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창 16:6-14)

첨부 1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창 16:6-14)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에서 그를 만나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은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 (창16:6-14)

1.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창12:1-3)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으로 그가 복의 근원이 되리라고 약속하실 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75세였습니다.(창 12:4) 그 후 아브라함은 100년을 더 살고 향년 175세를 살았습니다.(창 25:7) 아브라함에 대한 약속 중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라는 말씀이 있음에도 아브라함은 10년이 지나도록 그의 아내 사라가 잉태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사라는 생명을 잉태케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役事)를 기다리지 못하고 성급하게 판단을 내립니다. 창세기16:2을 보겠습니다. 

(창16:2)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라함이 사라의 말을 들으니라.

사라의 이러한 생각과 판단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는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시는데 그 때를 기다리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재산과 같은 몸종 하갈을 통해, 다시 말해 하갈을 생산수단으로 삼아 자손을 일으키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 결국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내가 제시한 요구와 방법이 분명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상반되는 것으로, 철저히 인간적인 방법임을 알면서도 한마디의 반론도 제기하지 않은 채 수락한 것입니다. 분명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인간적인 방법과 잔꾀로 성취해 보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이루시는 것을 믿지 아니하고 자신의 생각과 방법대로 행하는 것은 분명히 교만한 행동입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뜻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방법으로만 이루어가심을 알아야 합니다. 결국 아브라함과 사라의 불신과 교만은 심각한 가정불화의 고통을 초래하게 되었고, 하갈과 이스마엘, 그리고 그 후손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는 비극의 전조(前兆)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인 이삭은 그로부터도 15년이 더 지난 10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주어졌습니다.(창21:5) 

2. 하갈은 사라의 몸종으로 사라의 요구, 주인 아브라함과의 동침을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갈은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하갈은 몸종이지만 주인의 자식을 잉태하게 되자 여주인인 사라를 멸시하게 됩니다. ‘멸시했다.’는 말은 ‘하찮게 여겼다.’는 뜻입니다. 하찮은 몸종이 주인의 자식을 잉태하게 되자 자식을 낳지 못하는 여주인이 하찮아 보인 것입니다. 당시에는 여자가 잉태치 못하는 것을 대단한 치욕으로 생각했고 다산(多産)을 신의 은총으로 간주했었기 때문에 이러한 일이 충분히 일어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결국 사라는 자신의 계책에 자신이 얽매이는 비참한 꼴을 당한 셈이 되었습니다. 지혜서인 잠언 30:21-24에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잠30:21-23) 세상을 진동시키며 세상이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종이 임금된 것과 미련한 자가 음식으로 배부른 것과 미움 받는 여자가 시집 간 것과 계집 종이 자기 여주인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니라. 

“세상을 진동시키며 세상이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서넛 중, 계집 종이 자기 여주인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니라.”는 말씀대로 하갈이 자신을 멸시하는 것에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사라가 남편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창16:5)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사라 자신이 계집 종으로부터 멸시천대를 받게 된 모든 책임이 아브라함에 있다는 주장입니다. 하갈의 임신이 분명 사라 자신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임에도 자기 잘못을 모두 남편에게 그 책임을 전가한 것입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사라에게 “여보, 당신의 종이니, 당신 마음대로 할 수 있지 않소? 당신이 좋을 대로 그에게 하기 바라오.”라며 아내 마음대로 처분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라가 본격적으로 하갈을 학대하자, 하갈이 사라 앞에서 도망했습니다. 

주인집에서 도망친 하갈은 이제 머나먼 고향 애굽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심신이 곤비한 가운데 처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임신하여 무거운 몸이었습니다. 하갈은 지친 몸을 잠시 쉬기 위해 광야의 샘물 곁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회한과 절망의 한 숨을 내쉬었습니다. 

