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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최고로 행복한 사람 (행 26:2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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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로 행복한 사람 (행 26:24-32)


< 성도의 진정한 자랑거리 > 

사람들은 다 자기 잘난 맛에 삽니다. 그러므로 누군가 잘난 척 하면 약간의 맞장구도 쳐주면서 격려해주십시오. 가끔 너무 지나치게 잘난 척을 하면 아니꼬워서 팍 초를 치고 싶지만 용서해 주십시오. 우리는 모두 다 현행범, 아니면 전과자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잘난 척을 하고 싶어 할 때 그를 이해해주고 높여주는 것도 자비입니다. 어떻게 보면 돈을 주는 마음보다 명예를 주는 마음이 더 자비로운 마음입니다. 

그처럼 사람들이 다 자기 잘난 맛에 살듯이 성도는 성도다운 잘난 맛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상처를 받아도 사랑과 헌신을 포기하지 않고, 어떤 환난을 당해도 힘과 용기와 웃음을 잃지 않고, 아무리 힘들어도 위축되지 않고 내일의 소망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고, 자신에게 주어진 분수의 복을 감사하면서 꿋꿋하게 자기 길을 가십시오. 믿음의 선진들은 거룩한 자존심을 끝까지 지키며 자기 길을 갔던 사람들입니다. 

성경을 보면 거룩한 자존심으로 살았던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그가 조카 롯과 함께 요단들에 도착했을 때 많은 양떼들 때문에 다툼이 생기자 거룩한 자존심을 가지고 말했습니다. “롯아! 너와 나는 한 골육이다. 이렇게 싸우지 말자. 네가 우로 가면 내가 좌로 가고 네가 좌로 가면 내가 우로 갈게. 네가 먼저 마음대로 선택해라.” 그처럼 거룩한 자존심을 가지고 양보했기에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요셉이 이방 땅에서 보디발의 종으로 팔렸다가 가정총무가 되었습니다. 그때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했습니다. 이방 땅에서 많이 외로웠고 젊은 혈기가 있었지만 그는 신성한 자존심을 가지고 말했습니다. “내가 어찌 하나님 앞에 죄를 짓겠습니까? 저는 이럴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상황을 뿌리치고 결국 감옥에 갔습니다. 

외로운 젊은 청년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까? 그에게 자신은 하나님의 자녀란 거룩한 자존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거룩한 자존심을 가지면 사는 세계가 달라지고, 보는 것도 달라집니다. 반면에 삼손은 하나님이 그에게 놀라운 힘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들릴라의 무릎에 머리를 대고 신성한 자존심을 버림으로 결국 눈알이 빠지고 비참한 인간 노리개로 전락했습니다. 

이제 거룩한 자존심을 가지고 “예수 믿는 사람이 왜 그래!”라는 말을 듣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십시오! 신앙생활하면서 가장 억울한 말은 “아니! 예수 믿는 사람이 왜 저래!”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들끼리는 절대로 “예수 믿는 사람이 왜 그래!”라는 말을 하지 마십시오. 그 말이 주는 고통이 얼마나 큰지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억울해도 조금 더 잘 믿으라는 채찍질로 알고 성도답게 살려고 하는 성도가 위대한 성도입니다. 

어느 날, 교회에서 한 여 집사가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집사님! 왜 그렇게 눈물을 흘리세요?” “자존심이 상해서 그래요.” “무슨 일인가요?” 알고 보니 그녀는 남편의 말을 늘 존중하며 살았는데 어느 날 남편이 불필요하게 월급을 낭비해서 다투다가 남편에게 심한 말을 했습니다. 그때 남편이 말했습니다. “당신은 예수 믿으면서 믿는 사람이 왜 그래!” 

