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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주일] 엄친아 (엡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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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친아 (엡 6:4)

부모의 자식사랑은 절대적이라고 합니다. 부모들은 누구나 자기보다 자식을 더 사랑합니다. 그렇지만 모두가 다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사람에 따라 달라 정말로 자식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고 아닌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로서는 자녀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또 시대에 따라 많이 다릅니다. 자녀를 너무 많이 사랑하는 시대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그렇습니다. 좀 과할 정도입니다. 또 한 시대는 자녀들을 너무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고대 로마 사회가 그러했습니다. 오늘날로서는 상상이 안 될 정도로 자녀들에게 무정했습니다. 때로는 잔인할 정도였습니다. 

로마시대 아버지의 자녀에 대한 권한은 마치 절대군주와 같았습니다. 자녀를 자녀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물건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자녀를 아주 쉽게 노예로 파는 사람들이 있었고, 자녀를 많이 낳으려고 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만 일을 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자녀들이 커서 밭에 보낼 때는 하루 종일 일을 시키기 위해서 발에 차꼬를 채운 후 묶어 밭을 떠나지 못하게 했습니다. 벌주는 것 정도는 물론 마음대로였고 심지어 마음대로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법으로 자기 자녀를 죽이는 것은 죄가 아닌 사회도 있었습니다. 

당시는 자녀를 버리는 것도 관습화 되어있었습니다. 특히 병약한 아이를 낳으면 아주 쉽게 버렸습니다. 어제 언론 보도에 의하면 다운 증후군이 있는 아이를 낳자 병원 관계자가 이 아이를 데리고 가서 키울 것인지 물었다고 합니다. 저도 그 뉴스를 보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얼마나 놀랄 일이면 신문에 보도되겠습니까? 

로마시대는 그러했습니다. 낳은 아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가차 없이 내다버리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아이를 낳을 때에 산모는 항상 남편의 눈치를 보았습니다. 남편의 말 한 마디에 버려졌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딸아이는 태어났을 때뿐만 아니라 한참 자라고 난 뒤에도 아버지 눈치를 보아야 했습니다. 

고대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언제쯤 아이를 낳을 것 같다는 편지를 보냅니다, 아내의 그 편지에, 남편이 이런 답장을 했습니다, 아들을 낳으면 데리고 키우지만 딸을 낳으면 버리라..이런 편지가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아이들은 광장에 버려졌습니다. 서울 시청광장과 같은 곳인데 버려진 아이는 누구든지 데리고 갈 수 있었습니다. 당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버려진 아이를 데리고 가는 것은 사랑하고 키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노예로 만들어 일을 부리기 위해서 또 어떤 사람은 노예로 팔기 위해서 혹은 매춘사업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결국 사회문제가 되고 말았습니다. 여자들이 아이를 낳으려고 하지 않았고 아예 결혼을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결혼을 하면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낳게 되고 그때부터는 남편이 마음대로 하기 때문입니다. 어쩔 수 없이 결혼했다고 할지라도 어떻게 하든 아이를 낳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확률이 반이지 않습니까? 그러다 보니 로마의 출산율이 낮아졌습니다. 

요즘도 그렇지만 국력은 인구의 비례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니 로마 국력이 점점 낮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로마 정부가 관여하여 출산장려를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도 그렇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결혼했음에도 불구하고 자녀가 없는 사람들의 권리를 로마 정부는 정부에서 법으로 제한시켰습니다. 그런 시대였습니다. 

이처럼 아버지가 자식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풍조가 가득한 시대에 성경은 그 당시 풍조로서는 깜짝 놀랄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보면 당연한 말씀 같지만 당시로서는 대단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회에서 어떻게 저런 소리를 하는가? 저렇게 말하면 누가 교회에 가겠는가?’ 라고 생각할 수 있는 말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기독교란 어떤 종교인가?’ 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세상 풍조, 세상 관습에 따라가는 종교가 아닙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하고, 세상 풍조가 아무리 그렇다고 할지라도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세상을 뛰어넘어야합니다. 물론 맞는 것은 세상과 같이 가야합니다. 그러나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본래의 기독교는 이랬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그렇게 생각해도, 또 이런 말을 하는 것 때문에 사람들이 교회에 오지 않을 것 같아도 조금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런 사람은 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래의 기독교는 교회에 한 사람 더 오게 하려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애를 쓰고 기를 쓰지 않았습니다. 본래 기독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의 기독교도 뛰어넘어야합니다. 

