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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주일] 어린이를 축복하신 예수님 (막 10: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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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축복하신 예수님 (막 10:13-16) 

  
어린 시절은, 건물의 기초와 같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소홀히 여긴다면, 반드시 무너지게 된다.  ‘아름다운 비행’이라는 영화를 보면, 거위새끼들이 자기들을 부화시킨 소녀를, 어미로 착각하고 그 뒤를 따라 다니는 장면이 나온다. 

거위는 알에서 태어나면서, 처음 보는 것을, 어미로 기억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전문 용어로 imprinting(각인)이라고 한다. 거위나 오리는, 아무리 환경을 바꾸어 주어도, 태어나면서 처음 본 것 외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맹자의 어머니가 3번씩 집을 옮긴 이유는, 어린 자식의 뇌에 각인됨을 걱정해서이다. 요즘 상상을 초월하는 범죄가 나타나는 이유는, 어린 시절 좋지 못한 게임의 내용이, 뇌에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린 시절부터, 신앙교육을 철저하게 실행하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작은 새의 발자국이, 바위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모습은, 처음에는 작은 새가 디뎌도, 발자국이 날 정도로 물렁물렁했지만,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아주 단단한 돌이 되어, 지금은 큰 코끼리가 밟아도, 발자국이 생기지도 않고, 깨지지 않는다. 

어린이의 마음은 여리기에, 굳어지기 전에는 물렁물렁하다. 누가 무슨 자국을 남기든지, 그 자국은 평생 지워지지 않는다. 따라서 어렸을 때, 어떤 자국을 남기느냐가 참 중요하다. 자녀의 가슴에, 어떤 자국을 남기겠는가? 5월은 가정의 달이다.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의 소중함을, 되새기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첫째 주는 어린이 주일이다. 어린이를 소중히 여기자. 예수님은 바쁘신 중에도, 어린이들을 사랑해서 축복해 주셨다. 우리 자녀를 예수님의 축복을 받고 자라게 만들기를 바란다. 어떻게 해야 축복을 받고 자라게 되는가? 

1. 어린아이를 데리고 나와야 한다(13).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만져주다(ἅπτομαι)는 ‘소속하다, 관계되다. 하나로 묶이다’이다. 
예수님이 아이들을 만져주심은 축복이다. 예수님께서 만져주신 사람마다, 축복을 받았다. 맹인의 눈을 만져주니 눈을 떴다(마20:34). 나병환자를 만져주니 고침 받았다(막1:41). 귀 먹고 말 더듬는 자의 혀를 만져주자, 혀가 풀렸다(막7:33). 

따라서 예수님이 만져주시기를 바란다면, 본문에 나오는 부모들처럼, 아이들을 데리고 와야 한다. 우리 아이를 예수님께 데려오는 일이, 부모가 일차적으로 해야 할 일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들 가운데 가장 급선무다. 자녀들도 머리 커지면, 부모님의 말 잘 듣지 않는다. 

부모는 어린아이가 싫어하든 좋아하든, 주님 앞으로 데리고 와야 한다. 데려와서 하나님 말씀을 듣게 하여 믿음이 생기고, 찬송하는 중에 기쁨이 생기고, 기도하는 중에 은혜를 받게 된다. 정말 내 아이들을 사랑한다면, 주님 앞으로 데리고 와서, 안수 받는 거룩한 축복의 욕심이 있어야 한다. 
조금 컸다고 부모님의 신앙을, 자기에게 강요하지 말라면서, 반발하는 자녀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므로 아이들을 어려서, 예수님께 데려온 부모들은, 참 지혜로운 사람들이다. 사실 지혜는 얼마나 배웠느냐에 있지 않다.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만날 때, 지혜가 생긴다. 

미국의 초대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어머니 생일 축하식에 많은 분들을 초청하였다. 프랑스 대사가 워싱턴의 어머니에게 “저토록 훌륭한 아들을 둔, 비결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워싱턴의 어머니는 “나는 내 아들이 어려서부터,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교회를 떠나지 않도록 가르쳤노라.”고 했다. 

