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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의달] 우리는 가족입니다 (엡 2: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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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가족입니다 (엡 2:13-19)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사랑과 평화가 함께 한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2000년까지 4, 3, 2, 1 순이었는데, 2010년에는 2, 1, 4, 3 순으로 바뀌었고, 2012년부터는 1, 2, 3, 4 순으로 변했다”고 합니다. 무슨 이야기일까요? 축구국가대표팀의 포메이션을 말하는 것은 분명히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가구유형을 말하는 것입니다. 2000년까지는 네 사람이 사는 가구가 가장 많았고, 그 다음에는 3인 가구, 2인 가구, 1인 가구의 순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1인 가구가 가장 많고, 그 다음이 2인 가구, 3인 가구, 4인 가구 순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2인 이하 가구의 급증과 4인 이상 가구의 감소의 결과입니다. 이것은 혼자 사는 1인 가구의 비중이 가장 높아졌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집에서 하루에 밥을 몇 끼나 먹느냐에 따른 남편의 호칭이 유행어처럼 나돌아 다닌 것 적이 있습니다. 집에서 한 끼도 안 먹는 남편을 ‘영식님’라고 최고 호칭을 했습니다. 한 끼 먹는 남편을 ‘일식씨’라고 보통 취급을 했습니다. 두 끼 먹는 남편을 ‘두식이’라고 낮추었습니다. 그리고 세 끼 먹는 남편을 ‘삼식놈’이라고 욕을 했습니다. 그런데 앞으로는 ‘두식이’라고 낮추거나, ‘삼식놈’이라고 욕할 사람도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혼자만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문제는 함께 살아도 함께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빠, 엄마, 아이 둘, 이렇게 네 식구가 살아도 함께 식사하는 것이 일주일에 단 한 번도 없는 가정이 많다는 것입니다. 식구마다 밥을 먹는 시간이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함께 있어도 함께 사는 것이 아닌 이 시대의 특징을 스마트폰에서 찾는 사람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스마트 폰 안에 들어가 자신 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대화의 문을 닫아 버렸다는 것입니다. 10대들은 밥을 먹으면서 미친 듯이 문자를 합니다. 20대 연인은 만나서도 폰을 갖고 놀기가 바쁩니다. 30대는 직장 회식 때도 몰래 주식을 확인한답니다. 50대 주부들은 카톡으로 수다를 떱니다. 한 침대에 누운 부부도 스마트폰으로 대화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아이들이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면서도 설교를 듣지 않고 하나님과 직접(?) 문자를 주고받습니다. 

소통을 위한 문명의 이기가 소통을 막는 먹통의 흉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와 통하기를 바라고 열심히 자판을 누르고 있지만, 바로 옆의 사람과는 장벽을 점점 더 높이 쌓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초라한 모습입니다.

이런 시대에 다시 생각하는 가족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런 시대를 위한 교회의 역할은 무엇이겠습니까?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가족과 연관된 교회의 실체 즉,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모습은 무엇이겠습니까?
  
I. 실체  

성경에서 교회는 어떤 건물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냥 함께 있는 사람이 가족이 아니듯이 그냥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이 교회는 아닙니다. 교회는 독특한 사연을 가지고 모인 사람들입니다. 어떤 특별한 내용을 가진 사람들입니까?

19절 말씀입니다.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여기에서 ‘너희’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교인들에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여러분은 외국 사람이나 나그네가 아니요, 성도들과 함께 시민이며 하나님의 가족입니다.”[새번역] 여기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인 교회를 가리키는 특징적인 말로 ‘시민’이라는 말과 ‘권속’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에서 권속이라는 말이 바로 가족이라는 말입니다.  

먼저, 주목하려는 말은 ‘시민’입니다. 시민[sumpolivth"/쉼폴리테스]이라는 말은 앞에 나오는 외인이라는 말과 짝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외인은 외국인을 가리키는 말이고 그 반대로 시민은 내국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1. 우리는 외인이 아니라 시민입니다.

