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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함께 지어져 가는 교회 (엡 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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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지어져 가는 교회 (엡 2:20-22)
   
어느 한적한 마을에 매우 지혜로운 노인이 있었습니다. 노인은 매일 정유소 앞에 있는 흔들의자에 앉아 지나가는 운전자들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습니다. 어떤 날은 손녀도 그 발 앞에 앉아 그와 함께 오가는 사람들을 보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루는 키가 큰 한 여행객이 나타났습니다. 노인은 그 마을 사람들을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지나가는 사람인 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는 그 마을이 살기에 어떤지 확인하려는 듯 이리저리 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노인에게 다가와 ‘이 마을은 살기에 어떻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노인은 그 사람을 바라보며 천천히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떤 마을에서 오셨습니까? 그 마을은 살기에 어땠습니까?’ 그 여행객은 ‘제가 사는 마을 사람들은 모두 서로에 대해 아주 비판적입니다. 서로 나쁜 소문을 퍼뜨리고 함께 협력하지 않는 살기에 썩 좋지 않은 마을입니다. 저는 그곳을 정말 떠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의자에 기대어 앉아 있던 노인은 낯선 사람을 바라보며 ‘그래요. 이 마을도 당신이 사는 마을과 다를바가 없습니다. 똑같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서 그곳을 지나가던 한 자동차가 정유소에 기름을 넣기 위해 들였습니다. 차에는 한 가족이 타고 있었습니다. 가족들은 차에서 내려 손녀와 앉아 있은 노인에게로 다가 왔습니다. 남편 되는 사람이 노인을 향해 인사를 하며 ‘이 마을은 살기에 어떻습니까? 살기에 좋은 마을입니까? 살기에 힘든 마을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노인은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그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떤 마을에서 오셨습니까? 그곳은 살기에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남자는 ‘내가 사는 마을 사람들은 모두 아주 가깝게 지냅니다. 이웃끼리 서로 도와주고 어디를 가나 서로 따뜻하게 인사를 나눕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노인은 그에게 따뜻한 미소를 보내며 ‘이 마을과 아주 비슷하군요. 이 마을도 사람들이 서로 정을 나누고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사이좋게 살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가족은 고맙다는 인사를 한 후에 손을 흔들며 떠났습니다. 

그 가족이 떠난 후에 손녀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할아버지를 올려다보며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왜 첫 번째 사람이 물었을 때는 우리 마을이 살기에 아주 고약한 곳이라고 하시더니 저 가족에게는 아주 살기 좋은 곳이라고 말씀하셨어요?’ 할아버지는 껄껄 웃으면서 ‘사람은 어디를 가나 자기 마음을 가지고 다니는 법이란다. 그리고 그 마음이 살기 좋은 곳을 만들기도 하고 고약한 곳을 만들기도 하지’라고 대답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생의 어려움을 환경의 탓으로 돌립니다. 맞습니다. 환경이 인생에 커다란 영향력을 갖습니다. 그런데 그 환경을 만든 것이 바로 나의 마음과 성품, 선택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내가 만든 가정의 환경은 내가 만든 것입니다. 내 직장의 환경도 내가 만든 것입니다. 이웃들과의 관계도 내가 만든 것입니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는 것인데 그것은 나의 성품과 내 가치관, 생활의 습관 등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과 직장, 그리고 교회의 행복은 다른 사람이 만들어주지 않습니다. 그 행복은 내가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행복은 내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사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동성연애를 인정하면서 미국과 전 세계가 동성연애 문제로 시끄럽습니다. 아르헨티나는 공식적으로 남녀의 성별을 태어난 사람이 선택하도록 결정했습니다. 생물학적으로 남자로 태어났어도 자신이 여자로 등록을 하면 그의 선택을 존중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남녀의 성의 구분도 생물학적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사 결정에 따라 구분되는 시대에 살게 되었습니다. 세상이 가면 갈수록 묘한 세상에서 살게 됩니다. 시대와 환경에 따라 기준이 변합니다. 그러나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은 진리일 수가 없습니다. 진리는 시대와 상황이 변하여도 동일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 참 진리입니다.   

수 천년을 지나는 동안 인류로부터 진리로 인정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인생을 집을 짓는 것에 비유하면서 그 기초와 설계를 하나님의 말씀에 두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설계도가 없이 집을 지으면 그 집은 제대로 된 집이 될 수 없습니다. 집은 짓기 전에 많은 고민을 하고 설계도를 그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설계도에 따라 집을 지어야 합니다. 만약 집을 짓다가 변경하기 원한다면 설계도를 제대로 변경시키고 그대로 지어야 합니다. 설계도가 없이 지은 집은 외형은 멋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구조적으로 매우 불안전한 집이 될 것입니다. 조금만 외부의 충격이 가해지거나 환경의 변화에 따라 붕괴되고 맙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를 세울 때 두 가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기초입니다. 다른 하나는 지어져 가는 진행형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20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는 말은 그들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 토대위에 세워졌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는 교회의 기초 돌은 예수님이시고 예수님을 중심으로 교회가 세워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며칠째 몇 명의 스님들이 고승의 49제를 드리기 위해 백양사에 갔다가 호텔에서 밤을 새워 노름을 했던 것이 드러나 시끄럽습니다. 판돈이 억대가 넘었다고 하니 대단합니다. 스님들이 술과 담배를 마시고 피우며 날을 새며 노름을 하는 것을 상상하면 그들이 과연 진정한 수행자들의 모습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불교계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모르기는 몰라도 그것은 신부들 가운데도 그런 부류가 있을 것입니다. 목사들 가운데도 분명 그런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교회사를 읽어보면 신부님들이 중세 때에 행했던 음란함과 향락은 읽기에 낯이 뜨거울 정도의 모습입니다. 목사들이 교회의 돈을 횡령해 저지르는 사건들이 연일 신문에 보도되고 있습니다. 불교계의 권력 다툼이나 천주교, 개신교할 것 없이 교권을 잡기 위한 암투는 끊이질 않습니다. 이런 모습이 성직자이기 때문에 안 되고 하나님을 믿는 평신도들은 되는 것인가? 직분에 따를 엄격한 잣대가 다르겠지만 그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회개가 없는 종교는 진정한 종교가 될 수 없습니다. 회개라는 것은 중심에서 벗어났던 삶을 다시 자신이 믿는 신의 정신을 중심으로 바로 세우는 것입니다. 어느 종교이든지 회개가 없는 종교는 기복신앙을 중심으로 타락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건전한 종교에 몸을 담고 있다 하더라도 자신을 돌아보는 회개가 없다면 그것은 진정한 신앙인이 아닙니다. 

