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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벽 이슬 같은 청년 (시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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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이슬 같은 청년 (시 110:3)


오늘은 우리교회 청년들이 성년-어른이 된 것을 온 성도들 앞에서 확인하고 청년들을 축복하고 주님을 더 사랑하며 잘 믿으라고 기도해주고 격려해주는 뜻깊은 주일입니다. 오늘 성년식을 갖는 청년들과 선. 후배 모든 동성의 청년들에게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청년하면 18세부터 35세인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나 연령만으로는 청년을 설명하기에 부족합니다. 이 연령대 사람들이 지닌 특징이 있습니다. 청년은 진취적이고 도전적이며 지치지 않습니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새로운 미래를 꿈꾸며 계획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청년을 ?현존하는 미래?라고 했습니다. 특히 청년의 미래는 오늘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청년이란 뜻은 쉼 없이 움직이고 일을 계획하고 실행하며 실패하더라도 다시 도전하여 결국에는 열매를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청년이 완벽한 것은 아닙니다. 청년이라는 뜻에는 미완성의 의미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곧 배움이 더 필요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부족함이 있더라도 청년은 계속해서 배우는 가운데 부족한 것을 채우며 끊임없이 완성을 향해 나아갑니다. 

오늘 본문 3절에?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이란 말씀은 참 귀한 말씀입니다. 새벽 이슬- 깊은 밤, 새벽이 되려는 시간에 고요하게 산천 초목 위에 촉촉히 내립니다. 이슬은 요란하게 내리지 않습니다. 깊은 밤에 소리 없이 내려 온 초목을 적셔주어 생명을 주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합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에서의 이슬은 초목에게는 생명과 같습니다. 

팔레스타인은 한 낮에는 햇볕이 매우 뜨겁기 때문에 식물들에게 물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지방에는 물이 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산천 초목이 필요한 물을 새벽 이슬이 유일하게 채워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 지방의 이슬은 귀한 것입니다. 청년을 이슬에 비유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호 14:5절에 보면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저가 백합화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라죽을 수밖에 없는 이스라엘에게 이슬이 되어 주셔서, 백합화같이 아름다운 꽃을 피게 해주시고, 백향목 같이 우람하게 자라게 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향내나는 백합꽃 같이 아름답게 만개하고, 우람하고 곧게 뻗어 올라가는 백향목 같이 번성하게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청년들을 새벽이슬에 비유한 것은-이슬 같이 깨끗하고 거룩한 청년, 신선하고 영롱한 청년이 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복음의 꽃을 피게 하고, 교회가 성장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새벽이슬 같은 청년은 

1. 거룩한 옷을 입은 청년입니다. 

3절 상반 절에는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라고 합니다. 아마 여러분도 옷이 날개라는 말에 동의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옷은 어떤 의미에서 삶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벼운 옷을 입으면 가볍게 행동하고 싶어지고, 무거운 옷을 입으면 무거운 행동을 하고, 야한 옷을 입으면 야하게 행동하고 싶어지죠. 편한 옷을 입으면 편하게 행동을 하고, 정장을 입으면 정장다운 행동을 하고 싶어지는 용기가 부여 되는 것입니다. 제가 참 놀란 것은 예비군 훈련 때, 그렇게 점잖은 분들이 예비군복만 입으면, 정말,정말 상상하기도 힘든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이 아침에 어떤 옷을 입고 나오는 가에 따라 여러분의 행동이 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옷은 매우 중요합니다. 맥스 루케이도는 ‘옷은 성품’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롬12:12-14절에 우리 신앙인이 입고 살아야 할 의상에 대해서 말씀을 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그리고 13절을 보면 “낮에 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라는 말이 나옵니다. 또 14절에 가면 “오직 주 예수그리스도로 옷 입고”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세가지 말씀을 주목해보십시오. ‘빛의 갑옷을 입자’‘단정히 행하자’‘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자’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가 내 삶의 표현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처음 예수 믿을 때 이미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갈3:27절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그런데 예수님의 새 옷을 입을 때 예전의 더러운 옷을 벗지 않으면 희한한 모습이 됩니다. 마치 이런 겁니다. 옛날 구제품 얻어 입고 살 던 시절에 보면 희한한 복장이 있었죠. 아랫도리 바지는 한복인데, 윗도리는 양복저고리 이런 식입니다.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는 것은 예수님을 항상 의식하고 예수님과 일체감을 갖고 살라는 겁니다. 

