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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 이야기 (삼상 30: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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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이야기 (삼상 30:18-25)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이야기가 존재합니다. 하나는 <성공 스토리>입니다. 성공 스토리는 잡지의 커버스토리로 적당한 이야기들이지요. <저는 보리 고개를 넘기기 힘든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났습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도 재혼하여 떠나고 할머니 아래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반드시 성공하겠다는 꿈과 강한 의지가 있었습니다. 저는 주경야독을 하면서 공부했고, 배가 고플 때는 냉수로 배를 채워가면서 공부했습니다....그 결과 명문대학에 입학했고, 졸업도 하기 전에 사법고시에 합격했으며.....> 이런 식으로 이어지는 이야기가 성공 스토리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듣노라면 처음엔 감탄하고 놀랍니다. <나도 저 분처럼 해 보자.>라고 결심도 합니다. 그러나 열심히 애써도 잘 안 되면 나중에는 자신에 대해 열등감을 가지게 되고 마음이 우울해집니다. 결국 성공 스토리는 남들에게 위로 보다는 상처를 줄 때가 많습니다. 또 이런 이야기의 주인공은 우쭐하고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이야기가 아닌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은혜 이야기>입니다. 은혜 이야기는 구조부터가 다릅니다. <저는 정말 형편없었습니다. 게으르고, 삶은 무질서했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저 잘난 맛에 살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하는 일마다 실패했고, 그 결과 깊은 수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제가 지금은 여러분이 보시는 대로 당당하게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지금 제 마음은 의욕과 기쁨으로 가득합니다. 제가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지 알고 싶으시죠? 한 마디로 말하면 저는 은혜로 이 자리에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전개되는 것이 은혜의 이야기입니다. 교우님들은 평소에 어떤 이야기에 익숙하십니까? 또 어떤 이야기들을 듣고 싶어 하십니까? 

오늘 본문에는 성공스토리와 은혜 이야기가 모두 등장하고 있습니다. 우선 본문의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사울 왕에게 쫓기던 다윗은 결국 블레셋으로 망명하였습니다. 블레셋 왕 아기스는 골리앗도 이긴 영웅이 자신에게로 오자 기뻐했고, 그를 충성스런 신하로 만들 생각을 했습니다. 아기스는 다윗에게 <시글락>이란 성을 주어 거주하게 했습니다. 그 때 마침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에 국운을 건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는데, 아기스 왕은 다윗을 전쟁터에 데리고 가길 원했습니다. 이스라엘 군인들이 존경하고 자랑하던 장수가 블레셋 군대를 인솔하여 사울 왕과 맞서 싸우면 이스라엘 군대는 사기가 떨어질 것이고, 전쟁은 블레셋의 승리가 될 게 뻔했습니다. 이리하여 다윗은 아기스의 명에 의해 전쟁에 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 곤란한 문제였습니다. 블레셋 군으로 참전하기를 거부하면 아기스 왕에게 죽음을 당할 것이고, 참전한다면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백성을 보살펴야 할 사람이 자기 백성을 친 것이 되니, 이 전력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데 결정적 타격이 될 게 뻔했고, 수치스런 일이었습니다. 다윗이 얼마나 난처했을까요?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피할 길을 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뜻밖에도 이 곤란 중에서 다윗을 건진 이들은 아기스 왕의 신하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다윗이 참전하는 데 반대했습니다. 골리앗 까지 이긴 다윗이 만약 전쟁터에서 태도를 바꾸어 이스라엘을 돕는다면 블레셋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 빠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강력하게 다윗의 참전을 반대했습니다. 아기스 왕은 어쩔 수 없이 다윗을 다시 돌아가게 했습니다. 돌아가는 다윗의 발걸음이 얼마나 가벼웠을까요? 다윗은 수하들을 데리고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을 시글락으로 귀환했습니다. 

