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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주일] 누가 클까? (마 18:1-4)

첨부 1


누가 클까? (마 18:1-4)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마태복음 18장 1~4절>

할렐루야!
평안한 5월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결혼한 사람들이 꼽은 
<부부싸움 할 때 가장 듣기 싫은 말을 조사한 1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부부싸움으로 인한 갈등과 폭력으로 사회적 문제가 만연한 가운데 
기혼자 73.8%가 부부싸움의 원인으로
‘배우자의 말투’를 꼽아 눈길을 끈다. - 중략 -
부부싸움 시, 가장 듣기 싫은 말은 남녀 공히 
‘됐어, 말을 말자’(남성 36.3%, 여성 32.4%)라는 대답이었으며, 
그 뒤를 이어 남성의 경우‘이게 다 당신 탓이야’(18.6%), 
‘갈라서. 이혼해’(15.9%)가 나타났고, 
여성의 경우‘결혼, 후회된다’(23.7%),‘당신이 그렇지 뭐’(20.9%)
라는 답변이 많았다.
 
이미경 듀오라이프컨설팅 총괄팀장은 
“소통에서 대화의 내용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대화의 방식이다”라며 
“부부간 언쟁에서 부정어를 삼가고 긍정적인 표현과 비언어적 
여러 방법을 충분히 활용하는 것만으로도 
부부관계 향상은 물론 이혼예방에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한국일보 인터넷신문 2012. 4. 26>

오늘부터 “됐어, 말을 말자”라는 말을 하지 마세요.
여러분 말을 하기 전에 
‘내가 지금 이 말을 하면 상대방이 어떻게 들을까’를 생각하고
조심히 말하시기 바랍니다.

얼마 전에 어떤 분과 식사를 하는데
그분이 제게 ‘고신일 목사님에게는 2가지 문제가 있습니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너무 당황스럽고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첫째는, 제가 너무 어려 보인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동안이 대세라서 어려 보여야 경쟁력이 있는 세상인데
제가 어려 보이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너무 귀티가 난다는 것입니다.
저는 살다가 귀티난다는 말을 처음 들었습니다.
그런데 ‘고신일 목사님에게는 2가지 좋은 점이 있습니다’라고 
말하면 좋았을 텐데 ‘문제’라는 말에 마음이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똑같은 말을 다른 어조로 얘기했다면 
듣기에 거북하지 않았을 텐데 … 
어려보이고, 귀티난다는데 얼마나 좋습니까.
여러분 기둥교회 목사가 싼티나면 좋겠습니까. 

귀티나는 것이 좋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문제라고 하는데 뭐라 답해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같은 말도 좋게 표현하면 좋았을 텐데 
왜 그렇게 표현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분의 진심이 아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여러분, 옆의 분에게 진심을 담아 
“참 어려보이시고, 귀티나십니다.”라고 인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누구와 만나도 좋은 말만 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높이 들고 우리의 믿음을 표현합니다.

저는 예수 믿어 구원받았습니다(요3:16).
저는 예수 믿어 하나님 자녀 되었습니다(요1:12).
저는 예수 믿어 천국 백성 되었습니다(빌3:20).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오늘(시118:24),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습니다(딤후3:14~17).
눈을 열어 주의 법 안에 있는 
놀라운 진리를 보고 깨닫게 하소서(시119:18).
"아멘"으로 순종하여(고후1:20)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되게 하소서(마5:16).
아멘.

그런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저마다 어른이라고 가슴을 펴고 의젓하게, 점잖게 있지만
우리들 모두에게는 진달래 먹고 물장구치던 어린 시절,
누가 알까봐 걱정되는 사건들이 다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역사라는 긴 세월의 거울’에 비추어 보면
어린아이에 불과합니다.
- 나이를 먹고 먹어도 
주변에 나보다 더 나이 먹은 어른은 여전히 계시고
- 아무리 배우고 배워도 세상에 모르는 것이 더 많습니다.
- 많은 사람을 사귀었고, 많은 사람과 알고 지내는데도
앞뒤 둘러보면 여전히 낯선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그렇게 파란 만장한 삶의 여정을 걸었다고 말해도 
못해 본 일이 많고, 못 가본 곳이 더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전히 아직도 성장해야 하는, 
성숙해야 하는, 발전해야 하는 … 
어린아이 같은 존재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2000여 년 전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예수님께 직접 배우고 익힌 제자들도 
예수님 앞에 철없는 제자였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많은 부분 “실망스런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에서 
“성전세”에 대한 말씀을 하고 계실 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하는 것이 
오늘 본문 마태복음 18장의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18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두 가지의 중요한 교훈을 가르치십니다.
하나는, 겸손이요, 또 하나는, 용서입니다.