그 말이 자존심에 얼마나 큰 상처를 주었는지 즉시 남편에게 사과하고 교회에 와서 기도하니까 자꾸만 눈물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면서 생각했습니다. “내가 성도니까 더 참았어야 하는데 시시한 것 때문에 싸웠구나!” 그런 자책감으로 눈물을 흘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십자가의 눈물을 반드시 기억해주실 것입니다. 사실 그렇게 거룩한 자존심으로 사는 것이 성도의 진짜 자랑거리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입신해서 천국까지 보았지만 그것도 자랑거리가 아니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자랑거리가 있었는데 그는 약함을 자랑했습니다(고후 12:5). 일설에 의하면 사도 바울은 평생 간질과 백내장으로 고생했습니다. 특히 간질은 그의 자존감에 큰 상처를 주었습니다. 의사 선생님들의 말에 의하면 간질은 신경성 이상으로 잠깐 경직되는 병이기에 간질에 대해 지나친 편견을 버리라고 합니다. 

간질이 있어도 얼마든지 정상생활을 할 수 있고 결혼생활에도 문제가 없다고 합니다. 실제로 소크라테스, 줄리어스 시저, 나폴레옹, 아이작 뉴턴, 토스토예프스키도 간질환자였습니다. 그러나 의학지식이 없던 옛날에는 간질이 천벌로 여겨졌고, 당사자도 자존감에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간혹 발작을 일으키니까 사도로서의 권위에 큰 손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가시를 없애달라고 하나님께 3번 간구했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아!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내 능력은 오히려 약한 데서 더 온전해진다.” 

바울에게 약함은 오히려 축복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약함 때문에 교만하지 않고 주님의 능력이 계속 자신에게 머물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약함을 자랑하며 고백했습니다. “내가 비록 약해도 내게 있는 하나님의 은혜면 충분하다!” 그래서 그가 얼마나 능력이 있었는지 그의 손수건만 얹어도 병자들이 벌떡 일어났지만 자기의 약함을 위해서는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위대한 존재입니까? 

바울처럼 거룩한 자존심으로 사십시오. 현재 삶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에 만족하고 감사하지 못하면 은혜가 아무리 부어져도 그것은 밑 빠진 웅덩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감사하는 믿음을 체질화시키십시오. 살면서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가 주님과 깊은 사랑의 교제를 가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기뻐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마십시오. 

< 성도답게 사는 비결 > 

하나님은 우리가 성도답게 행복하고 풍성하고 매력적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어떻게 성도답게 매력적으로 살 수 있습니까? 

1. 결코 흔들리지 마십시오 

사도 바울은 3차 선교 여행이 후 예루살렘에 갔다가 성전에서 극렬 유대인들에게 체포됩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22장부터 26장에 걸쳐 5번의 변증을 하는데 본문은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 앞에서 한 5번째 변증(행 26:2-23) 후에 있었던 장면입니다. 5번째 변증에서 바울이 골수 바리새인으로 있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예기를 하면서 회개와 부활에 관해 말하자 그 얘기를 듣고 베스도 총독이 말했습니다. “바울아 너가 미쳤구나.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하는구나!” 

그때 베스도 총독이 정말 미쳤다고 생각했을까요? 아닙니다. 베스도는 바울이 보통 사람들과는 전혀 달리 사는 모습을 보고 그런 말을 한 것입니다. 정상적으로 살면 높은 학식과 신분으로 최고의 영예를 누리며 살 수 있는데 그것을 포기하고 힘든 상황을 자초하는 모습을 보고 미쳤다고 한 것입니다. 그처럼 때로는 좋은 일에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목표에 미쳐야 목표에 미칩니다(도달합니다). 

옛날 초기 공산주의자들은 공산주의 사상을 위해 삶과 사업, 종교와 취미, 그리고 빵과 가족과 친구와 연인까지 모두 버렸습니다. 어떤 공산주의자는 연인에게 절교 편지를 보내면서 이렇게 편지했습니다. “이제 나를 잊으시오! 나는 공산주의를 위해 꿈속에서도 일하고 있소. 이 비전을 떠나서는 어떤 우정도, 사랑도, 대화도 존재할 수 없소. 나는 이 비전을 위해 감옥에 갈 준비가 되어 있고 필요하다면 죽을 것이오.” 

