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어버이주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출 20:12)

첨부 1


네 부모를 공경하라 (출 20:12)

인터넷상에 이런 고백시가 있었습니다. 「생선장수 어머니」, “어린 시절, 시장에 생선을 파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내게는 너무도 창피했습니다. 저녁때 팔다 남은 고등어가 밥상에 오를 때면 철없는 투정으로 숟가락을 팽개쳤고, 힘들게 생선을 팔아 초등학교에 보내주실 때에도 학용품 사라며 쥐어주신 돈을 생선 냄새가 난다며 뿌리치고 말았습니다. 

지금 와 생각하면 그때는 왜 그리도 철이 없었는지요. 일한다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라는 걸 깨달은 지금 시장에서 고생하시는 분들을 보면 왠지 낯설지 않습니다. 그 얼굴 사이에 어머니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 머리라도 조아리고 싶어지지만 이제 어머님은 그 어디에도 계시질 않습니다. 그 옛날로 돌아가, 어머니께 용서를 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어머니 죄송합니다!”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이제 막 철이 들어서 효도 한 번 할까 두리번거렸더니, 어버이가 우리 곁에 아니 계신 분들도 많이 계신 줄로 압니다. 마땅히 효도해야 할 줄 뻔히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했던 인생의 무거운 짐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마냥 무겁게만 느껴지는 날 이기도 합니다. 옛날에는 5월 8일을 어머니날이라고 했는데 언젠가부터 어버이날이라고 합니다. 어버이가 누구입니까? 신학적으로 보면 궁극적이고 영원한 어버이는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산 꼭대기에서 부르셔서 모세가 올라가 십계명을 받았는데, 그 십계명 중, 제 5계명의 말씀입니다. 

(12절)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모세가 받은 십계명은 원래 두 개의 돌 판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첫 번째 돌 판에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다룬 4가지 계명이 새겨져 있었고, 두 번째 돌 판에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다룬 6개의 계명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 계명 중 중요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지만 그 십계명의 순서는 그 무게와 중요성의 순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둘째 돌판 여섯 가지 계명 가운데 그 첫 번째 계명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제 5계명을 율법의 중심점 혹은 십계명의 배꼽(옴파로스)이라고 합니다. 이 계명은 건강한 가정을 위한 첫 번째 계명입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모든 다른 계명은 바로 이 건강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 주어지는 계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간음하지 말라’ 

가정을 파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 ‘도둑질하지 말라’ 

남의 가정의 환경을 소중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 ‘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을 탐내지 말라’ 

행복의 근원과 행복의 이유를 내 가정 안에서 찾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는 이 기초관계가 무너져서 주춧돌이 뒤집어진 주택 마냥 많은 위기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효도가 무엇입니까? 한자어는 이 효도에 대해 퍽 재미있는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옛날부터 보통 닷 새 만에 장이 섰습니다. 장날이 되면 아들은 그 동안 해서 모은 나무 단을 지게에 잔뜩 싣고서 아침 일찍 장에 나가서 그것을 팝니다. 저녁이 됩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밥상을 준비해 놓고 이제나저제나 아들이 돌아오기만 기다립니다. 해가 서산에 뉘엿뉘엿 넘어가는 데도 아들이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걱정이 되어서 가만히 집에 머물러 계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동구 밖까지 나가서 아들이 돌아오기만 기다립니다. 드디어 한 사람씩 두 사람씩 멀리 산모퉁이를 돌아서 마을로 되돌아오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애틋한 심정이 되어서 좀 더 멀리, 좀 더 자세하게 보기 위해서 동구 밖에 서있는 나무 위에 올라갑니다. 

그 모습을 한자에서는 ‘어버이 친(親)’자로 묘사를 했습니다. 어버이 친자가 어떻게 씁니까? ‘설 립(立)’자 밑에 ‘나무 목(木)’자, 그리고 오른쪽에 ‘볼 견(見)’자를 씁니다. 나무 위에 올라서서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그리워하면서 바라보는 어머니의 애틋한 심정이 바로 어버이 친(親)자입니다. 

