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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아나니 (렘 29: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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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나니 (렘 29:11-13)
  

한 시골 청년이 캔자스시티에 들어왔습니다. 
출판사와 신문사를 찾아다니며 자기가 그린 만화를 실어달라고 부탁하였으나 한 군데도 상대해 주지 않았습니다. 
마침 주일이 되어 습관대로 길거리에서 보이는 아무 교회나 들어갔지만 설교 말씀은 머리에 들어오지 않고 눈물만 흐르는 것이었습니다. 
예배를 마친 다음 이상하다고 생각한 목사님이 이 청년을 만났습니다. 
목사님이 안타까운 청년의 사정을 듣고, 일자리를 구할 때까지 교회 창고에서라도 자겠으면 자라고 허락했습니다. 

그러면서 격려하시는 말씀이 본문 말씀이었습니다. 
“God's purpose for you is prosperity and not misfortune"
(용기를 잃지 말게, 하나님은 자네에게 재앙을 준비해 놓고 계신 것이 아니라 행복을 준비해 놓고 기다린다네.) 
이 말씀 한마디가 뼛속 깊이 사무치면서 큰 힘이 되었습니다. 
창고에는 주로 뭐가 있지요? 
쥐가 많지요. 

이 교회의 창고에도 낮밤을 가리지 않고 쥐가 많이 다녔습니다. 
먹을 것을 조금씩 주자 쥐들은 도망을 가지 않았습니다. 
이 청년은 쥐를 자세히 관찰하던 중 세계를 사로잡을 ‘미키 마우스(만화)’의 아이디어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 집도 절도 없었던 청년이 바로 ‘월트 디즈니’였습니다.
월트 디즈니는 이 말씀 한마디로 자신의 인생을 건졌습니다.

오늘 본문인 이 예레미야의 말씀은 70년간의 바벨론 포로시대가 시작될 때 주어진 말씀입니다. 
그 시절 절망하지 않은 유대인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기약 없는 포로생활이 시작되었는데 어떻게 절망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그때 절망하지 말고, 믿음 잃지 말라고 주신 격려의 말씀입니다.

이제 한 구절씩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11절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영어 번역으로는 "I alone know my purpose for you."(너희를 향한 내 계획을 나만 안다.)입니다. 
이 구절의 깊은 뜻을 두 가지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①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이 일은 이렇게 됐으면 좋겠다.’ 
‘이 일은 이때쯤 됐으면 좋겠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일의 때와 방향과 방법을 생각합니다. 
기도도 합니다. 
그런데 그 일이 내 생각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당황스러워 하고 혼란을 느낍니다. 

나아가 ‘하나님은 내 기도를 들으시지 않는가 봐.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가 봐. 아니야! 하나님이란 존재 자체가 없는 거야. 속은 거야’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가 명심해야 할 말씀은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런 내용의 말씀이 많습니다. 

사 55:8-9절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시 77:19절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곧은 길이 큰물에 있었으나 주의 발자취를 알 수 없었나이다.” 

얼마나 은혜로운 말씀입니까? 
바다 위에 날 길, 큰 물 위에 날 길을 어떻게 인간의 육안으로 볼 수 있겠습니까?
바다 위에 날 길, 큰 물 위에 날 길을 누군들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우리 인간의 생각을 훨씬 뛰어넘는다는 것입니다.

바둑을 둘 때 두 급만 달라도 고수가 두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왜 저기다 두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모릅니다. 
언제 압니까? 
지고 난 다음에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하나님의 생각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니 믿으세요! 
모든 것이 당황스럽고 혼란스럽게 보일 때에도 하나님은 나의 길을 아신다고 믿으세요.

② 하나님의 나에 대한 계획은 가장 유효하고 적절하다는 것입니다.