외인과 시민, 외국인과 내국인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저는 책임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외인은 책임이 없는 사람이고, 시민은 책임이 있는 사람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면서도 책임을 지려하지 않는 사람은 외인과 같은 사람입니다. 외국인면서도 대한민국에 책임을 지려고 하는 사람은 국적에 관계없이 시민과 같은 사람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가족은 서로를 책임지는 사람입니다. 

미국의 인기 작가 중의 한 사람인 에마 봄베크는 ‘가족에 미처라’(휴먼하우스)는 책에서 가족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가족!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병을 같이 앓게 하고, 같은 치약을 쓰게 하며, 디저트를 더 먹겠다고 다투게 하고, 서로의 샴푸를 몰래 훔쳐 쓰게 하며, 돈도 빌려주고, 아픔을 주기도 하면서 또 그 아픔을 달래주기도 하는, 울고 웃으며 사랑하게 만드는, 작고 신비로운 끈이다. 각자의 방문을 잠그고 살다가도 어려운 고통에선 모두가 힘을 합쳐 서로를 지켜주는, 그런 특별한 삶을 살아가게 하는,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보이지 않는 끈, 그것이 가족이다.”

가족은 끈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가족은 서로 싸우면서도 어려울 때 함께 있어주며, 서로에게 책임을 져주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외인과 시민의 차이입니다.

저도 이런 일을 여러 차례 본 적이 있습니다. 저희 아이들이 어렸을 때입니다. 두 살 터울인 위로 누나와 아래 동생이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싸우면, 두 아이가 사생결단을 하고 싸우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두 아이가 무섭게 싸우는 것을 보면서 내 자식이 맞는가 하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몇 주간 미국에 가느라고 집을 비운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아침에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 녀석의 가방을 챙겨주려고 보았더니 제 누가가 이미 전 날 저녁에 동생의 가방을 다 보아 두었더라구요! 아이들이 때때로 집에서는 싸우지만 밖에 나가서는 서로 도와주고 아껴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역시 가족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평소에는 정말로 친하게 지나다가도 어려움이 생기면 흩어지는 것은 시민이 아니라 외인입니다. 그러나 가족은 비록 갈등이 있더라도 어려울 때 함께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가족입니다. 교회는 가족의 정신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이제 두 번째로 주목하려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성경은 나그네가 아니라 권속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권속[oijkei'o"/오이케이오스]이라는 말이 ‘가족’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권속이라는 말로 번역한 것은 일차적으로 서로 돌아보아야 할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권속’이라는 말에는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 속한 사람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교회는 이 땅에서의 가족일 뿐만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여 있는 하늘의 가족입니다.

2. 우리는 손님이 아니라 가족입니다.

손님은 까듯하게 대접을 받지만 그 집안일에 대한 책임은 물론이고 권리도 없습니다. 그러나 가족은 책임뿐만 아니라 권리도 함께 가집니다. 교회가 무엇이냐는 말을 설명할 때 시민은 서로 사랑하여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가족은 하나님의 복을 함께 누릴 권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함께 교회를 이루는 사람들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권리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행복을 누릴 권리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오래 전, TV의 한 예능프로그램에 방영(2010/9/26 MBC)된 초등학교 2학년생의 시가 대한민국 아빠들을 슬프게 만든 적이 있습니다. 그 시의 제목은 ‘아빠는 왜?’였습니다.
아빠는 왜?
엄마가 있어 좋다. / 나를 이뻐해 주어서.
냉장고가 있어 좋다. / 나에게 먹을 것을 주어서.
강아지가 있어 좋다. / 나랑 놀아 주어서.
아빠는 왜 있는지 모르겠다.