그런데 시글락에 도착한 그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와 보니 잠시 시글락을 비운 사이에 아말렉 사람들이 가족들과 재산들을 모두 약탈하고 끌고 간 것이었습니다. 이때의 절망감을 사무엘상 30장 4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더라> 그 뿐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 모든 일의 책임은 다윗에게 있다고 생각하면서 다윗을 해할 마음까지 갖게 되었습니다. 큰 슬픔이요, 큰 위기였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떻습니까? 다윗 일행은 아말렉 사람들을 치고 가족과 재산을 모두 되찾게 됩니다. 30장 16-20절을 다같이 읽어봅시다. <그가 다윗을 인도하여 내려가니 그들이 온 땅에 편만하여 블레셋 사람들의 땅과 유다 땅에서 크게 약탈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먹고 마시며 춤추는지라  다윗이 새벽부터 이튿날 저물 때까지 그들을 치매 낙타를 타고 도망한 소년 사백 명 외에는 피한 사람이 없었더라  다윗이 아말렉 사람들이 빼앗아 갔던 모든 것을 도로 찾고 그의 두 아내를 구원하였고  그들이 약탈하였던 것 곧 무리의 자녀들이나 빼앗겼던 것은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이 모두 다윗이 도로 찾아왔고  다윗이 또 양 떼와 소 떼를 다 되찾았더니 무리가 그 가축들을 앞에 몰고 가며 이르되 이는 다윗의 전리품이라 하였더라> 그들은 기뻐하면서 가족과 함께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에 있었습니다. 전리품을 나누는 문제를 둘러싸고 서로 대립한 것입니다. 당시 다윗을 따르는 남자들은 육백 명 정도였습니다. 그 가족들까지 하면 제법 많았겠지요. 그런데 가족을 찾으러 간 육백 명 중에서 아말렉과 싸운 사람들은 사백 명이었습니다. 나머지 이백 명은 어찌 되었나요? 그들이 힘이 부쳐 힘들어하자 다윗은 그들을 브솔 시냇가에서 쉬게 하고 나머지 사백 명만 데리고 가서 가족을 되찾아 왔습니다. 

이 상황에서 전리품 분배를 둘러싸고 사람들의 말이 어떠했습니까? 두 가지 의견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성공 스토리>식 의견이었고, 다른 하나는 <은혜 이야기>식 의견이었습니다. 

<성공 스토리>식 의견이 본문 22절에 나옵니다. 다같이 읽어봅시다. <다윗과 함께 갔던 자들 가운데 악한 자와 불량배들이 다 이르되 그들이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은즉 우리가 도로 찾은 물건은 무엇이든지 그들에게 주지 말고 각자의 처자만 데리고 떠나가게 하라 하는지라> 

이렇게 말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본문에는 <악한 자와 불량배들>이라고 되어 있지요?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다윗과 함께 있는 것일까요? 그 연유는 이렇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기 시작할 때 이미 이스라엘 전역에 명성이 자자한 영웅이었습니다. 그런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다윗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숫자가 점점 늘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는 단순히 다윗을 돕겠다는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무엘상 22장 2절을 보면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날마다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 무차별로 다윗에게 모여오다 보니 그 중에 악한 사람, 불량배 같은 사람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전리품 나누는 데 문제를 일으킨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왜 전리품을 나머지 사람들과 나누려 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그 이유는 전리품을 자신들이 얻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지 말고>라는 말은 다윗에게 하는 말이지만, 사실상은 <절대 주지 않겠다>는 자신들의 의지가 담긴 말입니다. 그들은 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싸워서 이겼는데 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겠지요. <다 알다시피, 가족을 되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적들은 수가 많았고, 우린 이백 명을 빼고 겨우 사백 명 뿐이었다. 게다가 적들은 이미 멀린 간 후였다. 그러나 우리는 목숨을 걸고 싸웠다. 자 봐라. 내 팔뚝과 다리에 칼자국이 보이지 않느냐? 우리는 죽을 각오로 싸웠다. 그래서 가족을 구하고, 전리품을 얻은 것이다. 그러니 전리품은 피땀을 흘린 우리가 가져야 한다. 브솔 시냇가에서 쉬고 있었던 이백 명은 자격이 없다. 이건 우리 거다.> 싸운 것도 자신들이요, 이긴 것도 자신들이요, 권리도 자신들의 것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이게 성공스토리입니다. 

그러나 거기 <은혜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은혜의 이야기를 말한 사람은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은 은혜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이 생각해 보니 가족과 재산을 되찾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들이 시글락에 조금만 늦게 도착하여 아말렉 사람들이 자신들의 본토 깊이 들어간 후에 도착했다면 되찾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또 길 인도를 해 줄 사람을 만난 것도 은혜였습니다. 적들이 술에 취해 있어 쉽게 빼앗은 것도 그렇습니다. 모든 게 은혜였습니다. 

사실 시글락에 돌아와 가족과 재산을 잃은 것을 알았을 때 사람들은 다윗을 죽이려고 했을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습니다. 그 때 다윗에게 힘이 되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6절로 올라가 보면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다급한 순간에 다윗을 절망에서 건지시고 사람들을 독려하여 싸울 용기와 기회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셨습니다. 승리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셨습니다. 

다윗이 보기에 이 승리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이기게 하셨고, 은혜로 가족과 재산을 찾게 하셨고, 은혜로 전리품을 얻게 하셨다. 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이다!>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골고루 나누라고 합니다. 23-24절을 보십시오. <다윗이 이르되 나의 형제들아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치러 온 그 군대를 우리 손에 넘기셨은즉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이같이 못하리라  이 일에 누가 너희에게 듣겠느냐 전장에 내려갔던 자의 분깃이나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자의 분깃이 동일할지니 같이 분배할 것이니라 하고>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은혜를 말하면서 살라!>고 강력하게 도전합니다. 5월은 은혜를 말하기에 적합한 달입니다. 자식들은 <부모님의 은혜>를 깨닫고 말해야 합니다. 저는 어버이 주일을 전후해서 어머니를 하늘나라로 보내드리고, 장례를 치르면서, 다른 어느 때보다도 어머니의 은혜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 것이 부모님의 은혜입니다. 평생 부르고 또 부르며 마음에 담아야 할 은혜가 부모님의 은혜입니다. 

