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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주일] 작은 자를 섬기는 종교① (마 18: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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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자를 섬기는 종교①  (마 18:1-10)


I.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시인 윌리엄 워드워드의 싯귀처럼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입니다.” 
첫 아이를 기르며 토하는 모든 얘기 엄마들의 일성이 있습니다. 
“내가 얘 낳아 길러보니 부모 맘 알겠더라.”는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아이를 길러보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내 자식 속썩일 때 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속썩이는 자녀인가를 알게 됩니다. 자식들이 날 행복하게 해 줄 때 날보고 하나님이 얼마나 행복해 하실까? 깨닫게 됩니다. 자식 문제로 이불 쓰고 울 때 날 보고 하나님이 얼마나 아파하셨을까? 느끼게 됩니다.

부모에게 있어서 자식은 참 신비한 존재입니다. 세상 장사 가운데 가장 손해 보는 장사가 자식 농사입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거둘 것 계산하지 아니하고 한없이 시간 과 정성과 물질을 쏟아 붓습니다. 

자식만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해 지고 눈가에 잔주름 미소가 흘러 넘칩니다. 군대에 가 있는 아들, 외국에 나가 있는 자식, 건강하게 잘 지낸다는 전화 한통에 온종일 사는 맛이 납니다. 어린 자식 감기만 들어도, 다 큰 자식 근심된 얼굴만 보아도 입맛이 떨어집니다. 이게 내 자식이요 어버지의 마음입니다.

탈무드에 내 아들과 놀아주고 성경 가르칠 시간도 없을만큼 바쁜 것은 죄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 교육학자는 요즈음 어버이들은 떡을 달라는 아이에게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는 아이들에게 뱀을 주고 있다고 한탄했습니다. 안아 달라고 하는 아이에게 텔레비전 스위치 켜 줍니다. 같이 놀아 달라 하는 아이에게 1,000원짜리 들려주며 그것 가지고 놀라고 합니다. 뛰어 다니고 싶어하는 아이에게 억지로 피아노 앞에 앉혀놓습니다. 마음껏 장난치고 싶어하는 아이에게 봉고차에 태워 컴퓨터학원, 미술학원에 보냅니다.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밥을 먹고 싶어 하는 아이에게 중국집 전화번호 가르쳐 줍니다. 교회 문 두드리는 아이에게 독서실 문만 두드리면 된다고 합니다. 

과연 떡을 달라는 아이에게 돌을 주고, 또 생선 달라는 아이에게 뱀을 주는 세상 아니겠습니까? 기업과 경제가 무너지는 것보다 한 나라가 무너지는 것보다 나쁜 것은 가정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문제 부모는 있으되 문제 아이는 없다는 말이 있지요. 

II. 천국에서 누가 큰 자 인가?

오늘 읽은 성경 말씀은 어린이 주일, 가장 많이 등장하는 본문입니다만 단순히 어린이를 소중히 여기라는 말씀만은 아닙니다. 

1절부터 5절까지는 “어린아이”라고 하다가 6절부터 갑자기 “소자” - 작은자라는 말로 바뀌어 집니다. 원문에서 어린아이는 파이디온(paidion)이요, 소자 - 작은자는 미크론(Mikron)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 미크론 - 소자, 작은자는 어린아이 뿐만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연약한 자를 말합니다. 셀 목장안에서 새가족, 어린 신자가 미크론입니다. 사회속에서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가난하고 소외된 자가 미크론입니다. 육체적으로 병이 들어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 미크론입니다. 

천국에서는 이들 한 사람 한사람이 귀하고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이런 사람들이 더 소중히 대접받는 곳이 하나님 나라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1절)

제자들의 관심이 무엇이었습니까? 누가 크냐는 것입니다. 도대체 누가 서열이 높은가? 하는 것입니다. 누가 더 대접을 받을 것인가?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인가? 이는 제자들뿐만 아니라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타락한 사람들, 죄인들의 공통된 관심사입니다. 누가 더 월급을 많이 받는가? 누가 더 권력을 쎄게 가지고 있는가? 누가 더 예쁜가? 누가 더 큰집에 사는 것인가? 누가 더 좋은 자동차를 타고 멋진 옷을 입고 사는가? 