초등학생이 쓴 거짓 없는 시에서 엄마와 냉장고는 물론, 강아지만도 못한 아빠의 무력한 존재감이 드러났습니다. 이에 한 네티즌은 “아빠는 엄마를 예뻐하고, 냉장고에 먹을 것을 채워 넣고, 강아지 사료주려고 존재한단다.”라는 글을 남겨 씁쓸한 아빠의 심경을 대변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주변에서 무한한 책임만 있고 함께 누릴 권리가 없는 아버지들의 무거운 어께를 봅니다. 그런데 아버지들이 무겁게 느껴지는 것은 책임의 무게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섭섭함의 무게일 것입니다. 아무리 무거워도 우리의 아버지들은 그 짐을 져왔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알자 주지 않는다는 섭섭함이 가장 무거운 짐이 되었습니다. 가족,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여야 할 책임이 있을 뿐만 아니라 모두 사랑받고 존경받아야 할 권리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영적 가족입니다. 사도 바울은 어려울 때 서로 사랑하여야 할 책임이 있는 ‘시민’이라는 말로, 어려운 일을 하며 존경받아야 할 권리가 있는 ‘권속’이라는 말로 교회를 표현하였습니다. 영적 가족으로써 교회는 서로 사랑하여야 할 책임과 모두 존경받아야 할 권리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사랑하고 존경받는 영적 가족인 교회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영적 가족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회가 서로 사랑하고 모두 존경받아야 할 가족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19절 말씀은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은 그 앞에 있는 것들이 원인이 되어서 그 결과로서 시민이요, 권속인 가족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가 되기 위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II. 이유  

우리가 어떻게 가까워져 가족이 되었습니까? 왜 교인들은 한 가족이 되는 것입니까? 전에는 멀리 있던 사람 즉 가족이 아니었던 사람이 이제는 어떻게 가까워져 즉 가족이 되었습니까?

13절 말씀입니다.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여기에 우리가 주목하여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전에는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의 피로 하나님께 가까워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과 가까워진 사람들은 즉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피차 서로에게 형제와 자매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피 입니다.

1. 같은 피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의 핵심 신앙은 바로 ‘예수님의 피’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믿는 신앙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달려서 인간을 위하여 피를 흘려주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고, 그래서 한 형제자매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가족은 같은 부모에게서 같은 혈통을 받은 형제자매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피를 나눈 사람들을 가족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가족은 예수님의 피를 믿는 사람입니다. 혈액형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이루신 일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이루신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로 막힌 담을 허셨습니다(:14). 예수님은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셨습니다. 사람과 사람을 갈라놓는 중간에 막힌 담을 자신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허셨습니다. 그러니 사람과 사람 사이에 증오의 담을 점점 더 높이 쌓아 가는 사람은 참으로 예수님을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헐어버리신 담을 쌓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과 반대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막힌 담을 허는 사람이 되어야지 담을 쌓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둘째로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로 율법을 폐하셨습니다(:15).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려 죽으심으로 여러 가지 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희생하여 유다인과 이방인을 하나의 새 민족으로 만들어 평화를 이룩하셨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네가 옳으냐? 네가 옳으냐?’ 하는 시비(是非)의 담이 쌓였습니다. ‘네가 잘 했느냐? 내가 잘했느냐?’는 공로(功勞)의 담을 쌓았습니다. 시비를 따지고 공로를 다투는 것이 율법입니다. 그런데 시비를 따지고 공로를 세움으로 자신을 구원할 인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율법이 아니라 은혜로 얻는 구원의 길을 허락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공로가 아니라 은혜로 구원에 이르는 길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는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셋째로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로 원수 됨을 소멸하셨습니다(:16). 인간의 타락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만 원수가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만 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깨어졌습니다. 사람과 사람의 사이도 원수가 되었습니다. 에덴동산을 떠난 후 아담과 하와의 두 아들 중 형인 가인이 동생인 아벨을 죽이는 일이 있었습니다. 형제가 아니라 원수가 되었습니다. 인간은 서로를 미워하고 증오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죄 없으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원수 되었던 모든 요소를 없이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도 화해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평화의 길이 마련되었습니다. 그 피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평화의 길이 만들어졌습니다. 예수님의 피를 믿는 사람들은 하나의 가족, 영적인 가족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하나의 가족으로 묶는 영적인 끈임을 믿어지는 은혜가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같은 피를 믿는 사람들이 자주 가족이라는 본분을 잊어버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7절 말씀입니다.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모든 사람에게 평화를 선물하셨습니다. 피 뿐만 아니라 평화를 누리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가족이 된다는 것은 같은 피를 가지고 있다는 것 이상입니다. 같은 피를 나눈 형제라도 다른 마음을 가지고 싸우는 것을 우리는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평안이라는 선물을 이미 사람들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가족인 것은

