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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섬김 (막 10:4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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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김 (막 10:42-45)

(막 10:42)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막 10: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막 10: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막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어떤 목사님에게 초등학교 1학년짜리 막내아들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이 아이가 엉엉 울면서 들어왔습니다. 사연을 들어보니 그 날 학교에서 반장 선거가 있었는데 출마했다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부반장 선거에 출마했는데 그것마저 떨어져 큰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동생이 서럽게 울고 있으니까 형들이 와서 이렇게 달래주었습니다. "너 진짜 반장 하고 싶으면 지금부터라도 친구들을 열심히 도와주고 봉사해라." 
  
그리고는 2년이 지나 그 막내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습니다. 이 아이가 다시 반장 선거에 출마해 드디어 그토록 원하던 반장에 뽑혔습니다. 그 선거에 무려 16명이 출마했는데도 당당히 선출됐습니다. 어떻게 그 높은 경쟁을 뚫고 반장에 당선될 수 있었느냐고 물으니, 자기가 연설을 잘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를 뽑아주세요. 저를 반장으로 뽑아주시면 저는 여러분을 위한 걸레가 되겠습니다." 그렇게 연설했더니 친구들이 자기한테 표를 몰아주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아이의 말에 아버지 목사님 마음에 큰 감동이 임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막내아들을 무릎에 앉혀놓고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주님, 이 아이가 두학기 동안 친구들을 위해 참된 걸레가 되게 해주세요. 그리고 이 아이가 커서도 일평생 이 사회를 위한 걸레가 되게 해주세요." 

어느날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나아와 "주께서 영광받으실 때에 우리를 하나는 주의 오른 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하여 주십시오."하고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나머지 열 제자가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고 분위기가 험악해졌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입니다.  
  
어떤 자리에 앉느냐? 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게도 중요한 관심사였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도 상좌에 앉으려는 다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석에 앉으라고 하셨습니다. 상좌에 앉았다가 주인이 와서 '당신보다 높은 분들이 오셨으니 내려 앉으시지요.' 하면 얼마나 부끄럽게 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말석에 앉았는데 주인이 와서 '아니 이렇게 존귀한 분이 여기 앉으셨습니까? 이리로 올라 앉으시지요.' 한다면 모든 사람이 우러러 볼 것입니다. 
  
자리는 권력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통치자의 좌우편은  대단한 자리가 아닙니까?  모두가 눈독 들이는 자리입니다.  아마도 다른 제자들도 은근히 그 자리를 노린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먼저 그 자리를 요구한 야고보와 요한에게 분한 감정이 생겼던 것입니다.  실제로 권력을 잡은 실세가 되어서 권력을 과시하며 권력을 마구 휘두르다가 추락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라고 하시며 중요한 자리에 앉은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신약 성경에 나오는 섬긴다는 단어는 두 가지입니다. 섬기다의 헬라 원문의  한 단어는 '누구의 노예가 되다'라는 의미이고 다른 한 단어는 '시중들다'는 뜻입니다.  섬김이란 우리가 마치 누구의 노예로 선택된 사람들인 것처럼 그들에게 시중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종이 되어 자발적으로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며 자신을 헌신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섬김을 받는 일에 익숙하고, 섬기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유교 문화가  그렇게 가르쳐 왔습니다. 사농공상을 구분하여 귀천을 나누었습니다. 양반 선비는 헛기침이나 하며 섬김을 받는 위치에 머물고 중인과 상민이 온갖 선비 양반의 궂은 일을 다 감당해 주는 체제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많이 섬김 받는 자가 행복한 줄로 착각을 합니다.  좋은 자리 높은 자리에 앉아야 성공인줄로 압니다. 많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앉으려고 애씁니다. 정말 섬김을 많이 받은 사람들이 다 행복했습니까? 아닙니다. 성경은 '섬기는 곳에 행복이 있고 섬기는 자에게 확실한 행복이 찾아 온다'고 가르칩니다.  

  
1. 왜 섬겨야 합니까? (43)
  
섬기는 삶에 큰 행복이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막 10:43)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주의 나라에서 큰 자 되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서 크게 행복한 사람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위대한 사람이라고 칭찬하는 사람은 작고 연약하며 시시한 사람들을 많이 그리고 힘을 다하여 섬긴 사람입니다.  
  
