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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하시는 일 (요 9: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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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하시는 일 (요 9:1-12)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1-2)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3-5)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6-7)  

이웃 사람들과 전에 그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이르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자기 말은 내가 그라 하니, 그들이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그들이 이르되 그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 (요 9:1-12)

날 때부터 맹인 된 자

9장은 한 맹인이 눈을 뜨게 된 이야기입니다.  배경은 여전히 성전 부근입니다.  사람이 많이 왕래하는 곳에 맹인이 앉아 구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이 사람을 향하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1)  
  
이 사람은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입니다.  날 때부터 맹인이라고 밝힌 것을 보면 이 사람의 내력을 주변 사람들이 다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은 태어나서 한 번도 세상을 본적이 없었습니다.  맹인들 중에 상당수는 중도 실명자들입니다.  중도 실명자들은 실명하기 전에 세상을 본 적이 있기 때문에 어떻게 생겼는지 기본적인 영상이 있습니다.  

그러나 태생적인 맹인은 기본 영상이 없습니다.  꽃이 어떻게 생겼는지, 색깔이 어떤지, 사람 얼굴은 어떻게 생겼는지, 개와 고양이가 어떻게 생겼는지, 태양 빛이 어떤지, 하늘은 어떻고 구름은 어떤지 모릅니다.  볼 수 없는 것은 큰 불행입니다.  더군다나 그는 구걸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복음서에는 맹인 이야기가 종종 나옵니다.  맹인은 영적으로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본문의 결론부인 41절에 주님은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9:41)  

육의 눈으로 세상은 보면서도 영적 세계를 못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영적 맹인입니다.  성경은 육적 맹인보다 영적 맹인에 주목합니다.  영적 맹인은 영의 세계를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 구주 예수님, 성령의 역사, 천국, 지옥, 죄, 심판, 영생과 같은 영적 세계의 대상들을 볼 수 없습니다.  선과 악을 구별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소리와 마귀의 소리를 구별하지 못합니다.  
  
인생을 좌우하는 것은 물질세계가 아니라 영적 세계입니다.  하루하루 일어나는 모든 삶의 변화들이 다 영적 활동의 결과물입니다.  직장도, 사업도, 건강도, 인간관계도, 지식도, 사상도 모두가 영적 활동의 결과물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영적 세계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고, 본 바도 없습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영적 세계를 보지 못하는 맹인들입니다.  

성경은 바로 이점을 지적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맹인을 바라보면서, 2천 년 전의 어떤 맹인 이야기로 듣지 마세요.  바로 오늘 영적 세계를 못 보는 내 자신을 향한 말씀인 줄 알고 치유 받으시기 바랍니다.  


누구의 죄 때문인가? 

길에서 구걸하는 맹인을 바라보면서 제자들은 오늘날 우리가 보기에는 아주 엉뚱한 질문을 합니다.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2)  이 사람이 맹인 된 것이 누구 죄 때문일까?  제자들은 이 사람이 맹인이 된 이유를 어떤 죄에 대한 형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누구의 죄 때문에 벌을 받았을까?  본인의 죄 때문인가, 아니면 부모의 죄 때문인가?  

당시에 어떤 랍비들은 어린 아기가 모태에서도 죄를 지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25:22에 보면 이삭의 아내 리브가의 태속에서 쌍둥이 형제 야곱과 에서가 서로 싸웠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랍비들은 부모의 범죄가 자녀에게 나병이나 간질병을 가져온다 했고, 賢者가 요절하는 것은 모친의 죄 탓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제자들은 이런 맥락에서 질문을 한 겁니다.  
  
우선 정죄적인 접근법에 주목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누가 불행을 당하면 먼저 정죄합니다.  뭘 잘못했기에 이런 일을 당했나?  어떤 죄의 대가로 벌을 받는다고 단정합니다.  이것은 제자들뿐만 아니라 일반 사람들의 보편적인 본성입니다. 

욥이 큰 재앙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욥의 세 친구,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이 위로 차 찾아 왔습니다.  그들은 욥의 불행을 보면서 단정했습니다.  욥이 필시 남모르는 죄를 저질러서 하나님께 크게 벌을 받았구나!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하루아침에 10남매가 죽고, 가축 떼가 몰살당하고, 온 몸에 악창이 나서 앓아눕는단 말인가?  세 친구는 욥을 추궁하고 책망했습니다.  어서 자백하고 회개하라!  

