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어버이주일] 아버지의 마음, 아버지의 사랑 (눅 15:20-32)

첨부 1


제목 - 아버지의 마음, 아버지의 사랑
본문 - 누가복음 15:20-32

오래 전 『좋은 생각』이라는 잡지에 실린 ‘아버지의 마중’이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그대로 읽어 보겠습니다.
  
‘퇴근하려는데 갑자기 검은 구름이 온 하늘을 뒤덮더니 금세 비가 후두둑 쏟아져 내렸다. 금방 그칠 비가 아닌 것 같아 집으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얼마쯤 가다 보니 저쪽에서 누군가가 나에게 손짓하는 모습이 보였다. 고목처럼 여윈 팔을 이리저리 흔들며 웃고 계신 분은 다름 아닌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말없이 나에게 우산을 하나 건네주고는 당신 먼저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가셨다. 얼떨결에 우산을 받아 든 나는 “고맙습니다.”라고 말했지만 그 다음엔 할 말이 없어 잠자코 뒤따라갔다. 그 뒤 비가 올 때마다 아버지는 어김없이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렸다가 우산을 건네 주셨다. 그러자 나는 아버지의 마중을 감사하게 생각하기보다는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비오는 날, 그날도 나는 아버지가 우산을 들고 마중을 나와 계실 거라 생각했는데 웬일인지 아버지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마중 나오지 않은 아버지를 원망하며 그대로 비를 맞으며 집으로 갔다. 비에 흠뻑 젖은 채 집에 들어선 나는 잔뜩 부어오른 얼굴로 아버지를 찾았다. 그런데 잠시 뒤 나는 가슴이 뜨끔해졌다. 아버지가 갈고리 같은 손에 우산을 꼭 쥐신 채로 누워 계셨던 것이다.
  
“그렇게 말렸는데도 너 비 맞으면 안 된다고 우산 들고 나가다가 그만 몇 발자국 못 가 쓰러지셨단다.” 
  
어머니의 말씀에 나는 끝내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밭고랑처럼 깊게 패인 주름살에 허연 머리카락을 하고 맥없이 누워 계신 아버지의 초라한 모습을 보며 나는 내 자신이 너무 미워졌다. 마중 나온 아버지께 힘드실 텐데 그럴 필요 없으시다고 말하기는커녕 아주 당연하게 여겼던 것이 못내 부끄러웠다. 나는 그날 아버지의 깊은 사랑을 뒤늦게 깨달으며 한참을 울었다. 2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나는 그때가 떠올라 가슴이 아파온다.’ 

우리는 때로 사랑을 받으면서도 그 사랑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곤 합니다. 특히 오랫동안 지속된 참된 사랑 앞에서 그럴 때가 더 많습니다. 누군가가 베풀어준 한 두 번의 사랑에는 감사하면서도, 정작 묵은지와 같은 속 깊은 지속적인 사랑에는 감사하기보다 당연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부모님의 사랑이 그렇습니다. 부모님이 나를 사랑해 주시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감사를 잊고 살 때가 참 많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더욱 그렇습니다. 사랑을 잘 표현하지 않는 무뚝뚝한 아버지의 사랑은 나중에야 깨닫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느 초등학생이 이런 글을 썼다고 합니다. ‘엄마가 있어 좋다, 나를 예뻐해 주니까. 냉장고가 있어 좋다. 나에게 먹을 것을 주니까. 강아지가 있어 좋다. 나랑 놀아 주니까. 그런데 아빠는 왜 있는지 모르겠다.’ 

여기 아버지의 사랑을 잘 표현해 준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 재산 중에서 내게 물려주실 유산을 미리 주십시오.” 이것은 당시 문화로서는 이해할 수도 없고, 수용할 수도 없는 말입니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당시 중동지역에서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에는 유산을 물려받을 수 없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야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살아계시는데도 ‘자신에게 돌아올 미리 유산을 달라’고 말한다는 것은 불효막심하기 그지없는 모습입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두 말하지 않고 둘째 아들에게 유산을 물려줍니다. 둘째 아들은 물려받은 유산을 가지고 가능하면 아버지에게서 멀리 떠나갑니다. 먼 타국에 가서 물려받은 유산을 다 탕진하고 맙니다. 
  
가난뱅이가 된 아들은 남의 집에 들어가 돼지를 치는 품꾼이 되어 입에 풀칠을 해야 할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더구나 돼지들이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했지만, 그것마저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돼지를 치는 자가 되었다는 것은 이방인과 다를 바가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돼지를 치지 않습니다. 율법에 돼지는 부정한 짐승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돼지를 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임을 포기하고, 먹고 살기 위해서 이방인처럼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돼지들이 먹는 쥐엄 열매조차 먹지 못했다는 것은 돼지만도 못한 인간이 되고 말았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내려갈 수 있는 최고의 밑바닥까지 내려가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고생하다가 굶어죽을 지경이 이르게 되자, 아버지가 생각났습니다. 아버지 품 안에 있을 때에는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습니다. 그 아버지의 품이 얼마나 따뜻한 품이었는지 감사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먼 타국에 와서 이방인처럼 살아야 하고, 돼지보다 못한 존재가 되어 굶어죽을 지경에 이르게 되자 아버지 품에 있을 때가 그리워진 것입니다.
  