그 공산주의자는 잘못된 환상을 좇아갔지만 그의 자세만은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고 “나는 예수님 한분이면 만족한다.”고 고백하면서 사는 것이 인생 최대의 행복입니다. 양철냄비는 땅바닥에 내려놓으면 금방 식지만 돌솥은 오래 온기가 유지됩니다. 이제는 양철냄비처럼 쉽게 흔들리는 신앙을 가지지 말고 돌솥처럼 꾸준한 신앙을 가지십시오. 왜 신앙이 금방 식습니까? 진짜 은혜와 행복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큰집을 원하지만 사실 땅의 것으로 만족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돈도 사명을 위해 벌어야지 정욕을 위해 벌면 안 됩니다. 궁극적으로 인간의 소원이 만족을 위한 것이라면 한 가지 분명합니다. 그것은 “예수님만이 진정한 만족을 준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 한분만으로 만족할 수 없으면 어떤 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지만 예수님 한분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은 항상 만족하며 살 수 있습니다. 

서울에 한 자매가 있었습니다. 동생은 남대문에서 포목상으로 돈을 많이 벌었고 언니는 잘 살지는 못했지만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언니가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동생이 언니의 임종을 지켜보면서 손잡고 울었습니다. “언니! 일사 후퇴 때 월남해 잘살아 보자고 이제까지 왔는데 언니는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이렇게 고생만 하다가 죽으니 예수 믿고 잘산 게 무엇이고 예수 믿고 덕본 게 무언가요?” 

그때 언니가 조용히 말했습니다. “경자야, 사람은 다 죽어. 나는 조금 일찍 가지만 하나님한테 가는 거야.” 그리고 찬송하며 편안하게 임종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자 동생의 눈에는 언니가 정말 위대하게 보였습니다. 자기는 돈 몇 푼 벌겠다고 때로는 남대문에서 머리채 휘어잡고 싸우면서 결국은 큰집에서 살지만 언니는 언제나 순수한 믿음으로 살다가 평화롭게 죽는 모습을 보니까 자기 삶이 오히려 비참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때부터 동생도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 언니처럼 죽을 때까지 “나는 예수 믿는 것 한가지로 족하다.”고 말하면서 믿음의 길을 끝까지 제 코스로 가십시오.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은 어떤 길을 선택하고 그 길로 갈까 말까 망설이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믿는다면서 교회 일보다 다른 일에만 관심을 둡니다. 그러면 어떻게 작품인생이 나오겠습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꾸준히 가야 작품인생이 되고 그때 진정한 행복이 주어집니다. 

여름에 시골의 가로등 밑을 보면 많은 불나방들이 떨어져 있습니다. 그 불나방들은 죽는 줄 알면서도 빛을 향해 일직선으로 나아가서 부딪혀 결국 죽습니다. 그런 불나방들을 보면 감탄이 나오고 그런 무의미한 죽음도 위대해 보입니다. 그처럼 주님의 빛을 향해 몸과 마음을 아끼지 말고 최선을 다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이 흔들리지 마십시오. 그때 가장 복되고 매력적인 삶이 펼쳐질 것입니다. 


2. 구원의 확신을 가지십시오 

베스도가 미쳤다고 말하자 바울은 자신이 바른 정신으로 말한다고 했습니다(25절). 그리고 아그립바 왕에게 말머리를 돌려 말했습니다. “왕이여! 선지자를 믿습니까? 믿는 줄 압니다.”(26:26-27) 그때 아그립바 왕이 말합니다. “네가 적은 말로 나까지 그리스도인을 만들려고 하는구나!” 그때 바울이 말했습니다.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은 이렇게 결박 받은 것 외에는 다 나처럼 되기를 원합니다(29절).” 

아그립바 왕의 입장에서 보면 어이없는 말입니다. 바울을 살리고 죽일 권세가 자기에게 있는데 바울이 자기처럼 되라고 하니까 얼마나 어이가 없습니까? 그러나 사도 바울은 ‘구원 받은 성도’라는 존재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알고 있었기에 그렇게 담대히 말한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바울이 “나처럼 되라!”고 한 것의 핵심 의미는 무엇입니까? “나는 산자다! 나는 영원을 품에 안았다! 이제 너희도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땅에 있었으나 영원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보이는 것에 눈길을 돌리지 않았고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를 소유했기에 어떤 환경에서든지 자유했습니다. 그런 눈으로 세상을 보니까 자기를 심문하는 총독 베스도와 아그립바 왕이 오히려 측은하게 여겨져 “나처럼 되십시오!”라고 한 것입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핍박자에서 전도자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복음 때문에 수많은 고난을 당했지만 그래도 기뻐했습니다. 고난은 그에게 행복과 영광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천국이 보장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높아도 불쌍하게 보여서 육신이 묶인 그가 영혼이 묶인 그들에게 “여러분들도 구원받고 나처럼 되십시오!”라고 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구원받은 천국 백성으로서 믿음으로 사십시오. 그러면 정말 행복해지고 모든 시름과 걱정이 사라질 것입니다. 바울의 위대한 능력과 영향력은 자신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란 믿음에서 나왔습니다. 그 영향력이 얼마나 놀라운지 당시 대적들은 그를 염병이라고 했습니다(행 24:5). 그러나 그의 고백은 결코 헛된 고백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사도 바울의 영향력은 얼마나 놀랍습니까? 

