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성령강림주일] 성령의 사람 (행 2:42-47)

첨부 1


성령의 사람 (행 2:42-47)


1738년 5월24일 요한 웨슬리(John Wesley)는 올더스케잇 교회에서 성령의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웨슬리는 일기에 그 날을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저녁에 나는 별로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올더스케잇의 집회에 참석하였는데 한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고 있었습니다.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시는 일을 설명하고 있을 때 나는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나는 내가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를 믿고 있음과 주께서 죄를 거두어 가시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건져주셨음을 믿는 확신이 주어졌습니다.” 올더스케잇 회심 이후 요한 웨슬리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옥외 집회를 통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탄광촌을 다니면서 설교하고 노동현장을 찾아가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웨슬리의 설교는 많은 사람들을 회개시키고 예수를 영접 하는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웨슬리는 전도자였습니다. 매년 4,5천마일의 전도여행을 했습니다. 

1773년 이후에는 마차를 이용하였지만 그 전에는 말을 타고 다니며 전도를 하였으며 마상에서 설교하기도 했습니다. 회심한 웨슬리의 가슴에는 복음의 열정이 불타올랐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후 사울이 바울 되었을 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위해 자신의 생애를 드렸던 것처럼 웨슬리 역시 열정적인 복음전도자로서 그의 남은 생을 살았습니다. 80세에 쓴 일기에 보면 자신이 건강하게 지내는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첫째, 나를 부르신 부름에 합당한 자가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권능. 둘째, 1년에 4,5천 마일을 계속 여행하는 것. 셋째, 일정한 시간에 일어나는 것. 넷째, 항상 설교하는 것. 다섯째, 항상 심신을 유쾌하게 가진 것” 이라 했습니다. 건강한 삶의 비결이 바로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의 열정적 삶이었다는 고백이었습니다. 1791년 3월2일 오전 6시 성령의 사람, 요한 웨슬리는 영원한 안식의 나라로 들어갔습니다. 그의 기념비에는 세 구절이 새겨졌습니다. “세계는 나의 교구다” 그가 임종할 때 남긴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이다”, 동생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의 “하나님은 그 일군은 장사하시나 그 사업은 계속 하신다” 는 것이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을 사람들이 두려워했다고 본문 43절은 증거합니다. 이 말은 겁을 냈다는 뜻이 아닙니다. 두려움은 ‘awe’ 즉 존경심을 가졌다는 말입니다. 너무나 훌륭해서 어려워하며 신중한 태도를 보인 것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점점 좋아지니까 주위의 사람들이 존경을 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변화시킨 것은 성령이 임하여 성령의 사람이 되도록 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지금도 반복되어 일어납니다. 초대교회와 같은 동일한 성령의 역사가 임하도록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왜 신앙생활에 능력이 없습니까? 왜 기쁨이 사라졌습니까? 왜 열심이 식어졌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은 모름지기 성령으로 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의 사역이 아니면 결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성령의 임재를 사모하여 성령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사람은,
 
첫째로 서로 기도합니다 

최경주(崔京周) 골퍼는 PGA 경기를 하면서 어려운 교회에 헌금도 하고 간증도 종종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느 기자가 최경주 선수에게 물었습니다. “체력관리를 어떻게 하시나요?” “전에는 힘들게 운동을 하고 나면 쉬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쉬는 것이 몸에 좋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부터 게임을 마치고 피곤하더라도 헬스클럽에 가서 근육운동을 합니다. 근육이란 늘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긴장을 유지해야 합니다. 

플레이하는 동안 사용한 근육을 운동을 해서 다시 보충하는 것이죠.” 이는 신앙인의 문제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하는 대목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응답이 나타납니다. 더 이상 기도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해 책임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기도해서 응답받으면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라도 기도하기를 쉬지 말고 계속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령의 사람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42절입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여기의 ‘전혀 힘쓰니라’ 의 동사는 미완료과거형으로 전심전력을 다하여 지속적으로 기도하였음을 의미합니다. 기도에 힘쓰지 않으면 능력은 오래 지속되지 못합니다. 기도의 불이 꺼지면 모든 것이 다 꺼져 버립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 안 됩니다. 그러므로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은 기도와 정비례합니다. 서로 기도에 힘쓰는 모습이야 말로 성령의 사람의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오로지 기도하기에 힘썼습니다. 성령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사람이 되면 저절로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대화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끓어오릅니다. 저절로 기도하는 사람이 됩니다. 기도 소리가 넘치는 교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는 기도의 종교이어야 합니다. 기도가 없어지면 능력이 없어집니다. 기도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더 이상 성령이 역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디 성령의 임하심으로 서로 기도에 힘쓰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서로 사랑합니다 

성 프랜시스(San Francesco d'Assisi)가 길을 가다가 한 걸인을 만났습니다. 주머니를 뒤져보니 가진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는 걸인의 손을 잡고 “형제여, 미안하오. 마침 내게 가진 것이 전혀 없구려” 라고 말하자 걸인이 대답합니다. “아닙니다. 지금 당신에게서 가장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지금까지 어떤 사람도 나를 형제라고 불러준 적이 없습니다. 아무도 나의 더러운 손을 잡아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나의 손을 잡아주었고 나를 형제라고 불러주었습니다. 많은 돈을 받은 것보다 가장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사랑은 말이나 행동 이전에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가능케 하는 것이 성령의 능력입니다. 프랜시스는 사랑으로 충만한 성령의 사람이었습니다.