바로 그 때 하갈 앞에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셨습니다. 이 사건으로 하갈은 인생에 엄청난 전기(轉機)를 맞이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하갈에게 새로운 인생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창16:8) 사라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라는 한 마디 질문이었습니다. 하갈에게 물었던 이 질문은 오늘 우리 모두에게 묻고 있는 하나님의 질문입니다. 이 질문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1) 먼저, 이렇게 부르십니다. “사라의 여종 하갈아” 비록 하갈이 사라의 학대를 피해 달아났을지라도 여전히 그녀는 ‘사라의 여종’임을 상기시켜 주는 말입니다. 비록 여주인 사라의 요구대로 행하여 주인의 자식을 잉태했을지라도 여전히 ‘사라의 여종’이라는 것입니다. 종은 도망친다고 해서 결코 자유로워 질 수 없습니다. 종이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주인으로부터 사면을 받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사라의 여종 하갈아” 이 말은 막연하게 도피 행각을 벌이고 있는 하갈에게 비록 도망칠지라도, 여전히 ‘사라의 여종’이라는 사실과 그에 따라 마땅히 취할 행동이 무엇인지를 일깨워 주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네가 어디서 왔느냐?” ‘너는 지금 어떻게 해서, 무엇 때문에 이 지경이 되었느냐?’는 질문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하갈에게 일어났었던 일들과 그녀가 사라의 학대를 받게 된 사연, 그리고 도망쳐 나온 일 등을 이미 익히 알고 계시면서 그렇게 물으신 것입니다. 가인은 잘못된 예배를 드리므로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열납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잘못된 예배에 대해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했어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가인이 어떠한 마음을 품고 있는가를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창4:6-7)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일거수일투족뿐만 아니라 그 마음의 생각까지도 모두 아시는 분이십니다. 하갈이 주인집에서 도망쳐나오게 된 이유를 모두 아시는 하나님께서 “네가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마음에 도사리고 있는 죄를 다스리라고 하신 것처럼 하갈에게 ‘너 자신을 돌아보라. 네가 종의 신분으로 주인을 업신여기고 교만했던 너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죄를 범하고 에덴 동산 숲에 숨어있던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 것처럼, 아담이 무슨 짓을 하고 어디에 숨어 있는가를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 것처럼, 하갈에게 “네가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신 것은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범죄한 인간이 자신의 현 위치를 깨닫고 회개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부르는 말씀입니다. B.C.520년경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생활 중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제 때가 되어 해방될 것을 암시하기 위해 먼저 예루살렘에 돌아가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도록 섭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예루살렘에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 재건을 시작하는데 주변 부족들로부터 온갖 방해와 협박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주변 부족들은 자기들이 이미 예루살렘에 자리잡고 잘 살고 있는데 이스라엘이 해방되어 돌아오는 게 여간 못마땅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전 재건을 방해하고 위협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 재건 공사를 중단해버렸습니다. 무려 16년간이나 중단하고 자기들이 거처할 집을 지으며 먹고 사는데 열심을 다 했습니다. 주변 부족들은 이스라엘이 성전을 재건한다는 것은 국가적으로 회복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재건공사를 방해했던 것이고, 이내 성전 재건공사를 중단하자 내버려 둔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선지자 학개를 통해 이렇게 준엄하게 책망하십니다.

(학1:3-11)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 그러므로 이제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니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까닭이냐 내 집은 황폐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을 짓기 위하여 빨랐음이라 그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내가 이 땅과 산과 곡물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땅의 모든 소산과 사람과 가축과 손으로 수고하는 모든 일에 한재를 들게 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돌아가게 하신 본연의 임무를 망각하고 자기들 먹고 입고 사는 일에만 빠져 있는 행위를 돌아보고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있어야 할 자리를 벗어나 본연의 임무를 다 하지 아니하면 구멍뚫어진 전대에 넣음같이 모든 허사가 되고 말것이라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그간 쌓아놓은 재물을 바람에 불어 한 순간에 날려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갈에게 “네가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신 것은 속히 회개하고 돌아가 종의 자리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피조물 인간의 자리를 벗어나 하나님과 같이 되려다가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었습니다. 사탄은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입니다. 

(유 1:6)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 사탄에 미혹되어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을 잃어버렸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사는 땅에 기근이 들자 약속의 땅 가나안을 벗어나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아내를 잃을 뻔 했습니다. 남자는 남자의 자리에 있어야 하고 여자는 여자의 위치를 지켜야 아름다운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남편은 남편의 처소를, 아내는 아내의 자리를 지켜야 가정을 에덴동산으로 지켜갈 수 있습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과 함께 살았습니다. 인간이 있어야 할 자리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추방된 인간과 영원히 함께 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인생은 아브라함 집을 떠나 도망친 하갈과 같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삶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항상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신앙생활로 평안과 축복의 장막에 거하시는 복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2) 다음으로, “네가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네 고향이라 해서 애굽으로 도망치고 있지만 분명 잘못된 길, 잘못된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복의 근원으로 선택하신 축복의 장막인데 견디기 힘들다고 해서 그곳을 벗어나는 것은 결코 축복이 될 수 없으니 축복의 장막, 아브라함에게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애굽이 아무리 커 보이고 아무리 편하게 보일지라도 그곳은 하나님의 축복이 약속된 곳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가나안으로 가는 광야에서 그 생활이 힘들다고 자꾸 애굽을 돌아보며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불평하다 결국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다 죽고 말았습니다. 