그리고는 아버지께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이렇게 굶어죽느니, 차라리 아버지 집에서 품꾼으로 사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집에 아들이 그 집의 품꾼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의 아들로서 수많은 품꾼들로부터 ‘도련님’이라고 불리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그 집에 품꾼이 된다는 것은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렇게라도 하고 싶었습니다. 그게 굶어죽는 것보다는 낫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체면이고 뭐고 다 필요 없습니다. 먹을 것만 있으면 됩니다.

그렇게 마음먹고 어렵게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몰골은 말이 아닙니다. 바짝 마르고 검게 탄 얼굴엔 헝클어진 수염으로 뒤범벅이 되어버렸습니다. 마지막 남은 옷 하나마저 빨아본 적이 아득합니다. 다 헤어졌을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 찢겨져 부끄러운 속살이 다 드러납니다. 발에 신을 신이 없어 흙 묻은 발은 굳은 살이 가득하고, 상처들에서는 피가 흐르기도 합니다. 옛날 부잣집 아들이었던 모습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런 몰골로 힘없이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돌아가는 그 아들의 마음속에는 걱정이 가득합니다. 아버지가 과연 자신을 받아주실 것인가 하는 것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염치가 없어 아버지의 아들로 받아달라고는 못하겠고, 품꾼의 하나로 받아 달라고 하자.’ 수없이 그렇게 되뇌이면서 아버지 집을 향해 힘든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아버지 집에 가까이 왔습니다. 아버지 집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마음은 더욱 조마조마해집니다. 아버지가 자신을 받아주실까 하는 걱정 때문입니다. 

부끄럽고 창피해서 얼굴을 푹 숙이고 아버지 집을 향해 가고 있는데, 저 멀리서 아버지가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오십니다. 여기에서도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어른이 `‘달려간다’라는 표현을 거의 쓰지 않습니다. 

유대인의 성인 남자가 발목이나 발바닥을 드러내 보이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발바닥을 드러내 보이는 행동은 주변 사람들을 모욕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고, 또한 자신의 수치를 드러내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아버지가 아들을 향해 달려갔다는 것은, 아들을 위해 자기의 체면을 다 포기하고 남들이 손가락질 하는 것도 감수하겠다는 아버지의 마음이 표현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서 자신이 부끄러움을 당해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아버지의 마음이고,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수치를 당하고 모욕을 당한다 할지라도 개의치 않습니다.
  
마태복음 15장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실 때에 가나안 여자 하나가 예수님을 보자 소리를 질러댑니다. 자신의 딸이 귀신들려 고통당하고 있으니 고쳐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무 소리도 듣지 않으신 것처럼 묵묵히 당신의 길을 가십니다. 

그러자 가나안 여인은 더 큰 소리로 예수님을 부르며 졸라댑니다. 참다 못한 제자들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시끄럽게 소리 지르며 따라오는 저 여자를 쫓아버리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저 여자에게는 관심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절하면서 더욱 간절하게 ‘도와달라’고 간청을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발 아래 엎드려 있는 여자를 보고서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주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이 말씀은 그 가나안 여인을 개 정도로 밖에 생각 안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그 여인은 끝까지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제를 개라고 하셔도 좋습니다. 개들이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얻어먹는 것처럼, 개로 취급하시는 저에게 그런 은혜를 주실 순 없습니까?’ 그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칭찬하십니다. ‘큰 믿음을 가졌다’고 말입니다. 그리고는 그녀의 간청대로 그녀의 딸을 고쳐주십니다. 
  
이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께 무시를 당했습니다. 개 취급을 당하는 수치를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그 여인은 기분 나쁘다고 예수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 계속해서 간청합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고통당하고 있는 사랑하는 딸을 고쳐주고 싶은 사랑의 마음 때문입니다. ‘내 딸이 고침 받을 수만 있다면 자신이 무시를 당해도, 수치를 당해도 괜찮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여러분, 그게 어머니의 마음이고, 그게 부모의 마음 아니겠습니까?