“겸손과 용서”는 천국백성이 되기 위한 중요한 교훈입니다.
이 두 가지 중에 오늘은 겸손에 대한 말씀만 생각해 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나이가 30, 50, 70, 90이 되었어도
성경에는(약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안개 같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먼저 생각해 볼 것은 제자들의 질문입니다.
이 질문을 보면 
제자들이 아직도 영적으로 미숙한 상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
Who is the greatest in the kingdom of heaven? (NIV)

제자들의 관심은 ‘천국에서 누가 큰가?’입니다. 
여기서 ‘크다’라는 의미는 키가 큰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영문성경에 보면 ‘greatest’라는 말은 
누가 천국에서 위대한 사람입니까,
누가 천국에서 높은 자리에 앉습니까,
누가 천국에서 인정받는 대단한 사람입니까? 라고 묻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관심은 누가 천국에서 서열이 높은가? 
누가 대우받는 자리에 있는가?그런 것들이 제자들의 관심이었습니다.

제자들이 했던 질문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도 관심 있는 질문입니다.
그래도 제자들은 차원 높게 천국에서 누가 크냐였지만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세상적인 것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아니 온통 눈에 보이는 것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 있습니다.

‣ 남자들은 
- 누가 더 많은 월급을 받나?
-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있는가?
- 누가 더 높은 사람과 가까운가?
- 누가 더 비싼 차를 타고 다니는가?

‣ 여자들은
- 누가 더 예쁜가?
- 누구 옷이 더 비싼가?
- 누구 반지가/가방이 더 비싸고 좋은건가?

‣ 목회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 신학교를 어디 나왔나? 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학연으로 얽혀 살아갑니다.
- 고향이 어디인가? 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고향 따라 모임을 갖기도 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규모에 따라 목사를 평가하여 
우쭐대거나 기죽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런 관심들은 대부분 세속적인 관심입니다.
사실 이런 관심들이 인간사를, 
인간의 역사를 불행하게 만들어왔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이 불만족스럽고, 짜증나고, 미워하고,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들이 
이런 세속적인 것들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온 세계 인류의 평화를 위해 짜증내 본 적 있으십니까?
구원을 받느냐 못 받느냐, 
천국 가느냐 지옥가느냐에 대해서
짜증내고, 불만하고, 안타까워해 본적이 있습니까?

누가 더 높은가? 누가 더 월급이 많은가? 
누가 더 비싼 것을 가졌는가? 더 예쁜가? 와 같은 것 때문에
비교하고 짜증내고 실망하고 비판하고 살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누가 더 천국에서 크냐”고 질문했을 때
어린 아이 하나를 불러 제자들 앞에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선언하셨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3~4) 

예수님은 얼마나 강조하셨는지 
진실로(원문에는 – Amen), 결단코(Never) 라는 표현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하는 점이 있습니다.
오늘이 어린이주일이고, 어린이를 귀히 여기고
5월에 꽃이 만발하므로 5월 첫 주일을 ‘꽃주일’이라고도 합니다.

본문에 어린이가 등장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린이가 초점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자
‘어린아이들과 같이’라는 직유법으로 설명한 
‘자기를 낮추는 자’가 초점입니다.
예수님이 겸손에 대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낮춘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누구처럼 낮추냐면 어린아이와 같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하나님께서 멸망을 유보할 만큼 가치 있는 존재들입니다.
요나 4:11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욘4:11)
이렇게 가치있는 어린이들에게서 찾을 수 있는 
또 하나의 가치는 솔직하고, 꾸밈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와 같이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겸손이라는 것은 어떤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자기대로 드러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게 겸손입니다.
자기를 포장하고 힘을 주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옛날 러시아에 니콜라이 황제가 있었는데 
그는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어느 날 황제는 평민복으로 갈아입고 
백성들이 살고 있는 거리로 나갔습니다. 
백성이 살고 있는 모습을 살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갈래 길이 나타났습니다.
마침 어떤 군인이 걸어오고 있어 그에게 길을 물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나 거만하게 대답하는지 
황제는 “당신의 계급이 무엇이지요?”하고 물었습니다.