한편 아들은 준비해 간 나무를 시장에서 모두 팔고서 그 돈을 가지고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반찬도 사고 또 어머니에게 드릴 선물들을 사서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어머니가 집에 계시지 않고 동구 밖까지 나와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그 모습을 보면서 아들은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어머님! 왜 여기까지 나오셨습니까? 다리도 불편하실 텐데, 집에 가만히 계시지 않고요!” 그러면서 아들은 등에 지고 있는 지게를 내려놓습니다. “어머님! 어서 이 위에 올라앉으세요. 제가 어머님을 업어서 집에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그것을 한자에서는 ‘효도 효(孝)’자로 표시를 했습니다. 효도 효자는 어떻게 씁니까? ‘늙을 노(老)’자 밑에 ‘아들 자(子)’자가 있습니다. 아들이 연로하신 어머님을 등에 업고 가는 모습이 효도 효(孝)자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이와 같은 친(親)이 있고, 효(孝)가 있는 행복하고 화목한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에서 말하는 효도는 윤리에서 말하는 효도의 내용뿐만 아니라 다른 한 차원이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우리 기독교 신앙인의 효도는 차원이 다른 효도입니다. 기독교의 효는 그 이유에서 차원이 다르고, 다음으로 그 방법에서 차원이 다릅니다. 

옛날 어느 곳에 원님이 새로 부임을 했습니다. 그 고을에는 소문난 효자가 한 명 있었습니다. 원님이 새로 부임해 오기만 하면 효자는 초청을 받습니다. 그래서 푸짐하게 대접을 받고, 또한 큰상을 받고 온갖 칭찬을 듣고 돌아옵니다. 새로 원님이 부임을 해서 또 이 효자가 초청을 받았습니다. 이 효자는 그런 일로 많이 초청을 받다보니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갔습니다. 효자가 원님 앞에 섰습니다. 원님이 “자네가 이 고을에 그렇게 소문난 효자가 맞는가?”라고 물었습니다. 효자는 “예,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고 효자라고들 합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엔 원님이 “그럼 자네 부모 형편은 어떤가?”하고 물었습니다. 효자는 “제 어머니는 15년 전에 세상을 떠나셨고, 아버지 한 분이 지금 외롭게 살아가십니다. 그래서 제가 얼마나 외로운가를 생각하고 외롭지 않게 해드리려고 최선을 다하고, 불편이 없도록 지극 정성을 다해 온갖 시중을 다 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원님이 화를 내면서 “이 놈을 당장에 형틀에 묶고 곤장으로 죽지 않을 만큼만 내리쳐라”고 명합니다. 그러면서 이 원님이 이런 말을 합니다. “천하에 이런 고약한 놈이 지금까지 효자라고 칭찬을 받고, 효자라고 상을 받고 있었다는 말이냐? 저는 제 마누라와 함께 살면서 아버지가 15년 동안 혼자 살게 하다니? 진짜 효자라면 아버지를 장가 보내줘야 하지 않느냐? 아버지를 혼자 내버려두는 고얀 놈이 효자란 말이냐?”고 호통을 쳤습니다. 대접도 못 받고, 상도 못 받고, 그저 곤장만 죽지 아니할 정도로 맞고 벌벌 기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가 자초지종을 물었습니다. 모두 이야기를 하니까 가만히 듣고 계시던 아버지가 “이제야 제대로 된 속 시원한 원님이 오셨구만.”하면서 웃음을 짓더라는 것입니다. 이 사건이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원하는 효도와 아들의 효도는 전혀 달랐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효도는 효도의 방법이 다릅니다. 그 차원이 다릅니다. 그러면 성경적인 효도는 무엇입니까?  우리 신앙인은 어떻게 효도해야 합니까? 

1. 신앙인의 효도는 감사로부터 시작되어지는 것입니다.