특히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과 교회는 회개의 운동이 끊임없이 이어져야 합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났던 삶의 내용을 돌아보고 잘못을 고백하며 그 자리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인 교회의 주인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는 훈련이 되지 않는 사람은 결코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게 주신 행복의 설계도를 자주 보며 제대로 인생을 만들어가고 있는지, 제대로 교회를 만들어가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한 교회에 부임했습니다. 그 교회에서 어떤 행사를 잘 마쳤습니다. 청년들이 수고를 많이 했습니다. 목사님께서 청년들에게 수고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청년들이 ‘목사님, 술 한 잔 사주세요’ 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알고 보니 교회에서 일을 하면 집사님들이 청년들을 데리고 뒤풀이 한다고 술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청년들과 상담한다고 술을 사주며 상담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청년들에게 자연스럽게 술 문화가 교회 속에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그 교회는 성가대도, 남선교회도, 자연스럽게 술을 먹는 문화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자기끼리는 재미있을지 모르지만 교회 전체적으로는 영적으로 힘이 될 수가 없습니다. 교회다움을 잃어갑니다. 교회가 전혀 성장하지 않고 침체되고 있습니다. 참된 기독교의 영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사람에게서 나오지 세상적인 가치와 상황 논리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신앙의 힘이고 기독교의 영성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과 그들의 모임인 교회의 진정한 힘과 행복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를 두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 가운데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본문에서 강조하는 또 하나는 진행형이라는 것입니다. 21절에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를 보면 시제가 현재 진행형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주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라는 말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진행형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집을 짓는데 한 번 가보면 그 주변이 얼마나 너저분하고 볼품없는지 모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거룩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닙니다. 세상과 별 차이가 없는 도덕적인 수준을 가진 사람들도 많은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에 깊이 들어와 일을 하다 보면 별의 별 사람들이 다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종종 사용하는 말이 ‘공사 중’입니다. 우리는 공사 중입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완성을 향해 공사하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공사 중’이라는 팻말을 붙이고 살아야 합니다. 죽어서 하나님 앞에 서는 순간에 아마 ‘공사 중’이라는 팻말을 떼게 될 것입니다. 

목사도 공사 중입니다. 특히 저 같이 부족함이 많은 목사는 수리하고 보수할 곳이 너무나 많은 ‘대 공사 중’의 목사입니다. 우리 장로님들도 공사 중입니다. 안수집사, 권사님들도 모두 공사 중입니다. 성도님들도 모두 공사 중입니다. 문제는 자신의 이곳저곳이 허물어지고, 금이 가서 물이 곳곳에서 새고 있는데 자신의 그런 모습은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공사하는 현장을 돌아다니며 이것이 잘못이고 저것이 잘못 되었다고 지적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누구도 예외 됨이 없이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한 설계도에 따라 공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 성숙한 신앙인이고 성숙한 믿음이 공동체입니다. 

22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에서 ‘함께’라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교회는 믿음의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아름다운 교회는 함께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서로의 약함을 인정하고 서로 보완하며 함께 세워가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약함을 채우고 세우기 위해 하나님께서 장로님들과 교회 일꾼들을 세웠습니다. 우리 항존직자들의 약함을 채우고 세우기 위해 교회 제직들을 세우셨습니다. 공사 중인 교회에 힘을 보태라고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불러 주셨습니다. 

어떤 신앙인들은 자신의 마음에 맞지 않으면 교회를 쉽게 떠납니다. 자신의 생각과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입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교회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마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평생 교회를 찾아 떠돌아다닐 것입니다. 이 세상의 어느 교회를 가도 자신의 마음에 꼭 드는 교회는 없습니다. 마음에 드는 교회를 찾았다고 생각하지만 교회에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그 안에도 사람들의 모순과 한계가 드러납니다. 웬지 아십니까? 

아무리 좋은 뜻을 가지고 있는 교회라 하더라고 교회는 관계 속에서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어떤 관계도 완전한 관계는 없습니다. 부부와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도 온전하지 않은데 목회자와 성도, 성도와 성도간의 관계가 완전할 수 있겠습니까? 어느 순간에는 좋았다 가도 어느 순간에는 서운한 관계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자기중심적이거나, 끼리끼리 문화가 교회 안에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 그 교회는 좋은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교회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관계가 형성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일을 해 나갈 때 교회보다 관계가 먼저 우선이 되면 교회를 공정하고 바르게 이끌어 갈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모임이기 때문에 칼로 무를 자르는 것처럼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일을 할 때에 예수님을 중심으로, 교회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훈련이 될 때 좋은 교회, 좋은 일꾼, 좋은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하나님께서 축복의 통로로 쓰실 수 있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서로가 우리의 약함과 허물을 수리해 가고 있는 ‘공사 중’이라는 사실을 서로 인정하고 하나님의 아름다운 교회를 함께 만들어가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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