B.C.1015년경, 다윗이 사울 왕의 추격을 피해 도피생활 중이었습니다. 7년에 가까운 도피생활 끝에 더 이상 도망할 곳이 그리 마땅치 않았습니다. 또한 어디를 가나 안전한 곳이 없었습니다. 이미 전국에 걸쳐 지명 수배되어 있는 터에 사람들마저 믿을 수가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궁여지책으로 생각해낸 것이 이스라엘 경계를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 땅을 벗어나 적국이었지만 블레셋으로 도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의 가족들과 추종자들, 그리고 그 가족들 6백명과 함께 블레셋으로 도피했습니다.

(삼상27:1-2)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붙잡히리니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좋으리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영토 내에서 다시 나를 찾다가 단념하리니 내가 그의 손에서 벗어나리라 하고 다윗이 일어나 함께 있는 사람 육백 명과 더불어 가드 왕 마옥의 아들 아기스에게로 건너가니라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다윗과 그 일행이 거하고 있는 성을 잠시 벗어나 있을 때, 아말렉 족속들이 쳐들어와 그 성을 초토화시키고 성에 남아있던 다윗의 아내와 자녀들, 추종자들의 아내들과 자녀들이 모두 사로잡혀갔습니다. 이 사건으로 다윗과 그 일행들은 깊은 절망 중에 너나할 것 없이 큰 슬픔에 잠겼습니다. 다윗의 추종자들은 마침내 다윗을 향해 분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간 다윗과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을 모두 잃고 나니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이제는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능력으로는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절대적인 절망과 좌절의 상황을 맞게 되었습니다. 오직 유일한 돌파구는 다윗을 이제까지 도피 생활 중 자신을 보호하시고 인도해 오신 하나님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급히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자신을 돌아보며 그간 잘못 생각하고 행동했던 것들을 돌아보며 회개했습니다. 사울의 추격으로부터 안전하기 위해 블레셋으로 도피하려했던 자신의 생각과 판단이 잘못되었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아니하고 자신의 생각과 판단에 따라 행동했던 잘못을 깨닫고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삼상30:8)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내가 이 군대를 추격하면 따라잡겠나이까?

하나님께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온 다윗에게 응답하십니다. “그를 쫓아가라. 네가 반드시 따라잡고 도로 찾으리라.” 그렇게 해서 다윗은 아말렉을 추격해서 사로잡혀간 모든 것을 도로 찾았습니다. 빼앗겼던 것은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이 모두 도로 찾아왔습니다. 

(삼상30:18-20) 다윗이 아말렉 사람들이 빼앗아 갔던 모든 것을 도로 찾고 그의 두 아내를 구원하였고 그들이 약탈하였던 것 곧 무리의 자녀들이나 빼앗겼던 것은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이 모두 다윗이 도로 찾아왔고 다윗이 또 양 떼와 소 떼를 다 되찾았더니 무리가 그 가축들을 앞에 몰고 가며 이르되 이는 다윗의 전리품이라 하였더라

다윗이 하마터면 모든 가족들을 잃어버리고 죽을 뻔하게 된 원인은 바로 아무리 도피생활이 힘들고 그 생활에 지칠 대로 지쳤다 해서, 그리고 더 이상 도피할 곳이 없어보여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 가나안을 벗어난 것이었습니다. B.C.110년경 약속의 땅 베들레헴에 살던 엘리멜렉이 그 땅에 흉년이 들자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을 데리고 이방인 모압 지방으로 가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잠시 평안하고 넉넉하게 사는가 싶었는데 얼마가지 않아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뒤를 이어 두 아들마저 죽고 말았습니다. 결국 홀로된 나오미가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갔는데 사람들이 나오미를 잊지 아니하고 저마다 나오미가 아니냐며 환영합니다. 그러자 나오미가 이렇게 말합니다.

(룻1:20-21)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나오미’라는 이름은 ‘사랑스런 여인’, ‘희락’을 의미하고 ‘마라’는 ‘괴로움’이라는 뜻입니다. 약속의 땅에 흉년이 들었다 해서 그 땅을 벗어나 살기 넉넉한 곳으로 갔지만 결국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고 부르는게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분명 ‘내가 풍족하게 나갔으나 하나님께서 나오미를 텅 비어서 돌아오게 하셨다.’고 고백했습니다. 애굽과 같은 세상이 아무리 풍족해보일지라도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 살게 되면 결국 헛되고 헛된 인생이 되고 말 것입니다. 내 생각으로 살지 말고 하나님의 생각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내가 판단한 길로 가지 말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길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 말씀의 경계를 벗어나지 않는 생활로 풍족하고 형통한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55:8-11)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3.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하갈에게 “네 여주인에게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할 때, 수가 많아 셀 수 없을 정도로 번성케 하리라고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갈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 복을 받는 길은 그 주인에게 돌아가는 것뿐입니다. 신명기 30:9-10을 보겠습니다. 

