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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주일] 천국에서 가장 큰 자 (마 18: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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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서 가장 큰 자 (마 18:1-10)

저희교회에는 어르신들도 많이 계시지만 참 이쁜 아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중에도 2살의 찬희와 수민이는 참 귀여운 아이들입니다. 찬희는 남자아이이고 수민이는 여자아이입니다. 두 아이의 공통점은 각기 3남매 중 막내라는 점입니다. 수민이는 약간씩 콧물을 흘릴 때도 있지만 저를 만나면 기쁘게 제 볼에 뽀뽀를 해줍니다. 참 행복합니다. 어제는 찬희가 엄마와 함께 교회에 와서 안아주었더니 마치 자기 할아버지에게 안긴양 착 안깁니다. 전혀 불안함이 없습니다. 처음 안기지만 자신의 몸을 맡깁니다. 얼마나 이쁜지요 거기다 눈망울은 얼마나 초롱초롱 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어린이의 특성을 3가지로 말합니다. 첫째는 겸손함입니다. 아이들은 교만할 줄 모릅니다. 무얼 잘한다고 으시댈 줄도 모릅니다. 둘째는, 단순함입니다. 아이들은 순진무구합니다. 감출 줄도 모르고 안그런 척 할 줄도 모릅니다. 있는 그대로 느끼는 대로 표현합니다. 셋째는, 의존성입니다. 부모에게 의존하기 좋아하고 잘 믿습니다. 너무 잘믿어 유괴당하는 경우도 있지만 아이들은 잘 믿습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어린이를 내세우시고 말씀하십니다. 
1-3절“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 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제자들의 공통된 관심은 누가 크냐입니다. 남자들의 관심은 ‘누가 월급을 더 많이 받느냐?’ ‘누가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권력을 가지고 있는가?’입니다. 그런가 하면 여자들의 관심은 ‘누가 더 예쁜가?’ ‘누가 더 세련되었나?’ ‘누가 더 옷을 잘입나?’입니다. 1절의 “그 때에”라는 것은 예수님이 수난예고를 했을 때입니다(막17:22-23). 

예수님의 수난을 앞두고도 오직 제자들의 관심은 ‘천국에서 누가 가장 큰자인가?’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노중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이는 노중에서 서로 누가 크냐 쟁론하였음이라”(막9:33-34) 

그러나 실상 천국에는 이땅과 같은 계급의 서열이 없습니다. 이 땅에는 왕, 신하, 관리, 백성, 천민의 계급이나 서열이 있지만 천국에는 오직 하나님의 자녀만 있을 뿐입니다. 예수께서는 한 어린이를 내세워 자기를 낮추는 자가 천국에서 가장 큰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4절“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천국의 질서는 겸손입니다. 겸손한 사람이 가장 큰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복을 주십니다. 지난번 성지순례 때 여행사 사장이 직접 가이드로 동행했었는데 그분의 명함에는 영업부장이라는 직함이 있었습니다. 지난 주간 저희교회 권사님의 아들이 운영하는 ‘디톡스 코리아’라는 벤쳐기업에 가서 예배드렸는데 명함에는 ‘기획실장’이라고 찍혀있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고 이 회사들이 잘되는 이유를 알 것 만 같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한 어린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셨습니다’(2절). 사실 예수님의 행동은 그 당시의 정서로 볼 때 파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여자와 아이들은 인격적으로 대우 받지 못했고 그저 재산목록의 하나로 여길 정도였습니다. 로마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물에 던져서 살아나는 아이만 전사로 키웠다고 합니다. 어린아이를 세워 천국시민의 기준으로, 모델로 삼으신 것은 아이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태어난 존재요 하나님의 자녀임을 천명한 사건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1920년 이전에는 아이들에 대한 인격적인 호칭조차 없었습니다. 보통 아이들을 부를 때 ‘이놈’ ‘어린 것’ ‘애 새끼’등의 호칭으로 불렀습니다. 그러던 중 소파 방정환 선생의 제안으로 어린이날을 제정하였고 ‘어린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린이’라는 말은 ‘어린신 이’ ‘어리신 분’이라는 존칭에서 왔습니다. 당시에 예수님이 불러 세우신 어린이가 베드로의 아들이었다는 설도 있고, 초대교회 안디옥 교회의 감독을 지내가 순교한 ‘이그나티우스’ 였을 것이라는 설명도 있습니다.

어린이는 존귀한 존재요 나라와 가정의 미래입니다. 교회의 꿈이기도 합니다. 유대인 부모들은 자녀교육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2000만도 안되는 전세계의 유대인 가운데 노벨상 수상자가 30%나 된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유대인 부모들의 교육방식과도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1. 유대인 부모들은 아이들을 서로 비교하지 않습니다.

비교란 둘다 죽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교육에서는 몇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위협형은 ‘...대로 안하면 혼난다’ 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비교형은 옆집아이와 우리 아이, 형과 동생을 비교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나열형은 지나간 일을 줄줄이 나열하는 것입니다. 조소형은 ‘한 번 잘해봐라’ ‘잘되나 보자’등 냉소적인 유형입니다. 변덕형은 엄마의 기분따라 종잡을 수 없이 아이들을 대하는 것입니다. 기분이 좋으면 무엇이든 다 해주겠다고 하다가 기분이 나쁠 때는 전혀 다른 태도를 취하는 것입니다. 변덕형이 교육상 가장 안좋은 방법입니다. 

