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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시 98:1-3, 눅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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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시 98:1-3, 눅 19:8-9)

‘가문의 영광’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같은 제목의 드라마도 있고, 이 제목을 가진 유머도 여럿이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 대화 가운데도 ‘가문의 영광’이란 말은 종종 사용합니다. 아마 가문의 영광은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공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봅니다. 누구나 원하는 것이 영광스런 가문을 만드는 것입니다. 
  
미국의 정치명문이라고 일컫는 케네디가(家)는 대통령 한 명, 상원의원 세 명, 하원의원 네 명, 장관 한 명을 배출했습니다. 최근에는 케네디 대통령 시절 법무장관을 지낸 로버트 케네디의 손자가 연방하원에 도전하므로 명문가의 재기가 가능성이 다시 언론의 관심이 되고 있습니다. 개인도 중요하지만 개인을 넘어서 가문, 집안이 잘 되는 것을 가정에서는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정치 명가가 있습니다. 민주통합당의 정대철 고문의 가정입니다. 일전에 어느 신문에 정고문 부인의 인터뷰기사가 실렸습니다. 그 분은 시댁과 친정을 합하면 도합 19선이라고 합니다. 시아버지인 정일형전의원이 8선, 남편 정대철고문이 5선, 아들 정호선당선자 초선입니다. 이 세 세대의 새로운 기록은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이 같은 서울 중구가 지역구라는 것입니다. 정고문 부인의 할머니 박현숙전의원은 2선이고, 형부인 조순승전의원은 3선입니다. 이렇게 하여 시댁과 친정이 모두 정치 명가라는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개인의 영광도 중요하지만 가문의 영광도 중요하며, 명예로운 일입니다. 개인이 구원받는 것이 우선적이고 중요하지만 우리 가정이 구원받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나님께는 나를 통하여 우리가 가정이 구원에 이르고 우리 가문이 구원이 영광이 있기를 기대하십니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 하르모디오스 가문이라는 오랜 동안 존경받는 집안이 있었습니다. 하르모디오스 가문의 후손이 정적이었던 이피크라테스에게 천한 구두쟁이 아들 주제에 까분다고 모욕을 하였습니다. 이피크라테스는 그 모욕에 대하여 “당신과 나의 차이는 출신 성분이 아니라 내 가문은 나로부터 시작되지만 당신의 가문은 당신에게서 끝난다는 것이다”라고 대응하였다고 합니다. 나로 말미암아 가정이 구원받고, 우리 가문이 영광스럽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온 집을 구원받을 말씀을 이미 준비하셨습니다. 고넬료는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청하여 가이사랴의 자기 집에서 말씀을 전하게 합니다. 방에 가득한 사람들이 배드로를 통하여 말씀을 들을 때에 성령님께서 강림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1:14에는 “그가 너와 네 온 집이 구원 받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이라고 합니다. 
  
바울과 실라가 말씀을 전하다가 빌립보의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들이 밤에 찬양하는 가운데 지진이 일어나 옥문이 열렸습니다. 간수는 바울과 실라가 탈옥한 줄로 알고 자살하려고 하였지만 바울은 탈옥하지 않았으니 자살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 간수는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사도행전 16:31에는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가정에 대한 뜻은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을 계승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은총의 대가로 생육하고 번성하고 대를 잇기를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교회의 탄생과 처음 교회들을 말씀합니다. 라오디게아교회는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라고 합니다(골 4:15). 고린도교회는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라고 합니다(고전 16:19). 하나님은 예나 지금이나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의 집을 교회로 삼으십니다. 그리고 교회인 그 가정을 축복하십니다. 
  
한 때는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의 논쟁이 격한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는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은 논쟁거리가 아니라고 봅니다. 하나님은 개인구원을 통한 사회구원을 기대하십니다. 개인구원을 통한 가정구원을 기대하십니다. 하나님은 개인만이 아니라 가정 전체가 구원받기를 기대하시고 계십니다. 
  
삭개오 이야기는 옛날부터 유년부 공과와 동화에 단골메뉴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여리고의 삭개오는 세리였고,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그가 예수님을 만나 회개함으로 그 한 사람을 통하여 가정이 구원받았습니다. 나의 구원이 우리 가정의 구원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나 한 사람을 통하여 우리 모든 가족이 구원에 이르는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는 가정에 구원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9:8 상반절에는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는 예수님을 “주여”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이 자기 집에 들어오실 때 이미 삭개오는 변화되었습니다. 삭개오의 집에 예수님이 들어오실 때 이미 삭개오의 마음에 예수님이 주인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주께 여짜오되”라고 합니다. “예수께 여짜오되”라고 하지 않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께 “주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라는 말의 “보시옵소서‘는 헬라어의 ‘이두’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자신의 단호한 의지와 실천의욕과 자신만만함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자신을 완전히 노출시키고 더 이상 감출 것이 없이 다 열어 보이는 자세를 말합니다. 이런 자세가 주님께 대한 바른 자세입니다. 주님께 자신의 추한 점을 감추면 아직도 온전한 변화가 아닙니다. 
  