베스도 총독이나 아그립바 왕은 지금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습니다. 왕관을 벗으면 그들은 허깨비입니다. 그들은 겉은 화려하나 속은 비어 있었고 영혼은 남루한 속빈 강정이고 몸은 자유롭지만 영혼은 사슬에 묶인 가련한 사람들입니다. 그 사실을 생각할 때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이 세상에 가장 귀한 것은 바로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어떤 상황에서도 평안을 노래하며 기쁘게 사십시오. 


3. 거룩한 자존심을 가지십시오 

본문에서 베스도가 미쳤다고 한 것은 이런 동정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울아! 네가 교육계로 나갔다면 총장은 되었을 테고, 사업을 했다면 회장이 되었을 테고, 정치를 했다면 로마 총독을 했을 텐데 어쩌다 이런 신세가 되었느냐?” 어려움을 꿋꿋이 극복해나가던 사람도 그런 동정의 말을 들으면 자기 연민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전혀 위축되지 않고 “당신들이 모두 저처럼 되십시오!”라고 했습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은 대개 권력 앞에 위축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관대작 앞에서도 “나처럼 되십시오!”라고 당당하게 외쳤습니다. 당시 그의 외모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2년 동안 갇혀 지내면서 행색도 많이 초라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바울은 말했습니다. “저는 정말 행복합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합니다. 이 일은 정말 복된 일입니다. 여러분들도 저처럼 되십시오.” 그런 거룩한 자존심을 가지십시오. 

가끔 보면 어떤 분은 사회적으로 아주 훌륭한 사람인데 몸과 마음을 다 바쳐 교회를 위해 종처럼 섬깁니다. 또한 극심한 고난 중에서도 기쁨을 잃지 않고 변함없이 자기 자리를 지키고 교회를 위해 충성합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그런 삶을 이해하지 못하고 “너 미쳤니?”라고 합니다. 그때 이렇게 말하십시오. “아닙니다! 나는 멀쩡합니다! 당신들도 나처럼 살아보세요! 이게 얼마나 행복인 줄 아세요?!” 

세상 사람들의 성공은 다 1차원적 성공이고 근시안적인 성공입니다. 정확하게 계산적으로 사니까 언뜻 보면 성공하는 것 같습니다. 누가 일을 못하면 그냥 단칼에 자르니까 단기이익은 많이 남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회사는 커지고 지위는 올라가지만 주위를 돌아보면 한 사람도 진정한 친구와 동료가 주변에 없습니다. 그래서 목표에서는 성공했어도 인생에서는 실패한 존재가 됩니다. 

반면에 성도들은 성공해도 진짜 성공을 합니다. 은혜를 내세우니까 목표가 더디게 이뤄지지만 친구도 많아지고 하나님의 은혜도 넘칩니다. 그런 은혜에 대한 열린 마음이 있으니까 바울은 총독과 왕 앞에서도 죄수의 신분으로 “나처럼 되십시오.”라고 한 것입니다. 얼마나 당당합니까? 그러자 심문이 끝나면서 왕과 총독이 뭐라고 말합니까? “이 사람은 죄가 없다.”라고 합니다(31절). 아마 그들의 마음에는 바울에 대한 깊은 존경심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세상적인 자존심으로 말하면 누구에게도 꺾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베냐민 지파였고, 로마 시민권자였고, 골수 바리새인이었고, 율법으로는 거의 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그는 모든 훈장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지식을 가장 고상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바로 알면 고상한 사람이 되지만 바로 알지 못하면 더 자기 것만 찾고, 더 자기만 생각하고. 아주 치사하게 삽니다. 