(신30:9-10)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여 이 율법책에 기록된 그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고 네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여호와 네 하나님께 돌아오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과 네 몸의 소생과 네 가축의 새끼와 네 토지 소산을 많게 하시고 네게 복을 주시되 곧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을 기뻐하신 것과 같이 너를 다시 기뻐하사 네게 복을 주시리라.

하나님의 품을 떠나 곁길로 간 죄인이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은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뿐입니다. 오늘날 사회 기강이 해이해지고 각종 부정부패가 만연하는 까닭도 따지고 보면 학자가 학자의 신분을 떠나고, 위정자가 국민의 공복(公僕)이란 위치를 떠나고, 누구나 할 것 없이 자신의 활동 반경을 이탈하여 경거망동하는 데 있습니다.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 말씀에 순종하면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되 아주 풍성하게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갈은 여주인 사라가 자신을 통해 자손을 번성케 하시는 하나님의 언약이 실현될 것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주인에게 돌아가 그 수하에 복종하게 되면 마찬가지로 하갈 자신도 수가 많아 셀 수 없을 정도로 자손이 번성케 되리라는 약속을 받은 것입니다. 사라가 장차 ‘열국의 어미’가 되리라는 것처럼(창 17:16) 하갈도 장차 일국(一國)의 조상이 된다는 축복을 약속받은 것입니다. 결국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은 이러한 약속대로 오늘날 터어키인들과 아랍인들을 구성하는 12족속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창25:12-16) 사라의 여종 애굽인 하갈이 아브라함에게 낳은 아들 이스마엘의 족보는 이러하고 이스마엘의 아들들의 이름은 그 이름과 그 세대대로 이와 같으니라. 이스마엘의 장자는 느바욧이요 그 다음은 게달과 앗브엘과 밉삼과 미스마와 두마와 맛사와 하닷과 데마와 여둘과 나비스와 게드마니 이들은 이스마엘의 아들들이요 그 촌과 부락대로 된 이름이며 그 족속대로는 열두 지도자들이었더라.

일은 인생들이 저질렀어도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복을 주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하갈이 낳게 될 아들의 이름까지도 직접 지어주셨습니다. 성경에서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이름이 지어진 첫 번째 경우입니다. 그만큼 하갈에게 특별한 은총을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하갈의 소생 이스마엘이 비록 ‘약속을 따라 낳은 아들’이 아니라, ‘육체를 따라 낳은 자’이지만 이렇게 특별한 은총을 입게 된 것은 축복의 장막인(창12:3) 아브라함에게 돌아가 거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갈4:23)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렇게 하갈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아브라함의 장막으로 돌아가 하나님께서 주신 이름대로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이스마엘’은 하나님께서 하갈의 고통을 들으셨다는 뜻입니다. 하갈은 하나님의 복된 약속을 받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여기에서 나를 보시는 하나님을 뵙고도, 이렇게 살아서, 겪은 일을 말할 수 있다니!”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찾아오셔서 위로와 복을 약속하신 그곳 광야 샘을 “브엘라해로이”라고 불렀습니다. ‘나를 살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우물’이라는 뜻입니다. 

이곳은 지금 브엘세바 남방, 아인가데스 서북방 18Km지점으로 오늘날 아랍인들이 ‘마 레하이 라이’(살아 있는 자의 우물)로 부르고 있습니다. 하갈의 고통을 들으시고 그의 삶을 살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살아계셔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어디서 왔느냐?” “네가 어디로 가느냐?” ‘인생들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라’ 집을 나간 탕자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시는 아버지처럼 하나님께서 하루도 빠짐없이 인생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지은 죄가 아무리 무겁고 크기로 주 어찌 못 담당하고 못 받으시리요. 우리 주의 넓은 가슴은 하늘보다 넓고 넓어. 우리 주는 날마다 기다리신다오. 밤마다 문열어놓고 마음 졸이시며 나간자식 돌아고기만 밤새 기다리신다오. 채찍 맞아 아파도 주님의 손으로 때리시고 어루 만져 위로 해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 오오 어서.”(찬송가527장)

요나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도망했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참된 자유와 참된 축복을 누릴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잘 알고 믿는다는 요나처럼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사는 성도는 없습니까? 하갈은 비록 하나님의 약속 밖에 있는 여종으로 사라의 인간적인 생각에 따라 약속 밖의 아들 이스마엘을 낳았을지라도 축복의 장막인 아브라함에게 돌아가 거할 때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았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 믿음으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축복의 장막에 거하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습니다. 삶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변함없는 믿음과 하나님 말씀 안에 거하여, 풍족함과 형통으로 채워지는 복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