우리가 흔히 자신의 남편, 아내를 칭할 때 ‘바깥주인’, ‘안주인’이라고 합니다. 정말 주인답게 다 열고 삽니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 덜 열고 삽니까? 혹시 “이 정도는 닫아놔야지?”라고 하지 않습니까? 만일 그런 것이 있다면 아직도 주인이 아닙니다. 주인이라면 숨김없이 다 열어놔야 합니다. 
  
바울이 “예수님은 주시다”라고 선언한 것은 당시의 정황으로 봐서는 정치적 선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주’라 부르는 것은 시저가 주가 아니라는 것을 선언한 것입니다. 로마황제의 10대 박해를 보세요. 네로황제부터 갈레리스황제까지 약 250년 동안 모진 박해를 받았습니다. 황제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주원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황제가 주가 아니라 예수님이 주라고 하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에 예수님을 주라고 부른다는 것은 영적으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육적으로는 참으로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볼 때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는 일은 목숨을 거는 일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9:3에는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라고 합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날 때까지는 예수님의 존재에 대한 확실성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은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어떠한 주님이신가 하여 보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순수한 인간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나 구세주나  자신의 주인이 전혀 아닌 상태에서 만난 것입니다. 
  
구약에서 주님이란 말인 ‘아도나이’라는 단어는 ‘윗사람’(superior)을 뜻하는 말로 구약성경에서 주인, 지배자, 군주, 지도자 등 모든 부류의 주인(lord)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주인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자신이 소유라는 사실을 인정한 것입니다. 자신이 주인의 종이며 낮은 자로 인정하는 말입니다. 
  
베드로가 처음 예수님을 만난 날, 많은 고기를 잡은 후에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가이샤라 빌립보 지경에서 예수님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는 신앙고백을 합니다. 마르다는 오라버니가 죽었을 때에 자신의 집에 오신 예수님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요11:27). 도마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 예수님을 만나 뵙고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요20:28).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여 영접하는 것은 위대한 사실입니다. 
  
루디아는 바울을 자신의 집으로 청하였습니다. 주의 종을 집으로 청하여 들인다는 것은 주님 때문입니다. 사람은 청함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고 주님의 종을 청한 가정은 구원받은 가정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로 인정하는 자와 그 가정마자 구원을 얻습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백성들 전체를 ‘집’이라 부르십니다.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를 이스라엘 집이라고 합니다. 또한 야곱의 후손들을 야곱의 집이라고 합니다. 예레미야 33:14에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대하여 일러 준 선한 말을 성취할 날이 이르리라”고 합니다. 이사야 63:7에는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고 합니다. 성경은 온통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스라엘의 집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구원은 개인적입니다. 구원은 개인의 것이지만 하나님은 집이 구원받기를 기대하십니다. 가문이 하나님의 집이 되기를 기대하십니다. 우리 집이 나를 통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가정의 성경적 원리가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가 주인인 가정입니다. 가정의 주인은 사람이 아닙니다. 둘째는 가족이 성경적 원리의 삶을 사는 가정입니다. 셋째는 성경적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가정입니다. 넷째는 가정을 교회로 만드는 가정입니다. 우리 연동의 가정들이 그리스도가 우리 가정의 주님, 주인이기를 바랍니다. 

  
둘째,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가정에 구원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9:8 하반절에는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갑겠나이다”고 합니다. 회개는 구원을 이끕니다.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버리는 것이 회개입니다. 
  
삭개오가 무엇 때문에 세리가 되었다고 보십니까? 돈이 좋아서입니다. 돈 때문입니다. 돈 때문에 그 많은 비난을 받았습니다. 세리 노릇하느라 유대인의 공공의 적이 되었습니다.  열심당원의 공격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돈을 아낌없이 내어놓겠다고 하는 회개를 했습니다. 회개는 육적으로 가장 귀한 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될 때 가능합니다.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아낌없이 버릴 수 있을 때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집니다. 
  
빌립보서 3:7-8 상반절에는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배설물은 버려도 괜찮은 것입니다. 아니, 버리고 돌아보지도 않는 것입니다. 정말 돈이 버려도 괜찮은 것입니까? 돈은 누구에게나 귀한 것이고 좋은 것인데 어떻게 버려도 괜찮겠습니까? 어느 영화에 보니 돈 때문에 악당과 좋은 사람이 편이 나뉘어 쫓고 쫓깁니다. 그러다가 좋은 사람들이 돈 가방을 빼앗아 옥상에서 돈을 아래로 뿌립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위에서 흩날리는 돈을 줍느라 난리가 납디다. 돈은 누구나 그렇게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돈을 그렇게 사랑하던 삭개오가 돈을 버린다는데 어찌 놀라운 변화가 아니겠습니까? 
  