이러한 관심은 세속적인 관심입니다. 죄인들의 관심입니다. 이 관심이 인류를 불행하게 만들고 이 비교의식이 나를 불만족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런 관심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천국에서는 서열이 있는 것입니까? 서열이 있다면 누가 큰 자 입니까?” 묻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누가 더 큰 자 입니까?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습니다. 
천국에는 서열도 계급도 없습니다. 의미없는 질문일 뿐입니다. 
천국에서는 작은 자가 소중히 대접받는 곳입니다.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예수님이 세례 요한을 표현하실 때에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11절) 말씀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러나 천국에서는 이보다 작은 자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에는 작은자 없다. 서열 낮은자 없다. 다 하나님의 자녀일 뿐이다. 이것이 천국이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비극이 바로 천국의 질서 대신 세상의 질서, 
하나님 나라 가치 대신 세상의 가치관을 가지고 교회에 그대로 들어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천국에서 누가 큰 자인가?” 이런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받으시고 
예수님께서 웅변적인 행동을 하셨습니다.

2절부터 4절 말씀에 보면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2-4)

성경을 읽어내려 가다가 ‘진실로’라는 말은 굉장히 강조어입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오늘 본문이 ‘결단코’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강조어의 또 다른 강조어를 붙이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어린이’가 아니고 ‘같이’입니다. 초점은 어린이 같이. 계급과 서열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계급과 질서는 오직 겸손의 계급이 있을 뿐입니다. 

III. 연약한 자를 영접하는 사람

천국엔 계급도 서열도 없지만 큰 자의 모습이 있다 하고 5절 이후에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천국에서 큰 자가 누구입니까? 하나님 나라 지도자 리더는 누구입니까? 

5절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그대가 진정 천국에서 큰 자이기를 원하면 연약한 자를 영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어린이를 천국의 백성으로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영접하라는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어린아이를 예수님처럼 대하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여기에 천국에서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자식들은 부모를 대할 때 하나님처럼 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대신한 존재가 어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천사처럼 대해야 합니다. 하늘의 천사를 내게 보내준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천사처럼 대해야 합니다. 아내는 남편을 주님처럼 섬겨야 합니다. 셀목장 안에서 서로 주님처럼 대해야 합니다. 목사는 교인을 예수님처럼 섬겨야 합니다. 교인은 목사를 주님처럼 대해야 합니다. 

이 비밀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실망하고 상처를 줍니다.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퍽 재미있는 말씀이 나옵니다.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41절) 즉, 선지자라는 이름 때문에, 그의 하는 사역이 선지자라는 사실 때문에, 
그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한다는 것 때문에 선지자를 선지자로 영접하면 
그가 하나님 나라에 갔을 때 그가 선지자와 동일한 상을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가끔 우리교회 선교사님들이 방문합니다. 그가 선교사라는 사실 때문에 그를 접대하면 그를 인정해 주면 하늘 나라에서 선교사가 받는 동일한 상급을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나이 어린 목사가 있지만 인격적으로 모자라 보이지만 그가 목사라는 사실 때문에 주의 종으로 접대하면 목사가 받아야 될 상을 하늘 나라에서 받는다는 것이지요. 

내 아이는 하나님이 보내신 아이니까, 내 자식은 하나님이 주신 하늘의 천사이니까, 나를 믿고 내 가정에 맡긴 존재이니까,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처럼 대하고 양육하면 주님과 같은 상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저는 꽤 괜찮은 아빠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이들을 신앙으로 잘 양육하지요. 밥 굶기지 않았지요. 남들처럼 좋은 옷 입히지 못했지만 벗기지 않았지요. 학교 보내주었지요. 잠재워 주었지요. 적당한 용돈 주었지요. 보라 내가 얼마나 꽤 괜찮은 아빠인가? 그런데 어느날 기도하는 가운데 내가 그들에게 해 주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찮은 것에 불과했고 그들이 내게 주는 것은 엄청나게 값어치 있는 것들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내 피곤한 삶에 활력을 그들은 공급해 주었습니다. 때로 힘들고 지쳐 있을 때에 그들을 보며 나는 새 힘을 얻었습니다. 아무렇게나 말하고 행동하고 싶을 때에 그들을 바라보며 내 옷깃을 여미고 내 영성을 가다듬을 수 있었습니다. 수고한 보람과 희망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땀 흘리는 위로가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들을 보고 나를 반성했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아름다운 축복이었습니까? 그들이 바로 나의 천사들이었습니다. 험악한 이 생을 살아갈 때에 내가 쓰러지지 아니하도록, 넘어지지 아니하도록, 지치지 아니하도록, 천사를 보내주었는데 바로 그들이 내 자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하늘의 존재로, 하늘의 선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처럼 영접하라 말씀합니다. 

