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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역사를 위한 네 손길 (요 6: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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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위한 네 손길 (요 6:1-15)


얼마 전 이탈리아에서 미국으로 이민 간 포글리오 가족이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한 간증의 글을 읽었습니다. 이 집의 가장은 철도회사의 노무자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살림이 넉넉지 못한데다가 일곱 식구라는 대가족이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집안 살림에는 관심이 없는 불신자인 남편이 친구 네 명을 데리고 와서는 부인에게 “여보, 오늘 스파게티를 많이 좀 장만해 주시오. 오늘은 하루 종일 일을 해서 그런지 속이 아주 출출한 것 같소”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부인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습니다. 일곱 식구 먹기도 힘든데 네 사람이나 더 늘어났으니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그런데 이 부인은 아주 독실한 신앙인으로서 성령세례까지 충만히 받은 분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갑자기 방으로 들어가 성경을 갖고 부엌으로 가더니 한 주먹의 스파게티 재료와 성경을 머리에 이고 “하나님 아버지, 보시옵소서. 우리 식구도 겨우 먹을까 말까한데 제 남편이 네 명의 친구를 데리고 와서 스파게티를 많이 장만하려고 합니다. 스파게티를 내놓지 않으면 날벼락이 떨어질 것이오니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풀어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줄 압니다. 광야에서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시고 열두 광주리를 남게 하신 주여, 지금도 기적을 베풀어주실 줄 믿습니다.” 라고 기도한 다음 성경을 부뚜막에 놓고, 솥에 물을 부어 끓인 다음 스파게티 재료를 넣었습니다.
이 집의 아들이 이 광경을 지켜보다 솥을 보니까 스파게티가 얼마나 적었던지 아예 보이지 않더랍니다. 그래서 아들은 ‘이것 참 낭패다’라고 생각하면서 어머니를 보고 있는데 그 어머니는 찬송을 부르며 열심히 젓기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더니 어느 정도 저은 다음 큼직큼직한 열 한 개의 그릇에다 솥 안에 있는 스파게티를 퍼서 넣는데 한 그릇의 양도 안 되던 스파게티가 이상하게도 열 한 그릇에 다 채워지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본 아들이 ‘헤이 갓(Hey God)’이라는 제목의 책을 썼는데, 그 아들은 이 책에서 그 어머니의 단순한 믿음으로 인생의 방향을 바꾸게 되었고 위대한 믿음을 얻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많은 무리가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갈릴리 바다 건너편 뱃세다 광야까지 따라왔습니다. 오랜 시간 주님의 말씀을 듣는 동안 어느 새 하루해가 저물어갑니다. 모두가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백세다 광야는 민가와는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먹을 것을 구하려면 멀리 가야 합니다. 그나마 여자와 아이 외에 남자만도 오천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이 먹을 만큼의 빵을 살 곳이 마땅치를 않습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에게 먹게 하겠느냐?” 빌립이 대답합니다.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그나마 빵을 파는 곳은 아주 멀리 있는데 돈이 있다고 해도 어디 가서 빵을 사다가 이들을 먹일 수 있겠느냐고 합니다. 사실 갑작스레 이들을 먹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누구라서 아무 것도 없는데 이들을 먹일 수 있단 말입니까? 방법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빨리 저들로 돌아가게 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때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말합니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여기 있기는 있다는 것입니다. 보리빵 다섯 개 그리고 물고기 두 마리를 한 아이가 가지고 있다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내놓았는데 하지만 이거 가지고 누구 코에 붙이냐는 것입니다. 사실 그말이 맞습니다. 그저 가난한 집 아이가 자기 배를 채울 수준입니다. 그거 가지고는 예수님 한분도 배를 채울 수 없습니다. 안드레의 말마따나 그것을 가지고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습니다. 

안드레조차도 고개를 흔듭니다. 이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 가운데 먹을 것이라고는 이 아이가 가지고 있던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전부입니다. 그러니 나오느니 한 숨밖에 더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예수님은 거기다가 한술 더 떠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가 저들 먹을 것을 주라는 데야 두 손 두 발 다 들었습니다. 아니 도대체 무슨 말 같지 않은 이야기를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를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말씀으로 세상을 만드신 분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서도 온 세상을 말씀으로 지으신 분이 그까짓 먹을 것을 가지고 염려한단 말입니까?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려고만 마음먹는다면 돌을 가지고는 빵을 못 만들겠습니까? 없는 것도 있게 하실 수 있는 분이 마중물이 있는데 못하실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들에게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제자들을 통해 나눠 주시는데 그 많은 사람들이 다 배불리 먹고도 남은 것을 거두었더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했을까요? 
이 귀한 오병이어의 역사는 사실 주님 혼자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이 일을 위한 여러 손길이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로는 사랑의 손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세계 102개국 사람들에게 그런 질문을 던졌더니 대답은 하나로 모아졌습니다. 
“mother(어머니)!” 
그 뒤를 이은 ‘사랑’ ‘열정’ ‘미소’ ‘영원’.... 그런 단어들도 만만치 않게 아름다운 말들이지만 어머니를 이길 순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럴 밖에요. 어머니 아니었으면 어떻게 열정과 미소가 생겨나겠습니까? 어머니를 제쳐놓고 어떻게 사랑을 말할 수 있겠고 영원을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수천 년을 이야기해도 다함이 없을 이야기이기에 어머니는 끊임없이 드라마가 되고 영화가 되는 것입니다. 
오월의 신부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다면 오월의 어머니는 눈물이 겹도록 아름답습니다. 
이렇게 말한 사람도 있었지요. 
“나의 어머니는 문둥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나의 어머니를 클레오파트라와 바꾸지 않겠습니다.”