군인은 으쓱해지면서 배를 내밀고 
“자네가 한번 맞추어 보게나”하고 말했습니다.
황제는 겸손하게 군인을 향하여 
“상사이신가요?”, “아니 그 윌세”
“그러면 소위이십니까?”, “아니 그 윌세”
“아! 그러면 중위이시군요”, “아니 그 위야”
“그러면 대위십니까?” 그때야 군인은 빙그레 웃으면서 
“그래, 내가 대위이다 임마, 너는 사람도 몰라보느냐?”하면서 
호통을 쳤습니다. 

황제가 “네, 대위세요” 하면서 돌아서려고 하는데 
거동이 예상치 않게 보여 되묻기를 
“자네도 무슨 계급이 있는 모양이지?” 하고 물었습니다. 
“네, 대위님 한번 맞추어 보시겠습니까?”
“자네 일등병인가?”, “아니 그 위입니다.”
“그러면 상병인가?”, “그 위입니다.”
“아! 그러면 중위인가?”, “아니 그 위입니다”
이때 군인은 당황하여 자세를 고쳐 잡고 다시 묻기를
“그러면 대위십니까?”, “아니, 그 윌세”
이때 대위는 피우던 담배를 던져버리고 경례를 붙였습니다.

그리고 계속 묻기를 “그러면 소령이십니까?”, “아니 그 윌세”
“아이고 그러면 중령이십니까?”, “아니 그 윌세”
“아이고 그, 그러면 대장 가, 각하이십니까?”, “그 윌세.”
“아니, 그러면 원, 원수이십니까?”, “그 윌세”
원수보다 위라면 니콜라이 황제뿐이 아닌가?
그때 군인은 “폐하!”하면서 땅바닥에 엎드려 몸을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황제는 그를 일으키면서 “일어나게, 국방을 위해서 얼마나 수고가 많은가? 
자네나 나나 마찬가지로 다 죄 많은 인간일세.” 했다고 합니다.

우리들이 종종 자기 입장에서 상대방을 평가하고
상대방을 함부로 대할 때가 많습니다.

얼마 전에 여러 목사님들이 모이는 자리에 갔습니다.
테이블 위에 음료수와 종이컵이 있었습니다.
누가 서빙하는 분이 없고 각자 따라서 마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보다는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목사님 한 분이 
음료수를 따라 나눠드리다가 저를 보더니
‘쫄병, 이리와. 음료수 좀 따라’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옆에 계시던 목사님 한 분이 
‘둘 다 해병대 나왔잖아. 누가 고참이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목사님은 몇 기이십니까?’했더니
‘응, 나 3○○기야. 자넨 몇 기인가?’하시더군요.
그 소리를 듣자마자 저는 ‘이봐 쫄병, 자네가 다 하게’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273기이거든요.
그분은 저의 겉모습만 보고 자기 후배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요즘도 그분을 만나면 저보다 나이는 많지만 
그 일 이후로 저를 보면 머쓱해하십니다. 

우리들이 자기 입장에서 남을 평가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장구한 역사 앞에, 
장수하시는 노인들 앞에서 … 아직도 철부지입니다.
더욱이 신앙적인 입장에서 보면 /
더 커야 하는 자라야 하는 어린아이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히 
우리 자신의 성장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 4:15)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벧후 3:18)

크리스챤은 성장해야 합니다. 자라가야 합니다.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것이 아니라 반드시 성장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어느 단계에서 성장을 멈춰버립니다.
왜냐하면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겸손하지 못하기 때문에,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부족하니까 더 배우고, 더 잘해야지’하는 겸손함이 없이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집사 될 때까지 열심히 배웁니다.
집사가 되고 나면 끝입니다.
어떤 사람은 권사 될 때까지 예배 열심히 참석하고
성경공부 하고, 열심히 전도하다가 권사가 되면 그만둡니다.
어떤 이는 장로되기 전까지 잘 하다가 
장로 되는 순간 배우는 것도, 섬기는 일도 멈춥니다.
어떤 이는 신학공부를 하고 전도사 시절에 
열심히 배우고 겸손하게 알려고 노력하다가 
목사 안수 받은 순간 멈추는 이들이 있습니다.
신앙적인 나태가 이유입니다. 신앙적인 만족이 이유입니다. 
겸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영양섭취를 잘 해야 …

우리는 영적인 어린이이기 때문에 영양섭취를 잘 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2장 2절에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했습니다.
시편 119편 33~35절에 보면
“가르치소서”라는 말은 배우겠다는 의지표명입니다.
“깨닫게 하소서”는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이고
“행케 하소서”는 도와주셔야 함을 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예배참석), 묵상하고,
말씀대로 행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영양섭취 할 뿐 아니라 실천해야합니다. 배설해야 합니다.

