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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에 들지 않은 양들 (요 10:11-18, 행 4:5-12, 요일 3: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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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 들지 않은 양들 (요 10:11-18, 행 4:5-12, 요일 3:16-24) 

<무식한 베드로가 유식한 파워 엘리트들 앞에서 한 설교>

오늘 우리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인류가 하나님과 화해할 길이 활짝 열린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 달려 돌아가실 때 우리의 모든 허물이 사하여졌습니다. 예수께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인류의 최후의 원수인 죽음이 극복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사흘 만에 다시 사셨다는 소식은 인류 역사에 있어서 최고의 기쁜 소식입니다.

오늘 봉독한 사도행전은 베드로가 산헤드린 공회에서 했던 유명한 설교입니다. 산헤드린은 그 당시 이스라엘의 최고 의결기관이었습니다. 이 자리에 당시 유대의 최고 권력자들이 모두 모였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을 심문하기 위하여 유대의 최고 지도자들과 장로들과 율법학자들이 모였던 것입니다. 성전 미문에서 못 걷는 사람을 고친 다음에 도대체 무슨 권세로,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조사를 벌이게 된 것이지요. 

참으로 숨 막히고 두려운 자리에서 베드로가 일어나 일장 연설을 합니다. 무슨 권세로 누구의 이름으로 병자에게 착한 일을 했는지 대답합니다. 10-12절을 봅니다.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배운 것도 없고 미천하기 이를 데 없는 베드로가 한군데 막힘이 없이 이런 명 설교를 하는 것을 듣고서는 유대 최고의 권력자들이 너나없이 화들짝 놀랐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설교는 간단명료하지만 그 핵심만큼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권세로 이런 놀라운 구원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여기 베드로의 설교에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양축으로 강조되고 있는데, 이와 같은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근거해서 베드로는 참으로 담대하게 선언합니다. 12절에 보면 이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다는 것입니다! 하늘 위에든지 땅 아래든지 간에 우리가 의지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이름은 오직 예수 이름 밖에는 없다는 것이지요.


<객관적 화해와 주관적 구원 사이에서>

이와 같이 이미 2천 년 전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인간이 하나님과 화해해서 영원히 살 길이 활짝 열렸습니다. 문제는 이 소식을 아직 듣지 못한 사람들이 있기에 우리는 땅 끝까지 이 기쁜 구원의 소식을 힘써 전해야 합니다. 미전도 종족들에게 선교사를 보내서 어떻게 해서든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하지만 복음을 듣고서도 믿지 않는 이들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복음을 듣고서도 믿지 않는 이들에게도 오래 참음으로써 꾸준히 복음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하나의 비유를 들어봅시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해서 우리나라는 자유를 되찾았습니다. 광복(光復), 어둠 속에 있던 우리 민족이 빛을 되찾은 것이지요. 그런데 일제와 맞서 싸우기 위하여 백두산에 숨어 들어간 독립군들이 있습니다. 문제는 벌써 해방이 된지 67년이나 지났지만 아무도 일제패망과 조국광복에 대한 소식을 전해주지 않아서 우리나라가 아직도 일제의 억압과 수탈 속에 있다고 생각하는 독립투사들이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우리나라가 벌써 수십 년 전에 일제로부터 독립해서 지금 엄청난 자유와 눈부신 풍요를 누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을 새까맣게 모르고 있기에 이들은 아직도 일제강점기를 살고 있습니다. 산 밑에 엄청난 자유와 풍요를 누리는 것을 새까맣게 모르고 있기에 이들은 산속에서 억압과 곤궁 속에서 여전히 해방과 구원을 갈망하며 사는, 엄청난 모순 속에 빠져 있는 것이지요. 

1945년 8월 15일 한국이 자유와 독립을 회복한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건이요 객관적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아직 이 객관적 사실을 주관적으로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들은 여전히 식민지 상태에 살고 있습니다. 이들이 일제패망의 기쁜 소식을 직접 듣고, 또 들은 다음에 그 소식을 사실로 믿고서는 산 밑으로 내려오기 전까지는 이미 현실로 이루어진 대한독립의 자유와 풍요를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가장 시급한 것은 이런 이들에게 누군가 이 역사적 사실을 곧이 믿도록 백두산 깊은 곳에 들어가 직접 말해주는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2천 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사심으로써 우리 모두에게는 영원한 살길이 활짝 열렸습니다. 벌써 시간적으로도 2천 년 전이라고 하는 너무나 오래 전에 하나님과 화해해서 인간의 죄와 죽음이 극복되었지만 이 기쁜 소식을 아무도 전해주는 사람이 없기에 아직도 새까맣게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에게 하루 빨리 다가가서 복음을 전해주어 구원과 영생을 실질적으로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선교요 전도입니다!

다시 또 다른 문제 하나가 생길 수 있습니다. 누군가 힘들게 물어물어 온갖 고생을 다하며 백두산 밀림 깊은 곳에 들어가 미처 광복의 소식을 듣지 못한 독립군들에게 조국광복의 기쁜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이 소식을 듣고서도 선뜻 믿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설득을 하고 사진을 보여주고 온갖 증거물을 총동원해서 설명해도 도무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것을 선교와 전도로 바꾸어서 말한다면 누군가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온갖 증거를 총동원해서 열심히 전도를 했지만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치와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 뿌리 깊은 인간의 불신앙과 불순종의 죄가 있습니다. 만일 일제가 망한 소식을 듣고서도 산 밑으로 내려가지 않고 백두산에서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우기는 것은 교만의 죄입니다. 자유와 기쁨을 회복한 우리나라에 대한 소식을 듣고서도, 그동안 잘 적응해온 백두산이 좋으니 굳이 세상으로 나가기가 귀찮다고 말하는 것은 태만의 죄입니다. 일본이 망했다는 소식을 아무리 전하여주어도 거짓이라며 믿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기만의 죄입니다.

