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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주일]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엡 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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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엡 6:1-4)


에베소서6:1-4
1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3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어제는 90회 어린이날이었습니다. 소파 방정환 선생이 어린이에 대한 인격 개념조차 없던 일제시대에 어린이의 인격을 존중하고 잘 자라게 하자는 취지에서 만든 날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취지는 어린이날 노래 가사에 잘 담겨 있습니다.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그런데 과연 우리 자녀들은 이 노래의 가사처럼 새처럼, 냇물처럼 자유롭고 행복합니까? 우리 자녀들이 맞는 5월은 노래 가사처럼 푸르고 희망에 차 있습니까? 

어린이날에 맞추어 한국방정환재단에서 초등학교 4학년에서 고등학교 3학년까지 6,791명을 대상으로 청소년들의 주관적 행복지수를 조사 발표하였습니다. 그 결과는 69점으로 4년 연속 OECD 23개국 중 최하위를 기록하였습니다. 주관적 행복지수는 주관적 건강상태와 학교생활 만족도, 개인행복감 등 6개 항목에 대한 만족도를 수치화한 뒤 OECD 평균을 100점으로 환산하여 점수화한 것입니다. 평균에서 한참 못 미치는 점수입니다. 이런 통계가 없더라도 우리들은 대한민국 청소년들이 매우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고 짐작하고 있던 바입니다. 

그것은 최근 청소년 자살률이 가파르게 증가하고, 자살이 청소년 사망 원인 1위에 오르는 데서도 알 수 있습니다. ‘2012 청소년 통계’에 의하면 청소년 10명 중 1명꼴로 자살 충동을 느꼈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이를 보여주듯 대구 지역에서는 최근 4달 동안 9명의 중고등학생이 투신자살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자살의 주요 원인으로는 성적부진, 가정환경비관, 학교폭력 등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이런 통계들이 보여주는 바는 우리 자녀들이 매우 화가 나있다는 것입니다. 그 분노를 자기를 향해 쏟는 것이 자살이요 다른 사람을 향하는 것이 폭력 아니겠습니까? 성경 말씀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어른들의 잘못된 교육방식과 사랑 때문에, 부모들의 폭력이나 무관심, 아니면 지나친 애착 때문에 우리 자녀들이 화가 나 있습니다. 성경 말씀은 분명합니다. 우리의 경험이나 생각이나 어리석음으로 자녀들을 양육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운전에만 초보 운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녀교육에도 초보 운전자들이 많습니다. 운전면허를 따기 위해서는 몇 달식 고생이라도 하는데 부모면허를 따는 데는 전혀 교육 없이 이루어지는 것이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사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녀 교육에 자신 없어 합니다. 저 또한 두 자녀를 두고 있고 자녀교육서까지 썼지만 자신이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전하면서도 자녀 교육은커녕 큰소리만 지르고 우리 아이들을 노엽게 한 모습만 떠올라 말씀을 전하기가 상당히 부담이 갑니다. 단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전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선포할 뿐입니다. 이 말씀은 저 또한 귀를 열어 들어야 할 말씀이라 생각하며 전하겠습니다.

주의 교양과 훈계로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말씀은 ‘주님의 방식대로’ 가르치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방식대로 하면 자녀들은 노여워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방식은 복음서에 잘 나와 있습니다. 마가복음 9장 36절과 37절입니다.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9:36-37) 고대 사회에서는 어린 아이는 정상적인 인간 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제자들도 어린아이가 접근하면 쫓아내려만 하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주님의 말씀은 매우 충격적이었습니다. 어린 아이를 마치 주님을 대하듯이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방식은 어린 아이를 어리다고 무시하지 않고 인격적으로 대우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녀들을 이처럼 주님처럼 인격적으로 대하고 있습니까?

그런데 신앙인들이 자녀 교육에 있어서 주로 의존하거나 취하는 말씀은 잠언서 본문들입니다. 잠언서에는 특히 자녀를 교육할 때 매를 아끼지 말라는 말씀들이 많습니다. 그 구절들만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잠언 13장 24절,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잠언 22장 15절,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 잠언 23장 13, 14절,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 잠언 29장 15절,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이렇게 모아놓고 보니 잠언서 말씀이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님의 말씀과는 상치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제가 늘 말씀 드리지만 신약과 구약 말씀이 충돌할 때는 우리는 먼저 신약의 말씀에 비추어서 해석해야 합니다. 이중 예수님의 말씀들과 예수님의 십자가는 다른 어떤 말씀들보다 앞서고 가장 중심이 되어야 할 원칙입니다. 예수님이 어린 아이를 존중하라고 말씀하셨다면 잠언서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을 전제로 다시 해석해야 합니다. 자녀에게 매를 대어야 할 때도 있지만 그것은 정말 아이가 심각한 잘못을 했을 경우에 드는 사랑의 매로 국한해야 합니다. 

