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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의 형제 자매들 (마 1: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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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형제 자매들 (마 1:18-25)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손인 이석씨가 있습니다. 이석은 30대 때에는 “비둘기처럼 다정한 사람들”이라는 대중가요를 부른 가수이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전주 이씨 종친회에서 전주에 그의 삶의 터전을 마련해 주어서 전주에서 살고 있다고 합니다. 이석씨의 젊은 시절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석의 가족들은 일제에서 해방이 되자, 그동안 살던 궁궐에서 쫓겨났습니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일을 하다가 한 번은 지치고 피곤해서 술집에 들어가서 술을 마시고 취기가 올라서는, 술김에 “나는 조선의 황손이다.”라고 소리를 질렀더니,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미친놈이 들어왔다.’고 그러면서, 다가와서 주먹질을 하고 발로 걷어차더랍니다. 조선왕조가 망한지 겨우 50년 정도 지났을 때의 일입니다. 왕가가 망한지 50년이 지난 후에, 왕손들이 길거리에서 얻어맞고, 사람들에게 발로 걷어 차인다면, 왕조가 망한지 600년이 지난 왕족의 후손들은 어떤 대접을 받겠습니까? 

육신적으로 나사렛 예수의 아버지인 요셉은, 다윗 왕의 후손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날 때에, 다윗 왕조는 망한 지가 이미 600여년이 지났습니다. 사실 다윗의 후손들은 자신의 조상들이 과거에 왕족이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어도 왕이 어떻게 사는 존재인지는 경험할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의 아버지인 요셉은 통일왕국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 다윗의 후손은 분명했지만, 이미 오래 전에 몰락한 왕조의 후손인지라, 요셉의 모습이나 삶 속에서, 자신이 왕족의 후손이라는, 어떤 분명한 징표도 갖고 있지 않은, 그저 자기의 생활에 성실하고 진실하고, 가난한 목수였습니다. 요셉은 조상들로부터 자신이 왕족이라는 어떤 징표도 받지 못했습니다. 요셉은 자기가 다윗 왕의 후손이라는 것을 증명해 줄 수 있는 골동품 하나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단지 요셉은 자신이 다윗의 후손이라는 말만 듣고, 갈릴리 지역 나사렛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천사가 나타나서 “다윗의 자손 요셉아!”라고 불렀습니다. 본문 20절 하반절에서 21절을 보면, 천사는 요셉에게 말하기를,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네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것이니, 너는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가 자기의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요셉을 찾아 온 천사는 요셉이 비록 가난한 목수이지만, 그의 조상이 다윗 왕인 것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요셉은 자신이 비록 다윗 왕의 족보에 올라 있는 것 외에, 자신과 다윗과는 비슷한 부분이 한 군데도 없다는 점을 이미 인정하고 있습니다. 

한 번 생각을 해보세요, 다윗은 천하를 호령하는 위대한 왕이었지만, 요셉은 겨우 문짝이나 책상, 아니면 동족을 처형하는 형틀인 십자가를 만드는 목수였습니다. 다윗은 전쟁터에 나가면 용감하게 싸우는 무적의 장수였지만, 요셉의 손에는 칼과 창 대신 대패나 톱과 같은 목공도구가 들려 있을 뿐입니다. 다윗은 넓은 영토를 가졌지만, 요셉은 한뼘의 밭도 가지고 있지 못한 가난한 목수였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생각과 판단으로는 다윗과 요셉은 비교할 수 없는 관계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보낸 천사는, 놀랍게도 다윗의 영광을 요셉과 관계시켰습니다. 천사는 요셉을 부를 때에, ‘능력 있는 목수 요셉아!’라고 하지 않고, “다윗의 자손 요셉아” 라고 불렀습니다. 사실 후일에 천사의 말에 순종한 목수 요셉은, 다윗의 영광을 능가하는 영예를 얻게 되었습니다. 다윗의 후손이라는 것 외에 다윗이 가진 영광은 그림자도 없었는데, 그런 요셉을 천사는 ‘다윗의 후손’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면 왜 천사는 위대한 왕 다윗의 영예를, 보잘것없는 시골 나사렛에 사는 목수 요셉과 관계를 시켰습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요셉이 맡은 책임이 다윗보다 컸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왕국, 영토 안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는 책임을 졌습니다. 다윗은 이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밤낮으로 전쟁터에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다윗의 손에는 이스라엘이란 민족의 장래가 달려있었습니다. 하지만 나사렛의 목수 요셉의 손에는, 전 인류의 장래가 달려 있었고, 요셉은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를 보호하고 지키는 책임을 맡았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자신의 백성의 육신적인 생활에 안정을 책임졌다만, 목수 요셉은 온 세상 사람의 몸과 영혼을 책임지실 귀한 분을 지키고, 보호할 책임을 맡았습니다. 그래서 천사는 본문 21절에서 목수 요셉에게 말하기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전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신 나사렛 예수를 보호하고 지키는 책임을 요셉이 맡았습니다.