내 자식이 남의 집 아이들처럼 똑똑하지 못할 때에, 그 아이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퍽 어려운일 일수 있습니다. 남의 집 아이들은 다 건강한데 우리 집의 장애인 어린아이가 태어났을 때에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눈물 겨운 일인지 모릅니다. 원치 않았는데 우리 집에 문제아가 생겨납니다. 헝클어진 머리채를 부둥켜안고 울어야 하는 순간이 많이 있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영접하라 말씀하십니다. 있는 그대로 그들을 기도하고 축복하라 말씀하십니다. 

보스턴에 불행한 애니라는 작은 소녀가 있었습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 맹인이었습니다. 정신질환으로 정신병동에 입원해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버려진 아이처럼 보였습니다. 부모조차 그들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나이든 자원봉사자 한 사람이 이 애니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따뜻한 사랑에 감동이 되었는지 6개월쯤 그를 돌보았을 때 마음의 문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점점 병세가 좋아져서 퇴원했고 보스턴 파킨스 맹아학교에 들어가 6년동안 우등생으로 공부를 합니다. 한 신문사의 도움으로 개안수술을 받아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신문에 보니까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3중고에 시달리는 아이가 한명 있는데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광고였습니다. 신문사의 도움으로 눈을 뜬 것도 감사하고 나이든 자원봉사자의 사랑도 고마워서 ‘나보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지’ 늘 생각했는데 흔쾌히 자원했습니다. 이 아이 곁에서 함께 먹고 자기를 48년. 바로 이 아이는 인류역사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헨렌 켈러였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이 헨렌 켈러 여사에게 영국 최고의 훈장을 수여하며 “당신처럼 모든 불리한 조건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엄청난 업적을 이룰 수 있었습니까?” “오직 한 가지 앤 설리반 선생님 때문에!” 3중고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준 앤 설리반 선생님 때문에 헨렌 켈러가 이 땅에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IV. 연약한 자를 보호하는 사람

천국에서 누가 큰 자 입니까? 하나님 나라의 리더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소자를 소중하게 영접하는 일이요. 둘째는 실족케 하지 않는 일입니다. 좀 더 적극적으로 말하면 연약한 자를 보호하고 양육하는 일입니다. 

본문 10절에 퍽 재미있는 한 단어가 나옵니다. “그들의 천사들”이란 말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지킬 수 없는 연약한 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하나님이 수호천사를 보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기억하십시다. 우리가 우리 가정안에서, 혹은 셀 목장안에서 혹은 사회속에서 연약한 자들을 돌보고 지킬 때 우리는 천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우리의 어린 자녀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잘 양육할 때 우리는 하늘의 존재, 천사가 되는 것입니다. 셀 목장안에서 어리고 연약한 가족을 잘 섬기고 양육해 갈 때 우리는 교회의 천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의 가난하고 약한자, 장애인들을 섬길 때 이 사회의 천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천사 역할을 하지 못하여 저들을 실족케 한다면 우리는 악마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어지는 6절 말씀은 그렇게 기록해 내려가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저는 목회를 하면서도 가끔 실족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이 본문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에 너도 많은 사람 앞에 말하는 사람이니 많은 사람을 대하다 보니 너도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하느니라. ‘그렇구나. 나 때문에 실족하는 사람이 많겠구나. 내 설교에 상처 받는 사람이 많이 있겠구나. 내 사랑을 받고 싶은데 내 사랑 받지 못해서 실족하는 사람이 있겠구나.’ 싶습니다. 이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는 가운데에 부족한 종으로부터 종의 연약함 때문에 상처받고 실족한 분이 계시면 주님의 이름으로 종을 용서해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명절이나 부모님의 생신 때가 되면 가족들이 함께 모입니다. 그때 언제나 중심은 어린아이입니다. 아이 때문에 모든 사람이 웃습니다. 모든 가족들의 눈길이 아이에게만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아이 이야기로 꽃을 피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셀 목장안에서도 늘 어린 신자 중심으로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셀은 성경 지식을 자랑하는 곳이 아닙니다. 자신의 영적인 성숙을 뽐내는 곳이 아닙니다. 성숙한 사람이 연약한 신자를 돌보고 세워주고 양육하여 나보다 더 훌륭한 리더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내 주변의 연약한 자, 미크론 - 작은 자가 있을 때에 그들을 어떻게 내가 섬길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이 나의 어떤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인가? 기도하며 그들을 바라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파트 주차장에 한 사람이 차를 주차하고 있었습니다. 퍽 예쁜 자동차였던 모양입니다. 한 소년이 이 광경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자동차에서 내리는 아저씨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아저씨 자동차가 너무 예뻐요. 이런 자동차 사려면 꽤 비싸겠지요. 난 잘 몰라. 우리 형님이 내게 선물한 것이거든. 그랬더니 활짝 웃으면서 “나도.” “어 너도 나중에 형이 너한테 자동차를 사 줬으면 좋겠다는 뜻이구나.” “아니예요. 내게 동생이 한명 있는데 다리가 불편해서 밖에 나가서 걷지도 못하고 뛰지도 못해요. 내가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내 동생에게 이런 자동차 하나 사 주고 싶어요. 나도 내 동생에게 자동차 하나 사주는 그런 형이 되고 싶어요.”

