로 이스라엘을 변함없이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이스라엘이 불쌍하여 오히려 그 생각과 사랑이 불붙듯 일어나신다는 것입니다. 비록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할지라도 결코 그들을 영원히 멸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냐? 그 이유를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내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기 때문이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거짓하거나 변개(變改)치 아니하시고 한번 선택하시고 목적하신 바를 끝까지 이루시는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이같은 진실되시고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두고 두고 말씀하셨습니다. 

(민23:19)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삼상15:29)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

(말3:6)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

(사49:15-16)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아들처럼 사랑하시어 애굽에서 구원하셨으므로 끝까지 사랑으로 인도하여 멸망치 않도록 보호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을 향한 이같은 사랑을 믿고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을 두고 그 사랑을 이렇게 고백하시고 있습니다. 아가서1:5-6입니다.

(아1:5-6) 예루살렘의 여자들아, 나는 비록 검지만 아름답단다. 내가 검은 천막처럼 그을렸어도 솔로몬 궁전의 휘장처럼 아름답단다. 내 피부가 검다고 나를 흘겨보지 말아라. 햇볕에 그을렸을 뿐이란다. 내 오빠들이 화를 내어 나를 포도원에서 일하게 하였으므로 내가 몸을 돌볼 시간이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된 성도들이 포도원에서 일하는 천한 신분이어서 햇볕에 그을려 그 피부가 비록 검지만, 그래서 그을린 피부를 돌볼 시간도 없어 검은 천막처럼 새까맣게 그을렸을지라도 솔로몬 궁전의 휘장처럼 아름답게 여기시고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누가 뭐라 해도 전혀 흠이 없는 아름다운 신부로서 성도 여러분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아4:7) 나의 사랑 너는 어여쁘고 아무 흠이 없구나

그리고 그 사랑에 변함이 없으실 뿐만 아니라 사랑하므로 병이 날 지경으로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아5:8) 예루살렘 딸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내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가서8:6-7입니다.
당신은 나를 인장 반지처럼 당신의 마음에 간직하고 도장처럼 당신의 팔에 새기세요.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며 질투는 무덤처럼 잔인하여 맹렬한 불처럼 타오릅니다. 많은 물도 사랑의 불을 끌 수 없고 홍수라도 그것을 소멸할 수 없으니 사람이 자기 재산을 다 주고 사랑을 사려고 해도 오히려 비웃음만 살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지고지순(至高至純)하신 사랑은 전 재산을 다 주고도 살 수 없습니다. 아니 그 보다 세상 모든 것을 다 준다 해도 그 사랑을 살 수 없습니다.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은 바로 이러한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항상 잊지 아니하고 사시기 바랍니다.


4. 하나님의 그 죽음보다 강하며 맹렬한 불처럼 타오르는 사랑, 그리고 그 변함없는 사랑을 받고 있는 성도 여러분은 그 사랑에 변함없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다윗 왕 휘하의 유명한 장수 중 하나인 요압이 있습니다. 요압은 다윗과 함께 수많은 전쟁에 참전했던 군사령관이었습니다. 

B.C.990년경 다윗이 왕궁 옥상을 거닐다 건너편에 한 여인이 목욕하는 모습을 내려다 보았는데 그 여인은 아주 아름다웠습니다. 다윗은 이내 왕궁으로 끌어들여 그 여인과 정을 통했습니다. 다윗이 간통한 여인은 충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였습니다. 얼마 후 밧세바가 임신하게 되자 다윗은 자신의 간통죄를 감출 도리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 사실을 교묘하게 감추기 위해 전쟁터에 나가 있는 충신 우리아에게 휴가를 주어 그의 아내 밧세바와 동침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아가 ‘저의 상관이신 요압 장군과 왕의 모든 신하가 벌판에서 진을 치고 있는데 어찌, 저만 홀로 집으로 돌아가서, 먹고 마시고, 나의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 할 수가 있겠습니까?’라며 거절합니다. 이에 다윗은 요압 장군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너희는 우리아를, 전투가 가장 치열한 전선으로 앞세우고 나아갔다가, 너희만 그의 뒤로 물러나서, 그가 적군에 의해 맞아서 죽게 하라.’ 는 것이었습니다. 요압 군사령관은 왕의 지시대로 행하여 결국 충신 우리아는 영문도 모른 채 살해된 것입니다. 다윗과 요압이 공모해서 자신의 간통죄를 덮으려고 충신을 죽인 것이었습니다. 

