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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주일] 어린이의 재발견 (눅 18: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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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의 재발견 (눅 18:15-17)


어제가 ‘어린이날’이었습니다. 이 어린이날은 소파 방정환 선생이 이끌던 색동회가 1923년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공포하고, 기념행사를 가짐으로써 시작됐습니다. 그 후 일제의 억압으로 중단됐다가, 해방 후 5월 5일로 날짜를 바꾸어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그러다 본격적으로 정부가 나서서 1957년에 ‘어린이 헌장’을 공포하고, 1975년에 ‘국가 공휴일’로 정하게 됨으로써, 오늘과 같은 어린이날로 자리를 잡게 됐습니다.

어린이날을 지키게 된 것은 어린이를 새롭게 이해하게 됐다는 것을 뜻합니다. 전통사회의 유교문화 속에 무시되고 억압되던 어린이를 소중한 인격체요, 당당한 권리를 가진 존재로 재발견하게 됐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어린이날을 지키는 것은 다시금 어린이를 소중한 존재로 재확인하고, 더욱 사랑으로 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린이를 재발견한 것은 그 명칭에서부터 시작됐습니다. 원래 어린이에 해당하는 제대로 된 명칭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보통은‘애새끼’, ‘자식놈’, ‘딸년’, ‘아들놈’이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일부 사투리로 ‘어린아’, ‘얼라’, ‘어린놈’, ‘어린 애기’, 등으로 불렸습니다. 그러다 1920년에 방정환 선생이 ‘어린이’라고 부르자고 제안해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어린이라는 말은 국어사전에 이렇게 풀이하고 있습니다. “어린이란 어린 아이를 높여서 부르는 말로서 나이가 어린 아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어린이를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하고, 더 나아가 존중하며 부르는 호칭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어린이라는 명칭은 이미 어린이를 인격체요, 소중한 존재로 재발견하고자 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린이를 재발견해야 합니다. 소중한 인격을 가진 인격체로 재발견해야 합니다. 무한한 가능성을 간직한 내일의 주인공으로 재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고 돌보며 지켜주어야 할 우리의 분신으로 재발견해야 합니다.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의 시집 [예언자]는 한 때는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 책으로 정평이 나있습니다. 이 시 중에 ‘아이들에 대하여’라는 부분이 어린이의 부모들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아이들은 그대를 거처 이 땅에 온 것 뿐, 그대가 창조한 것은 아니다.    아이들은 그들 자체의 삶을 살아 갈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아이들은 그대들의 소유물이 아니다. 

그대들은 아이들에게 사랑을 줄 수 있으나 그대들의 생각을 주어서는 안 된다. 아이들은 그들만의 생각을 소유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대들이 아이들처럼 되기에 힘쓰는 것은 좋으나 아이들을 그대들처럼 만들려 하지 말라. 

그대들은 아이들에게 육신의 집은 줄 수 있으나 영혼의 집은 줄 수 없다. 아이들의 영혼은 내일의 집에 살기 때문이다. 

그대들은 활, 아이들은 화살이다. 사수이신 하나님은 그대들을 힘껏 당겨 아이들을 먼 미래로 쏘아 보내신다. 하나님은 활인 그대들도, 화살인 아이들도 사랑하신다. 

그렇습니다. 어린이날을 즈음하여 그리고 어린이 주일을 지키면서 우리는 어린이들을 재발견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께서 활인 우리를 통해 저 먼 미래로 쏘아 보내실 화살이라는 점을 재발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재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저들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겨야 할 것인가를 새삼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나아가 저들을 저 먼 미래로 쏘아보내기 위해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야 한다는 점을 깊이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영적인 측면에서 어린이에 대해 우리가 새롭게 재발견해야 할 점이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 주님께서 주님 앞에 나오는 어린이들을 귀하게 대해 주시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어린이에 대한 주님의 시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점을 깊이 새겨야 하겠습니다.

첫째, 주님께 나오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16절에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이 말씀은 제자들의 태도에 대한 주님의 반응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앞의 15절을 보면,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사람들이 어린 자녀들을 주님 앞으로 데리고 오는 것을 제자들이 가로 막았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심하게 나무라면서 어린이들이 주님 앞으로 나오지 못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제자들을 나무라셨고, 어린이들이 주님 앞으로 나오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왜 제자들은 부모들이 어린아이들을 주님께로 데리고 나오는 것을 가로 막았을까요? 