V. 연약한 자를 축복하는 사람

성경과 기독교 역사 속에서 믿음의 사람들은 연약한 자들에게, 자녀들에게 평소에도 복을 빌었습니다. 이삭이 죽기 전에 야곱에게 축복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먼 길을 떠날 때에, 결혼을 앞두고 있을 때에, 사업을 새롭게 시작할 때에, 군대가고 전쟁터에 나갈 때에, 잠자리에 들 때, 그들은 침대 머리에 앉아 복을 빌었습니다. 

먼저, 축복할 때에 신체적인 접촉을 했습니다. 손을 잡기도 하고 어루만지기도 하고 머리에 손을 얹기도 하고 입을 맞추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의미있는 축복의 말을 그들에게 남겼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너를 축복한다. 너는 놀라운 하나님의 사람이 될 거야. 너는 꽤 쓰임받는 사람이 될 거야. 믿음의 사람이 될 거야. 너는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이 네 기도에 응답해 주실 거야. 하나님은 너를 축복하며 너를 영광스럽게 쓰실 거야.”

마지막 유언을 넘길 때에, 임종을 앞두고 자식을 한 자리에 불러모아 축복했습니다.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이 너희들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나를 축복하신 하나님이 너희들에게도 축복하길 원하노라. 평생을 나와 동행하셨던 그분이 너희들과도 이 땅 세상 끝날 때까지 너희들과 동행하기를 원하노라.”

랄프 갈복이라는 사람이 쓴 「가정의 축복」이라는 책에 그런 얘기가 있습니다. “구약의 믿음의 조상들이 자손들을 축복하듯이 목사가 교우들을 축복하듯이 가정의 아버이들은 거룩한 손을 들어 자식을 위하여 축복해야 될 권세가 있고 의무가 있고 특권이 있다고.”

구약 성경의 영향을 받은 위대한 어머니들의 교육방법을 쥬이쉬 마더(Jewish mother) 교육방법이라고 합니다. 유대인 어머니들의 교육방법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많은 내용이 있습니다만 간단하게 요약하면 두 마디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너의 자녀를 비교급 인생으로 만들지 말고 최상급 인생으로 만들어라. 비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 부모 다른 부모와 비교하지 말아라. 내 자식 다른 자식들과 비교하지 말아라. 그리고 있는 모습 그대로 축복하라. 비교급 인생으로 만들지 말아라. 

