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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선을 행하라! (창 19: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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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행하라! (창 19:1-13) 
 
 
❚선을 행하되

오늘 주보의 담임목사 칼럼에 ‘배은망덕(背恩忘德)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습니다. 나중에 한 번 읽어보세요. 내용은 미국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것입니다. 미국 콜로라도 주의 도나 먼슨이라는 할머니가 집 앞에서 야생 곰들에게 물어뜯겨 죽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미국에서는 사람이 야생 곰에게 습격을 당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만 이 곰들은 다름 아니라 할머니가 오랜 세월 위험하다는 주위의 경고를 무시한 채 먹을 음식을 챙겨주던 곰들인데 할머니를 그렇게 물어 죽인 것입니다. 

이 사건을 보고 사람들은 이런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저런 배은망덕한 곰 같으니라고!” 그런데 저는 이 ‘배은망덕한 곰’이라는 표현을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곰이야 짐승인데 당연히 배은망덕하지요. 은혜를 어떻게 기억합니까? 하지만 사람이 곰보다 나은 것은 은혜를 안다는 사실 아니겠습니까? 문제는 ‘곰만도 못한 인간’도 있다는 것입니다.

뉴스에 선배 집을 털었다가 구속된 사건이 나왔습니다. 후배가 직장을 구하기까지 머물 곳이 없는 게 딱해서 한 달 동안 자기 집에서 같이 살게 해주었더니 이 배은망덕한 후배는 선배가 야간근무 하느라 집을 비운 사이 그 집을 털어간 것입니다. 얼마 전에는 자신이 불쌍하다고 집에 불러 밥을 차려준 할머니를 살해하고 보잘 것 없는 금품을 훔친 ‘배은망덕’한 청년에 대한 기사도 나왔습니다. 배은망덕(背恩忘德)이란 은혜를 잊고 오히려 악으로 갚는 것을 말합니다. 

요즈음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정말 ‘은혜를 잊고 사는 시대’가 된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에게서 받은 은혜도 기억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받은 은혜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시대입니다. 기억하지 못할 뿐 아니라 나아가 은혜를 악으로 갚는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시대가 어찌하여 이렇게 사람의 은혜도, 하나님의 은혜도 잊고 은혜를 악으로, 불순종으로 갚는 시대가 되었는지, 정말 ‘곰보다 못한’ 사람들 아닙니까? 그런데 이런 현상은 오늘날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디모데후서 3:1~5은 말세에 일어나는 현상을 나열하면서 “(자식들이)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또 “배신하는” 시대가 온다고 말씀합니다. 즉 말세의 현상이 부모의 은혜도 감사하지 않고, 하나님 은혜도 감사할 줄 모르고, 배은망덕하여 배신하는 것이기에 요즘 이렇게 배은망덕한 시대가 된 것은 다 말세의 징조인 것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이렇게 배은망덕하고 배신하는 일이 허다하게 일어나더라도 우리는 결코 선을 행하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갈라디아서 6:9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물론 세상은 점점 험해져가고 차가워져 가기에 선을 행하며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선을 행하다 보면 내가 손해도 보고, 시간과 물질과 많은 것을 희생해야 하고, 게다가 앞서 소개한 일들처럼 오히려 선을 악으로 갚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성경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때가 이르면 반드시 선을 더 큰 선으로 거두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좀 손해도 보고, 희생도 해야 하고, 나를 배신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해도 선을 행하고 친절을 베풀며 때가 이르러 거두게 될 날을 기다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롯의 선행

오늘 우리는 선행을 베풂으로 열매를 거둔 사람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바로 ‘롯’입니다. 지난 두 주간 말씀 나눈 것처럼 롯은 아브라함이라는 좋은 멘토를 만났지만 안타깝게도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순간에 신앙적인 기준이 아닌 세상적인 기준, 육신의 안목으로 선택을 했던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나마 다행인 것은 롯이 선행과 친절을 베푸는 자세를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온 것처럼 천사를 대접하게 됨으로 끔찍한 멸망에서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첫 번째로 생각해 볼 것은 롯의 이러한 친절과 선행이 누구에서서 배운 것이냐는 사실입니다. 그 답은 바로 앞장인 창세기 18장에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마므레 상수리나무에 장막을 치고 사는데 여호와 하나님이 두 천사를 동행하고 그곳을 지나가십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아주 뜨거운 한낮에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세 명의 낯선 사람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그들을 친절하게 영접합니다. 물론 아브라함은 그 세 명의 나그네가 하나님과 두 천사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지요. 