여러분, 이왕 예수 믿을 것이라면 하나님께 인정받는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야고보와 요한 처럼 좋은 자리 달라고 간청하는 것 아무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종이 되어 섬기면 반드시 높여 주십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중요한 인물로 부각됩니다.  

우리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오셨습니까?  섬김을 받고 싶어서 오셨습니까?  예수님은 천국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수많은 천군과 천사들이 다 와서 시중을 듭니다.  하늘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천국 보좌를 놓아 두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섬김을 받고 싶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들의 종이 되어서 섬기려고 스스로 낮아 자신 것입니다. 당신의 목숨을 죄인들의 죄값으로 대신 희생하시기까지 섬기셨습니다. 
  
여러분, 그런 예수님이 이해가 됩니까?  수 많은 천사들이 성심껏 섬겨 주는 좋은 자리를 버리고 죄인들의 천한 종이 되어 섬기기 위해 이땅에 오신 예수님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무엇때문입니까?  사랑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을 부요하게 하려고, 행복하게 하려고, 존귀하게 하려고 스스로 낮아지고 종이 되셔서 섬기셨습니다. 
   
쉘 실버스타인의 작품 중에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책의 내용입니다. 한 소년의 집 근처에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있었습니다. 소년은 어린 시절 이 나무에 올라가 놀기도 하고 나뭇가지에 그네를 매고 그네를 뛰기도 했습니다. 그 그늘에서 마냥 즐겁게 놀았습니다. 나무는 그에게 이 같은 놀이터를 제공했습니다. 소년은 자라서 그네를 다시 타지 않게 되고 이제는 나무 열매를 구하게 됐습니다. 다행히도 나무는 좋은 열매를 줄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그가 청년이 되어 집에 땔감이 필요했습니다. 나무는 말했습니다. 내 가지를 베어다가 불을 때서 더웁게 하라고. 장년이 되었습니다. 돈을 벌어와야겠다고 나서면서 그에게 배가 필요했습니다. 나무는 말했습니다. 나의 몸통을 베어다가 배를 만들어서 타고 목적지로 가라고. 그러고도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멀리 떠난 소년은 한 동안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소년이 백발이 되어서 노인의 몸으로 집에 돌아왔습니다. 나무는 밑동만 남아있었습니다. 이 노인은 밑동에 걸터앉아 쉬었습니다. 이 책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납니다. "나무는 너무 행복했습니다." 
  
여러분, 종의 마음을 품고 서로 섬길 수 있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열심히 섬기시기 바랍니다.

  
2. 누구를 섬겨야 합니까?(44)
  
예수님은 우리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60억 인류를 모두 섬기라는 말씀입니까? 그럴수는 없습니다. 그럼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붙여 주신 모든 사람이 섬김의 대상입니다.  예수님께서 만난 모든 사람을 섬기신 것 처럼 우리도 모든 사람을 일단 섬김의 대상으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나누는 습관이 있습니다.  내게 유익을 주는 사람과 해를 입히는 사람으로 나눕니다. 내 편과 다른 편을 나눕니다. 나와 견해를 같이 하는 사람과 달리 하는 사람으로 나눕니다.  그리고는 맘에 드는 사람은 그래도 섬기려고 하지만 맘에 들지 않는 사람은 섬기려고 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진정한 섬김이 될 수 없습니다. 주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가리지 말고 모두 섬겨야 합니다. 
  
무디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평가할 때 그가 얼마나 많은 종을 거느리고 살았느냐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종노릇하였느냐이다."   
  
또한 우리는 작은 자를 섬겨야 합니다.  자기 보다 큰 자를 섬기는 것은 쉽습니다. 당연하게 보입니다. 여러분이 과장이면 이사나 부장을 섬기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여러분이 나이가 젊으면 연장자를 위하여 섬기는 것은 당연하게 보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사장이나 이사가 평 사원을 위해 수고한다면 감동을 줄 수 있습니다. 선생님이 학생을 위해 봉사하는 마음으로 다가간다면 감동을 받습니다.  이처럼 교회안에서도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연약하여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누가 섬겨야 합니까? 그들보다 건강한 사람, 성숙한 사람들이 섬겨야 합니다.   교회밖에서도 능력이 부족하여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분들을 섬기는 것이 사명임을 깨닫고 돕기 위해 다가갈 수 있기 바랍니다.  