훌륭한 부모는, 자녀를 믿음으로 기른다. 하나님의 말씀가운데 자라게 한다. 그러면 시련의 가뭄이 와도, 환란의 비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고, 성공적으로 자라게 된다. 모든 지혜의 근원은 예수님이다. 따라서 우리 자녀들이 지혜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만들어 주라. 
세상의 모든 학문을 섭렵하고 알아도, 예수님을 모르면 무지한 자이다. 우리 자녀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최고의 자산은, 절대로 돈이 아니다. 예수님이다. 그러니 본문말씀처럼 예수님께 자녀들을 데리고 
온 부모가 얼마나 지혜로운가? 

부모는 자녀들이, 복의 근원이신 예수님께 나와, 복을 받도록 만들어주는, 복의 통로가 되어야만 한다. 신령한 복을 자녀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부모님이 신령한 통로가 되어야만 한다. 부모님의 신앙이 자녀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크다. 자녀들에게 축복을 주거나, 앞길을 가로막을 수 있다. 
그 대표적 사건이, 한나와 엘리 제사장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둘 중의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엘리 제사장처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녀로 키우겠는가? 아니면 한나처럼,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겠는가? 우리는 둘 중에, 어떤 것이라도 선택하실 수 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우리가 선택할 수 없다. 주님께 자녀들을 데려옴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각인될 수 있기를 바란다. ‘데리고 왔다.’는 미완료형이다. 즉 사람들이 계속, 어린아이들을 예수님에게 데리고 왔다. 하나님께 바치는 마음으로, 데려왔다는 말이다. 
그런데 아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축복받기 원하는 부모의 마음을 모르는 제자들은, 그들을 꾸짖었다. ‘꾸짖다’는 말은, 그냥 ‘애들아 조용히 해라 착하지…’ 이런 뜻이 아니다. 여기서 ‘꾸짖다’는 말은 에피티마오(ἐπιτιμάω)인데, 예수님이 귀신을 꾸짖으실 때, 사용된 말이다. 

예수님이 귀신에게 ‘귀신아 물러가라!’고 소리쳤다. 이처럼 제자들이 어린아이들을 꾸짖자, 아이들은 무서워서 떨었다. 그만큼 제자들은 어린 아이들을, 하찮게 여겼다. 제자들이 어린 아이들을 무시했던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유대교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를 못했다. 
유대교는 율법주의였다. 율법이 명한 계명들을 지켜야만, 의롭다 함을 얻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부모의 품에 안겨있는 어린 아이들은, 선악도 좌우도, 전혀 분별할 수 없다. 그러니 그들이 무슨 의를 행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엄격하게 금했다. 

2. 어린이의 인격을 인정하시는 예수님(14)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제자들이 어린아이들을 꾸짖는 모습을 보고, 예수님은 노하시어 어린아이들이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셨다. 이는 그 당시에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고대 사회에서는 아이들의 인격을 무시하고, 귀찮은 존재로 여겼다. 따라서 당시 관습으로 볼 때, 제자들은 크게 잘못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당시 관습을 뛰어넘어, 아이들을 어른과 동등한 인격으로 대우하셨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예수님은 전혀 뜻밖의 말씀을 하셨다.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도 들어보지 못한, 말씀을 하셨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14下)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누구든지 하나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영접)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 말을 잘못해석하면, 어린아이는 깨끗하고, 죄가 없기에 천국에 간다고 주장하게 된다. 어린아이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신다. 어린아이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고는, 천국에 들어갈 가능성은, 0%라는 말이다. 
아이들의 마음은 잘 받아들인다. 그대로 잘 받아들이고, 잘 의지하기에, 유괴도 쉽게 된다. 믿음은 하나님의 뜻이라면 받아들인다. 하나님의 말씀을 스펀지처럼, 그냥 받아들인다. 받아들임이 믿음이다. 어린아이들은 착한 일을 할 능력도 없다. 잘 배우지도 못했다. 

그러나 베풀어주는 은혜를, 기쁨으로 순수하게 잘 받아들인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받아들이는 마음 없이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그래서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하였다.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말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내가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다는 말은, 교회를 왔다 갔다 함이 믿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주와 주님으로, 인격적으로 내 마음속에 받아들음이, 신앙의 시작이다. 

