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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창립] 좋은 소문나는 교회 (살전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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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소문나는 교회 (살전 1:2-8)
[어린이 주일 및 창립기념주일]

오늘은 어린이 주일 및 우리 교회가 설립된지 107주년을 맞이하는 기념주일입니다. 먼저 우리의 가정을 행복한 가정으로 세워 주시고 자녀, 자녀손들을 형통케 해주신 하나님과 교회의 머리되셔서 지금까지 우리교회를 인도해 주시고 성장시켜 주신 주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립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교회의 성장과 부흥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시고 헌신하신 모든 성도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사람들은 소문에 대하여 굉장히 민감합니다. 어느 마트에서 물건을 싸게 판다하면 아무리 거리가 멀어도 그곳으로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어느 음식점이 음식을 맛있게 만든다고 소문나면 사람들이 그 음식점으로 모여듭니다. 그러나 맛이 없으면 아무리 도시 한 가운데 음식점을 있어도 찾아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소문이란 참으로 중요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교회라는 소문이 나면 사람들이 다 호감을 가지고 찾아옵니다. 그러나 교회가 문제가 있다고 하면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소문이 잘나면 그 교회는 부흥하는 교회가 되고, 반대로 좋지 못한 소문이 퍼지면 부흥하기 어렵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데살로니가 교회가 바로 좋은 소문난 교회였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각 지역으로 좋은 소문이 퍼진 교회였습니다. 오늘 본문 8절 후반절에 “너희의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한마디로 “다른 설명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생활을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잔소리를 할 필요가 없을 만큼 성숙한 교회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아름다운 소문이 각처로 퍼져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 부흥의 지름길입니다 교회부흥은 교회가 아름다운 소문이 나야 합니다. 오늘 창립 107주년을 맞이하는 우리 교회도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아름다운 소문이 온 지역에 퍼지는 복된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어떤 교회였습니까? 우리 교회는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합니까? 어떻게 하면 좋은 소문나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까? 오늘 사도 바울이 칭찬한 데살로니가 교회를 살펴보면서 몇 가지 방향성을 제시 하고자 합니다. 

1.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으로 역사하는 교회였습니다. 

오늘 본문 3절에 “너희의 믿음의 역사”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여기서 “믿음의 역사”란 “믿음의 행위, 믿음의 활동, 믿음의 힘”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믿음으로 살 때 나타나는 결과”를 말합니다. 

믿음은 신앙생활의 출발점입니다. 신앙은 지식이나 경험으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않는 모든 것은 죄라고 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과 분명히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지혜, 자기의 능력, 자기의 주관으로 삽니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하였습니다. 

믿음은 언제나 구체적인 행위를 수반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약 2:17절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믿음과 행위는 바늘과 실의 관계처럼 때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으로 복의 근원이 되는 축복을 얻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을 바라보는 믿음의 눈으로 가나안을 차지하는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비록 물맷돌을 가졌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거인 골리앗을 넘어뜨리는 승리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기만 해도 낳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치유의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믿음의 행위는 구체적인 결과가 나타납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전도하고 가르치고 기도했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를 드러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일으켰고, 죽은 자를 살리며, 귀신을 쫓아내고, 이기적인 사람들을 변화시켜 이웃사랑의 사람들이 되게 했습니다. 그들의 믿음의 강한 역사는 인간영혼을 사랑하는 복음 선교의 열정으로 나타나 믿는 자의 수를 더하게 했습니다.  

이처럼 믿음의 역사를 나타내는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가 다른 것은 조금 부족하다고 할지라도 믿음의 역사가 나타나는 교회로 소문이 나야 하겠습니다. 

믿음으로 전도하여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있어야 하고, 인생의 문제, 사업의 문제, 물질의 문제가 해결되고, 육체의 질병과 영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귀한 역사가 일어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전도와 선교를 통해 영혼을 구원하는 역사가 나타나는 교회로 소문나는 것이 앞으로 우리교회가 추구해야 할 기도제목이요, 방향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데살로니가 교회는 사랑으로 수고하며 섬기는 교회였습니다. 

본문 3절에 “사랑의 수고”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주를 위해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교회였습니다. 우리 성경에 ‘수고’로 번역된 헬라어 ‘코포스’는 ‘엄청난 고통이 뒤따르는 수고, 봉사’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코포스’는 현재 진행형으로 ‘일회적인 수고가 아닌 계속적인 수고’를 말합니다. 

모든 수고와 봉사의 기초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성령님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교회를 내 몸처럼 아끼는 사랑, 한 영혼을 사랑하는 사랑이 없는 수고는 태산을 옮기는 큰 역사를 할지라도 아름답지 못합니다. 사랑이 없는 수고는 피곤합니다. 괴롭습니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사랑으로 하지 않으면 괴롭고, 힘들고, 짜증납니다. 