그 감사가 무엇입니까? 생명에 대한 경외감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생명을 주셨다. 내 어버이를 통하여 생명을 주셨다.” 생명에 대한 한없는 감사가 효도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우리 부모님들이 훌륭해 보이지 못해서 불평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부모님들이 많이 배우지 못한 듯하여 자랑스럽게 여기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들을 통하여 내 생명을 이 땅에 보내주셨다는 한 가지 사실 때문에 우리는 그분들을 존경하고 자랑스럽게 여기고 감사할 수 있어야 된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급변하다 보니 부모님들이 연로하셔서 못나 보일 때가 있습니다. 또 실제로 연로하신 부모님들을 보면 실수가 많이 있습니다. 어릴 때 우리가 실수가 많았습니다. 내 어머니 그것을 참아 주셨고 내 아버지 내 실수를 바라보며 인내해 주셨습니다. 이제는 자식 된 우리가 늙으신 어머니 아버지의 실수를 참아주고 인내해 주고 안아주어야 합니다. 부모님이 홀로 서지 못하고 거동이 불편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서지 못할 때에 내 어머니 나를 안아서 키워주셨습니다. 이제는 늙으신 내 어머니를 우리가 안아줄 수 있다고 한다면 얼마나 커다란 영광이 되겠습니까? 내 아버지 당신의 손으로 밥을 드실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늙으신 어머니에게 수저에 밥을 담아 입에 넣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효를 할 수 있는 최상의 기회가 된 것입니다. 때로는 부모님이 옷과 이부자리에 대소변을 가리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똥오줌 가리지 못할 때에 내 어머니 내 아버지 싫다 더럽다 말씀하지 아니하고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주셨습니다. 이제는 자식 된 우리들이 그런 일을 맞이한다 할지라도 싫어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하나님 부족한 내게 효를 갚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셨군요. 나를 효자 삼으시기 위하여 이런 기회를 내게 주셨군요.” 하면서 그 일 감당할 줄 알아야 된단 말입니다. 

이 땅에 어버이의 최고의 영광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자식들로부터 공경과 사랑을 받고 늙어가는 것입니다. 가장 서러운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내 몸으로부터 낳은 자식으로부터 공경과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왕상 2:19절에 솔로몬 임금도 ‘아침에 일어나 어머니께 절하고 자신의 옥좌 우편에 앉혔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아의 아내였던 솔로몬의 어머니, 양반 고관대작들로부터 얼마든지 무시당하기 쉬운 조건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식 된 솔로몬 임금이 그 어머니를 공경하고 높여 드릴 때에 그 누가 그 여인을 무시할 수 있겠습니까? 


2. 우리의 효도는 살아 계실 때 효도하는 것입니다. 

돌아가신 다음에 제사상이나 차려드리면 되는 그런 효도가 아닙니다. 

열 가지 계명 중에 아홉 가지 계명은 평생 나를 따라다닐 수 있는 계명입니다. 그러나 제5계명만큼은 어느 날 문득 내 곁을 떠나 버리고 마는 계명입니다. 아홉 가지 계명을 내가 범하고 잘못 감당했다고 할지라도 돌이킬 수 있습니다. 새롭게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이 5계명만큼은 어느 날 갑자기 내 곁에서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송강 정철 선생의 시 

“어버이 살아계실 제 섬기기를 다하여라. 한번 가신 뒤에 애달프다 어이하리. 생전에 고쳐 못할 일은 이뿐인가 하노라.”  

박인노의 시 

“반중조홍감이 고와도 보이나니 품음직 하다마는 품어가 반길이 없으니 이를 서러워 하노라.” 

‘내 아버지 내 어머니 홍시 좋아했는데 잘 익은 홍시 손바닥에 들고 달려가 이것 어머니 드세요, 아버지 드세요, 드리고 싶었지만 이제는 반길 이가 없으니 그를 서러워하노라.’ 

제5계명은 부모님이 돌아가신 다음에야 슬퍼하는 계명이며, 자녀들로부터 푸대접받고 늙음의 비애가 내 인생에 넘치는 그때, 더욱 서러워지는 계명입니다. 