그러나 욥은 친구들에게 반발합니다.  나는 누구 못지않게 정직하고 의롭게 살기 위해 애를 쓴 사람이다.  그런데도 이런 불행이 다가왔다.  욥과 세 친구는 죄 때문이다 아니다 하면서 긴 논쟁을 벌입니다.  
  
정죄적인 태도 이면에는 사랑이 없는 차가운 인간상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차가움, 몰인정함!  남이 당하는 불행에 대하여 무감각합니다.  명색이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런데도 이들이 맹인을 바라보는 시선은 무덤덤합니다.  ‘불쌍하다’ 혹은 ‘도와주자’는 생각보다는 그저 ‘누구 탓으로 맹인이 되었는가?’만 묻고 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있다면 우선 구해야 합니다.  책임 추궁은 그 다음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그것이 긍휼이며 자비입니다.  하나님께서 햇빛과 비를 선인과 악인에서 골고루 내리시지 않습니까?(마5:45)  
  
남의 탓 하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무슨 재난만 일어나면 남을 탓합니다.  이게 다 누구 잘못이냐?  그러나 누구를 정죄하는 것은 문제 해결에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오늘 내 곁에 힘든 일을 당한 사람이 있습니까?  정죄하지 마세요.  먼저 불쌍히 여기세요.  그리고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됩니다.  


이 사람에게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려 함이라

그러면 이 사람은 왜 맹인이 되었을까?  하늘 아래 우연은 없습니다.  머리터럭 하나까지 간섭하고 헤아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이 왜 어떤 사람을 앞을 못 보도록 하셨을까요?  일부러 앞을 보지 못하게 하신 것은 아닐지라도 최소한 막지는 않으셨습니다.  왜 내 인생은 이럴까?  이런 질문에 대해서 주님은 대답하십니다. 
  
이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려고 하신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3)  무의미한 인생은 없습니다.  맹인이 된 것 조차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기 위함입니다.  인생은 하나님의 역사를 보여주는 계시물입니다.  
  
주님은 먼저 이 사람이 맹인 된 이유가 본인의 죄도 부모의 죄도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본인이나 부모가 무죄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죄 없는 죽음이 없고, 허물 없는 고초도 없다.”(R. Ammi)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 세상의 모든 불행은 전적으로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부모의 죄나 본인의 죄가 아니라고 하신 것은, 맹인이라는 큰 불행이 꼭 특정한 죄에 대한 형벌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인생에 무슨 일이 생기면, 특히 나쁜 일이 생기면, 사람들은 죄와 벌의 논리로 접근합니다.  욥의 친구들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불행은 형벌적인 의미만 있는 게 아닙니다.  그 이상의 숨은 뜻이 있습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불행을 통해서 자신의 일을 나타내십니다.  
  
오늘 여러분은 내 인생이 왜 존재하는지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성공하기 위해서입니까?  뭔가 업적을 남기는 겁니까?  아니면 이름 석 자를 남기는 겁니까?  각 사람마다 하나님이 주신  삶의 목적이 있습니다.  오늘 주님은 내게 말씀하십니다.  “너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시려고 내 인생을 주셨습니다.  

심지어 내가 어떤 불행을 타고 났다 할지라도, 그 불행까지도 뭔가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고, 하나님을 보여주는 계기가 됩니다.  주님은 앞 못 보는 맹인 거지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고자 하셨습니다.  
  
내가 현재 가진 모든 조건은 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한 것들입니다.  심지어 내가 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불행한 조건들까지도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수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환경이나 조건에 낙심치 말아야합니다.  가난하다고 낙심 말고, 불구라고 낙심 마세요.  사업에 실패했다고 낙심 말고, 시험에 떨어졌다고 낙심 마세요.  부모 갖지 못했다고 원망 말고, 사람 잘 못 만났다고 불평 마세요.  아무려면 맹인으로 태어나서 구걸하며 사는 사람만큼 불행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불행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십니다.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십니다.  그러므로 불행의 원인을 캐기 전에 인생의 목적을 생각하세요.  하나님께서 왜 나의 삶을 주셨을까?  오늘 내가 당하는 불행은 무슨 일을 이루려는 계획이 있을까?
  