가나안 여인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부모님, 우리의 아버지도 그러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좋은 옷을 입히시면서도 당신은 남루한 옷을 바꾸지 않으셨습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남들에게 수치 당하는 것쯤은 별거 아닌 것처럼 사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기꺼이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말입니다. 십자가는 수치였습니다. 가장 큰 죄를 지은 사람에게 내린 형벌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향해 올라가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을 손가락질하며 저주했습니다. 그래도 우리 주님은 십자가의 고통뿐만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당하는 그 모든 수치와 저주를 다 담당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우리를 위해서 그런 모진 고통과 수치와 멸시를 당하셨습니다. 

아들에게 달려간 아버지는 아들을 품에 안고 입을 맞춥니다. 누더기와 같은 옷을 입고, 며칠 몇달 동안 씻지 않아 아들의 몸에서 냄새가 날지라도 아버지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꼭 껴안아 주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께 부끄럽게 말을 꺼냅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수없이 되뇌이던 말입니다 ‘저는 염치가 없어 아버지의 아들로 받아달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저를 품꾼의 하나로...’ 

그렇게 말을 이어가려 하는데 아버지가 아들의 입을 막아버립니다.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게 하고서, 하인들을 불러 집안에 있는 옷들 중에 가장 좋은 옷을 가져오게 합니다. 손에는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는 신을 신기라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게 합니다.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는 것은 아들로서의 모든 지위와 명예를 회복시켜 주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아들에게는 분명 그럴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는 불효막심한 놈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살아계심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돌아올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해서 아버지를 멀리 떠나갔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물러받은 재산을 다 방탕하며 허비해버렸습니다. 그리고는 거지의 모습으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자기가 마음속에 수없이 되뇌였던 것처럼, 그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 자격은 이미 다 사라져버렸습니다. 그저 아버지가 불쌍히 여겨 굶어죽지 않게 품꾼으로 써 주신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할 일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 아들을 품에 안아주었습니다. 모든 과거를 다 용서하고, 아니 과거가 전혀 없는 사람처럼 그를 다시 아들로 맞아주었습니다. 종들에게 옷을 가져오게 하고, 가락지를 가져오게 하고, 신발을 가져오게 한 것은 종들로 하여금 돌아온 그 아들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려는 아버지의 배려입니다. 그 종들이 주인으로 모셔야 할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쳐주기 위한 아버지의 섬세한 배려입니다.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치룬 백년전쟁이 시작된 초기인 1346년에 ‘크레시 전투’(Battle of Crecy)라고 불리는 전투가 있었습니다. 당시 영국의 국왕인 에드워드 3세에게는 9천 명의 병력이 있었고, 이에 맞서 싸운 프랑스의 왕 필립 6세에게는 그에 몇 배 많은 병력이 있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영국 국왕 에드워드 3세는 18살밖에 되지 않았던 왕자 에드워드 흑공(Black Prince)에게 선봉 부대의 지휘를 맡겼습니다. 아버지인 국왕은 친위대를 높은 지대에 배치시키고, 즉각 왕자가 이끄는 부대를 지원할 수 있도록 필요한 준비를 갖추고 전투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18살의 어린 왕자는 프랑스의 거센 공격을 받고 위험에 처하게 되자, 아버지에게 구조를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인 국왕은 지원군을 보내주지 않았습니다. 지원군이 오지 않자 왕자는 또 다른 전령을 보내어 즉각 구조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국왕은 왕자가 보낸 전령에게 이렇게 말해줍니다.
  
“가서 왕자에게 나는 언제 구조가 필요한지 모르는 그런 미숙한 지휘관도 아니고 또 구조대를 보내지 않을 만큼 무관심한 아버지도 아니라고 왕자에게 전하거라.”
  
국왕이 왕자의 강력한 구조 요청에도 지원군을 보내지 않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프랑스 군대 안에 혼란이 생겼음을 간파하고, 왕자가 조금만 더 견디면 유리하게 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국왕은 그 전투의 승리로 얻어지는 영예가 아들인 왕자의 것이 되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이 어린 왕자에게 명성이 돌아갈 수 있을 만큼 전세가 흘러갈 때에 지원부대를 투입시키려고 계획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 전투에서 영국은 프랑스 군을 대파하고 승리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인 국왕은 즉각 지원부대를 보내도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왕자가 자신을 따르는 병사들에게 존경과 신임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지원부대의 투입을 늦추고 아들인 왕자에게 명예와 존귀가 돌아가도록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 하나님도 그렇거니와, 우리의 아버지들도 그러십니다. 자신이 칭찬받는 것보다 자식이 칭찬받는 것을 더 큰 기쁨으로 삼으십니다. 자신이 잘 사는 것도 바라시겠지만, 그것보다 더욱 간절한 소원은 자식들이 더 잘 사는 것입니다. 본인도 건강해야 하지만, 자식들이 더 건강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다. 그래서 병이 들어 고통하는 자식을 보면, 줄 수만 있다면 자신의 생명을 떼어서라도 자식에게 주고 싶어 하십니다. 그게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돌아온 둘째 아들을 위해서 잔치를 베풀고 있는데, 들에 나갔던 첫째가 집으로 돌아오다가 집에서 흘러나오는 잔치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리고 그 잔치가 아버지의 유산을 다 탕진하고 돌아온 둘째를 위해서 마련된 자리라는 것을 알고는 집에 들어가기를 거부합니다. 아버지에 대해서 불만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아버지께 순종적이었습니다. 아버지께 불효를 저지르지도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방탕하게 다 탕진해버린 둘째와 달리, 자신은 아버지를 위해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자신을 위해서 잔치 한번 베풀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아버지의 재산을 다 탕진해버린 둘째를 위해서는 그렇게 성대하게 잔치를 열어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래서 아버지에게 따져 묻습니다. ‘어찌 그럴 수가 있느냐’고 말입니다. 둘째를 혼내주어야 하고,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서 응분의 책임을 지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입니다. 