더군다나 한국사회에서는 매를 드는 일은 정말 조심해야 하며 아예 들지 않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아이들에게 매를 들어서는 안 되는 이유는 첫째는 어른들이 자기감정으로 때릴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 교육효과는 없고 자녀들의 마음속에 억울함과 분노만 쌓을 뿐입니다. 둘째는 매가 아이들의 자존감을 상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맞는 순간 아이들은 강자 앞에서 비굴해지며 자신이 존중받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어른들도 잘 느끼는 바 아닙니까? 셋째는 아이들은 매를 맞으며 무언중 그것을 통해 폭력을 배운다는 점입니다. 아이들 또한 잘못한 사람은 맞아도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것이 학교 폭력이나 가정 폭력이나 사회 폭력으로 이어집니다.

잠언서 말씀이 선포되던 시대는 어린아이에 대한 인격권이 형성되지 않았던 시대입니다. 어린 아이의 심리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던 시대였습니다. 이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발전되고 더 온전한 진리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자녀를 존중한다는 점에서 비인격적인 매는 대지 말아야 합니다. 대신 많은 대화와 설득이 필요합니다. 외국 영화를 보면서 우리가 자주 느끼고, 또 지난번에 <인 어 베러 월드>라는 덴마크 영화를 보면서 매우 인상적으로 느꼈던 부분인데, 거기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선하건 그렇지 않건, 어리석든지 그렇지 않든지에 상관없이 그들의 인격권이 잘 보장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마치 어른들과 같은 취급을 하며 대화와 설득으로 개선시켜 갑니다.

이는 창세기 말씀을 읽으면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교육방식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설득할 뿐이지 강요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깨닫고 결단하기를 바라실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야곱과 이삭을 대하는 방식이 그러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이 없어 자기 아내를 누이라 속여도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오래 지켜보시며 스스로 깨닫기를 기다리십니다. 야곱은 다른 사람을 속이고 이기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야곱도 매를 대시기보다는 그가 인생을 살면서 스스로 깨닫고 믿음의 사람으로 돌아오기까지 기다리셨습니다. 결국 자기보다 더 이기적인 사람인 삼촌 라반을 통해서 그 인격이 연단되고 스스로 깨달아 열두 지파의 아비가 되지 않았습니까?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보십시오. 둘째 아들이 아직 버젓이 살아 있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상속 몫을 달라고 하였을 때 아버지는 이에 대해서 싫다거나, 너는 재산을 감당할 능력이 되지 않는다고 나무라거나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내주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저는 스스로 깨닫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셨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인격존중입니다. 

아들이 상거지가 되어서 돌아올 때 그를 반기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십시오. 성경은 서로 떨어진 거리가 멀었는데도 아버지가 알아보고 버선발로 달려왔다고 말씀합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눅15:20) 탕자의 아버지는 무관심하거나 무교육적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스스로 깨닫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아들을 인격적으로 존중하였습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는 환경들

최근 서울시 학생인권조례가 논란을 빚고 있습니다. 신앙인들 중에는 인권조례 중 임신, 출산의 이유로, 성적 소수자라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을 권리에 대해서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입니다. 또 종교 교육의 자유 문제를 지적합니다. 임신, 출산, 성적소수자 문제는 그것을 장려하자는 것이 아니라 만약 그런 경우가 있다면 그것 때문에 불이익을 받지 말게 하자는 취지인데 그 단어가 주는 어감 때문에 반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종교 교육의 자유는 신앙인으로서는 나름 할 말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보다 보다 더 본질적인 부분을 보았으면 합니다. 학생인권선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학생 인권의 보장입니다. 그동안 학생들을 교육의 대상으로 취급했으며, 또 미성숙하다는 이유로 그들의 자유를 억압하거나 간섭하는 것을 당연시 해왔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 체벌 문제입니다. 아직도 교육 현장은 체벌이 없으면 교육이 안 된다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그렇지만 이 문제는 좀 심각하게 논의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 사회는 폭력이 만연한 사회입니다. 정치나 언론이나 사회나 가정에 폭력이 만연한 근본 이유 중 하나가 학교와 군대에서 당연시되고 있는 폭력문화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학교나 군대에서 배운 폭력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또한 일제 군국주의 문화와 그를 이은 군사문화의 잔재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자랄 때에 학교에서 교사들에 의해 자행된 폭력은 정말 끔찍할 정도였습니다. 다들 맞았던 추억이 있을 것입니다. 저도 그런 적이 있는데 아직도 그때의 좋지 않은 감정이 생생히 남아 있습니다. 고등학교 때 미술 도구를 준비해가지 않았다가 미술 선생님에게 맞은 적이 있습니다. 우유병이 보이길래 그것으로 물감통을 대신했는데 그 게 화근이었습니다. 미술 선생님이 매점 관리를 하고 계셨는데 재활용해야 될 우유병을 망쳤다고 화가 난 것입니다. 친구들 보는 앞에서 제 머리를 그 우유병으로 여러 번 세게 때리는데 정말 욱하고 속에서 분노가 솟았습니다. 그 분노가 정말 목까지 찼는데 겨우 참았습니다. 그때 만약 선생님께 욕하고 뛰쳐나갔다면 저는 이런 가난한 목회자의 길이 아니라 아마 부유한 부자의 길을 걸었을 뻔했는데 아깝습니다(?).