그리스도를 입지 않은 사람은 천국시민 될 자격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 해주었다는 사실을 믿는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입니다. 우리의 허물을 예수님께서 옷 되어 가려주셨습니다. 그리스도로 옷을 입었을 때 가리지 못할 허물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구원의 옷이요, 의의 옷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이 옷을 입히시려고 우리들의 옷을 벗기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제 옛사람, 마귀에 종노릇하고, 세상 정욕에 휘둘리는 그런 인생들이 아닙니다. 주의 거룩한 자녀들입니다. 이제 격이 달라졌습니다. 이게 어떤건지 아세요? 2년전인가요? 청와대에서 나눔 가족에 초대를 받고 대통령과 영빈관에서 식사를 하고 청화대 뜰을 다니는 데 그 옆에 경호원들이 물샐틈없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인간 중에 가장 보호를 철저히 받는 사람이 있다면 대통령일 겁니다. 대통령이 어디를 행차하면 몇주전부터 난리죠. 

답사를 하고, 맨홀 뚜껑까지 열어보면서 철저히 검색을 합니다. 그리고 수십 명이 에워싸고, 일단 유사시에는 경호원들이 몸을 던져 총탄을 대신 맞으면서까지 경호합니다. 그런데도 전 세계적으로 보면 국가 원수들이 암살되거나 사고를 당하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완전하지 않다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온전하게 보호해 주십니다. 보호해 주실 뿐만 아닙니다. 우리를 당신의 형상을 입은 놀라운 신분 상승을 주십니다. 멋진 명품의 인생으로 삶의 격을 높혀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분 상승을 한 멋진 인생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신분에 걸맞는 삶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수준을 끌어 올리는 것입니다. 

2. 여기 청년들이 거룩한 옷을 입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3절 중반절에 말씀합니다. ?즐거이 헌신하니?라고 합니다. 여기 헌신이란 주님께 몸을 드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통사람은 헌신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헌신은 가치 있는 일이고 뜻있는 일입니다. 우리나라 청년들도 요즘 꿈이 없는 청년들이 점점 많아집니다. 많은 청년들이 현실에 안주하려하고 뭔가 모험을 두려워합니다. 우리의 열정은 다름 아닌 내 삶을 다해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펼쳐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일에 부름을 받은 자들입니다. 한 생명을 주 앞으로 인도하기 위해 어쩌면 단 하나 밖에 없는 내 삶을 바쳐야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청년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력 일 것입니다. 

생물학적인 생명이 아닌 그 삶속에서 발산되는 생명력이 그 사람이 청년인지 아닌지를 구별할 수가 있습니다. 나이가 젊었다고 하여 다 청년이 아니듯 또한 나이가 많다고 하여 청년이 아닌 것이 아닙니다. 이 생명력이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창2:7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사람은 그 육신이 다른 생물들처럼 흙으로 구성되지만, 결정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생기를 받아 생령이 되었습니다. 곧 하나님의 영이 충만할 때, 그 사람의 생명력 또한 충만해집니다. 

행2:17절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어린 자녀들도 성령이 임할 때 청년이 되고, 젊은이들도 하나님의 영을 받을 때 환상을 보고 앞으로 나아가는 청년이 됩니다. 또한 나이를 먹어 그 육신이 늙을찌라도 하나님의 이루실 새 일을 꿈꾸는 자는 영원히 청년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 시대의 청년들은 어떠�爛歐� 작년 청년층의 체감실업률은 22.1%라고 합니다. 자신의 앞가림하기에도 벅차다고 청년들이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환경이나 주변 여건 때문에 주저앉으면 안 됩니다. 요즘 정말 안타까운 것은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사회에 비관하여 술과 여러 쾌락을 즐기며 소비하고 심지어는 그 삶을 파괴하는 청년들도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청년다운 삶을 사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의 뜻 때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사람을 지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무슨 말입니까? 생육하고 번성하고 정복하며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허지만, 아담의 범죄로부터 시작된 죄의 본성이 이러한 엄청난 약속을 감당치 모하도록 우리를 비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예수님은 항상 우리를 향해 청년이라고 부르시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그렇게 살아갈 힘과 능력을 주십니다. 약한 자에게는 그 약함을 극복할 수 있는 인내와 부활의 믿음을 덧입혀 주십니다. 지혜가 부족한 자에게는 친히 지혜가 되어 주셔서 무슨 문제든지 해결해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십니다. 지식이 부족 할 때에는 배움의 길을 열어주시고 채울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무엇보다 믿음이 부족할 때에는 믿음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이렇게 우리를 청년 본연의 모습으로 회복시켜 주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정복하고 다스리는 자로, 새 역사를 창조하는 역사의 일꾼으로 이 시대의 진정한 리더요 지도자로 살도록 인도하여 주십니다. 