우리가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하다 보면 흔히 이와 같은 세 가지의 근본적인 죄, 즉 교만과 태만과 기만의 죄를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인간의 집요한 죄악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복음을 전해야만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마지막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들어와야 할 다른 양들>

다시 요한복음으로 돌아와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요한복음에 나타난 유일한 비유, “목자와 양의 비유”를 쓰십니다. 먼저 예수님은 자신이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선한 목자는 어떤 목자입니까? 첫째로,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립니다(11절). 돈을 받고 고용된 삯꾼 목자는 양들이 자기의 양들이 아니므로 이리가 덤벼들 때 양들을 버리고 도망을 칩니다. 둘째로, 선한 목자는 양들을 사랑으로 돌봅니다(13절). 삯꾼 목자들은 양들을 생각하지 않고 이득과 안전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셋째로, 선한 목자는 양들을 다 압니다(14절). 반대로 양들은 목자를 압니다. 

선한 목자 예수님은 어리석고 연약한 양된 우리들을 사랑하셔서 당신의 목숨을 십자가 위에서 버리셨습니다. 그런데 이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은 양된 우리를 항상 우리 안으로 끌어들이십니다. 양들은 시력이나 청력이 심각하게 퇴화했기 때문에 항상 양 우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양 우리 밖으로 나가면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거나 맹수의 밥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양의 최고의 기쁨과 최고의 안전은 목자가 친히 지켜주는 양 우리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양과 같은 우리가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을 따라 머물러야 할 양 우리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교회입니다! 세상에 그 어떤 맹수가 울부짖고, 천 길 낭떠러지가 코앞에 있고, 어두운 밤하늘에 천둥번개가 휘몰아친다고 할지라도, 양 우리 안에 있는 양들은 언제나 안전합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께서 든든히 지켜주시는 양 우리, 교회 안에 들어온 모든 양들, 모든 크리스천들이 이와 같은 안전을 누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제 오늘 저의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이자 결론이 16절입니다. 우리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해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여기에서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은 누구입니까? 두말할 필요도 없이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 그리하여 아직 교회에 들어오지 않은 모든 사람들이 우리에 들지 않은 양들이지요. 

그렇다면 이 양들은 왜 우리에 들어오지 않을까요? 이들이 한 무리를 이루어 한 우리에 들어와 한 목자의 지도를 받지 않으려는 이유는 너무도 뻔합니다. 삯꾼 목자들에 현혹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참 목자가 아닌 거짓 목자에게 속아 넘어갔습니다. 그래서 양 우리 안에 들어오지 않고 세상의 들판을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휘젓고 다닙니다. 모두다 삯꾼 목자에게 정신이 팔려있기 때문이지요. 개인주의라는 삯꾼 목자에게 현혹되었습니다. 쾌락주의, 황금만능주의라는 삯꾼 목자에게 미혹되었습니다. 

이러한 삯꾼 목사들이 겉보기에 아무리 그럴 듯 해보여도 양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자신의 명리(名利)와 안전이 우선이기 때문에 양들에게 위험이 닥칠 때 양들을 버리고 도망칩니다! 오직 유일하신 참 목자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안전하고 풍요롭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참 생명을 줄 수 있습니다. 들어가고 나오며 풍성한 꼴을 얻을 수 있습니다. 

물질적으로 잘 먹고 잘 입고 잘 사는 것만 가지고서는 진정으로 풍성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의 유일하신 선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그 분의 뒤를 따를 때에만 우리에게 부족함이 없게 됩니다! 오직 예수 우리의 선한 목자만이 우리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이제 그 선한 목자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마침내 “내 잔이 넘치나이다!” 하고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양이 아무리 훌륭해도 양 우리 안에 들어오지 않은 양은 위험합니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도덕적으로 바르게 산다고 해도 홀로 떨어져 있는 양은 언제나 낭떠러지와 맹수의 위협에 노출됩니다! 우리는 세상의 들판에서 방황하다가 하나님께서 거룩한 경계로 지정해주신 내리교회라는 공동체, 아니 양 우리 안에 들어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아직도 이 양 우리 안에 들지 않은 많은 양들을 이 양 우리 안에 들어오도록 해야 합니다! 

이미 2천 년 전에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과 인간의 객관적 화해가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운 역사적 사실이지만 아직도 이 기쁜 소식을 듣지 못하고 죄와 죽음의 권세에 사로잡혀 사는 이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양 우리 안에 들어오게 해야 합니다! 

아무리 복음을 전해주어도 도무지 믿으려고 하지 않고 삯꾼 목자들에게 현혹되어 있는 양들이 너무 많습니다. 교만과 태만과 기만의 죄에 사로잡힌, 들판을 헤매며 길 잃은 양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들도 양 우리 안에 들어오게 해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 주변에 양 우리 안에 들어오지 않은 양들을 살펴보고 그 양들을 선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켜주시는 양 우리 안에 들어오게 하시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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