교회도 뛰어넘어야하고 목사도 뛰어 넘어야 합니다. 사람들 듣기 좋은 말 하라고 세운 사람이 목사입니까? 그것은 사람의 종입니다. 목사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하든, 심지어 교회 다니는 여러분들이 무엇이라고 하든지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해야합니다. 그렇게 하면 세상이 말하는 ‘인기’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인기를 위하는 목사라면 그 사람은 목사가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의 이목과 인기를 위한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의 놀이터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세상 사는 법도 세상 사람들과 무언가 좀 달라야합니다. 돈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심히 돈을 벌어야하고 아껴야합니다. 그런데 돈은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가 쓰고 싶다고 무조건 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쓰라고 하는데 써야합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신자들입니다. 내 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녀 키우는 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 어린 자녀를 두신 분 또는 이미 장성한 자녀들이 있는 사람들도 이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합니다. 무언가 좀 달라야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한다 하더라도 성경 말씀이 그렇지 않으면 아니라고 말해야 하고 우리 삶으로도 보여주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생각해봅니다. 부모라는 존재는 자녀들에게 있어서 아주 특별한 존재입니다. 특히 영향력에 있어서는 대단합니다. 자녀들이 아무리 거부하고 부모들 말을 듣기 싫어해도 희한하게 부모 따라 그대로 가게 됩니다. 말하는 것도 따라가게 되고, 삶도 따라가게 됩니다. 그래서 자녀를 부모의 거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부모가 사는 대로 갑니다. 

혹시 여러분들이 자녀를 잘 키우셨으면 잘하셨습니다. 여러분의 말이나 삶으로 잘 보여주어서 여러분의 자녀들이 잘 자란 것입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여러분의 자녀들이 무언가 아니다 싶으면 그것은 그 어떤 다른 사람의 책임이 아닙니다. 선생님 책임도 아니고 사회 책임도 아니고 바로 여러분의 책임입니다. 여러분의 모습이 자녀들에게 그대로 비친 것뿐입니다. 누구도 원망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영향을 많이 미칩니다. 

부모들이 특별히 자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은 혹시 자녀들이 어디서 상처를 받았거나 힘든 일이 있을 때입니다. 부모들이 자녀를 제일 잘 치유할 수 있고 회복시킬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아버지입니다. 늘 어머니와 같이 하기 때문에 어머니일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아버지가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는지 모릅니다. 아버지가 한 마디만 잘 해주면 아이들이 살아납니다. 

그런데 그 반대가 문제입니다. 아이들에게 제일 많이 상처를 주는 사람도 부모입니다. 부모 중에서도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상처 주기 쉽고 자녀들이 좌절하도록 절망에 빠뜨리기 쉬운 것이 바로 아버지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아버지다워야 합니다. 부모가 부모다워야 합니다. 오늘 우리 스스로를 깊이 돌아보는 한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며칠 전 어느 일간지가 우리나라 유명한 작가 한 사람과 인터뷰를 했습니다. 이 작가는 기인이라고 소문이 나 있는 유명작가입니다. 기자가 작가에게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라고 보는지에 대해서 질문을 했는데, 이 작가는 거침없이 교육이라고 대답했습니다.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머리로 사는 시대가 가고 마음으로 사는 시대가 왔는데 교육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라고 말합니다. 학교 교육입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제 일은 가정교육입니다. 어머니, 아버지의 교육, 무엇보다도 아버지의 교육입니다. 그 교육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어머니, 아버지들이 자신들이 아이보다 낫다고 생각하고 내 뜻대로, 내 생각대로 아이를 키워나가려고 하고 내 주장대로 아이에게 어떤 일을 하려고 합니다. 이것 때문에 자신의 아이들이 그렇게 힘들어하고 괴로움을 당하고 잘못되는 일들이 많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따라가지도 못하면서 도리어 자기가 아이보다 낫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이 작가의 말을 더 들어보겠습니다. 
‘행복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꼭 대기업에 취직하고 억대 연봉을 받아야 행복한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좋은 대학을 가면 잠시 기분이 좋습니다. 좋은 회사에 취직하면 잠시 기분이 좋습니다. 돈을 많이 벌면 기분이 좋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좋지만 그렇게 오래 기분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당연히 행복과 직결되지는 않습니다. 

작가는 또, ‘10위 경제대국에서 국민 자살률 1위, 청소년 자살률 1위, 노인 자살률 1위 이것이 말이 되는가?’ 라고 말합니다.