우리 교회 청년들이 정말 젊음을 바쳐서 헌신하는 그런 열정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찰과 교회가 이웃하고 있었습니다. 교회가 늘 찬송을 하고 너무 시끄러워 사찰의 스님이 염불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대표가 가서 조용히 하라고 해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가 가서 조용하라고 권할까 했지만 아무도 갈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때 한 젊은 스님이 나서서 말했습니다. ?제가 십자가를 지겠습니다.? 누가 무엇을 진다는 것입니까? 우리 젊은이가 십자가를 져야합니다. 젊어서 힘이 있을 때에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젊은이가 마땅히 나서야 합니다. 그리고 젊은이가 나설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젊은이가 나설 수 있도록 사기를 꺾지 않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셋째, 주께 나아와야 합니다.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어디로 나오느냐에 따라 우리 삶의 모습이 달라집니다. 우리 청년들이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무의식중에 어디로 갑니까? 주께 나오십시오. 주께 나오면 은혜의 사람이 됩니다. 주께 나오면 새벽이슬이 됩니다. 전도서 11:9에는 말합니다.?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어디든 가세요. 그러나 그것 때문에 미래의 길이 정해지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어디든 가세요. 그러나 그 다음에 하나님의 심판의 길이 있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주께 나오기가 점점 힘들어지는 시대입니다. 젊은이들이 갈 데가 많아집니다. 

