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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청년주일] 하나님은 남긴 것을 계산하십니다 (마 25: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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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남긴 것을 계산하십니다 (마 25:14-30)

오늘은 청년주일입니다. “비전의 원동력”이라는 영상을 보신 후에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프로페자이-설교모임 동영상 비전의 원동력(강영우박사)를 보시겠습니다. 

서울대학교 교수이신 김난도박사는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은 몇 달 동안 베스트셀러에 오른 책입니다. 이 책을 읽은 후에 어떤 독자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나눠줄 썩 괜찮은 선생님을 둔 서울대생들이 처음으로 부러웠다”고 하였습니다. 김교수는 “좋은 선생이란 학생들을 꿈꾸게 만들고, 그 꿈을 이루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라 믿는다. 좋은 선생이 되고 싶다. 이 문제의식이 결국 이 책을 쓰게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김교수는 이런 말을 인용합니다. 영국의 작가 조지 버나드 쇼의 말을 인용합니다. “젊음은 젊은이에게 주기에는 너무 아깝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정말 명언입니다. “젊음은 젊은이에게 주기에는 너무 아깝다” 이처럼 절절한 표현도 부족하다고 생각될 만큼 젊음이란 정말 소중하고 또 소중합니다. 

청년시절, 참으로 좋은 때입니다. 왜 좋으냐고 묻는다면 무한한 가능성 때문입니다. 청년의 시절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시간이 주어져 있습니다. 사랑하는 청년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은 그리스의 명언입니다. “기하학에는 지름길이 없다”는 말입니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가야 합니다. 시간을 뛰어넘어 잘 되는 법이 없습니다. 시간이 알차게 지나가야 내공이 쌓이는 법입니다. “1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한 분야에서 정상에 서려고 하면 1만 시간의 노력이 따라야 합니다. 

저는 보석을 가공하는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보통 돌에 영롱한 보랏빛의 루비가 박혀 있는 돌인데, 원석이라고 합니다. 저의 눈에는 그 돌이 보석의 원석인지, 단순한 돌인지 모르겠습니다. 원석이라고 하는데, 차돌 같습니다. 그러나 보석 전문가는 보는 눈이 달랐습니다. 원석에서 보석이 될 부분을 잘라내고, 도려내더니, 보석을 갈고 닦는데, 처음에는 별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보석이 되겠습니까? 차돌로 남겠습니까?

김난도 박사는 이 책 1부에서 “그대 눈동자 속이 아니면 답은 어디에도 없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제1장의 제목이 “인생시계”라는 글이었습니다. 교수님의 탁상에는 탁상시계가 놓여 있는데, 교수님의 시계는 일부러 건전지를 빼놓아서 멈춰 선 시계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항상 한 자리에 서 있는 시계는 아니고, 매년 생일이 되면 18분씩 앞으로 시계 바늘을 옮겨놓는다고 합니다. 책을 계속 읽어보면 그가 왜 이런 시계를 놓고 있는지 알게 됩니다. 

그가 인생을 80세라고 계산하고 24시간을 분으로 환산하면 1,440분, 이것을 인생 나이 80으로 나누면 1년은 18분이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20세는 오전6시, 40이 되면 12 정오가 됩니다. 50세는 오후 3시, 60세를 살았으면 오후 6시에 이릅니다. 70을 살았으면 오후 9시, 80을 산다고 하면 몇 시간 남지 않았습니다. 김난도 교수는 49세로, 인생시계는 오후 2:24을 가리키고 있다고 합니다. 올해 50세로 오후 3시를 넘기고 있습니다. 

빌 하이벨스의 목사님의 책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책에서 포기하는 순간들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달리기 하는 선수가 “그만, 이제는 못가. 한 발자국도 더 못가” 하는 것은, 육체적 포기의 순간입니다. 

마감 시간에 회사사장이 들어와 또 업무를 맡깁니다. 열이 받쳐 오릅니다. “됐어. 이젠 더 이상 못 참아. 당장 사표 써서 책상에 던져버릴 거야!” 이것은 직장 포기의 순간입니다. 