물리학자요 상대성 원리를 발견한 아이슈타인은 어릴 때 문제아로 통했습니다. 학교 선생님이 보낸 성적표에는 ‘이 아이는 무엇을 해도 성공할 수 없음’이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한국 같으면 초상집처럼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어머니는 담담하게 아들에게 말합니다. “너는 남과 다르기 때문에 기필코 훌륭한 인물이 될거야” 어머니는 친히 아들을 가르쳤고 위대한 인물로 키워냈습니다. 

진정한 교육은 하나님께서 그 아이에게 주신 재능과 은사를 찾아내어 개발시켜주는 것입니다. 획일적인 평가나 기준으로 비교하면 아이들의 무한한 가능성을 막아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 있습니다.


2.유대인 부모들은 축복관이 남달랐습니다.

유대인들은 랍비(지금의 목사)들이 마을에 오면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축복기도 받기를 즐겨합니다. 왜냐하면 부모가 할수 있는 부분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하실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농부들이 곡식을 가꿀 때도 씨를 뿌리고 거름을 주고 잡초를 뽑아주는 일은 사람이 하지만 비를 내리고 태양을 비추시고 바람을 불어오는 일은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9:13절에도 부모들이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안수 기도해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이는 유대의 부모들이 자녀들이 축복받는 것을 사모하고 있음을 증명합니다. 매월 1일에 드리는 월삭예배에도 늘 어린자녀들을 엎고 끌고서 새벽예배에 나오시는 부모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는 진심을 다하여 자녀들을 위해 안수기도를 합니다. 부모들의 정성과 열심히 너무나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월남전에 참전했던 한국군목의 이야기입니다. 예배가 끝나갈 즈음 일단의 미군병사들이 예배당에 뛰어들어와 무릅을 꿇었습니다. 얼떨결에 축도를 하고 예배를 마쳤습니다. 미군부대 교회가 있는데 여기에 온 이유를 물었더니 군목이 출타중이어서 예배는 드렸지만 축도를 받지 못해서 축도를 받기위애 왔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축복관이 남다릅니다. 우리의 부모들도 아이들이 축복받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부모들이 직접 기도해주시고 안수해주십시오. 그 모든 기도와 축복이 이루어질 줄로 믿습니다.


3.유대인 부모들은 신앙교육에 열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수아의 인도로 요단강을 건널때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십니다. 요단에서 12개의 돌을 취하여 그들이 머물 길갈에 돌비석을 세우도록 했습니다. 여호수아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백성에게 말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후일에 너희의 자손들이 그들의 아버지에게 묻기를 이 돌들은 무슨뜻이니이까 하거든/ 너희는 너희의 자손들에게 알게 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이 마른 땅을 밟고 이 요단을 건넜음이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너희 앞에서 마르게하사 너희를 건너게 하신 것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심과 같았나니/ 이는 땅의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의 손이 강하신 것을 알게 하며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항상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수4:21-24)

유대의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요단을 마른땅같이 건너게 하신분이 하나님임을 알게 합니다. 그리고 여호와는 강하신 분이요 우리는 그분을 항상 경외해야 한다고 교육합니다. 과거에 우리 조상들을 위하여 이 위대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들을 위해서도 기적을 베푸실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어린이와 자신을 동일시 하시고, 이런 작은 자를 실족케 하면 연자맷돌을 목에 걸고 바다에 빠지는게 낮다고 선언하십니다. 

5-6절“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며 곧 나를 영접함이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작은 자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트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내 이름으로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일은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어린이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셨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동시에 어린이와 같은 작은자를 실족케하는 범죄를 피하라고 호소하십니다. 

전에 시골에서 섬기던 교회에는 한 여 집사님이 교회학교 교사로 계셨는데 이분은 많은 어린이들에게 상처를 주셨습니다. 주일에 아이들이 슬리퍼 신고 오면 운동화신고 오라고 돌려보냅니다. 반바지 입고 오면 꾸지람을 하고 심지어는 벌을 세웁니다. 어떻게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데 반바지를 입을수 있느냐고.... 정말 답답한 집사님이셨습니다. 얼마나 많은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고 저들을 실족케 했을까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작은 자’는 비단 어린이만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어린이를 포함해서 여러면에서 연약한자 소외된 자를 가리킵니다. 마태복음25:40절에는 “여기 내 형제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작은 자는 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된 자, 헐 벗은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등을 가리킵니다. 특별히 6절에 “나를 믿는 이 작은 자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말씀에 비추어보면 어린이와 교회안에서 소외된자나 새신자들을 가리킵니다. 교제권 밖으로 밀려난 분들이나 새가족들이 우리로 인해 실족당하지 않도록 잘 보살펴야 합니다. 그분들을 그리스도의 지체로, 한 가족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각 지체입니다. 누구든지 교회 공동체속에 들어오면 사랑과 행복을 느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앤 설리반이 헬렌켈러를 데리고 난생 처름으로 교회를 갔습니다. 미리 부탁해놓은 탓에 교회학교 아이들은 처음 온 8살의 장애인소녀 ‘헬렌 켈러’를 따뜻하게 맞아 주었습니다. 헬렌 켈러는 처음 방문하고 난 교회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교회는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곳이었다”

오늘 어린이 주일을 맞이하면서 어린이들이 행복한 교회, 그리고 작은 자, 연약한 자들이 행복한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 이일을 위해서 노력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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