그러나 작은 일도 사랑의 수고가 될 때 그 수고가 아름답고, 사랑의 수고가 될 때 기쁘고, 사랑의 수고가 될 때 즐겁고, 사랑의 수고가 될 때 보람이 있습니다. 힘들어도 피곤하지 않습니다. 어려워도 참고 견딜 수 있습니다. 

라헬을 사랑한 야곱을 보십시오. 라헬을 아내로 맞는 조건으로 삼촌 라반에게 칠 년을 봉사해 주기로 약속했지만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습니다. 어떻게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길 수 있습니까? 야곱의 수고는 타의에 의한 강제적인 수고가 아니라 사랑의 수고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라는 책을 쓴 토마스 아캠퍼스는 “고통이 없는 사랑에는 삶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곧 사랑에는 고통이 따른다는 의미입니다. 

아프리카의 선교사였던 리빙스톤은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죽음을 각오하고 아프리카로 가서 일생동안 온갖 고생을 한 것도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가 왜 대학 교수직도 내놓고 식인종이 있는 곳에 가서 흑인들을 돌보며 손수 병원을 지으며 환자들을 돌보며 살았습니까? 주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다니엘 신부가 왜 나병 환자를 돌보며 나중에는 그 몸에 나병이 옮아서 죽을 때까지 그들을 위해 끝까지 봉사했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의 영구표어는 “섬김과 나눔을 실천하는 교회”입니다. 물질을 투자하고 힘들고 어려워도 다양한 지역복지 프로그램을 실시하는 것은 주님이 사랑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사랑의 수고가 있는 교회, 섬김과 나눔을 실천하는 교회로 소문이 널리 퍼져서 누구든지 와 보고 싶은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묵묵히 봉사하면서도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랑의 수고가 마음에 주렁주렁 열리는 교회, 누가 시키지 않아도 먼저 찾아서 일하면서 그 속에서 보람을 느끼는 사랑의 수고가 넘치는 교회, 도우고 싶어서 견딜 수 없는 가슴 뜨거운 사랑의 수고가 우리 교회의 아름다운 소문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3. 데살로니가 교회는 소망 중에 인내하는 교회였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소망의 인내가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오늘 본문 3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데살로니가 교회가 이처럼 믿음이 좋은 교회이고, 사랑의 수고가 있는 교회였던 것은 저들에게 생활의 여유가 있고 남을 도울 수 있는 안정된 조건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판단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지금 어떤 환경 가운데 있었는지 아십니까? 6절에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초대교회가 다 그렇듯이 그들도 신앙생활 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는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정치적으로 로마당국으로부터 황제숭배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박해를 당했고, 유대교인들에게 기독교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사회적으로 소외당했고, 또 직장이나 그 밖에 어떤 단체에서든지 핍박을 당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너무나 그 고통이 심해서 믿음을 버리고 도망가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예 믿음을 가질 용기조차도 가지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신앙을 지켰습니다. 어떻게 지켰습니까? 인내로서 지켰습니다.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이 이처럼 많은 환난 가운데서도 기쁨으로 말씀을 받으면서 지낼 수 있었던 까닭은 저들에게는 소망의 인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하루하루 가 견디기 어려운 핍박과 환난과 고난 속에서도 소망이 넘치는 교회였습니다. 그들에게 소망이 없었다면 모두가 절망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소망이 있었기에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가 있었으며 소망이 있었기에 어려움을 이길 수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소망은 무엇이었을까요?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사모하는 것은 다시 오마 약속하신 우리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그래서 소망가운데 인내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기적이 어떤 때에 나타납니까? 하나님의 기적은 바로 위기 가운데 나타납니다.  

홍해의 기적이 일어날 당시는 이스라엘 민족의 위기였습니다. 뒤에서는 세계 최강의 애굽 군사가 쳐들어오고 있었고,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위기 가운데서 홍해가 갈라진 것입니다. 

여러분 문제를 많이 만나고 있습니까? 역경을 만나고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기적과 능력을 경험할 수 있는 현장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인내가 필요합니다. 체념하면서 자포자기 가운데 참는 것이 아니라 소망 가운데 참는 것입니다. 

소망가운데 인내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 소망 없는 자들이 우리교회는 소망이 넘쳐난다고 소문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 교회도 데살로니가 교회와 같이 아름다운 믿음의 소문이 나는 좋은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의 부흥은 그 교회에 대한 소문이 주변에 어떻게 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특별히 현대 사회에 있어서는 더욱 더 그러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얼마나 많습니까? 물론 교회가 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성장해나가면, 무엇이 문제겠습니까?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느 교회는 폭발적으로 성장하는데 어느 교회는 자꾸만 침체 됩니다. 그 이유가 어디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교회의 이미지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 창립기념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 교회가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 소망 중에 인내하는 교회로 좋은 소문나서 교회와 성도들이 칭찬을 들으며, 그 결과로 부흥하는 교회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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