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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충성된 일꾼들의 교회 (겔 37: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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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된 일꾼들의 교회 (겔 37:1-13)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는 교회가 어떠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귀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안에서의 파당의 문제를 밑에 깔고 그곳 신자들의 교만을 꾸짖고 있습니다. 

본문 1절은 대단히 중요한 말입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라고 한 것은 사도 바울 자신을 포함해서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하는 모든 사역자들을 가리킨 것입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한 것은 사도 바울을 비롯한 모든 사역자들을 존귀하게 여기고 깍듯이 받들어 높이라는 뜻으로 한 말이 아닙니다. 

이 문장에서의 강조점은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비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꾼”과 “맡은 자”에 있습니다. 즉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고린도 교회를 위한 또 다른 그 어떤 사역자라도 다 일꾼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꼭 같은 그리스도의 일꾼들로 여겨달라는 것입니다. 주인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다 맡은 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맡기신 이가 따로 그들 위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비밀을 전하고 가르치도록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에게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두가 한 하나님으로부터 같은 진리를 전하고 가르칠 책임을 맡은 일꾼들인데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 중에 누가 더 높다, 누가 더 잘났다 하며 혹은 이 사람, 혹은 저 사람의 이름으로 패거리를 이루고 서로 다투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일꾼”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일꾼”이라고 번역된 말의 원래 뜻은 문자적으로 이해한다면 “밑에서 노 젓는 사람”입니다. 이 단어가 나중에는 “노예”를 뜻하는 말이 되기는 했지만 본래는 옛날 노를 저어서 배를 움직일 당시의 전함의 배 밑창에서 노를 젓는 사람입니다. 노 젓는 사람들이 호흡을 맞추어 모두가 균일한 힘과 균일한 리듬으로 노를 저어야 배가 빨리 가고 똑바로 가며 오래 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노 젓는 사람들이 누구는 빨리 젓고 누구는 천천히 저으며 누구는 힘껏 젓고 누구는 살살 저으면 배가 잘 나아가지도 않고 노 젓기가 너무 힘들어 다들 곧 지치고 맙니다. 

노 젓는 배에 구령이나 북으로 노 젓는 속도와 강도를 조절해주는 사람이 있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뿐만 아니라 노 젓는 노예들 중에 요령부리며 힘껏 젓는 자가 있지 않나 살피며 그런 자에게는 가차 없이 채찍을 후려치는 감독관도 있었던 것은 한 척의 배가 원활하게 항진하기 위해서 노 젓는 자들의 일치된 호흡과 동작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호흡을 맞추며 함께 섬겨야지 어떤 사람은 독주하고 어떤 사람은 방관하며, 어떤 사람은 열심히 하는데 어떤 사람은 요령만 부린다면 교회가 평안할 수 있겠습니까? 

또 노 젓는 사람들 사이에 파가 갈려서 저쪽 파 사람들이 노 저으면 이쪽 파 사람들은 손 놓고 쉬거나, 저쪽 파 사람들이 앞으로 가게 노 저으니 우리는 뒤로 가게 노 젓자 하면 그 배가 움직이겠습니까? 한 치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말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온 교인, 모든 제직이 한 마음으로 호흡을 같이 하고 같은 방향으로 최선을 다해야 교회가 성장할 수 있고 빨리 목표하는 바에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왕초 노릇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 중심으로 파벌들이 있어 주도권 다툼하는 교회치고 성장하는 교회를 보지 못했습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올라간다고 하듯이 엉뚱한 방향으로 잘못 가고 있는 교회들을 보면 다 파벌싸움에 빠져있는 교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사역자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일꾼들이고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할 일을 맡은 사람들이기에 근본적으로 꼭 같은 사역자들이며, 그래서 그들 사이를 가르는 판단을 해서는 안 됨을 강조한 사도 바울은 그러나 굳이 그 사역자들 가운데서 판단을 하려면 그 판단의 기준은 오직 충성됨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누가 더 인물이 훤한가, 누가 더 말을 잘 하는가, 누가 더 세상의 지식과 지혜가 많은가 하는 것을 보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 누가 더 그리스도의 일과 하나님의 비밀에 충성스러운가 하는 것이 유일한 판단기준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뜻으로 쓴 글이 본문 2절의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일과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이들에게서 충성 외에 다른 것, 즉 인물이나 언변이나 세상의 지식과 지혜의 뛰어남을 구하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일과 하나님의 비밀에 대한 충성 말고 다른 것을 기준으로 자기를 판단하려고 한다면 그런 판단에는 개의치 않을 것임을 밝힙니다. 본문 3절입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인물이나 언변이나 세상의 지혜 같은 것을 가지고 판단하든 아니면 다른 세상 법정에서 또 다른 어떤 법으로 자기를 판단하든 자기에게는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심지어는 자기 스스로도 자기 자신에 관해 판단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한 것입니다. 이 말은 자기가 결코 다른 그 어떤 사도들보다 못하지 않고 덜 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내세우지도 않을 것임을 다짐한 것입니다. 그런 판단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이 본문 4절의 말입니다: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하나님 앞에서는 다 죄인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일을 하며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사역자들은 사람들로부터 판단받기를 구하지 말고 자기 스스로 판단하려고도 하지 말며 오직 하나님 앞에서만 판단 받으려 해야 할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어서 사람의 판단은 그릇될 때가 많고 완전할 수 없으며 따라서 사람들로부터 칭찬받기를 좋아하지도 말아야 할 것을 권면합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비로소 각자에 관한 모든 것은 밝히 드러날 것이기에 그때까지 사람에 대해 어떤 판단도 하지 말고 어떤 칭찬도 기대하지 않으며 기다리면 주님께서 오셔서 모든 이에 대한 바른 판단을 하시고 칭찬 받을 이들을 칭찬해주시리라는 것입니다. 본문 5절입니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사도 바울은 그 일에 있어서 자기 자신이나 아볼로나 본을 보였음을 말합니다. 본문 6절을 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 교회 신자들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우게 했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사도 바울은 이 편지를 쓰며 여러 차례 “기록된 바” 하며 구약성경의 말씀들을 인용했습니다. 예를 들면 