그런 교육을 받고 성공한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아인슈타인입니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때까지 성적표를 받을 때마다 꼴찌였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마지막 성적표에는 그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 학생은 앞으로 무슨 공부를 하든지 공부로 성공할 것 같지는 않음.” 이 성적표를 받아든 엄마의 마음이 오죽하겠습니까? 그러나 성적표를 받을 때마다 이 엄마는 아인슈타인을 품에 안고 머리에 손을 얹고 그 아이를 축복했습니다. “아이야, 걱정할 것 없다. 남과 같아지려고 하면 결코 남보다 나아질 수 없는 법이다. 하지만 너는 남과 다르기 때문에 기필코 훌륭한 인물이 될거야.” 과연 그는 세계적인 물리학자가 되었습니다. 

자녀들을 비교급 인생으로 보지 말고 최상급 인생으로 보라. 하나님의 말씀, 긍정적인 언어로 축복하라는 것입니다. 단순하면서도 얼마나 위대한 교육방법입니까? 

아이들을 망치는 언어가 이 땅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비교하는 언어입니다. 

“아무개 좀 봐라. 언니 좀 본 받아라.” 자존감을 무너뜨리는 인격을 무시하는 말들입니다. “잘하는게 뭐 있어야지. 지겹다 지겨워. 멍청한 자식아.”

지금도 직장에서 가정에서 사회에서 학교에서 폭력적인 언어, 잔인한 언어, 가혹한 언어 때문에 인격과 영혼이 망가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반면, 아이를 살리는 언어들이 있습니다. 축복의 언어, 칭찬의 언어, 격려의 언어 말입니다. 나는 네가 자랑스럽다. 네가 소중하다. 아빠는 너를 믿어. 너를 위해 기도한단다. 너만 보면 행복해. 참 잘했어. 너무 멋져. 너만 보면 힘든 줄 몰라. 너의 진가를 나타내기 시작했구나. 얘야, 대단하다. 얘야, 참으로 놀랍다. 

시카고 대학 교수인 벤자민 볼룸이라는 학자가 연구하면서 학자들, 예술가들, 혹은 운동선수들, 흔히 말하는 성공했다고 하는 존경받는 분들을 120명을 조사해 보고 결론을 내렸는데 첫 째는 “아이들을 가르칠 때는 많이 칭찬하라”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칭찬 받는 수준에서 자기 가치를 발견한답니다. 칭찬 받는 바로 그 수준에 도달하도록 그들은 노력하게 되고 칭찬 받는 만큼 자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가르치기는 하되 나무라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한 번 나무라면 ‘내가 잘못했는가봐.’ 두 번 나무라면 ‘난 머리가 나쁜가보다.’ 세 번 나무라면 ‘내가 세상에 있는 것이 귀찮은가봐. 나는 구제불능한가 봐. 어머니는 나를 키워가는 것이 고생스러운 가봐.’ 이렇게 생각합니다. 벌써 정신적으로 자살이 시작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무라지 말라는 것입니다. 잘못된 일이 얼마든지 있어도 아이를 나무라면서 키우지 말고 오히려 성공했거나 잘한 일이 있으면 그것을 오래오래 기억하게 해주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기를, 자기 가능성을 인정하게 되니까요. 잘한 일에 대해서 오래오래 기억합니다. 

그래서 장점을 계속 극대화하도록 해주는 것이 교육의 원리입니다. 탈무드에 재밌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선물을 주면서 말을 많이 하면 아니 준만 못하다” 잔소리 들으면서 아이들이 하는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참 돈 벌기 힘들다.” 뇌물성 선물이 세상을 망친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깊이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누구인가라도 단 한 사람,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으로 나를 사랑할 때에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될 때 그는 참으로 귀한 사람으로 태어나게 되는 겁니다. 

천국에서 누가 큰 자 입니까? 천국엔 서열이 없습니다. 겸손한 자가 큰 자입니다. 연약한 자가 더 소중히 여김을 받는 곳이 천국입니다. 천국에 큰 자는 연약한 자들, 작은 자들을 영접합니다. 여러분 도무지 용납이 안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들의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들 모습 그대로 받아 주기로 하십시다. 그것이 천국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도무지 용납이 안되는 분을 여러분이 한 사람이라도 예배를 통하여 받아줄 수만 있다면 여러분의 마음은 천국이 건설될 줄로 믿습니다. 그들을 보호하고 양육하십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위대한 리더로 함께 만들어 가십니다. 칭찬하는 것입니다. 격려하는 것입니다. 축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아! 거룩한 손을 들어 그들을 축복하라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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