2. 같은 맘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가족을 구성하는 가장 기초적인 단위는 부부입니다. 같은 피를 나눈 자식을 두기 전에, 다른 피를 가졌지만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 된 아내와 남편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사람들에게 평안이라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평안은 행복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정에 행복을 주셨습니다. 교회는 이 행복을 지켜가는 사람들입니다.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 아버지와 아들이 있었습니다. 보다 못한 어머니가 지혜로운 사람을 찾아가서 남편과 아들의 사이를 좋게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아들에게 아버지께 가장 불만스러운 점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아들은 “저는 아버지께서 머리를 쥐어박으실 때가 가장 싫어요. 저를 어린아이로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다음, 아버지에게 아들을 사랑하는 방법을 물었습니다. 아버지는 “표현하기가 영 쑥스러워서 사랑한다는 말 대신 아들의 머리를 살짝 쥐어박곤 하죠.”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사랑의 표현을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손을 잡아 주었습니다.

그들에게 지혜로운 사람이 말합니다.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 다를 뿐, 두 사람은 서로를 깊이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필요한 것은 하나입니다. 상대방의 눈높이에서 바라볼 수 있는 ‘이해’라는 안경을 끼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미 같은 맘, 평안을 주셨습니다. 가족은 적이 아닙니다. 가족에게는 적대감이 아니라 이해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주신 평안을 지키어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평안이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같은 피, 같은 맘. 그리고 한 가지 더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18절 말씀입니다.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성경은 “이방 사람과 유대 사람 양쪽 모두,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모두 한 성령님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갑니다. 같은 영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가족인 것은

3. 같은 영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원망하고 불평하고 싸우며 살고 싶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원하는 데로 평화를 누리고 사랑하며 이해하며 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인간을 이끌어 가는 또 다른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피를 나누고 같은 맘을 가지고 있지만 파멸로 끝나는 사람들은 그들이 악한 영에게 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 순종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가정을 위해서는 반드시 기도가 필요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을 지켜주시는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시대는 가족의 해체라는 핵가족 시대를 훨씬 지나서 가족의 부재라는 일인 가구 시대에 도달하였습니다. 삼촌, 고모라는 말이 없어질 것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현실이 되었습니다. 이러다가는 부모, 자식이라는 말이 없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으로 인류의 종말을 앞당길 것이라는 조심스러운 관측도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교회는 가정의 아름다운 가치를 지키는 곳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부모를 존경하고, 자녀를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고 행복한 가정을 가꾸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가 영적인 가족으로 사명을 다하여야 합니다. 고령화시대가 되면서 어쩔 수 없이 일인 가구가 많아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때, 누가 여러분을 위로해 주고 누가 여러분을 격려해 줄 수 있겠습니까?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가 가족인 것은 같은 예수님의 피와 평안이라는 같은 맘과 성령님이라는 같은 영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외인이 아닌 같은 시민으로, 손님이 아닌 가족으로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시민으로써 서로 사랑하는 책임을 다하여야 합니다. 가족으로써 존경받는 권리를 누려야 합니다. 교회는 영적 가족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행복이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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