그러면 이 사람을 통해서 이루려는 하나님의 일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첫째로는 이 사람을 구원하여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일입니다.  둘째로는 이로써 빛이신 주님을 세상에 드러내는 일입니다.  내 인생에 일어난 최대의 사건은 내가 구원 받아 하나님 자녀가 된 일입니다.  다음은 이 사건을 통해서 주님을 나타내고, 하나님을 나타내게 된 일입니다.  

본문의 맹인은 눈을 떴습니다.  보이지 않던 세상을 보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격입니까?  그러나 육신의 눈을 뜬것은 구원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이 맹인은 눈을 떴지만 아직도 영의 눈은 어두웠습니다.  자기 눈을 뜨게 해 주신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맹인이 눈을 뜨게 된 장면을 간략히 소개합니다.  그리고 점차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이 사람으로 하여금 완전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비로소 이제까지 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일을 시작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앞서서 주님은 하나님의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6:29)이라고 말씀하신바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인간의 제일가는 본분입니다.  그리고 그것이야 말고 인간에게 최고의 특권이요 회고의 축복입니다.  
  
맹인이 눈을 뜨고 하나님을 경배케 된 일!  하나님을 드러내는 인생이 된 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나타내시는 최대의 일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던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자녀가 돼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이적입니다.  이런 일을 통해서 하나님은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십니다.  오늘 이러한 이적이 여러분과 가족과 이웃에 나타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낮 동안에 하나님의 일을 하라

하나님의 일은 때가 있습니다.  아무 때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4)  낮에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낮이란 언젭니까?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5)  하늘에 태양이 떠 있는 동안을 낮이라고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계신 동안은 영적으로 낮입니다.  예수님이 떠나시면 그때는 밤입니다.
  
빛의 역할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우리가 사물을 보지 못하는 것은 두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의 눈이 나쁘기 때문이고, 둘째는, 우리의 눈이 제아무리 좋아도 주위에 빛이 없다면 볼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의 빛이라고 할 때에는 이 두 가지 뜻이 다 있습니다.  

먼저 주님은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춰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눈이 밝아서 영적 세계를 보고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게 하십니다.  또한, 주님은 어둠의 세상을 비춰주셔서 밝히 드러나게 하십니다.  하나님, 마귀, 귀신, 인간 영혼, 천국, 정의와 불의, 죄, 심판, 구원의 길 등등.  그러나 주님이 떠나시면 도덕적 혼란이 오고, 영적 암흑이 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계실 동안에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하십니다.  4절 말씀에는 두 가지 강조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we, must)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내가’ 홀로 하겠다고 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함께 해야 될’ 일!  영혼을 구원하는 일은 우리 공동의 사명입니다.  성직자만의 사명이 아닙니다.  성도들 모두의 사명입니다.  

둘째로, 영혼 구원은 시한부 사업이라는 사실입니다.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4) 예수님은 스스로 빛이시므로 언제나 하나님의 일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우리는 예수가 계신 동안만 일할 수 있습니다.  특히 당시의 제자들은 6개월이 지나면 주님을 떠나보내야 될 입장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빛이 있는 동안은 정말로 잠시 뿐이었으며 사람을 구원하는 일은 매우 긴급한 일이었습니다.  역사의 종말은 가깝습니다.  역사가 얼마나 지속될는지, 언제 불현듯 마감될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 때가 오기 전에 사람들을 구원해야합니다.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그러면 이제 주님이 맹인을 어떻게 고치셨는지 살펴봅시다.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6-7)
  
주님은 먼저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셨습니다.  왜 진흙인지, 왜 침을 뱉었는지,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셨는지 일일이 의미를 부여하기는 곤란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침을 눈병에 사용하거나, 진흙을 약으로 사용한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본래 흙이란 창조 때에 사람을 만든 재료입니다.  사람은 흙에서 왔고 흙으로 돌아갑니다.  흙은 인간 육체의 고향입니다.  아마 흙은 인간에게 최고의 치료약인지도 모릅니다.  
  
먼저 생각해야 될 것은 주님의 다양한 치료 방법입니다.  어떤 때에 주님은 말씀으로만 병을 고치셨습니다.  어떤 때는 손으로 만져서 고치셨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흙이나 침 같은 재료를 사용하셨습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믿음으로 고치려면 무조건 약도 먹지 말고 의사에게 가지도 말고 이적으로 나아야만 된다고 주장합니다.  약은 하나님이 내신 것이 아닌가요?  