그런데도 낯선 나그네들을 몸을 땅에 굽혀가며 겸손하고 친절하게 맞아 물로 발을 씻기고 최선의 음식을 준비해 대접하는 것을 보면 아브라함은 이때 한 번뿐만 아니라 늘 나그네들을 그런 식으로 대접했다는 뜻입니다. 바로 아브라함이 늘 이렇게 선행과 친절을 베푼 덕에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그토록 기다리던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씀도 듣고, 지금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러 가는 길이라는 말씀까지 듣고 제발 구원해 달라는 간구도 할 수 있게 되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롯이 어떻게 두 명의 나그네를, 알지도 못하는 낮선 사람들을 그토록 친절하게 영접했는지 금세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삼촌이며 멘토인 아브라함에게서 배운 태도라는 것입니다. 롯은 어려서부터 삼촌인 아브라함이 늘 이런 식으로 낯선 나그네들을 영접하고 친절하게 대접하는 것을 보며 자랐을 것입니다. 그러니 배운 대로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렇게 배운 친절과 선행 덕분에 롯은 멸망에서 구원받게 된 것이란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사람은 반드시 습관을 보고 배우게 마련입니다. 부모와 주변 사람들이 하는 것을 보고 자란 아이는 어른들의 나쁜 습관도 그대로 배우고, 좋은 습관도 그대로 배웁니다. 아이들이 나쁜 행동을 할 때 부모들이 그러지요? “얘가 누굴 닮았냐고”요. 누굴 닮긴요? 자기 닮았지요. 어려서부터 남에게 친절과 사랑을 베푸는 부모를 보면 자녀도 그대로 배워 베푸는 삶을 살게 됩니다. 어려서부터 남에게 모질고 박하게 대하는 부모를 보고 자란 자녀는 똑같이 남을 대하게 마련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복 받는 습관!’ 사랑과 선행은, 친절과 사랑은 반드시 때가 되면 아름다운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내가 복을 받으려면 선행과 친절을 베푸는 습관을 가지십시오. 나아가 자녀들에게 그것을 보고 배우게 하십시오. 우리 자녀가 이런 좋은 습관을 배우면 반드시 복을 받게 됩니다. 여러분만 잘 살지 마시고 자녀들에게 잘 사는 법, 복 받는 법을 잘 가르치기 바랍니다.

둘째, 롯은 어떤 선행과 친절을 베풀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인 창세기 19장 1절에 보면 두 천사가 저녁 때 소돔에 이를 때 롯이 그들을 영접합니다. 앞장인 18장에는 하나님도 오셨는데 아마 하나님은 올라가시고 두 천사만 소돔을 멸하러 온 모양입니다. 그런데 롯은 그들이 천사인 줄 전혀 몰랐습니다. 그런데도 롯은 낯선 그들을 친절하게 영접합니다. 물론 앞서 말한 대로 삼촌 아브라함에게서 배운 태도이기도 하고 또 자신도 소돔에 뒤늦게 이민 온 나그네 경험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1절에 보면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아 있다가” 두 천사를 영접했다고 하는데 롯이 성문에 왜 앉아 있었을까요? 그것도 지나는 사람도 별로 없는 저녁 때 말입니다. 학자들은 롯이 이미 소돔 성에서 지도자의 위치에 올랐다는 증거라고 말합니다. 왜나 하면 “성문에 앉아있다”는 말은 그 성에서 재판을 하거나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자리에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롯은 소돔에 이민 와서 상당 기간 고생하다가 이제 겨우 돈도 벌고 인정도 받는 위치에 올랐을 것입니다. 그러니 롯이 낯선 두 나그네를 보고 자기 옛날 생각이 나서 더 그들을 잘 영접했다는 것이지요. 롯이 두 천사를 영접하는 방법이 아브라함과 거의 똑같습니다(18장). 롯도 아브라함처럼 두 사람을 땅에 엎드려 절하며 영접하고 자기 집으로 가서 발을 씻고 식사도 하고 주무시고 가라고 간청합니다. 거절하는데도 강권하여 집으로 모셔 가서 정성껏 음식을 준비해 식탁을 차리고 두 나그네를 잘 대접합니다.