또 5월은 <스승의 은혜>를 말하기 좋은 달이기도 합니다. 가르치는 분이 없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세상을 사는 원리와 지식을 배웠겠습니까? 우리 내면에 갈무리되어 있는 많은 것들이 다 스승들로부터 배운 것들입니다. 여러분, 유치원 시절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스승들의 얼굴과 존함들을 기억하십니까? 요즘 선생님들이 학교에서 수모를 당하고, 교단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것은 정말 개탄하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예전에는 스승을 부모와 같이 여겼는데, 지금은 그 어느 것도 제대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런 은혜 이야기들의 최고봉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를 죄와 사망과 사단의 손에서 건져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이야기>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살려내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고, 독생자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꽉 닫혀 있고 완악하던 우리 마음을 감동시키시고 녹이셔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 구원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복되게 사명자로 살뿐만 아니라, 이 육신의 생명이 다하는 날 영원한 생명의 나라인 천국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여러분, 이 은혜 아시지요?  풍성한 은혜가 임하시길 축복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과 다른 점은 <은혜를 말한다>는 것입니다. 남들은 저절로 된 줄 알지만, 우리는 은혜로 된 줄 압니다. 남들은 자신이 얻은 줄로 알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셔서 얻을 것을 압니다. 
은혜 이야기를 할 줄 아는 사람만이 행복할 수 있습니다. 성공 스토리를 말하는 사람들은 별로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얻을 것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당연히 얻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성공 스토리를 말하는 사람은 점점 목소리가 커지고 톤이 높아집니다. 흥분하게 됩니다. 자기도취에 빠집니다. 그러나 은혜 이야기는 다릅니다. 은혜 이야기를 할 때면 목소리가 점점 낮아지고, 나중엔 눈물이 흘러 말을 못합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현재 누리는 모든 것이 은혜임을 알기에 일마다 때마다 감사하며 삽니다. 

은혜를 깨달을 때 우리는 모두 사도 바울처럼 고백하게 됩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바울은 자신이 구원을 받아, 복음의 사도로 살아가는 모든 것이 은혜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런 마음으로 찬송합니다. 

내 평생 살아온 길, 뒤를 돌아보오니 걸음마다 자욱마다 모두 죄 뿐입니다 
우리 죄를 사하신 주의 은혜 크시니 골고다의 언덕길 주님 바라봅니다. 

여러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결코 <내가 했다, 내가 얻었다. 그러니 전부 내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본문의 악한 사람들의 말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들은 그 모든 전리품을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셨으므로 남아 있던 이들과 나누어야 마땅했습니다. 더구나 이것은 일찍이 모세가 미디안과의 전쟁 당시부터 정한 규례였습니다. 

민수기 31장 27절을 보면 <그 얻은 물건을 반분하여 그 절반은 전쟁에 나갔던 군인들에게 주고 절반은 회중에게 주고....>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의견처럼 모두 함께 나누는 것이 하나님의 법에도 맞고,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당연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본래 은혜로 주시는 것은 동등하게 나누는 법입니다. 더구나 구원의 은혜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포도원 품꾼의 비유>도 그러합니다. 포도원 주인은 이른 아침에 포도원에서 일한 사람이나 오후 다섯 시부터  한 시간만 일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 주었습니다. 

여기서 데나리온은 구원의 은총을 상징합니다. 구원의 은총은 모두가 동일하게 받아야 합니다. 먼저 온 사람이나 나중 온 사람이나 동일합니다.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총은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동일하게 받습니다. 

은혜로 받은 것을 자기 것처럼 주장하지 않길 원합니다. 우리 모두가 은혜 이야기를 말하며, 은혜의 방식으로 살길 원합니다. 은혜의 방식으로 사는 것은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는 삶>을 말합니다. 이들은 자기 공로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내가>라는 주어를 사용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께서>라고 말하길 기뻐합니다. <내가 얻었습니다.>라는 표현 대신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기에 이들은 무언가를 많이 알고, 가졌고, 누린다 해서 교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늘 황송하게 여기고 감사할 뿐입니다. 

동시에 은혜의 방식으로 사는 삶은 <다른 이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삶>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끊임없이 은혜를 받고, 은혜에 감사하며, 은혜를 베풀면서 삽니다. 이런 식으로 사는 것이야말로 어차피 세상을 떠날 때 모든 것을 놓고 갈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삶의 길입니다. 
우리 모두 풍성한 은혜의 이야기들 속에서 살아가게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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