몇 년 전에 삼성생명에서 "어머니"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기업광고를 냈던 적이 있습니다.
- 스물 하나 - 
당신은 고개를 두 개 넘어 얼굴도 본 적 없는 김씨 댁의 큰아들에게 시집을 왔습니다.
- 스물 여섯 - 
시집온 지 오 년 만에 자식을 낳았습니다. 당신은 그제야 시댁 어른들한테 며느리 대접을 받았습니다.
- 서른 둘 - 
자식이 밤늦게 급체를 앓았습니다. 당신은 자식을 업고 읍내 병원까지 밤길 이십 리를 달렸습니다.
- 마흔 -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습니다. 당신은 자식이 학교에서 돌아올 무렵이면 자식의 외투를 입고 동구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자식에게 당신의 체온으로 덥혀진 외투를 입혀주었습니다.

- 쉰 둘 - 
자식이 결혼할 여자라고 집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당신은 분칠한 얼굴이 싫었지만 자식이 좋다니까 당신도 좋다고 하였습니다.
- 예순 - 
환갑이라고 자식이 모처럼 돈을 보냈습니다. 당신은 그 돈으로 자식의 보약을 지었습니다.
- 예순 다섯 - 
자식 내외가 바쁘다며 명절에 고향에 못 내려온다고 했습니다. 당신은 동네 사람들에게 아들이 바빠서 아침 일찍 올라갔다며 당신 평생 처음으로 거짓말을 했습니다.
오직 하나 자식 잘 되기만을 바라며 살아온 한평생. 하지만 이제는 깊게 주름진 얼굴로 남으신 당신...... 우리는 당신을 어머니라 부릅니다.

이런 어머니의 마음이 본문에 나오는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에 가득 담겨 있습니다. 누구에게서 들었는지 예수님 이야기를 한참 떠들어대더니 자기도 예수님 이야기를 들으러가겠다는 것을 듣고는 아이가 배고플까봐 어머니가 정성스럽게 도시락을 쌉니다. 비록 가난하지만 아이를 사랑하는 어머니의 마음은 더욱 애잔하기만 합니다. 그래도 어머니도 들은 소리가 있습니다. 

예수라고 하는 분이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에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문둥병자도 고치고 중풍병자도 고치고 각종 병과 약한 것을 가 고치실뿐만 아니라 귀신도 몰아내신다는 말을 전해 들으면서 어떤 분일까 하는 마음에 나도 그분 얼굴 한번 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가까이 오셨다는 것입니다. 아이가 신이 나서 자기도 가서 보겠다고 하는데 그냥 있을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이 아이의 어머니도 같이 길을 나섰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어머니는 먼저 아이를 생각합니다. 아이가 배고파할까봐 아이의 먹을 것을 정성껏 준비합니다. 그리고 아이의 손에 들려줍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다가 허기질까봐 준비한 도시락입니다. 남들처럼 풍족하지는 못해도 그래도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야 누구보다도 따뜻한 어머니입니다. 

혹 그래 조심해서 다녀오라고는 할지 몰라도 시간이 오래 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도시락까지 준비해줄 어머니가 과연 몇이나 될까요? 아니 그건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도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저 호기심에 얼굴만 보고자 나왔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 가운데도 병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귀신 들린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 그 누구도 자기 문제 해결만 생각했지 수고하는 주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할 생각은 누구도 하지를 못했습니다. 