인격을 지키려 분투노력하는데 세상은 까딱하지 않고 사람들은 놀려댑니다. “나만 애쓸 까닭이 어디 있어? 남들처럼 일반적인 도덕 수준에 맞추어 살아야지 뭐” 이것은 도덕적인 포기의 순간입니다. 

신앙인도 포기의 순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옳은 데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은 알지만, 실패를 겪고 모멸을 받으면 “하나님, 더는 못갑니다. 제 분수에 넘는 것을 요구하시는군요. 마음대로 하세요.” 이것은 영적 포기의 순간입니다. 

그렇게 어려운 순간에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처절한 고통을 겪으실 때에, 사탄의 소리가 들렸을 것입니다. “포기해, 그만 둬. 인간들, 하찮은 죄인이잖아, 심판받게 버려두라, 이런 고통당할 필요가 없잖아!” 못이 주님의 손을 뚫고 지나가고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는 순간, 우리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을 때에, 그래도 예수님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고통스러운 순간을 넘기시고 우리의 구원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온 인류에게 새로운 비전을 보여 주셨습니다. 인내와 비전은 주님의 위대한 선물입니다. 성도 여러분! 때때로 만나는 어려운 일들 속에서 주님 생각하며 인내와 비전을 품으십시오. 

우리는 찬송가 323장의 제목은 “부름 받아 나선 이 몸”입니다. 신학교에 입학하여 감동적으로 많이 불렀고, 결단하면서 외친 찬송은 바로 “부름 받아 나선 이 몸”이라는 찬송가였습니다.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 두 손을 불끈 쥐고 소리 높여 부르던 찬송이었습니다. 이 찬송을 지은 이호운목사님은 “저도 주님을 위하여 몸 바치기를 원합니다. 평안과 영광과 칭찬을 원하지 않사오며, 주님이 지고가신 십자가를 원합니다. 옛 성도들이 졌던 십자가를 저도 지고 가려고 합니다. 오로지 저도 주님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려고 합니다. 주님을 위하여 일하고 주님을 위하여 죽으려고 합니다.”라고 고백하였던 신실한 목회자였습니다.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 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사명자들이 다시 불러야 하는 찬송이요, 오로지 주님 앞에 헌신만을 다짐하는 고백이 되어야겠습니다. 우리 모든 사람은 사명자들입니다. 목사와 신학생만이 사명자라고 하는 말은 정말 맞지 않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 보냄을 받아 태어난 모든 사람은 다 사명자들입니다. 

김동길교수의 에세이, “내가 부르다가 죽을 노래여”라는 책을 보면 “죽음 직전에”라는 글이 있습니다. “어느 여대상이 겪은 죽음”라고 시작합니다. 그 글의 요지와 사건을 요약해보면, 서울의 어느 유명한 대학에서 독일어를 전공하며 자기 성취욕에 만족하며 사는 여대생이 있었습니다. 그가 대학 3학년 때에 배에 만져지는 종양을 검사하게 되었다. 의사들은 환자가 알아들 수 없는 말로 소견을 나누는데, 독일어로 암일 것이라고 주고 받는 것이었습니다. 의사들은 자기들이 나누는 말을 환자가 알아듣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알아듣고, 여학생은 부모님에게 유서와 비슷한 글을 남기고 수술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여대생은 수술을 받기 전에 병원을 나와 명동거리를 활보하는데, 입원하기 전과 다르게 눈에 보이는 모든 세상은 아름다웠고, 생기가 넘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1년만 더 살게 하시면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이웃을 섬기며 받들고 사랑한다는 말만을 하겠다고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암이 아닌 일반 종양이었고, 건강을 되찾으면서 후에 새로운 각오로 인생을 보람 있게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죽음을 경험해보아야 인생을 신실하게 살고 최선을 다하고, 정성스럽게 살게 됩니다. 