이렇게 받아들이지 못하면, 신앙은 시작되지 않았다. 아무리 교회에 와서 앉아도, 아무리 예배를 드리며 설교를 들어도, 아직 마음의 문을 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있다면, 그는 그리스도인 아니다. 따라서 마음의 문을 열고, 받아 들여야 된다. 이런 마음이 어린 아이에게는 있다. 
‘찰스 브론디’라는 줄타기 곡예사가, 장대 하나만을 가지고, 나이아가라 폭포를 건너간 일이 있다. 나이아가라 폭포 이쪽과 저쪽 끝에 줄을 걸고, 그 줄 위에서 ‘브론디’가 관람객들에게 말했다. “내가 이 줄을 타고, 건널 수 있다고 믿습니까?” “물론 믿지요.” 

“그러면 이제 한 사람을, 내 어깨에 앉혀서, 함께 건널 수도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할 수 있지요.” “그렇다면 누구든지, 내 어깨 위에 앉아서, 함께 이 줄을 건너갈 사람 나오십시오.” 그 순간 사람들은 침묵을 하고, 어느 한 사람 나서지 않을 때, 한 소녀가 일어나 브론디 앞으로 나아갔다. 
곡예사는 그 소녀를 어깨에 태우고, 반대편까지 무사히 건너갔다. 그 소녀는 이 곡예사 브론디의 딸이었고, 아버지를 진정 신뢰하였기에, 자신을 아버지에게 맡길 수 있었다. 아이들은 어른들을 믿고 따른다. 우리에게 맡겨질 때, 어린아이의 마음은, 그렇게 아름다웠다. 

우리에게 나쁜 영향을 받기 전에, 어린이들의 마음은 순수하고 깨끗했다. 그런데 요즘 어린이의 마음을, 더 이상 아름답다, 더 이상 깨끗하다고만 할 수 없다. 더 이상 순수하다고 할 수 없다. 많이 추해지고, 불순해졌다. 이렇게 됨은 누구의 탓일까? 
아름답고 깨끗하고 순수했던 마음을, 누가 그렇게 만들었나?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바로 우리 어른들이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 자녀의 마음을, 원래의 마음으로 돌릴 수 있을까요? 거듭나게 해야 한다.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여, 주님이 다스리게 해야 한다. 

3. 어린아이를 축복하신 예수님(16) 

“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예수님은 먼저 아이들을 안아 주셨다. 또한 아이들에게 안수하셨다. 그리고 아이들을 축복하셨다. 이렇게 3단계로 사랑하고 축복하셨다. 
이 3가지는, 예수님이 행하셨듯이, 우리가 자녀들에게, 꼭 해야 할 것들이다. 

(1) 안아 주라. 

안아주었다는 말은, 두 손 벌려서, 가슴에 품어 주는 사랑을, 표현하는 말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넓고, 가장 푹신한 품은, 주님의 품이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가장 따뜻한 품은 주님 품이다. 예수님을 잘 믿는 가정의 자녀들은, 주님 품에 안겨 산다. 부모가 자녀의 신앙을 위해서 기도하고, 믿음으로 키움은, 주님 품에 안기도록 하는 일이다. 
자녀는 부모의 따뜻한 체온에서, 사랑과 평화를 맛본다. 심리학자 할로우가 실험한 결과다. 2마리 어미원숭이 모형을 만들었다. 하나는 차가운 철사로 만들고, 다른 하나는 따뜻한 헝겊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철사로 만든 어미의 목에, 젖병을 매달아놓았다. 

그런데 새끼 원숭이들은, 젖병을 매달아놓은 철사 원숭이에게는 가지 않았다. 오히려 헝겊으로 된 원숭이에게만 갔다. 어쩌다 젖을 먹을 때에도, 몸은 헝겊 어미 쪽에 두고, 목만 길게 빼서, 젖병을 끌어당기곤 했다.  
이 실험으로, 자녀가 부모에게 사랑을 느낌은, 피부 접촉에서 오는, 따뜻한 사랑 때문이라고 증명했다. 부모가 사랑으로 안아줄 때, 자녀는 내가 사랑 받고 있는 존재라고 느낀다. 우리의 자녀들을 자주 안아주고, 다독여주시기 바란다. 우리의 사랑을, 가슴으로 표현하시기 바란다. 