“내 소유의 절반”이란 당시에 랍비들이 제시한 구제비의 내용이 소유 혹은 수입의 20% 인데 절반이란 파격적 액수를 제시한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 한 젊은 관원이 찾아와서 영생에 관한 질문을 했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고 하셨고, 젊은 관원은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눅 18:22). 그와 비교해볼 때 완전히 대조적인 자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속여 빼앗은 것은 네 갑절을 갚겠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당시에 세리가 속여 빼앗는 것은 합법입니다. 그렇게 해서 로마에 세금을 내고 나머지는 자기가 갖는 것이 세리들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세리가 비판을 받고 백성들이 싫어하였습니다. 유대인으로서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 로마를 유익하게 하고 유대인들을 괴롭힌다고 하여 공적이 된 것입니다. 
  
아무리 합법이지만 정당한 것이 아닙니다. 합법이라고 다 정당한 것은 아닙니다. 얼마 전 우리 아파트 앞에서 사흘 동안 아침부터 밤까지 시위를 하였습니다. 어느 단체에서 아파트 앞에 확성기를 설치하고 노래를 부르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알고 보니 어느 회사와 LH공사에 대하여 체불임금을 지급하라는 것입니다. 왜 아파트 앞에서 이런 시위를 하는가 알고 보니 그 회사의 사장이 우리 아파트에 산다고 합니다. 임금을 체불한 것은 회사의 사장으로서 그 사람이지 우리 아파트 주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 시위는 회사 앞에 가서 해야지 아파트 앞에서 수천 명의 주민을 며칠씩 괴롭히면 안 되지요. 그들은 법에 의하여 허락을 받고 하니 합법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정당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런 경우는 법도 좀 더 세밀하게 바꾸어 주민도 보호하는 세심함도 있어야 할 것이라고 봅니다. 
  
네 배를 갚겠다고 한 것은 구약의 율법에 정한 대로 갚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합법이지만 정당하지 못했던 자신의 과거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7:10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라고 합니다. 회개는 누구에게나 필요하고, 누구나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삭개오의 회개는 자신과 자신의 가정의 구원의 지름길이었습니다. 
  
삭개오가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속여 빼앗은 돈의 네 배를 갚겠다고 했을 때에 예수님은 “좋은 생각이구나”하지 않고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돈주머니의 회개는 온전한 회개이기 때문입니다. 
  
루터는 “마음과 정신 그리고 돈주머니가 회개해야 진정한 회개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돈주머니의 회개 없는 회개는 믿을 수 없습니다. 세례요한이 세례를 베풀 때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나오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태복음 3:8에는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라고 하였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무엇입니까? 돈의 회개입니다. 돈을 빼앗은 사람은 돈을 돌려주는 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입니다. 인간관계의 다툼이 있는 사람은 가서 용서를 빌고 화해하는 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입니다. 정욕으로 음욕의 죄를 짓는 사람은 결단하고 음란을 끊고 돌아서는 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가 애통한 죄를 결코 범하지 않는 사람이 자기가 범한 죄를 참으로 애통한다”고 하였습니다. 회개란 다시 똑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회개라는 말의 히브리어 ‘테슈바’와 헬라어 ‘메타노이아’는 가던 길에서 완전히 유턴하여 바르게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할머니가 서울에 있는 딸의 집에 왔다가 제주도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탔습니다. 일반석에서 앉아 있다가 화장실에 다녀오면서 보니 비즈니스석이 비어 있어 거기 앉았습니다. 승무원은 “안돼요. 할머니 여기는 할머니 앉는 데가 아니에요”하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는 “자리가 텅텅 비었는데 왜 안 돼”하면서 계속해서 버티고 있었습니다. 

이때 뒷자리에 있던 어느 신사가 귓속말로 뭐라고 하니 얼른 자기 자리로 가더랍니다. 뭐라고 했을까요? “할머니 여기는 부산 가는 사람이 타는 자리예요”. 이 말을 듣고 얼른 간 것입니다. 하늘나라 가는 열차를 타고 다른 데로 가면 안 됩니다. 얼른 제 자리로 바르게 돌아서야 구원열차입니다. 다른 데로 가지 맙시다. 다른 자리는 절대 안 됩니다. 우리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자리로 확실하게 돌아섭시다. 이것이 회개한 사람, 하늘나라 가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결론: 

신라시대는 골품제도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성골과 진골이 임금이 되고 나라를 이끌어갔습니다. 성골과 진골은 신라사회의 최고 신분층인 왕족입니다. 성골은 왕족 내부 혼인으로 태어난 집단을 말하며, 진골은 왕족과 다른 귀족의 혼인으로 태어난 집단을 말합니다. 원래는 성골만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선덕여왕 때 성골 남자가 없어서 진골도 왕이 될 수 있게 하였습니다. 물론 현대사회에는 골품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는 근본적으로 차별을 거부합니다. 우리가 우리 가문을 정말 예수 잘 믿는 가정으로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볼테르는 “당신이 잘 하면 조상이 필요 없다”고 하였습니다. 조상 덕 볼 생각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잘 해서 가문을 영광스럽게 세우면 됩니다. 좋은 조상을 가지는 것보다 내가 잘 돼야 합니다. 
  
우리 연동의 가정들에게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는 주님의 선포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는 은총의 말씀이 늘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든 가족들이 하늘나라의 생명책에 이름이 있고, 모두 구원받고, 이 땅에서 하늘나라를 경험하는 구원받는 가정들이 다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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