오늘은 “하나님은 남긴 것을 계산하십니다.”라는 제목으로 본문의 말씀을 새로운 각도에서 보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에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기고 가게 되었습니다. 여러 종들이 있었으니, 그동안 그들의 열심과 능력을 고려하면서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나갔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잘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달란트의 비유로 들려주셨는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 19절입니다.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라는 말씀입니다. “오랜 후”라고 하니, 몇 년은 족히 지나갔을 것입니다. 종들을 불러놓고 회계합니다. 결산하고 헤아려봅니다. 재산이 늘었는지, 줄었는지, 그대로 있는지 셈을 해보야 하고, 감사를 합니다. 

우리에게는 결산하는 날, 주인 앞에서 셈해야 하는 날이 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결코 비유가 아니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현실이요, 불원간에 우리 앞에 펼쳐질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이 결산하는 날이 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 서서 우리의 살아온 일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물질, 그리고 건강을 어떻게 사용하였는지 보고하고 평가받아야 합니다. 

그 날, 마지막 날에 풍성한 결산보고를 하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중간 평가를 해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을 평가해보고, 다시 도전해야 하고, 이윤을 남겨야 하고, 주어진 남은 시간과 물질 건강을 잘 사용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사용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에 잘 부응하면서 살았는지, 아니면 나 중심으로, 내 욕심만 이루기 위하여 나를 낭비하면서 살았는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이 아시고, 내가 나를 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지금 책망 받는다는 심정으로 나를 바로 세우고, 나 중심에서 중심이 이동이 되어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위치로 방향을 전환해야 합니다. 

보완하고 개선하는 것은 기업에서나 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달마다 해마다 나를 점검하고, 나를 보완하고 개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중간평가라는 것은 아주 좋은 일입니다. 그래서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그동안 잘 살았으면, 그대로 밀고 나가면 됩니다. 그래야 우리의 남은 인생을 제대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당신의 소유를 맡기셨습니다. 14절 말씀에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인의 소유를 맡은 사람이지, 나의 소유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나의 소유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여러분이 맡은 것이지, 결코 여러분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청지기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나의 모든 것은 주인의 것이요, 주인이 가져오라고 하면 가져가야 하고, 주인이 내 것이라고 하시면 예, 모든 것은 주인의 것입니다. 주인이 쓰겠다고 하면 언제라도 내어놓아야 하고, 주인이 그만 하라고 하면 그만 두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이란 바로 그런 존재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각각 종들의 재능대로 달란트를 맡겨주셨습니다. 우리 사람들에게는 재능이 주어졌습니다. 재능이 있습니다. 재능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누구에게나 재능을 주셨습니다. 각각 다른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항상 내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소유를 내가 임시로 맡아 관리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기 바랍니다. 그래야 주님의 뜻대로 잘 관리할 수 있습니다. 멋지게 투자하며 장사를 잘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소년이 있었습니다. 소년의 학교성적은 항상 꼴찌였습니다. 그는 예술학교를 세 번 지원했으나 모두 낙방했습니다. 이유는 ‘교육 불능’ 아버지는 아들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오며 통탄했습니다. “왜 하필 우리 집에 이런 바보가 태어났을까” 이 소년이 바로 세계 최고의 조각가 로댕입니다. 

다른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다섯 살 때 겨우 입을 열었습니다. 글을 읽지 못해 ‘멍청한 아이’로 불렸습니다. 산수는 항상 낙제점. 담임선생으로부터 ‘환상에 사로잡힌 저능아’라는 평가를 받고 퇴학당했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세계적인 석학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박사입니다. 

또 한 소년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에 하나를 더하면 왜 둘이 되느냐”며 따졌습니다. 어떤 날은 새끼를 낳겠다며 온종일 오리 알을 품었습니다. 담임선생은 그를 ‘혼란스런 문제아’로 지목했습니다. 그리고 열세 살 때 퇴학처분을 받았습니다. 이 소년이 바로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무엇을 얼마나 맡겨 주셨는지 알고 계십니까?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 주신 것의 종류와 분량을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나를 향한 기대를 알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종은 미련한 종과 어떤 차이점이 있습니까? 