1:19에서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한 것이나, 1:31에서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한 것이나, 2:9에서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한 것이나, 3:19에서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한 것이나, 3:20에서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한 것입니다. 

그렇게 인용한 구약성경의 말씀의 요지는 “사람의 지혜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말씀 밖으로 나가지 않고 사도 바울이나 아볼로는 그 말씀대로 세상의 지혜를 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며 전하며 가르쳤고,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데 본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고린도 교회 신자들은 다 알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 자신이나 아볼로나 다 꼭 같이 충성된 그리스도의 일꾼인데 왜 바울 파나 아볼로 파가 있어서 서로 대적하며 서로 더 잘났다고 교만한 마음을 품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가당치 않은 교만이 자리 잡고 있음을 신랄하게 비판하기 시작합니다. 먼저 본문 7절입니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신자들 사이의 갈등과 분쟁의 뿌리가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과 구별하여 스스로를 우월하다고 여기며 다른 사람들보다 높아지려고 하는 욕망에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 스스로를 다른 교인들과 구별되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처음부터 자기에게 있는 것으로 자랑하느냐는 것입니다. 

어처구니없는 교만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스스로에게 더 바랄 것이 없어 보이는 교만입니다. 더 이상 배울 것도 없고 자기들을 가르쳐줄 선생도 필요 없다고 여기게 된 것입니다. 자기들이 스스로 다스리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본문 8절이 그런 뜻으로 비꼬며 쓴 것입니다: “너희가 이미 배 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 바울의 이 말은 “당신들이 우리와 상관없이 이미 스스로 왕들이 다 되었으니 잘 됐네. 우리도 덩달아서 왕 노릇 할 수 있겠네.” 하는 야유였습니다. 

이어서 사도 바울은 잔뜩 바람 든 고린도 교회 신자들의 안일한 신앙적 교만과 자기를 비롯한 다른 사역자들의 고난의 삶을 극명하게 대조시키며 고린도 교회 신자들의 각성을 촉구합니다. 본문 9절입니다: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신자들을 향해 “당신들은 스스로 신앙적으로 벌써 왕의 자리에 앉아들 있지만 우리는 죽음 직전에 내몰려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구경거리”가 되었다는 것은 개선행진 시 적군의 패잔병들이 쇠사슬에 묶여 시가지에서 끌려다니고 원형경기장에서 맹수의 밥으로 내어줌을 당하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10-13절을 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이것은 “우리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어리석은 자 같이 되고 약한 자가 되며 비천하여지고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 없는 자가 되고 모욕과 박해와 비방을 받으며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는데, 당신네 고린도 교회 신자들은 어느새 지혜롭고 강하며 존귀한 분들이 되셨군요. 대단하십니다.” 라고 하는 신랄한 비아냥입니다. 그 터무니없는 교만과 착각에서 깨어나라는 권면이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 비아냥이 혹 오늘 우리 자신을 향한 것으로 느껴지지는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바울이 겪은 그 숱한 고초와 멸시와 낮아짐의 경험과 실천은 없이 스스로를 구별된 존재로 여기고 잘났다고 여겨지는 사람들끼리 파당을 짓고 교만으로 배부르며 교회 안에서 주인처럼, 왕처럼 군림하려 하고 있는 우리는 아닌지를 냉철히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서 아직도 우리는 이 험악하고 적대적인 세상에서 당하며 견뎌야 할 수많은 고난과 수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을 감당하고자 하는 의지와 다짐은 없이 손쉽게 훌륭한 신앙인임을 자처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자문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는 한쪽에서 선한 의지로 무언가를 해보려고 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일단 기계적으로, 조직적으로 반대부터 하고 보며 거꾸로 노를 저어 교회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걸음하게 만드는 일은 없는지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 일을 하는데 언제나 세상의 논리와 지혜를 내세우곤 하지는 않는지도 짚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에 얼마나 신실한 삶을 살며 그리스도의 일에 얼마나 충성된 청지기인지를 진지하게 점검해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겸손과 인내로 훈련된 충성된 일꾼들로 가득한 우리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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