본문 44절입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예루살렘 교회는 체제나 조직이 없이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였습니다. 그들은 모든 물건을 서로 사용하였습니다. 필요에 따라 물질을 나누었습니다. 교회의 처음 모습은 사랑으로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누구의 것을 빼앗아 분배한 것이 아닙니다. 

나의 재물을 내어놓을 수 있었던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가 초대교회였습니다. 교회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성령이 함께 하지 않을 경우 서로 상처를 주고 분쟁을 일으키기 쉬운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초대 교인들은 이런 문제들을 극복하고 서로 사랑하였습니다. 성령이 임한 성령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가진 것을 서로 나누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사랑에 눈을 뜨게 됨으로 자신의 귀한 옥합까지 깨뜨리게 됩니다.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고 이웃을 위해 기꺼이 나눌 수 있는 사랑의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모름지기 성령의 사람은 사랑의 모습이 나타나야 합니다.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욕심과 감정을 버리고 성령으로 충만하여 서로 사랑하기에 힘을 다해야 합니다. 성령의 열매가 바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함으로 성령의 사람인 것을 나타내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서로 기뻐합니다 

팡세의 저자 파스칼 (Blaise Pascal)은 ‘걸어 다니는 병원’ 이라고 할 정도로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고통을 겪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던 그가 성령을 받자 마음에 기쁨으로 가득합니다. 성령의 불을 체험하던 순간을 팡세는 마지막 편 메모리알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654년 11월 23일 밤 10시 반부터 12시 반까지. ‘불’ 이었다. 철학자와 식자의 하나님이 아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확신, 확신, 느낌, 기쁨, 평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기쁨, 기쁨, 기쁨, 기쁨의 눈물.” 파스칼은 기쁨이라는 단어를 수없이 반복하였습니다. 

신앙인의 가장 기본적인 감정은 기쁨입니다. 신앙인은 우울한 사람이 아닙니다. 프란시스가 우울한 표정을 하고 슬픈 기색을 보이는 형제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형제여, 사람 앞에서 슬픈 기색을 하며 낭패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항상 품위를 잃지 않도록 하십시오. 죄는 당신의 방에서나 반성하십시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 앞에서 울고 신음하십시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십시오. 슬픔을 없애고 다른 형제들과 함께 어울리시오.” 

본문 46절입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초대교회 성도들은 성령에 의해 자발적으로 기쁨 충만한 상태에서 모였습니다. 모이는 것이 기쁘고 즐거웠습니다. 성령을 받으면 모이는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영적 교만을 품고 모임에 등한시하면 독선적 신앙으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자 기쁨의 에너지가 솟구쳐 올랐습니다. 담력으로 예수를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유대로, 사마리아로, 로마로,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 하였습니다. 

교회의 동력은 성령입니다. 성령께서 모든 것을 주관해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함 받지 않는 열심은 도리어 교회에 해를 끼칩니다. 성령강림은 교회를 교회답게 만들고 성도들에게 신앙의 근본을 되찾게 하는 영적사건이었습니다. 성령은 잠잠한 영혼을 깨워 성령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성령의 사람은 서로 기뻐합니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서로에게 기쁨을 주며 서로 기뻐하는 성령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레드우드 국립공원 (Redwood National Park)은 미국 캘리포니아 북부 해안지대에 있습니다. 그곳에는 레드우드(Redwood)라는 삼나무들이 있는데 지구상에서 가장 큰 나무들입니다. 어떤 것은 나무 둘레가 수십 미터나 되고, 키도 수백 미터나 되는 나무도 있습니다. 수명도 2,500년이나 된 나무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나무의 뿌리는 생각과 달리 그리 크지도 깊지도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 나무들은 비바람이 불고 폭풍이 몰려와도 끄떡없이 버티고 있습니다. 그 비결은 나무의 뿌리들이 옆에 있는 다른 나무의 뿌리와 얽혀져 서로 붙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레드우드처럼 세우셨습니다. 험한 세상, 환난과 핍박, 유혹이 많은 세상에서 혼자 살게 하지 않으시고 성도들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 서로 붙들어 주며 살도록 만드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사람들이 서로 지체가 되어 서로 한 몸을 이룬 신앙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함께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른 성령의 사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성령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서로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서로 기뻐해야 합니다. 부디 성령의 사람이 되어 교회를 부흥케 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