사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어떻게 한국이라는 나라가 이렇게 괴물 같은 세상이 되었습니까?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가운데 연세 드신 분들은 이 나라의 오늘 이 모습을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수고를 했습니까? 제대로 먹지도 못하면서 온 힘을 기울여서 공부했습니다. 참 많은 애를 쓰고 힘을 썼습니다. 우리 선배들 가운데는 독일로 광부로 팔려가기도 하고, 간호사로 가기도 하고 월남파병으로 생명을 잃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나라를 만들었는지 그 역사가 말합니다. 

‘부모들은 그저 부자 되라, 이기라고만 한다. 할 말이 그것밖에 없는가? 요즘 청춘들이 가장 불안초조해하는 것은 미래다. 하지만 어느 시대나 미래는 불투명했지 않은가?’

사실입니다. 항상 그랬습니다. 역사적으로 아무리 기업환경이 좋고 취직 환경이 좋다고 해도 당사자는 항상 불안했습니다. 문제는 환경이나 사회 여건이 아닙니다. 조건이 문제가 아닙니다. 부모들이 자꾸 더 좋은 대학 가야하고, 더 좋은 데 취직해야하고 더 돈을 벌어야한다고 압력을 넣으니 압박감을 받습니다. 심지어는 아내들도 남편들에게 이런 압박감을 줍니다. 이렇게 되니 남편들이 견디지 못하고 자녀들이 견디지 못합니다. 

상당히 기인인 이 작가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나보고 기인이라고 하는데, 내 눈에는 세상 사람들이 기인으로 보인다. 어떻게 그렇게 돈을 존경할 수 있을까?’

사실 사람들이 돈을 존경하는 것 같지 않지만 내용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정말로 존경하는 것 같습니다. 맘몬신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정말로 신으로 섬기는 것 같습니다. 

작가이기 때문에 아주 재미있는 말을 했는데 한 번 들어보십시오.
‘제비는 그저 잘 날면 되고, 두더지는 땅을 잘 파면 되고, 물고기는 헤엄을 잘 치면 된다. 인간 세상도 한 가지만 잘하면 먹고 사는데 별 지장이 없다. 그런데 지금 우리 교육은 제비한테 땅까지 파라고 하고 두더지한테 날아보라고까지 하는 격이다.’

그렇습니다. 전부다 잘 하라고 합니다. 어린 아이에게 악기도 잘 해야 하고 노래도 잘해야 한다고 합니다. 악기도 한 가지만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체육도 이 종목 저 종목 다 잘해야 한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질질 끌려 다닙니다. 어제가 어린이날인데 어린 아이들이 어린이날인 오늘 하루 종일 놀면 안 되냐고 묻는다고 합니다. 이것이 아이들이 할 질문입니까? 이런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작가는 또 ‘이런 말을 하면 젊은 애들은 자신감으로 얼굴이 밝아지는데 학부모들은 싫어한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심지어 자기의 목자라고 생각하는 목사가 그런 말을 해도 싫어합니다. 예배당에 오면 내 교육방침과 맞는 말을 하면 좋아하고 내 방침과 다르고 내가 하는 것과 다르면 싫어하면서 목사님은 세상 물정도 모른다고 합니다.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아는지 모르는지는 하나님만 아십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 도대체 싫어합니다. 

그저께 한 대학 연구소가 발표한 자료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어린이와 청소년의 물질 만족도, 물질 행복도는 OECD 회원국 가운데 네 번째라고 합니다. 좋은 것 같습니까? 

우리나라 경제력은 어떻습니까? 잘 이야기하는 사람은 열 번째라고 이야기하고 또 열두 번째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이들의 물질 만족도, 물질 행복도는 네 번째라 합니다. 잘 한 것 같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잘한 것이 아닙니다. 경제력이 열 번째 혹은 열두 번째가 되면 아이들의 물질만족도도 그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물질만족도가 높습니까? 부모들이 자기들이 행복하게 사는 것보다 이렇게 하면 아이들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데 써야할 것, 사회와 이웃과 어려운 사람들 또 자신을 위해서 써야할 것을 전부 다 자식들에게 쏟아 부었기 때문입니다. 좋은 것이 아닙니다. 결과가 다릅니다. 부모들이 이것을 모릅니다. 많이 쏟아 부으면 좋은 줄 알고, 돈만 많이 쓰면 좋은 줄 아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와 함께 이 아이들의 행복지수는 어떠한지에 대해 조사했는데, OECD국가 23개국 중 우리나라가 마지막인 23등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물질 만족도, 물질 행복도는 네 번째인데 왜 행복지수는 꼴찌입니까? 아마 28개 국가까지라면 28위일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한 해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4년째 이 조사를 했는데 4년 내내 꼴찌라고 합니다. 