옷을 바꿔 입어야 …

영양을 섭취하고 섭취한 영양을 소모했으면 
옷도 바꿔 입어야 합니다.
아기 때는 아기 옷을 입고, 학생 때는 학생 옷을 입고, 
성인이 되면 나이에, 수준에 … 맞게 옷 입어야 합니다.
진급도 하고 진학도 해야 합니다.
그런데 혹자는 매년 제자리에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매년 
‘다음에 하겠습니다. 내년에 하겠습니다’라는 말로 
제자리걸음을 합니다. 
여러분에게 다음이, 내년이 보장되어 있습니까.
우리는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제자리에 있으려고 합니다.

우리가 자꾸 제자리에 있으려고 하면
부모가 자식에게 매를 들듯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향해 채찍을 들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6장 4절에 보면 
자녀들을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영문성경에 보면 
warning and discipline (The Simple English Bible), 
‘경고’를 하고 ‘훈련’을 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양과 훈계”는 “훈계(훈련)와 교양(경고, 징계)”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본래의 뜻과 어울립니다.

그런데 그 훈계와 교양이 
지도하는 부모의 욕심에 따른 것이 아닌 
“주님의(of the Lord)”뜻에 따르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부모는 자식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은 
분명히 가르치고 그 한계선을 분명히 알려줘야 합니다.
그 한계선을 존경선(line of respect)이라고 합니다.

가정문제 전문가인 도브슨박사(Dr. James Dobson)는 
“자녀가 존경선을 넘을 때는 
반드시 벌을 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존경선을 넘긴 자녀를 책망할 때 책망하고 
책망 후에는 반드시 품에 안고 왜 책망했는지를 설명하고, 
그것이 사랑해서였음을 확인시켜 주어야 합니다.
자기 감정 분풀이로 책망해서는 안됩니다.
마이어(P.D. Meier)는 
“성인 인격의 85%가 6세 이전에 형성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6세 이전에 아이의 버릇을 바르게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왕자와 공주가 너무 많아서 
아이들을 책망하지 않고 길러서 다 대장노릇을 합니다.
6세 이전의 아이를 얼마나 책망하셨습니까?
채찍질을 하셨습니까?

저는 몇 년 전에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으로 글을 썼습니다. 
자녀를 징계할 때 또는 징계하기 전에 알고 있어야 할 
주의 사항이 있습니다.(참고 성구 – 잠언 22:15, 잠 23:13~14, 잠 29:15)
① 충분한 설명으로 잘못을 깨닫게 해주어야 합니다.
② 실수는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도록 주의 주어야 합니다.
실수를 무조건 잘못이라고 책망해서는 안됩니다.
(고의적인 것이 아닌 때는 절대 매질을 해서는 안됩니다)

③ 자녀의 현실, 형편을 고려해야 합니다. 
④ 매를 들기 전에 이제 곧 때릴 것이라는 것을/
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을/손바닥을 맞게 될 것을 미리 알려 
자녀가 징계 받을 준비를 할 시간을 주어야 한다.
갑자기 느닷없이 정신 못차리게 때리거나 혼내면 안됩니다.
⑤ 책망하거나 매질을 할 때는 인격을 모독하는 곳이나
몸에 상처가 가는 매질을 삼가야 합니다.
손바닥을 때려도 상처나지 않게 해야 합니다. 
단지 벌을 받는 수준이라는 것을 알려줘야 합니다.

⑥ 적어도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징계 후에 끌어안고 기도해주고
자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사랑 때문임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 감정으로 아이들에게 손을 대거나 벌을 주면
아이에게 상처를 주게 됩니다.
아이의 인격에 모독을 주어서는 결코 안됩니다.

우리는 어른으로서 아이들을 바르게 가르칠 뿐 아니라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배울 줄 알아야 합니다.
어린아이 같이 겸손해야 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기 자신의 현실을 인정하고 …
참된 소망의 자리를 꿈꾸며
영적인 성장을 위하여 영양 섭취를 위한 노력하고,
소모하는 열심, 성장하는 변화를 보여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보시기에 합한 참된 영적 어린이가 되어야 합니다.
배우려고 노력하고 잘못된 것은 고치려 하고
그래서 훗날 하나님께서
“잘 하였도다, 잘 하였도다”칭찬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예수 믿게 하시고 구원받은 사람으로 살게 하신 것 감사합니다.
어린아이 같이 겸손하여 자신을 낮추고 
더 배워야 하고 부족함이 많음을 인정하는
하늘 백성으로 살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겸손한 자를 천국에 들이시고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하나님 마음에 합한 믿음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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