그런데 4절부터 보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참 부끄러운 일이 생깁니다. 나그네들이 막 잠들려 할 때 소돔 백성들이 ‘노소를 막론하고’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남자들이 다 롯의 집으로 몰려와 나그네를 내놓으라고 아우성을 칩니다. 왜요? 5절에 이유가 나옵니다.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뭘 상관해요? 이 말은 부끄럽지만 성관계, 즉 동성애를 뜻합니다. 낯선 두 남자가 와서 롯의 집에 머문다는 이야기를 듣고 동네 남자들이 다 몰려와 동성애 하게 나그네를 내놓으라고 아우성 친 것입니다. 영어사전에서 sodomy라는 낱말을 찾아보십시오. 그 뜻은 ‘소돔 사람의’라는 뜻이며 또한 남색(男色), 즉 남자 동성애를 뜻합니다. 소돔이 바로 이런 도시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노소 막론하고’ 모두가 성적으로 다 타락하고 죄악이 가득하니 하나님이 소돔을 유황불로 멸망시키신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롯은 놀라운 방법으로 대처합니다. 6절부터 보세요.

6 롯이 문 밖의 무리에게로 나가서 뒤로 문을 닫고 7 이르되 청하노니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하지 말라 8 내게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하건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 내리니 너희 눈에 좋을 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라

롯은 차라리 자기 처녀인 두 딸을 대신 내어줄테니 나그네들은 건드리지 말라고 말합니다. 친절이 좀 심하지요? 성경은 이러한 롯의 행동이 윤리적으로 옳으냐 그르냐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볼 때도 이것은 적적하지 못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 정도로 롯이 손님을 소중히 여겼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소돔 사람들은 롯의 제안을 거절하게 롯을 비난하고 밀치며 집으로 들어오려고 합니다. 하는 수 없이 두 천사가 롯을 집으로 데려 들어오고 문을 닫고 소돔 사람들의 눈을 어둡게 하여 문을 찾느라 헤매게 만듭니다. 아무튼 우리는 롯이 이 정도로, 심하다 싶을 정도로 선행과 친절을 베푸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심지어 자기 딸을 희생하고 자기가 희생해서라도 말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이러한 롯의 선행과 친절은 어떤 열매를 맺게 되었을까요? 12~13절을 보세요.

12 그 사람들이 롯에게 이르되 이 외에 네게 속한 자가 또 있느냐 네 사위나 자녀나 성 중에 네게 속한 자들을 다 성 밖으로 이끌어 내라 13 그들에 대한 부르짖음이 여호와 앞에 크므로 여호와께서 이 곳을 멸하시려고 우리를 보내셨나니 우리가 멸하리라

결국 롯은 이 사랑과 선행 덕분에 소돔의 멸망에 대한 예고를 듣게 되고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보존하게 됩니다. 물론 롯의 선행만이 아니지요. 앞장인 18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합니다. “소돔 성 중에 의인이 오심 명이 있으면 멸망시키지 않으시겠습니까? 아니, 사십 오명만 있으면, 삼십 명, 이십 명, 마지막엔 의인 단 열 명만 있으면 소돔 성을 멸망시키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는 간절한 기도를 드립니다. 