아니 감사의 마음은커녕 자기들 먹을 것조차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바른 것은 많은데 고마워할 줄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이 어머니는 최소한 자기 자식에 대한 사랑만은 남달랐습니다. 그래 아이가 배고프지 않도록 정성껏 도시락을 준비했는데 그 사랑이 바로 오병이어의 기적의 출발점이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이 아이의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 여자와 아이 외에 남자만도 오쳔 명이나 되는 사람을 배불리 먹인 것은 바로 이 사랑을 깨우쳐주기 위한 배려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우리들에게 동일한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모든 것을 사랑으로 하라고요. 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주님 말씀하십니다. 자녀를 위하는 어머니의 사랑이 오늘 서로에 대한 아름다운 사랑으로 이어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섬기는 아이의 손길입니다.
어떤 식료품 가게에서 일하는 청년이 하나 있었는데 이 청년은 워낙 똑똑하고 유능하지만 돈이 없기에 무엇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식료품가게 정리도 하고 때로는 계산도 하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상당히 큰 식료품 가게였는데 거기에 어떤 할머니가 일주일에 몇 번씩 물건을 사러 왔습니다. 그런데 이 할머니가 오면 얼마나 손이 많이 드는지 모릅니다. 그 할머니를 부축해야 하고 물건도 골라서 담아주고 배달을 하는 등 시간이 많이 드는 여러 가지를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모든 종업원들이 그 할머니만 오면 다 도망가 버리지만 이 젊은 청년은 그 할머니를 따뜻하게 잘 보살펴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그 할머니는 오기만하면 이 청년만 찾는 것입니다. 이 청년은 근무를 마치고 나서도 그 할머니 집에 식료품을 배달도 해주고 또 집에 가서 할머니의 얘기를 들어주는 등의 시간을 많이 보내며 그 할머니를 잘 섬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할머니 집에 배달을 갔는데 그 할머니가 이 청년에게 ‘내가 아무래도 오래 살 것 같지 않으니 내가 이제 죽으면 자네가 내 부탁을 꼭 좀 하나 들어주게. 이 서류를 변호사에게 꼭 전해주고 그 변호사가 하라는 대로 좀 해주게. 제발 부탁이네’라고 말하고 그 서류를 맡겼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며칠 후에 그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청년은 할머니 살아생전에 계속 섬겨주다가 이제 돌아가신 다음에도 또 심부름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서류를 가지고 변호사를 찾아가 그 할머니가 부탁한 것이 무엇인지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변호사가 그 서류를 전부 보더니 할머니가 가지고 있던 엄청난 재산을 자기에게 사랑을 베풀고 섬겨준 그 청년에게 주라는 할머니의 유언장에 청년의 서명을 요구합니다. 그 할머니의 유언대로 이 청년은 큰돈을 벌게 되어 큰 사업가가 되고 그의 생애가 달라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시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아이는 배고픈 줄도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이들의 먹을 것을 주도록 하라는 말씀과 더불어 제자들이 그건 불가능하다는 말을 전해 들으면서 문득 예수님은 얼마나 배가 고프실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로 자기 배도 고픕니다. 하지만 아이는 그 도시락을 자기가 먹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훨씬 더 배가 고프실 텐데 하는 생각에 이 아이는 볼 것 없이 자기의 도시락을 가까이 있는 예수님의 제자 안드레에게 전달합니다. 

어찌 보면 부끄러울 수도 있습니다. 보잘 것 없는 보리빵과 물고기를 어떻게 예수님께 드릴 수 있나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아이는 그런 것보다도 예수님이 배고프실 텐데 하는 생각으로만 가득합니다. 그래 선뜻 자기의 도시락을 내밀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조차도 이것이 오병이어의 마중물이 될 것이라고 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어떻게 됐습니까? 예수님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 그리고 자기까지 모두가 배불리 먹고도 남았습니다. 거기다가 예수님이 메시야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 더 큰 상이라면 상이 될 것입니다. 아이는 자기의 작은 손길이 이렇게 큰 일의 밑거름이 됐다고 하는 것이 두고두고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작은 섬김과 더불어 주님의 말씀대로 십일조와 헌물을 주님께 드릴 때 그리고 흩어 구제할 때 이 오병이어의 기적이 우리들의 삶에도 나타날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한 때 부자 되세요 하는 광고가 유명세를 탔습니다. 사실 부자가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하지만 부자가 되기가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따라 귀한 십일조와 헌물로 섬기고 흩어 구제하고 선교함으로 섬기게 될 때 하나님은 그 섬김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복을 받게 하실 뿐 아니라 그렇게 섬기는 우리에게는 더욱 풍성한 것으로 가득 채우심으로 말미암아 쓰고도 남게 하실 것입니다. 이런 귀한 섬김의 사람, 드림의 사람, 씨를 뿌리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세 번째로 생각할 손길은 중재자로서의 제자의 손길입니다.
아프리카에서는 총각이 장가를 가려면 결혼 지참금으로 소 한 마리를 내야 합니다. 한 못생긴 처녀가 있었습니다. 청혼하는 총각이 없었습니다. 소 반 마리 값만 치러도 되겠는데…. 그러는 사이 나이는 들어 노처녀가 되었고 볼품은 더욱 없어졌습니다. 결혼은 포기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최고의 신랑감이 나타났습니다. 추장 외아들이 청혼을 해온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소 여덟 마리나 지참한 채. 둘이는 결혼했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신부의 얼굴은 몰라보게 아름다워졌고 만인이 우러러보았습니다. 어느 날 밤, 신부는 신랑에게 조용히 물었습니다.