첫째의 말이 백번 맞습니다. 둘째를 아들로 맞아들이려면 최소한 ‘그 많은 돈을 어떻게 썼는지’라도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한 행동에 대해서 응분의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 어떤 책임도 묻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다 탕진하고 돌아온 둘째를 조건 없이 맞아들이신 아버지의 모습은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그 어떤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과거를 캐묻지 않으시고, 우리의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여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과거에서 책망할 거리를 찾아 기록하신다면 책 한두 권을 가지고도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부끄러운 과거를 들춰내지 않으시고, 캐묻지도 않으시고 우리를 받아주십니다. 
  
하나님의 그 마음과 그 사랑이 우리의 아버지들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아버지는 자식의 부끄러운 과거를 들춰내려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지난날 잘못한 것에 대해서 책임을 물으려 하지도 않으십니다. 그저 다 덮어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자식이라는 그 한 가지 이유만으로 우리의 모든 허물과 부끄러운 과거를 다 덮어 주십니다. 

그 아버지의 마음을 미리 깨달으면 좋으련만, 미련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잘 깨닫지 못할뿐더러, 아버지의 그 마음도 잘 헤아리지 못합니다. 아버지가 되어서야 조금이나마 아버지의 마음을, ‘그 때 왜 그렇게 하셨는지’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리게 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아버지와 아들이 목욕탕에 갔습니다. 아버지가 뜨거운 물에 들어가서는 아들에게 “들어와라, 아주 좋다”고 말했습니다. 아들 녁석은 그곳에 뜨거운 곳인지를 아는지라, “뜨거워서 못 들어가요. 안 들어갈래요.” 그렇게 말합니다. “이놈아! 사내 녀석이 뜨거운 물에도 들어오고 참기도 해야 사람이 되지!” 아버지가 아무리 아들을 들어오라고 해도 아들 녁석은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중얼거립니다. ‘나는 이 다음에 커서 내 아들에게는 절대로 뜨거운 물에 들어오라고 하지 않을거야!’
  
한참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되고 그 아들은 결혼을 해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제 3대가 함께 목욕탕에 갔습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뜨거운 물에 들어가서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합니다. “여기 뜨거운 물에 들어와 보거라. 아주 좋다.” 그러자 아들이 대답합니다. “뜨거워서 못 들어가요. 안 들어갈래요.” “야, 이놈아! 사내 녀석이 뜨거운 물에도 들어오고 참는 법도 배워야 되지!” “싫어요. 안 들어갈래요. 그리고 저는 이 다음에 제 아들에게는 절대로 뜨거운 물에 들어오라고 안 할 거예요.” 뜨거운 물에 들어가 앉아 있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그 말을 듣고는 서로 마주 보고 웃었습니다. 그러자 아들 녀석이 물었습니다. “왜들 웃으세요?” 아버지가 대답합니다. “네도 아버지가 되면 안다.”
  
여러분, 아버지가 되어야만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조금 더 일찍 깨달으면 안 될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만 더 일찍 깨달았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신앙을 가지고 더욱 풍성한 은혜를 누리며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신 부모님을 사랑을 조금만 더 일찍 헤아릴 줄 알았다면, 우리는 우리 마음에 효도를 다하지 못한 아쉬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우리가 지금을 깨닫지 못한 수많은 사랑들이 아직도 우리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그렇고, 부모님의 사랑도 그렇습니다. 어쩌면 평생 다 깨닫지 못하고 끝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논리적으로 맞지 않고, 수리적으로 계산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과 아버지의 그 마음을 조금씩이나마 깨달아가며 사십시다. 그리고 우리가 받은 그 사랑에 감사할 수 있는 마음과, 우리의 가슴에 새겨진 그 사랑을 누군가에게 조금이나 나눌 수 있는 삶을 사십시다. 사랑은 받음에서 확인되는 것이 아니라, 나눔에서 비로소 내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