눈앞에 직면한 일들이 우리에게 어떻게 보일지라도, 상황이 제 아무리 뒤틀려있을지라도, 하나님의 계획은 가장 유효하고 적절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일이 꼬여갈 때, 일이 늦어질 때, ‘하나님이 이 일을 늦추시는구나! 이 일이 이렇게 되는 것은 잘 풀리는 것보다 나에게 유익할 게 분명해.’라는 믿음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진리의 예를 성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에스더서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얼마나 유효적절하신지 잘 보여주는 사건이 나와 있습니다. 아하수에로왕 치하에 왕의 경호원이었던 빅다나와 데레스가 왕을 암살하려고 음모를 꾸밉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쿠데타이지요? 
이 음모를 유대인이었던 모르드개가 알아채고, 왕께 보고하여 왕을 살렸습니다. 
왕정시대에 이것은 공적 중의 공적입니다. 
왕은 이 사실을 궁중사기에 기록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포상하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그 당시 모르드개는 얼마나 섭섭했겠어요? 
아하수에로 왕의 포상을 잊게 하신 분은 누굴까요? 

그때 궁 밖에서는 하만 총리가 유대인을 몰살하려는 계략을 꾸미고 있었습니다. 
이미 아빕월 14-15일 양일간에 걸쳐 유대인을 몰살시키라는 왕의 조서까지 내려놓은 상태입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아하수에로 왕은 잠이 오지 않아요. 
밤에 잠이 오지 않으면 뭐합니까? 
책을 보지요? 

그래서 왕이 궁중사기를 뒤적거리다 옛날 있었던 쿠데타 사건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모르드개를 포상하지 않은 것이 생각났습니다. 
‘내가 참 실수를 했구나. 이런 사람에게 포상을 하지 않았다니!’ 
누가 이 사실을 생각나게 했을까요? 
왕이 하만 총리에게 묻습니다. 
‘왕이 존귀하게 하기를 기뻐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여야 하겠느뇨?’ 
그랬더니 하만 총리가 착각을 합니다. 
‘왕이 존귀하게 하기를 기뻐하시는 사람은 나밖에 누가 있겠는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왕복을 입히시고, 왕이 타시는 말에 태우고, 방백 중 가장 존귀한 자가 그 말고삐를 잡고 성중의 거리를 다니게 하심이 옳을 줄 아뢰오.” 
“그것 참 좋은 생각이로구나.”
그래서 모르드개에게 왕복을 입히시고, 왕이 타시는 말에 태우고, 하만 총리로 하여금 그 말고삐를 잡게 하고 성중의 거리를 돌게 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모르드개는 그의 동족 유대인을 멸족의 위기에서 구해냅니다. 

가장 클라이맥스에 이 사건을 쓰시려고 하나님은 왕으로 하여금 이 사건을 오랫동안 잊게 하셨고, 또 적절한 때 이 사건을 기억나게 하셔서 유대인들을 살리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가장 유효적절하다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2. 11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삶에는 재앙처럼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그것이 재앙이 아니라 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데오드르 래취’는 그의 ‘예레미야서 주석’에서 말하기를, “자기 백성에 대한 그분의 계획은 항상 선하고 복되다. 그분이 어쩔 수 없이 매를 사용하신다 해도 그것은 노여움의 매가 아니라 그들의 현재의 행복과 영원한 행복을 위한 징계의 매이다. 자기 백성을 위한 그분의 계획에는 악한 항목이 하나도 없다. 그 계획의 착상, 그 계획의 과정, 그 계획의 달성 등 모든 면에서 백성들에게 해로운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겪고 있는 명백한 불행조차도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행복을 위한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말콤 매거리지(Malcom Maggeridge)는 ‘20C의 증거’(A twentieth century testimony)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75년간 살면서 배운 모든 것과 나의 존재를 드높이고 내게 빛을 비추었던 모든 것은 편안을 통해서가 아니라 고통을 통해서 얻은 것이었다. 만일 어떤 약물이나 어떤 미신 같은 것에 의해 우리의 인생에서 고통이 제거된다면 그 결과는 인생을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평범하고 사소한 것으로 만들 것이다.”

어떤 환경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할 말은 오직 ‘아멘’입니다.
월터 디즈니가 창고 속으로 들어갈 때, 그가 그곳에서 쥐를 관찰하며 세계를 사로잡을 미키 마우스를 만들어낼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 어두컴컴한 창고가 인생의 빛을 발할 계기가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아멘’ 밖에는 없습니다. 