살다 보면 두 가지 자존심을 봅니다. 하나는 세상적으로 꿀리지 않으려는 세상적인 자존심입니다. 그처럼 인물이 잘났다든지, 많이 배웠다든지, 세상적인 명예를 가졌다든지 해서 목에 힘주는 자존심을 가지면 사람들이 존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늘이 준 성도의 긍지인 신성한 자존심을 가지면 그 자존심 앞에서는 모두 고개를 숙이면서 위대하게 봅니다. 그런 거룩한 자존심을 가지십시오. 


< 최고로 행복한 사람 > 

이제 가난하면 사도 바울처럼 이렇게 고백하십시오. “여러분! 내가 가난한 것 외에는 다 나처럼 되십시오.” 실패했으면 이렇게 고백하십시오. “여러분! 내가 실패한 것 외에는 다 나처럼 되십시오.” 병들었으면 이렇게 고백하십시오. “여러분! 내가 병든 것 이외에 다 나처럼 되십시오.” 그런 고백으로 살면 사람들은 절대 우습게보지 않습니다. 고통 중에도 얼굴이 빛나고 아름다운 언어가 나오는 사람을 누가 비웃습니까? 

사람들이 믿다가 시험에 빠지는 가장 큰 원인은 세상 것을 취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처럼 예수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하면 시험 드는 법이 없습니다. 또한 “죽으면 죽으리라!”고 하면서 넉넉한 모습으로 사니까 그 사람 때문에 덩달아 행복해집니다. 이 세상에서 최고로 행복한 사람은 내 행복이 넘쳐서 남까지 행복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되기를 꿈꾸십시오. 

일전에 말씀준비를 하다가 갑자기 건물에 전기가 나갔습니다. 그때 후속처리를 잘못해서 몇 시간 동안 준비한 말씀이 다 사라졌습니다. 그러자 순간적으로 짜증이 나서 교회에 사람이 없는 줄 알고 건물을 수리하겠다고 아무런 통고도 없이 전기를 차단한 사람에게 짜증을 냈습니다. 그리고 목양실로 돌아와서 거울을 보니까 얼굴이 완전히 마귀처럼 보이고 도저히 “나처럼 되십시오!”라고 할 수 있는 성도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그 문제를 가지고 기도하자 곧 하나님이 이런 음성을 주셨습니다. “이 목사야! 이미 지나간 일이다! 다시 시작해라. 내가 돕겠다..”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그래서 슈퍼에 가서 하드는 사서 전기를 차단한 사람에게 다시 갔습니다. 그가 야단치러 온 줄 알고 화들짝 놀랐습니다. 그때 허리 뒤에 감추었던 하드를 내밀었습니다. “아까 놀라셨죠? 이거 드세요.” 그가 말했습니다. “목사님! 다시 설교를 준비하려면 어떡하죠?” 제가 말했습니다. “괜찮아요. 잠을 좀 줄이죠.” 그러자 비로소 마음도 편해지면서 설교도 더욱 잘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으려고 하십시오. 그 목적이 분명하면 그 목적 때문에 자신이 존귀해집니다. 네로에게 죽는 것만이 순교가 아닙니다. 매일 가정과 삶의 현장에서 정욕과 욕심을 못 박고 주님 뜻대로 사는 사람들도 위대한 순교자입니다. 그처럼 어려운 환경이나 돈의 유혹 앞에서 무릎 꿇지 말고 거룩한 자존심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성도답게 살면. 누구보다 행복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어떤 권사님은 93세까지 정정하게 살다가 물을 마시고 싶다고 해서 며느리가 물 뜨러 간 사이에 돌아가셨습니다. 평소에 그 권사님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고 순식간에 가게 하소서.” 

그 기도가 응답된 것입니다. 얼마나 행복한 죽음이고 행복한 삶입니까? 그처럼 행복은 현재의 처지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특히 사도 바울처럼 거룩한 자존심을 가지고 살면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행복과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한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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