“왜 나를 선택했습니까?” “왜 소를 여덟 마리나 가져왔습니까?” 
신랑의 대답은 분명하고 또렷했습니다. 
“사랑하니까.” 
그렇습니다.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하니까 하나님은 그 외아들을 우리에게 아낌없이 보내주신 것입니다. 오직 사랑 때문에!
그 하나님 사랑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분이 바로 중재가가 되시는 성령님이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감동하시어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도록 그 사랑을 깨우쳐주셨습니다. 그 성령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위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하나님께 간구와 중보의 기도를 올려드리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태어날 때부터 믿는 부모 밑에서 자라 신앙생활을 하는 분도 계시고 자기 발로 스스로 교회로 나아온 분도 계시겠지만 거의 대부분은 우리로 하여금 교회에 발을 들여놓도록 이끌어준 손길이 있을 것입니다. 
이 아이에게도 마찬가지로 그런 좋은 중재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안드레입니다. 안드레는 수줍은 듯이 내미는 아이의 도시락을 받아들고 그것을 기쁨으로 주님께 전달합니다. 비록 그 보잘 것 없는 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하며 다소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기는 했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옳은 이야기입니다. 이만 명이나 되는 사람이 있는데 거기에 비하면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턱없이 적은 것임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안드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의 섬김을 예수님께 전달합니다. 

만약 안드레가 그거 누구 코에 붙인다고 그러냐고 하며 코웃음을 쳐버렸더라면 어찌 됐겠습니까? 그래서 우리에게는 누구에게나 좋은 중보자와 격려자와 축복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나를 위로해 주고 격려해주는 사람, 나를 위해서 중보해주며 날마다 축복해주는 사람이 있을 때 그 작은 섬김이 큰 역사의 한 물줄기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이제 주님이 나눠주시는 빵과 물고기를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것도 제자들의 몫이었습니다. 그들의 수고가 있었기에 모두가 배불리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작은 것도 큰 것으로 알아 격려하고 축복하고 위로하고 중보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고 작은 사랑과 함께 나누며 협력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는 축복하고 감사하는 주님의 손길입니다.
마침내 주님의 손에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올려집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것을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축복하고 감사를 드리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빵과 물고기를 나눠주기 시작하는데 놀랍게도 그 많은 사람들이 다 배불리 먹고도 남은 것을 거두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습니다.

보십시오. 무리들이 굶주리는 것을 보시고 안타깝게 여기신 분도 주님이십니다. 저들이 마땅히 빌 바를 알지도 못할 때 주님이 먼저 도움의 길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해결책도 주닙니다.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십니다. 물론 제자들은 펄쩍 뛰었습니다. 아니 우리가 어떻게 저들의 먹을 것을 줄 수 있단 말입니까? 자그마치 이백 데나리온 어치 빵을 가져야 하는데 그나마 돈도 없을 뿐 더러 있다고 한들 어디서 살 수 있냐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결국 그 제자들로 하여금 무리들에게 먹을 것을 주게 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축복하셨고 하나님이 허락하심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모든 쓸 것을 풍성하게 채우시리라는 바울의 말처럼 예수님께서 무리들의 모든 굶주린 배를 채워주신 것입니다.

이 주님이 오늘 우리들의 모든 부족한 것을 채우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오늘도 변함없이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 많은 무리들이 그렇게 배불리 먹을 수 있었던 비결은 다른데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그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들은 굶주린 배룰 움켜 쥐면서까지도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기뻐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항상 주님과 함께 있기를 기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들이 배고프다고 중간에 돌아가버렸더라면 이 놀라운 역사의 동참자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래 참아야 하고 끝까지 인내해야 합니다. 

그런데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주님 곁을 떠나게 만듭니까?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주님 앞에 있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까? 돈 때문입니까? 건강 때문입니까? 아니면 자식 때문입니까? 일 때문입니까? 하지만 진정으로 우리 모든 쓸 것에 풍족하게 채움 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항상 주님 곁을 지켜야 합니다. 주님 앞에 있기를 즐겨해야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주시는 것으로 풍족하게 채움 받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이를 생각하는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 주님만을 생각하는 아이의 맑고 깨끗함 섬김과 사심 없는 드림 그리고 그 사랑과 드림을 주님과 연결해 주는 중보자요 ㅌ축복자가 있을 때 주님께서 놀라운 은혜로 우리를 복되게 만들어 주십니다. 이 귀한 오병이어의 역사가 오늘 우리들의 삶 전체에, 우리들이 살아가는 모든 영역에 그리고 우리가 축복하고 중보하는 모든 일에 놀랍도록 나타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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