우선, 어린이들을 귀찮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지금 주님께로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통제가 힘들고 질서를 유지하기가 힘이 듭니다. 그런데 어린이까지 가세하면 더욱 힘이 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 아이들이 보채며 울거나 시끄럽게 떠들면 곤란합니다. 많은 사람들 중에서 아이들이 다치거나 넘어지기라도 하면 곤란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 틈에서 아이들을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곤란합니다. 제자들의 눈에는 어린이들은 그저 귀찮은 존재일 뿐입니다.

다음으로 더 중요한 것은 어린이들에게 주님이 필요하다고 생각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어린이들도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지 못했습니다. 아직 어려서 말씀을 들어도 이해하기 힘들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중에 말씀 들을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어린이들도 주님 앞으로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어린이들이 주님 앞으로 나아와 축복을 받아야 하고,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린이들도 주님 주시는 복을 지금 받아야 하고, 주님의 말씀을 지금 들어야 한다고 보신 것입니다.

유대인의 인구수는 전 세계에 걸쳐 약 1천 4백 50만 명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전 세계 인구의 0.25% 정도 밖에 안 되는 작은 민족입니다. 그런데 노벨상 수상자의 약 1/3이 유대인입니다. 미국의 큰 부자들 중 1/4이 유대인입니다. 그리고 미국 내의 대학교수 중 1/3이 유대인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요? 유대인이 특별히 우수해서 일까요? 한 연구조사에 의하면 유대인의 어린이들이 동양의 어린이들보다 미숙하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요? 단연코 교육 때문입니다. 

유대인의 남다른 교육의 비밀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한 가지가 바로 ‘테필린’(Tefillin)입니다. 이 테필린이란 몸에 부착하는 말씀 상자를 말합니다. 즉 가로 세로 높이가 각 3-4센티 정도의 검은 색 가죽상자에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을 담아 놓은 것입니다. 두 가지인데 하나는 ‘쉘 로쉬’(shel rosh)라 하여 머리에 붙이고, 다른 하나는 ‘쉘 야드’(shel yad)라 하여 손목에 붙입니다.

그리고 이 테필린에는 ‘파리시요트’(parishiyot)라 불리는 서기관이 손으로 쓴 성경구절을 적은 두루마리를 넣습니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이 테필린 안에 넣어둔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해서 암송하도록 했습니다.

유대인에게 있어 테필린을 머리와 손에 부착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더불어 산다는 영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유명한 유대인 신학자 밀톤 스타인버거 박사는 테필린 부착에 대한 의미를“유대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몸에 지님으로 자신의 모든 마음과 행동을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자 하는 헌신의 표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유대인의 남다른 교육의 핵심은 어린이를 어려서부터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한 데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며 자라게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암송하며 자라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하나님께서 길러주신 아이들을 누가 당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어린이들은 주님 앞으로 나와야 하는 존재들임을 재발견해야 합니다. 주님의 축복을 받으며 자라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암송하면서 자라야 합니다. 그래야 올바른 인격과 가치관을 가지고 자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 주시는 풍성한 은사 곧 재능을 키울 수 있습니다.

둘째, 천국의 주인공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16절을 보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한 마디로 어린이들이 천국의 주인공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과 연관해서 떠오르는 말씀이 있습니다. 마 5:3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심령이 가난한 자가 천국의 주인공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을 말씀하시면서 처음 입을 열어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듣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다 천국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들 중에 심령이 가난하지 않은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씀 듣기 위해 주님 앞으로 나온 사람들이 천국의 주인공이 되려면 심령이 가난해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주님 앞으로 인도되어온 아이들은 천국의 주인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어린이들은 다른 조건도 필요 없이 그 자체로 천국의 주인공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조금 더 자세히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15절에 ‘어린 아기’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 말은 헬라어로 ‘브레페’(Brephe)라는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브레페는 젖먹는 아기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16절을 보면 ‘어린 아이들’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헬라어로 ‘파이디아’(paidia)라는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파이디아는 7세 미만의 어린아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천국의 주인공이라고 말씀하신 대상은 7세 미만의 영.유아.유치 어린이를 가리킵니다. 저들은 생각이 단순합니다. 마음속에 이것저것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엄마만 의지하고 엄마 말씀이면 진리 그 자체입니다.