너무나 많은 부모들이 자녀들을 망치고 있습니다. 자녀들을 괴물로 만들고 있습니다. 요즘 언론을 통해서 보았을 것입니다. 아이들이 놀다보면 해코지 할 수도 있습니다. 잘못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다른 아이들을 죽기까지 못된 짓을 하는 아이들이 여기저기에 그렇게 많습니까? 괴물들 아닙니까? 괴물 세상 아닙니까? 괴물 나라 아닙니까? 누가 이 좋은 한국을 괴물 세상, 괴물 사회, 괴물 나라로 만들었습니까? 어른들이 그랬습니다. 부모들이 그랬습니다. 부모들은 나름대로 잘한다고 하는 게 그것이었이었습니다. 

아이라는 풍선을 눌렀는데 그 풍선 바람이 어디로 빠졌습니까? 엉뚱한 데로 나와서 괴물로 빠지고 말았습니다. 괴물 사회, 괴물 자녀로 바람이 빠져나가고 말았습니다. 부모들은 나는 저 괴물을 만들지 않았다고 이야기하는데 아닙니다. 바로 어른들, 부모들이 그 괴물을 만들었습니다. 자녀들을 노엽게 해서 그렇습니다. 자녀들이 어릴 때는 그저 부모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시키는 대로 따라하다 보니 이상한 괴물이 만들어져 나오고 만 것입니다. 

괴물을 만드는 비결이 많습니다. 자녀를 자꾸 비교하는 것입니다.
부모들은 이집 아이들, 저 집 아이들과 비교합니다. 죽이고 싶으면 비교하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자녀뿐만 아니라 남편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을 이 남편, 저 남편과 비교하는 잘못된 아내들이 남편을 죽이고 있습니다. 내 자녀를 죽이는 어머니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잘 되게 한다고 하면서 그러나 자녀를 죽이는 어머니들이 많습니다. 비교해서 많이 죽입니다.

‘엄친아’ 라는 말을 아실 것입니다. 저는 바로 며칠 전에 알았는데 엄마 친구 아들을 말한다고 합니다. 엄마가 자기 친구 아들을 그렇게 대단하게 멋진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듣는 아이가 미칩니다. 그 집 아이처럼 공부도 잘하고 착한 아이가 되고 싶지 않은 아이가 어디 있습니까?
비교하는 것은 아이를 죽이려고, 망치려고 작정한 것입니다. 꼭 말로만 비교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은근하게 비교합니다. 그래서 남편들이 은근하게 죽어갑니다. 자식들이 은근하게 괴물이 되어갑니다. 자꾸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또 만족하지 못합니다. 욕심이 너무 많습니다. 치맛바람으로 교육열이 좋아 우리나라 교육이 이렇게 좋게 된 것은 좋지만 심합니다, 너무 심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과한 욕심이 오늘 한국 경제를 만든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적절하게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들이 위대한 한국인들을 낳았고 오늘 위대한 한국을 만들었습니다. 넘치게 치맛바람을 일으킨 부모들은 스스로 자위하지 마십시오.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됩니다. 부려야할 욕심이 있고 부리지 말아야할 욕심이 있습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면 끝까지 만족하지 못합니다. 아이가 열심히 애를 써서 열심히 하고 잘 하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서 욕심을 냅니다. 아이 능력은 안 되는데 높으라고 하면 아이는 뒤꿈치를 들어야합니다. 들어보아야 한 뼘일 뿐이고 또 그것이 다입니다. 부모들이 너무 바라기에 폴짝 뛰기도 합니다. 이처럼 아이들이 부모를 만족시키려고 얼마나 애를 쓰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힘들여 든 발 뒤꿈치가 언제까지나 들려있을 수 있습니까? 내고오고 말지요. 폴짝 뛴 발이 언제까지나 공중에 들려있을 수 있습니까? 땅에 떨어지게 되지요.

또 하나는 자녀를 믿지 않습니다. 내 눈에는 모자라고 잘 안 되는 아이 같지만 아닙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아이들 나름대로 귀한 보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들은 그저 자기만 생각합니다. 자식에게 주는 가장 무서운 독 중에 하나가 자녀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믿어서 아이가 잘못 되는 것보다 믿지 않아서 아이를 잘못 만들어가는 일들이 훨씬 더 많고 질도 훨씬 더 악합니다.