3. 우리는 이 계명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는 부모 공경에 대한 말씀이 참 많이 나옵니다. 

(신5:16)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신27:16) “그의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잠23:22) “너를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 

(엡6:2~3)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신, 구약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은 부모 공경에 대한 말씀을 무수히 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리고, 또한 부모 공경하는 이에 대한 축복을 말씀할 때, 우리 인간들이 가장 많이 바라는 것으로 축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장 많이 소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땅에서 하는 일마다 잘 되고, 그리고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하나님은 바로 그것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뜻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너희들이 바라는 것이 뭔지 안다. 그런데 그것을 원하면 먼저 네 부모에게 잘해’, 하나님은 부모 공경을 하나님 공경으로 여기십니다. 

여러분, 이 땅에서 믿음을 가지고 진정으로 효도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축복하십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교회 유치부에 다니는 어린아이가 어느 날 집에 돌아와서 무엇을 열심히 외우고 있어요. 부모가 뭐를 외우고 있나? 가만 들어보니 십계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린아이가 제5계명을 외우는데 “네 부모를 공격하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빠가 “이놈아, 공격이 아니고 공경이야 공경!”,  “‘공격하라’와 ‘공경하라’는 어떻게 달라요?” 아이가 묻자 아빠는 대답을 했습니다. “공경은 아빠 말씀을 잘 듣고 사랑하는 거고, 공격은 아빠한테 덤비고 말씀을 안 듣는 것이지.” 그러자 대뜸 아이가 말을 받습니다. “그런데 아빠는 왜 할아버지 공경하지 않고 공격해!” 

성경은 말씀합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 효를 뿌린 자가 효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효자 성도가 또 다른 효자 성도를 낳습니다. 

지난 주중에 어버이날, 아들 상우가 준비한 카네이션을 옷에 달았습니다. 카네이션이 브롯지 형태로 된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어버이날 새벽에 무슨 특별 이벤트를 하려고 했는데, 그것이 잘 안 되었던 것 같아요. 작년에도 카네이션을 받았지만 다른 느낌은 없었는데, 올해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두 번째 맞는 어버이날인데, 어머니가 안 계신 것에 대한 아쉬움이 작년보다 더 한 것임. 결혼 후 3년 째부터 늘 모시고 살았고, 점점 병이 중해지시는 것을 옆에서 보며 막판에는 아내의 병과 겹쳐서 더 힘들어서 정신없이 지나갔다는 생각인데, 이제는 아쉬운 생각이 더 드는 것임. 아프셔서 해외여행 한번 못 보내드렸지만 모시고 살면서 매년 여름 휴가때는 근사한 경치라도 보여드리려고 했고, 수년 전에는 제주도에도 모시고 가서 섬 일주를 시켜드렸습니다. 그래도 생각납니다. ‘살아계셨을 때, 좀 더 잘 해 드렸으면 좋았을 걸’... 

찬송 579장, 
“어머니의 넓은 사랑 귀하고도 귀하다 그 사랑이 언제든지 나를 감싸줍니다. / 아침 저녁 읽으시던 어머니의 성경책 손 때 남은 구절마다 모습 본 듯합니다. / 믿는 자는 누구든지 영생함을 얻으리 들려주신 귀한 말씀 이제 힘이 됩니다.”...

 저는 이 찬송이 정말 저의 어렸을 때 어머니의 모습을 기억나게 합니다. 저는 자랄 때 집에서 성경 읽으시고 찬송 부르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많이 보면서 자랐습니다. 말년에는 병으로 힘드셨고, 또 큰 아들 집에 사시면서 나보고 동생들 안 챙겨준다고 하셔서 섭섭하게도 하셨지만, 제가 자랄 때는 늘 이 큰 아들을 위해 주셨습니다. 

오늘은 어버이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시고 부모님이 생존해 계시는 분들은 계실 때 잘 해 드리시기 바라며, 또 후손들에게도 귀한 덕을 남기셔서 여러분의 가문이 축복의 가문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