요압은 그 뒤 다윗 왕의 아들 압살롬의 반란을 진압하고 압살롬을 처형하기도 했습니다. 다윗은 아무리 반란을 일으켰을지라도 자기 아들인지라 죽이지는 말라고 신신당부했지만 요압 장군은 거침없이 머리털이 상수리나무에 걸려 매달린 압살롬의 심장을 찌르고 쳐죽였습니다. 다윗 왕이 압살롬의 죽음을 두고 ‘(삼하19:4) 큰 소리로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고 통곡하자 요압 장군은 심히 못마땅해 하기도 했습니다

(삼하19:5-7) 그 뒤 불량배 세바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다윗 왕은 새로운 군사령관으로 아마사를 임명하고 반란군을 진압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아마사와 알력관계에 있던 요압이 자기 지위를 되찾기 위해 아마사를 살해합니다. 요압은 아마사를 찾아가 반갑게 인사하는 체 하면서 칼을 빼들어 아마사의 배를 찔러 살해한 것입니다. 

또한 요압은 기브온 전투에서 적장 아브넬에게 동생 아사헬이 죽임당하자 훗날 복수하게 됩니다. 아브넬이 다윗에게로 망명했을 때 뒤쫓아가 살해한 것입니다. 이러한 요압의 행적을 눈여겨왔던 다윗이 죽을 날이 임박하자 아들 솔로몬에게 유언합니다. 그 유언 중 하나가 요압에 대한 것인데, 그를 이렇게 유언합니다.

(왕상2:5-6)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내게 행한 일 곧 이스라엘 군대의 두 사령관 넬의 아들 아브넬과 예델의 아들 아마사에게 행한 일을 네가 알거니와 그가 그들을 죽여 태평 시대에 전쟁의 피를 흘리고 전쟁의 피를 자기의 허리에 띤 띠와 발에 신은 신에 묻혔으니 네 지혜대로 행하여 그의 백발이 평안히 스올에 내려가지 못하게 하라

이후 솔로몬 집권 당시 요압은 제사장 아비아달과 함께 아도니야의 반역을 선동하고 반역음모에 가감했습니다. 솔로몬이 반역 일당을 제압하자 요압이 도망했지만 결국 잡혀 처형되고 말았습니다. 사실 다윗 왕이 일찍이 왕명을 거역하고 압살롬을 죽인 것이나, 새로 임명된 군사령관 아마사를 살해한 것, 그리고 망명해온 아브넬을 살해한 것 등을 두고 다윗이 얼마든지 요압을 처형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요압을 직접 처형하지 못한 이유를 들자면,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죽을 때 요압의 도움을 받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를 직접 죽이지 못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요압을 처형할 때 솔로몬 왕이 이렇게 그 이유를 말합니다. 

(왕상2:28) ....이는 그가 다윗을 떠나 압살롬을 따르지 아니하였으나 아도니야를 따랐음이더라.

“다윗을 떠나 압살롬을 따르지 아니하였으나 아도니야를 따랐음이더라.” 이 말은 요압이 압살롬의 반란 당시 압살롬의 반란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다윗 왕이 늙어 죽는 날이 가까워오자 세력이 커 보이는 아도니야의 반역에 가담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요압은 왕에 대해 끝까지 충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켜주십니다.

(사26:3)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

(시112:8) 그의 마음이 견고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의 대적들이 받는 보응을 마침내 보리로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변함없이 사랑하는 믿음이 견고하여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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