의사의 손길은 하나님 수단이 아닌가요?  저는 인류에게 약을 주시고 의술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인간의 모든 치료 행위도 결국은 하나님 소관입니다.  다만 인간이 불치라고 판정한 병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지식의 범주에서 불가능하다는 말이지 하나님의 세계에서 불가능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무튼지 하나님의 다양한 치료 방법에 우리는 감사를 드립니다.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는 말씀에 대해서 어떤 의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실로암이란 히브리 말로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왜 이런 이름이 붙었는가?  역사적인 유래가 있습니다.  기원전 740년경 유다왕 히스기야는 앗수르 왕 산헤립의 침략을 받아, 예루살렘 성 밖에 있는 기혼샘에서부터 성 안까지 물을 끌어들이기 위한 터널을 팠습니다.  기혼 샘(처녀의 샘이란 뜻)은 지금도 수천 년 전과 다름없이 물이 철철 흘러나옵니다.  

저도 이 기혼샘 입구에 들어가 보았는데 터널처럼 된 계단을 내려가면 물소리가 들립니다.  이 물은 히스기야의 터널을 통하여 533미터나 떨어진 실로암 못까지 흘러갑니다.  그러므로 기혼샘에서 솟아난 물이 실로암까지 보내진다는 뜻에서 ‘실로암’이란 이름이 붙었던 것입니다.  
  
‘보냄을 받았다’는 의미는 사도 요한에게는 보다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요한은 언제나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이 보내신 분으로 소개합니다.  그러므로 실로암 못이 상징하는 것은 ‘하나님이 보내신 분’ 곧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실로암 되신 예수님께 가서 씻으라!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러면 하나님 자녀가 되고 영의 눈을 뜨게 됩니다.  어떤 분들은 실로암 물에 씻는 장면을 세례에 비유하기도합니다.  이 소경은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를 씻음으로써 영과 육의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들에게 실로암이 되십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를 씻어내시기를 축원합니다.  영적인 눈이 떠지기를 축원합니다.  인생의 모든 길이 밝히 드러나기를 축원합니다.  이 세상은 조만간 마감됩니다.  주님이 떠나실 때가 있습니다.  그 때가 오기 전에 그리스도를 만나세요.  그래서 천국 백성으로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어떻게 눈을 떴느냐?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것은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여러 가지 반응들이 나타났습니다.  이웃 사람들은 구걸하던 맹인이 눈을 떴다고 놀랍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거지를 닮았지만 그 사람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이 맹인은 단호하게 대답합니다.  “내가 그로라”  마치 예수께서 ‘내가 그니라’ 고 말씀하신 장면과 흡사합니다.  이 맹인은 분명히 눈을 떴습니다.  
  
맹인이 내가 그 사람이라고 하니까 이제는 다음 질문을 던집니다.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10)  질문이 재미있습니다.  누가 눈을 뜨게 만들었느냐고 묻지 않고 어떻게 떠졌느냐고 묻습니다.  눈을 뜨게 만든 주체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어떤 요행으로 눈이 떠졌다고 생각했습니다.  

맹인 역시 마찬가집니다.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11)  이 사람은 아직 예수를 ‘그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뿐만 아니라 진흙을 바르고 물에 씻은 것이 눈을 뜨게 된 원인인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아직도 예수에 관해서 깨달아 가는 과정에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또 묻습니다. “그가 어디 있느냐?”  맹인은 모른다고 대답합니다.  아주 멍청한 대화입니다.  묻는 사람이나, 대답하는 사람이나!
  
우리가 가장 먼저 물어야 될 질문은 “어떻게 눈을 떴느냐?”가 아닙니다.  누가 눈을 뜨게 했는가?  그리고 그는 누구인가?  이 중대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맹인도 군중들도 예수에 대한 관심보다 눈뜬 맹인에게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눈을 뜨게 하신 목적을 찾지 못하고 눈을 뜬 수단만을 찾았습니다.  요한의 목적은 눈을 뜨게 하신 예수님을 알게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세요.  예수님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십니다.  예수를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세요.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인간의 본분으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까닭은 그가 영의 눈을 떠서 하나님을 섬기는 본분에 이르게 하심에 있습니다.  예수님 만나 눈을 뜨고,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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