아마도 엄마가 아이들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에 대해 나름대로 가르쳐주었을 것입니다. 이 아이들은 그 말씀을 그대로 믿고 주님 앞으로 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 나온 어른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주님을 보았을 것입니다. 하시는 말씀과 보이시는 능력을 보고 최종 판단을 하려고 마음속에 열심히 계산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이런 어린이들이 천국의 주인공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래전 주일학교 교사 시절 생각이 납니다. 어린이들과 여름성경학교 중이었습니다.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옵니다. 당장이라도 폭우가 쏟아질 기세입니다. 어린이들이 우산을 가지고 오지 않아서 끝나고 집에 가는 일이 걱정입니다.

그래서 어린이들과 비가 오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 배웅을 준비하며 혹시 몰라서 우산을 챙겼습니다. 한 아이가 제게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우산 필요 없어요. 하나님께서 우리기도 들어주셔서 비 오지 않게 해 주실거예요.” 

그 순간 난감했습니다. 그리고 부끄러웠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린이들을 천국의 주인공으로 여기고 계십니다. 때 묻은 어른들보다 생각이 복잡한 어른들보다 어린이들을 더 좋아하시고 더 편하게 여기시고 더 사랑하십니다. 

이제 우리가 이런 어린이들을 더욱 귀하게 여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때로는 어린이들에게 기도부탁도 하고, 때로는 그들의 생각에 귀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셋째, 어린이들에게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17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이제 어른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여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저 어린아이들에게서 배우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린이들에게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한 마디로 저들의 동심(童心)입니다. 동심이란 천진난만한 마음, 순진한 마음, 단순한 마음, 솔직한 마음, 겸손한 마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우리가 어른이 되면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 동심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세파에 시달리며 세상풍조에 적응해 가며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동심을 하나씩 둘씩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때로는 철이 든다는 생각에 동심을 포기할 때도 있습니다.

이렇게 동심을 잃어버리게 되면서 하나님 나라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확인해 보려고 합니다. 따져보려고 합니다. 계산해 보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 나라를 아멘으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어떤 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지대 침수지역에 살면서 해마다 장마 때면 곤욕을 치른다는 것입니다. 

어느 해인가 대비도 제대로 못했는데 갑자기 물이 차오르더랍니다. 하수구로 물이 역류하고 대문 쪽에서도 물이 쏟아져 들어오더랍니다. 막아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가재도구 하나라도 높은 곳으로 올려보려고 쩔쩔매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철없는 어린 자식이 소리를 치더랍니다. “엄마! 수영복” “야 신난다!” 그러고는 세수 대야를 들고서는 물장난을 치더랍니다. 얼마 지나서 보니 나름대로 세수 대야로 물을 퍼내더랍니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처음에는 화도 났지만 철없는 어린아이의 행동에 그만 걱정을 내려놓고 웃고 말았답니다. 그래 이제 어쩌겠냐는 생각에 자기도 어린아이와 같이 그 물속에 뛰어들어 한 동안 놀았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동심을 많이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인생을 너무 힘들게 삽니다. 걱정도 많고, 두려움도 많고, 의심도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체험하지 못하며 삽니다.

어린이들을 보십시오. 울다가도 뚝 그치고 어느새 천사처럼 새근새근 잠을 잡니다. 어린이가 근심 때문에 밤을 설치는 것 보셨습니까? 어린이가 내일 걱정 때문에 밥을 먹지 못하는 것 보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런 것을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아이를 가르치려고만 하지 말고 어린아이에게 배우려고도 하라는 말씀입니다. 특히 동심을 배워서 하나님 앞에 어린아이처럼 서려고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은 우리가 어린이주일로 지킵니다. 먼저 우리는 어린이를 재발견해야 하겠습니다. 이 어린이들에게 무엇보다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는 일도 중요하고, 좋은 교육을 시켜주는 일도 중요하지만 먼저 주 앞으로 나오게 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주 앞에 나온 아이들이 천국의 주인공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을 기뻐하시고 저들을 축복하신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또한 우리가 이 어린이들에게 배워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동심을 배워서 어린이처럼 주 앞에 서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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