(복음성가-나의 등 뒤에서)

3. 그러면 이런 삶을 실제적으로 체험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12절, 13절 말씀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12절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13절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평안을 느끼며, 미래의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기도의 거성들로부터 어떻게 하는 기도가 능력 있는 기도인지에 대하여 배웁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약속을 근거로 하나님께 탄원하기도 하고, 조르기도 하고, 따지기도하고, 늘어지기도 하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기도를 좋아합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출33장의 모세의 기도에는 하나님의 약속을 근거로 따지고 있습니다.
출33:12절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
출33:16절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모세는 하나님의 약속을 근거로 따지듯이 기도를 드립니다. 
“그렇게 약속해놓고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렇게 해놓고 너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장난감 가게 앞에서 “아빠가 전에 장난감 사준다고 약속했잖아?”라고 아이가 아빠의 약속을 기억하고 드러누우면 아빠는 꼼짝 못하고 사줘야 합니다.
안 사주면 약속을 못 지키는 아빠가 됩니다. 
그것은 아빠의 능력문제가 아니라 인격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아빠는 아이들에게 돈을 많이 못 버는 아빠는 될 수 있어도 못 믿는 아빠는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빚을 내서라도 사줍니다.
모세의 기도에서 이런 분위기를 느끼게 됩니다.

여호사밧 왕을 보십시오. 
역대하 20장에 보면 여호사밧은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붙잡고 늘어졌습니다.
여호사밧은 하나님을 ‘여호와’라고 불렀습니다.
역대하20:6절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하늘에서 하나님이 아니시니이까 이방사람들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지 아니하시나이까 주의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능히 주와 맞설 사람이 없나이다.”

‘여호와’란 이름은 ‘약속’과 관련된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여호사밧은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붙잡고 늘어졌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어떤 어려운 문제에 봉착해 있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합니까?
하나님의 자비가 필요합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합니까?
하나님의 치료가 필요합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계시해 주신 하나님의 이름 중에서 어떤 이름을 붙잡고 늘어지십니까?
문제에 해당되는 하나님의 성품을 붙잡고 늘어지십시오.

저는 이런 중보기도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에미의 마음을 아시잖아요? 에미의 마음을 모른다면 어떻게 ‘에미가 그 낳은 자식을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분명히 에미의 마음을 아십니다. 하나님, 저 에미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보십시오. 저 눈물을 보시니 하나님의 마음도 좋지 않으시지요? 그러니까 그 에미의 기도를 들어주십시오.”

이사야를 보십시오.
사63, 64장에서 이사야는 자비로운 하나님의 성품에 의지하여 탄원합니다.
사63:7절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그의 찬송을 말하며 그의 사랑을 따라 그의 많은 자비를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
여기에 보면, ‘그의 사랑을 따라’ ‘그의 많은 자비를 따라’ 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자비’를 의지합니다.
자비란 ‘벌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이어서 사 64장에서 이사야의 기도를 보십시오.
사64:6-7절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소멸되게 하셨음이니이다.”

자신들의 죄악을 인정합니다.
자신들의 잘못을 부정하지 않아요.
그렇지만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이 아니시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64:9절에 이렇게 탄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너무 분노하지 마시오며 죄악을 영원히 기억하지 마시옵소서. 구하오니 보시옵소서. 보시옵소서. 우리는 다 주의 백성이니이다.”

아무리 악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것입니다.
아무리 죄인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아무리 개망나니라 할지라도, 아무리 ‘호적에서 파 가라.’고 호통을 칠지라도 아버지의 아들이 아닐 수 없듯이 우리는 여전히 주의 거룩한 백성이라고 탄원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이렇게 기도하여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모세처럼, 여호사밧 왕처럼, 이사야처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약속을 근거로 하나님께 탄원하기도 하고, 조르기도 하고, 따지기도하면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이런 기도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평안을 누리며, 찬란한 미래의 희망을 갖게 되길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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