지금은 그렇게까지 무식하게 때리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교육현장은 여전히 아이들에게 하다못해 간접체벌이라도 해야 교육이 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반대입니다. 우리의 잘못된 폭력문화를 근절하기 위해서라도 체벌은 간접체벌이라도 금지해야 합니다. 그 과정이 어렵지만 설득하고 대화해야 합니다. 공동체의 룰을 따르고 그것을 따르지 않으면 손해를 감수하는 민주주의 의식과 책임 의식을 가르쳐야 합니다. 매나 체벌은 아이들의 자존감만 상하게 할 뿐 교육적 효과가 없습니다. 아이들이 학교현장에서 존중을 받아야 그들이 사회에 나가서도 타인을 존중하게 됩니다.

물론 학교 현장이 쉽지 않다는 것을 모두가 공감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자기 인격과 타인의 인격을 상호존중 하는 법을 배우고, 민주 시민 의식을 배우는 것의 중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학교 현장의 분위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적과 그것을 위한 경쟁이 최고가 되어 있습니다. 사교육과 점수 경쟁을 통해서 좋은 성과를 얻는 것이 교육의 최고 목표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여기서 소외된 아이들이나 이 긴장감을 이기지 못하는 아이들이 자살의 위기로 몰립니다. 인격을 존중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학생들이 집단 폭력이나 왕따라는 폭력을 행사합니다. 또 그것을 잡겠다고 경찰력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더 강한 폭력으로 폭력을 누르겠다는 발상입니다. 이런 비교육적 환경을 제공하고 있는 어른들이 먼저 반성하고 제도 개선을 해야 합니다. 학생들이 행복하고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 자녀들을 행복하게

학교 탓만 할 수 없고 우리 가정에서부터 먼저 우리 자녀들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고귀한 인격으로 대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이 어린 시절부터 인격적인 대우를 받아야 어른이 되어서도 불안감을 느끼거나 폭력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고 행복한 인생을 꾸려 나갈 수 있습니다. 

그 실패의 사례로 루터의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루터는 종교개혁을 이루었던 위대한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는 또한 평생 동안 우울증을 안고 살아야 했던 불행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루터의 우울증은 매우 심해 언젠가는 “자기 자신이 태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소원을 공개적으로 발설하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친구인 멜랑히톤에게 썼던 편지의 일부입니다. “우울증과 육체적 고통으로 일주일이 넘게 죽음과 지옥을 넘나들었다. 절망감의 돌풍과 파도 속에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거의 잃을 뻔하였다.” 루터의 우울증적 기질은 그가 처음 주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도 드러났습니다. 루터는 비오는 날 바로 자기 옆에 떨어진 벼락에 벌벌 떨며 신부가 되기로 서원을 했습니다. 루터에게는 하나님은 매우 두려운 분이셨던 것입니다.

루터는 신부수업을 마친 후 첫 미사를 집례할 때도 두려우신 하나님의 모습에 벌벌 떨어야 했습니다. 그러다 결국 성스런 포도주를 흘리는 잘못을 범하기도 했습니다. 루터는 그의 주기도문 강해에서 믿음에 대한 확신을 갖기 전 자신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라는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수도원 생활에서도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고해 성사를 해야 겨우 안심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진저리가 난 상급 사제인 슈타우피츠가 “간통이나 살인 같은 죄다운 죄를 짓고 와야지. 그걸 뭐 죄라고 고백하느냐.”고 놀릴 정도였습니다.

루터가 이처럼 결벽증적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울증적인 기질을 갖게 된 것에 대해 심리학자들은 주요 원인을 그의 부모와 그 교육방침에서 찾고 있습니다. 루터의 아버지 한서 루터는 농부로 태어났지만 지독한 검소함과 부지런함으로 성공한 광산업주가 된 인물이었습니다. 아버지 한서 루터의 야망은 아들 루터에게로 또한 향했습니다. 자신의 무지하고 품위없었던 과거를 보상받으려는 듯 아버지는 루터에게 상류층 교육을 시켰습니다. 

부유한 특권층만 다니는 라틴어 학교에 보냈고 아들을 법관으로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아버지는 폭력을 주로 사용을 하였습니다. 루터의 어머니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루터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호두 한 알을 몰래 훔쳐 먹은 죄로 종아리에 피가 나도록 맞았던 기억을 언급하곤 했습니다. 이런 억눌렸던 기억 때문인지 루터는 20세가 되기 전까지 젊은이들은 인생을 즐겨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루터는 부모의 지나친 기대와 폭력 속에서 자존감을 잃었으며, 두려운 아버지 상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루터는 전혀 인격적 대우를 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런 루터가 하나님의 쓰임을 받았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다 할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자존감 결여로 살던 루터가 다른 어떤 조건도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그 기쁨과 그 자유함은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루터는 어린 시절 부당한 대우와 상처로 말미암아서 평생을 우울증과 싸워야 했던 불운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면 그 분노는 우리 자녀가 어른이 되었을 때 자신의 인생을 불사르게 만드는 흉기가 될 것입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마십시오.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곧 주님의 방식대로 우리 자녀들을 양육할 때 그것이 우리 자녀들을 행복하게 만들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주님의 말씀을 읽으며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9:3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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