  
3. 어떻게 섬겨야 합니까? (45)
   
섬김은 다양합니다. 은사에 따라 다양한 섬김을 할 수 있습니다.  가르침도 섬김의 자세로 할 때 열매가 달라집니다.  설교 사역도 섬김이 될 수 있습니다.  찬양, 구제, 예배 안내, 차량 봉사, 주방 봉사, 모든 영역에서 섬김을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필요를 보고 채워주는 것이 섬김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똑같은 봉사를 해도 전혀 섬기는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정신이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났습니다. 수십년간 모은 돈의 절반에 해당되는 삼천 만원을 은행에서 찾아 가지고 오다가 시퍼런 칼을 목에 대고 위협하는 강도에게 다 빼았겼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역시 삼천 만원이나 되는 돈을  사랑스런 자녀를 위해 교육비와 결혼 비용으로 썼습니다.  어떤 차이입니까?  강도를 만나 강탈당한 것은 싫지만 위협에 의해 빼앗긴 것입니다.  자녀를 위해 쓴 것은 사랑하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자원하여 내어 준 것입니다.  
  
억지로 마지 못해 할 수 없이 시간이나 물질이나 몸으로 수고한 것은 섬기는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랑으로 자원하여 자신의 시간이나 물질이나 재능 또는 은사를 나누어 주며 부족한 사람을 돕는 것이 섬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어 주심 같이 자기의 소중한 것을 기쁨으로 내어 줌으로 섬겨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줄 수 잇는 최고로 아름다운 것이 무엇입니까?  시시한 것을 마지 못해 던져 주듯이 해서는 감동을 줄 수 없습니다.  최고의 것을 정중하게 최선을 다하여 드리듯이 내어줄 때 예수님의 섬김을 따라는 것이 됩니다.  

페르시아의 Cyrus 라는 왕이  전쟁에 나가서 적국의 왕자와 그 부인과 자녀들을  포로로 잡아 왔습니다.  왕은 이렇게 질문을 했습니다. "만일에 내가 당신들을 죽이지 않고 당신을 놓아주면 당신은 나에게 무엇을 주겠는가?"하고 물었습니다.  왕자는 말하기를  "내가 가진 재산의 절반을 드리겠습니다." "이 아이들을 놓아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다시 물었습니다. "남은 재산을 전부를 드리겠습니다." "그럼 그대의 아내를 놓아주면 어떻게 하겠느냐?" 했더니 왕자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내 생명을 드리겠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왕은 깜짝 놀라서 이렇게 아름다운 사랑이 어디 있단 말인가? 감동하여 "아무 조건없이 다 놓아줘라." 했습니다. 
  
그날 밤  왕자는 집으로 돌아와 축하파티를 합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보면서 말했습니다. "오늘 그 Cyrus 왕은 참 훌륭하지. 내가 보니 참 미남인데다 의젓하고 지혜롭고 훌륭한 왕이었소. 당신 보기에는 어떻소?"  아내가 대답했습니다. "저는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해 모르겠습니다." "아니 그럼 무얼 보았소?" "나를 위해서 대신 생명을 내놓은 한 남자를 보았습니다. 내눈에는 오직 당신만 보였습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섬김입니다. 

우리 교회 남편들이 모두 가정에서 가족들을 이렇게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마 그렇게 된다면 부인들이 모두 큰 감동을 받고 평생을 남편을 존경하며 사랑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계속 섬기려고 하지 않고 섬김을 받으려고만 한다면 존경대신 갈등만 더 커질 것입니다. 갈등이 있는곳에는 결코 행복이 깃들 수 없습니다. 성경으로 돌아가 가정과 목장과 교회와 직장에서 섬김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모두 그런 섬김을 받고 있습니다. 바로 당신을 위해 목숨을 바치신 하늘 나라의 왕자님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섬김에 감동하며 살기 바랍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며 살기 바랍니다.  그 사랑에 감동이 되어 물질을, 시간을, 은사를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며 살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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