청년들의 세계에 독버섯처럼 번지는 포스트 모던니즘의 영향은 마치 거센 밀물처럼 밀려와서 청년들의 삶 전체를 세속의 바다에 빠져들게 했습니다. 이 영향 때문에 청년들이 교회에 나오지를 않습니다. 이 포스트모던니즘은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1) 절대 가치의 부정 2) 절대 권위의 부정입니다. 1) 절대 가치의 부정은 하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타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2) 절대 권위의 부정입니다. 아버지의 권위, 선생의 권위, 부모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는 세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무엇보다 청년들의 관심은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여기 주께 나아온다- 이 말은 하나님의 비전의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어떠합니까? 지금 조국 한국은 나라를 바르게 섬겨야 할 위정자들이 혼란한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금융 사고는 하루가 멀다하고 일어납니다. 돈이 있어도 은행에 맡길 수 없는 세상, 사랑스러운 내 자녀들을 학교에 맡기기 힘든 세상입니다. 건강한 젊은이들이 일자리가 많아야하는데 실업자가 흘러넘치고 있습니다. 아직도 신용불량자의 수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조금만 눈을 돌리면 아직도 전쟁에 대한 두려움이 있고, 세계는 지진과 전쟁, 그리고 기아와 굶주림으로 절규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도 사탄이 그저 제철을 만난 듯 미친 듯이 날뛰고 있습니다. 이곳 저곳에서 우상들이 판을 치고 있고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려는 영적 어두움이 우리를 덮으려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난세를 극복해야 할 한국교회는 이 시대 앞에 직면한 이 문제를 감당할 만한 능력이 있습니까? 정말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지난날에는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 자리에 있지만, 이잰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정말 가슴 아픈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우려는 지금 우리의 사역의 현장에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폭발적인 성장을 이룬 1970∼80년대에는 하루에 개척교회가 6개씩 생겨났고, 당시 여대생들 사이에서 1등 신랑감은 단연 목회자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영적으로 점점 한해에 목사 안수를 받는 사람이 4000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서울에만도 목회지가 없어서 다니는 분들이 1만 명이나 된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또 한 해에 3000여개의 개척교회가 문을 닫는 이런 이야기가 들릴 때 어디까지 믿어야 하나하는 생각에 정말 고통스러운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청년, 그리고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가 일어나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깨지기 쉬운 존재일찌라도 나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신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놓치지도, 결코 포기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넘어지고 실수하는 내 모습에도 불구하고 나를 끝까지 믿어 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 실망 어린 나를 품에 안으시고 나를 변화시키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나의 강팍한 가슴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 불꽃으로 임하셔서 내 함께 하시는 성령님이 지금 여러분을 향해 ‘너를 보배롭고 존귀한 존재로 여겼나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른 피조물과 달리, 당신의 모양과 형상대로 손으로 친히 빗어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택한 족속으로, 왕 같은 제사장으로, 거룩한 나라로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의 왕자와 공주들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은혜가 내 심령에 임하면 나는 더 이상 옛것에 매여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우리의 생애를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내 마음의 이런 상처, 저런 아픔, 고통으로 겹겹이 쌓여 열등감 많은 내 생애를 모든 사람 앞에 온 세상 앞에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외쳐대는 당당한 인생으로 우리의 생애를 바꾸십니다. 그래서 인생의 남은 시간을 가장 값지게 만드시는 손에 이끌려 살아가는 승리자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깨어지기 쉬운 존재에서 하나님의 보배롭고 존귀한 존재로 부름받은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합니까? 우리 인생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끝까지 붙잡을 수 없는 일과 결코 놓칠 수 없는 일입니다. 대 부분의 사람들은 끝까지 붙잡을 수 없는 일에 인생을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명예도, 부도, 명성도, 성공도, 다 끝까지 붙잡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설령 내가 그것을 누렸다 할찌라도 바닷물을 들이키듯 갈증만 더 날 뿐입니다. 그러나 결코 놓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내 인생을 붙잡고 계신 주님입니다. 젊음은 지나갑니다. 명예도 지나갑니다. 인간적인 야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주 앞에 마지막에 순결하게 서기 위해, 정말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인생으로 주 앞에서는 놓칠 수 없는 마지막 영광을 위해 세상적인 잣대를 포기하는 자, 그는 어리석은 자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정채봉씨가 쓴 '모래알 한 가운데서'란 책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와 있습니다. "상처를 입은 젊은 독수리들이 벼랑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날기 시험에서 낙방한 독수리/짝으로부터 따돌림을 받은 독수리/윗 독수리로부터 할큄 당한 독수리/" 그들은 이 세상에서 자기들만큼 상처가 심한 독수리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죽느니보다 못하다는 데 금방 의견이 일치했습니다. 이때 망두에서 파수를 보던 독수리 중에 영웅이 쏜살같이 내려와서 이들 앞에 섰습니다. "왜 자살하려고 하느냐?" "괴로와서요.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낫겠어요." 

영웅 독수리가 말했습니다. "나는 어떤가? 상처하나 없을 것 같지? 그러나 이 몸을 봐라." "이건 날기 시험 때 솔가지에 찢겨 생긴 것이고, 이건 윗 독수리한테 당한 자국이다. 그러나 이것은 겉에 드러난 상처에 불과하다. 마음의 상처자국은 헤아릴 수도 없다." 영웅 독수리가 조용히 말했습니다. "일어나 날자꾸나. 상처 없는 새들이란 이 세상에 나자마자 죽은 새들이다. 살아가는 우리 가운데 상처 없는 새가 어디 있으랴." 

그렇지 않습니까? 날기를 포기하기에는 아직 할 일이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또한 세상으로 보냄 받은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우리가 한 생을 은혜를 입고 주님 닮아가는 성숙의 삶이 우리의 목표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삶이 얼마나 상처투성이인지 모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눈에 보이는 절망적인 환경과 자신의 연약함을 뛰어넘어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매이지 않고 오히려 믿음으로 눈에 보이는 장애물들을 뚫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늘 주 앞에 나아오기를 기뻐합니다. 우리 청년들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일어나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고, 주께 나오는 청년이 되어서 청년이 살아 있는 소망이 있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다 그렇게 되기를 받으시면 아-멘을 세 번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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