롯의 삼촌이자 멘토인 아브라함은 이렇게 끝까지 조카를 구하려는 간절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고 그의 간절한 기도가 롯이 생명을 구하는데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그래서 부모의 기도가 중요하고, 기도의 후원자, 기도의 멘토가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꼭 이런 기도의 후원자를 얻으시고 여러분도 그런 후원자가 되기 바랍니다. 하지만 아무리 부모나 배우자나 주변에서 열심히 기도로 후원해줘도 정작 본인이 안 움직이면 소용이 없지요. 롯 자신이 선행과 친절을 베풂으로 그는 복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3:2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누구 얘기겠습니까? 바로 아브라함과 롯 이야기지요. 그러니까 일부러 천사처럼 생긴 사람 찾아서 대접하라는 것이 아니라 늘 일상생활에서 친절과 사랑으로 대접하다보면 혹시 천사를 만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꼭 이렇게 되시기 바랍니다.

❚선행의 열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3주째 롯의 모습을 통해 ‘죄악된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알아보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우리도 선을 부지런히 행해야 합니다. 친절해야 합니다. 롯처럼, 아브라함처럼 사랑과 선행 베풀기를 멈추지 말고 계속하시기 바랍니다. 비록 세상은 죄악 되지만, 너무나 사랑이 메마르고 냉랭하지만, 때로는 배은망덕으로 사랑과 친절을 배신하기도 하지만, 그런 세상 속에서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아 사랑 베풀기와 선을 행하는 일을 계속해 나가야 합니다. 거창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수억 원씩 성금을 못 내도 좋고, 누군가를 살리려 내 장기를 내주거나 큰 희생을 치르지 못해도 좋습니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 속에서 작은 친절과 선을 베풀며 살면 언젠가 때가 이르러 반드시 열매를 거두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 복은 내가 직접 받지 못할지라도 내 자녀와 자손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성경이 그렇게 약속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생명의 삶> 큐티 교재에서 읽은 아주 인상적인 글을 인용하며 말씀을 마치지요. 인종차별 철폐 운동가로 노벨 평화상을 받은 남아프리카공화국(넬슨 만델라 대통령에 버금가는) 투투 대주교 이야기입니다. 그가 어쩌다가 성공회 주교가 되고 인종차별 철폐 운동을 하게 되었냐는 질문을 받고 어렸을 때 경험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가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길을 걷는데 성직자 차림의 훤칠한 백인이 다가오더랍니다. 

당시 남아공은 철저한 인종차별 국가였기 때문에 흑인이 백인이 지나가면 한쪽으로 물러나 고개를 숙이고 백인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투투와 어머니도 한쪽으로 물러나려고 하는데 그 백인이 재빨리 먼저 한쪽으로 비키고는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한 뒤 투투와 어머니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더라는 것이지요. 너무 놀란 어린 투투는 어머니께 물었습니다. “저 백인이 왜 저러는 거에요?” 이때 어머니의 대답은 투투의 인생을 바꾸어 놓습니다. 

“응, 저 사람은 성공회 주교인데 성경에서 선을 행하라고 배웠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는 사람에게도 친절하고 공손하게 대하는 거란다.” 그래서 어린 투투는 나중에 반드시 성공회 주교가 되겠다고 결심했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친절과 선행이 한 아이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고, 나아가 남아프리카공화국이라는 한 나라의 미래를, 그리고 세계를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우리는 나 한 사람 힘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나 하나 잘 한다고, 혼자 선행 베풀고 사랑 베푼다고 해서 뭐가 바뀔까 절망하거나 포기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나 하나쯤이야”로 바뀌게 됩니다. 하지만 절대 아닙니다. 이런 복음성가 가사가 있습니다. “작은 불꽃 하나가 큰 불을 일으키듯이...” 바로 이 가사처럼 우리의 작은 사랑의 불꽃이, 선행과 친절의 불꽃이 이 소돔처럼 죄악된 세상을, 냉랭한 세상을 바꾸어 놓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효자교회 대표선수요 천국의 국가대표입니다. 그러니 세상에 나가서 대표답게 잘 사셔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과는 그래도 ‘좀’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낙심하지 말고 끝까지 선을 행하여 때가 이르매 거두는 여러분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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