미련한 종은 가서 땅을 파고 주인의 돈을 묻어 감추어 놓습니다. 왜 감추었을까요? “두려워하여..”(25) “주인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알았으므로 ...”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가서 장사하여 이를 남긴들 얼마나 되겠으며, 그것이 주인에게 얼마나 보탬이 되겠느냐?라는 생각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수고가 아무 의미도 없고 아무 가치도 없으며 주님께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칭찬받은 종들, 5달란트와 2달란트를 받았고, 또 남긴 종들을 보면 모험심이 강하였습니다. 얼마를 남겼느냐 하는 것보다 충성심이 있었고, 충성심에 대한 열매가 이윤으로 모아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충성된 종은 어떤 종입니까? 그러한 종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충성된 종은 그것으로 ‘바로 가서’ 장사를 했습니다. 시간 여유가 많이 있으니까, 좀 놀다가 천천히 하자고 미루었다면 그는 충성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충성된 종은 작은 일에 충성했습니다. 주어진 일이 어떤 일이든 최선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충성된 종에게 하나님은 세 가지 축복을 주셨습니다.

첫째는 주인 되신 하나님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불러주셨습니다. 우리 주님께 칭찬을 듣는 것보다 더 신나고 행복한 일이 또 있습니까? 

둘째는 더 얻게 되었습니다. 주인은 그가 충성하여 남긴 이를 빼앗지 않으시고 오히려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라고 하십니다. 많은 것으로 맡겨 주시는 것은 특별한 은혜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절대 신뢰한다는 말씀이지 않습니까? 다섯 달란트가 작은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크고 많은 것을 안심하고 맡겨주겠다는 말씀입니다. 

셋째는 주님의 즐거움에 초대하십니다. 충성된 종들이 주인의 칭찬 뿐 아니라 즐거운 잔치에 초대받는 영광을 얻게 된 것입니다. 주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셨는데, 그런 즐겁고 영광스런 자리에 당당한 내빈으로 참석하게 되면 얼마나 신나고 즐거운 일인지 상상해 보십시오. 

그처럼 우리가 충성된 청지기가 되면 하나님의 칭찬 뿐만 아니라 더 많은 것을 받으며 주님의 즐거운 잔치에 참여하는 기회를 얻는 것입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 무익한 종에 대하여 알아야 합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도 주인으로부터 달란트를 받은 즉시 행동에 옮겼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그는 이윤과 열매를 남기기 위함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존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땅을 파고 묻어 감추어 놓았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주신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종을 책망하는 단어를 잘 살펴보십시오. 26절 ‘악하고 게으른 종아’, 30절 ‘이 무익한 종’ 이라고 했습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말합니다. 게으르다는 말은 인정을 하겠습니다. 그러나 악하다는 말은 좀 심하지 않습니까? 본전 잘라먹는 사람도 많은데, 가지고 도망가지 않았는데 왜 주인은 그를 악하다고 했을까요? 주인의 의도대로 하지 않고 제 맘대로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 달란트 받은 종처럼, 주인을 폭군으로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박사는 아름다운 일화를 많이 남겼습니다. 어느 해 정월 초하룻날, 아침 일찍 박사 곁에서 자고 일어난 제자가 잠자리를 정돈하고 세배를 올렸습니다. 장기려 박사는 따뜻한 미소를 머금고 덕담을 해주었습니다. “금년엔 날 좀 닮아라.” 스승의 큰 사랑에 어리광을 부리던 제자가 재롱삼아 말을 받았습니다. “선생님 닮아 살면 바보 되라고요?” 그러자 장기려 박사는 껄껄껄 웃으며 다음과 같이 토를 달았다고 합니다. “그렇지, 바보 소리 들으면 성공한 거야. 바보로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 줄 아냐?” 

혹여 세상 사람들은 늘 불쌍한 환자들에게 무료진료를 해주던 장기려 박사를 “저 사람 바보가 아냐?” 하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장기려 박사는 바보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바보로 살기”로 작정했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주님만을 바라보며, 주님을 따라 바보로 살기로 작정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오늘 청년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고 하시는 칭찬과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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