부모들이 정말로 잘 알아야할 것은 내 자녀에 대한 내 생각이 틀릴 가능성이 많다, 그것도 적당하게 많은 것이 아니라 대단히 많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우리는 지금 내가 하려고 하는 일, 내가 지금까지 하고 있는 일들이 잘하는 것인지 잘못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부모님들은 아이가 잘 자라도록 돕는 정도만 하면 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녀들에 대해서 정말로 만족할 수 없겠습니까? 지금 있는 그대로 만족할 수 없겠습니까? 고맙다고 할 수 없겠습니까? 

저는 오늘 슬픈 이야기를 하나 하려고 합니다. 지난 주간에 장례가 두 번 있었습니다. 그 중 한 장례는 서른 살이 넘은 자매의 장례였습니다. 무거운 병에 걸린 그 자매는 오랫동안 밖에 나가지 못했습니다. 그 자매의 소원은 마음껏 밖에 나가보는 것이었습니다. 병이 심해지다 보니 복도에도 제대로 나가지 못했습니다. 어머니가 아이들 요람처럼 병상을 흔들어주는데 너무 너무 좋아합니다. 비행기를 타고 여행하고 싶다고 하니 부모의 가슴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흔들리는 병상을 비행기라 여기면서 그렇게 기뻐하고 얼굴이 환해졌습니다. 그러다 피곤하니 이제 호텔에 가서 쉬어야겠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흔드는 것을 멈추었습니다.

임종 바로 전 임종예배를 드릴 때 천국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임종 몇 시간을 앞두고 들려준 하나님 말씀을 분명하게 잘 받아들였습니다. 말을 못하니 눈으로, 몸으로 대답했습니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입술로 ‘아멘’도 하고 ‘예’ 하고 대답도 잘했습니다. 그러다 괴물같은 세상으로부터 영원한 자유를 얻었습니다. 부모의 아픈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집니다. ‘병이 낫지 않아도 살아있기만 해도 얼마나 좋을까? 한번만이라도 그 얼굴을 볼 수 있다면, 한 번이라도 목소리를 들으면 얼마나 좋을까?’ 보는 저도 가슴이 아프고 힘들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의 자녀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 만족하지 못하시겠습니까? 만족할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 하나 한 번 세어보십시오. 건강하게 있는 것..혹시 탈이 있어도 볼 수 있지는 않습니까? 목소리 들을 수 있지 않습니까? 멀리 있는 아이들이 있다면 전화라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것만으로도 만족할 것이 있습니다. 얼마나 큰 행복입니까? 감사하려고 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를 정말로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그냥 믿으십시오.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으로부터 믿으십시오. 아이가 있을 때 ‘난 널 믿는다.’ 내 말을 듣는 아이가 곁에 없을 때에도 ‘예야, 나는 너를 믿는다.’ 말하면 이것이 얼마나 큰 힘으로 아이에게 다가가는지 아십니까?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더라도 아이들에게 격려의 말을 해주십시오. 들을 때에는 물론 ‘넌 틀림없이 잘 할 것이다.’ 라고 말하고, 보이지 않는 데서도 아이 이름을 부르면서 ‘너는 잘 할 것이다.’라고 하십시오. 그 에너지가 아이에게 이어집니다. 

하나님이 들으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하나님께 ‘하나님, 우리 아이를 잘 되게 해주세요. 그렇게 키워주실 것이죠?’ 라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말씀을 믿고, 하나님 말씀으로 격려해주십시오. 그리고 있는 그대로 사랑하십시오. 더 원하지 마십시오. 더 요구하지 마십시오. 만약 할 것이 있다면 기도하십시오. ‘기도 외는 방법이 없느니라.’ 이 말은 기도에는 방법이 있다는 이야기이지 않습니까? 

하나 더, 지금 그 자녀들과 함께 무엇이든지 있는 그대로 즐거워하십시오. 나중에 하지 말고 지금 그대로 즐거워하십시오.

무엇보다도 최고의 길은 예수님과 가까이 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신비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로 하여금 어떻게 하든 예수님과 가까이하도록 하십시오. 예수님께 길이 있고 행복이 있고 평화가 있습니다. 더 자주 예수님을 만나도록, 더 자주 예수님을 생각하게 하도록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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