(2) 안수해 주라. 

오늘날 예수님은 승천하셨기에, 직접 손을 얹으실 수가 없다. 따라서 당신의 종들을 통해 얹으셔서, 아이들을 축복한다. 그러면 아이들에게 안수하는 권한이, 그러면 목회자에게만 주어졌나요? 아니다. 
부모, 조부모에게도 주어졌으니, 안수하기를 주저 말고, 할 수만 있으면, 자주 하시기 바란다. 손이 닳도록 자주 얹고, 축복해 주기 바란다. 부모는 자녀에게 있어서,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 이는 예수님을 복을 주시는 분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안수는 부모의 사랑을, 손에 얹어서 표현하게 된다. 권위 있는 부모가 되고 싶다면, 자녀의 머리에 자주 손을 얹기 바란다. 순종하는 자녀로 키우고 싶다면, 자녀에게 자주 안수하라. 꼭 안수기도하지 않더라도, 자녀에게 자주 손길을 주라. 식물조차도 자기에게 손길을 자주 주는 것을 안다. 
그러니 사람이야,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사랑을 손으로 표현하기 바란다. 미움 받으며 자란 아이는, 미움을 배우며 자란다. 매를 맞으며 자란 아이는, 폭력을 휘두르게 다. 놀림을 당하며 자라난 아이는, 수줍음을 타게 된다. 사랑을 받으며 자란 아이는,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된다. 

용서받은 경험이 있는 아이는, 남을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이 된다. 관용 속에 자란 아이는, 참을성 있는 사람이 된다. 격려를 받으며 자란 아이는, 자신감을 갖고 자란다. 칭찬을 받으며 자란 아이는, 감사할 줄 안다. 공정한 대접을 받으며 자란 아이는, 올바름을 배우게 된다. 
안정 속에 자란 아이는, 믿음을 갖게 된다. 기도로 자란 아이는 희망을 꿈꾸는 사람이 된다. 축복을 받으며 자란 아이, 남을 축복하며 자라게 된다. 우리의 자녀가 이 세상을 품고, 이 세상을 축복하는 아이들이 되기를 바란다. 

(3) 축복해 주라. 

축복하다는 율로게오(εὐλογέω)이다. (εὐ)좋은 + (λόγος)생각, 말 = 칭찬하다, 축복하다, 번영을 빌다, 감사하다, 찬양하다는 말이다. 칭찬하는 말을 말한다. 하나님께 사용되면, 찬양하다는 말이다. 
마음껏 계속해서 축복해 주셨다. 축복은 부모의 사랑을, 입술로 표현하는 내용이다. 가장 거룩한 부모는, 자녀를 위해서 기도하는 부모님이다. 꼭 눈을 감고 기도하지 않아도, 자녀에게 축복의 말을 하라. 자녀의 가슴에 상처 주는 말을 삼가 하라. 

의도적으로 축복의 말을 하려고 하라. 롤프가복은 “하루에 한 번씩 자녀를 축복하라.”했다. 우리 자녀들에게, 매일 축복의 말을 하시기 바란다. 그래서 그 축복의 말이, 자녀의 비전이 되게 만들자. 우리의 사랑을 입술로 표현하시기 바란다. 꾸지람 속에 자란 아이는, 비난하는 것을 배운다. 

이제 말씀을 맺겠다. 우리가 부모로서 해야 할 첫 번째 사명은, 우리의 자녀가 축복의 예수님을 만나도록 인도해야 한다. 최고로 효과적인 방법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녀를 양육하는 길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먼저, 말씀 위에 확고하게 서시기 바란다. 
우리가 신령하고, 거룩한 축복의 통로가 되시기 바란다. 자녀들을 인격적으로 대해 주라. 예수님이 자녀들을 축복해주신 것처럼, 우리에게 맡기신 자녀를, 자주 안아주시기 바란다. 우리 손이 닳도록, 안수해 주시기 바란다. 하루에 한번 이상, 꼭 축복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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