그러니까 요셉이 지켜내야 하는 것은, 다윗이 지켜내야 했던 예루살렘 성보다 더 중요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사람이 지은 것으로 언젠가 무너져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목수 요셉의 보호를 받는 분은, 그 무너진 성을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성으로 다시 건설하실 분입니다. 

목수 요셉은 다윗보다 더 큰 싸움에서 이겼습니다. 이 세상에 오신 살아계신 하나님의 외아들이신, 나사렛 예수를 지켜 드리고, 보호하기 위하여, 사실은 다윗보다도 더 크고 무서운 싸움을 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본문 마태복음 1:18-25절의 말씀을 줌심으로 해서 나사렛 예수의 육신적인 아버지인 목수 요셉의 삶에 대하여 몇 가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목수 요셉은 다윗보다도 더 큰 싸움을 하면서 무엇을 극복하고 이겼습니까?  

(1) 목수 요셉은 분노를 이겼습니다.

통일왕국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인 다윗은, 성을 빼앗고 빼앗은 성을 지키는 싸움에서 승리를 했습니다. 하지만 목수 요셉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겼습니다. 가만히 생각을 해보세요, 자신과 정혼한 여인이 자기도 모르게 임신을 했다는 소식을 들은 순간, 요셉은 자존심이 땅에 떨어졌고, 아무리 선하고 착한 인격의 소유자라고 할지라도 믿었던 이에게 당한 배신감으로 인하여 분노가 화산처럼 타올랐을 것입니다. 목수 요셉이 마리아에 대하여 갖은 신뢰감이 크면 클수록 배신감과 분노는 더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목수 요셉은 이처럼 자신의 마음속에서 물 타오르는 분노와 배신감을 극복했습니다. 

놀랍게도 목수 요셉은 정혼한 여인이 자기도 모르게 임신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조용히 마리아와의 관계를 끊어버리고자 했습니다. 당시의 사회 풍습으로는 정혼을 했으면서도, 정결을 지키지 못하고 간음을 한 여인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를 풀기 위하여, 남자 편에서 동원할 수 있는 정당한 복수의 방법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정혼한 여자가 남자 모르게 간음을 했다고 이웃에게 알리기만 하면, 부정한 여인에게 복수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다 알아서 해 주게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목수 요셉은 마리아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대신 아무도 모르게 그 사건을 그냥 모른 채, 지나가고자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길만이 자기와 정혼 했던 여인 마리아가 생명을 보존하는 방법이 되기 때문입니다. 정혼한 남편인 목수 요셉이 마리아의 임신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면, 문제를 제기할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 18-19절에서 마태는 이 사건에서 목수 요셉의 입장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나서,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므로, 약혼자에게 부끄러움을 주지 않으려고, 가만히 파혼하려 하였다.’라고 했습니다.      

목수 요셉의 이런 소극적인 행동은 그래도 요셉이 약혼녀 마리아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한 선한방법입니다. 왜냐하면 약혼녀가 만일 약혼기간 중에 다른 남자와 관계로 임신을 하게 된 것이 드러나면, 유대인의 율법으로 하면, 그런 여인은 돌로 쳐 죽이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목수 요셉은 자기의 마음 속에서 솟아나는 배신감과 배신감에 따른 분노의 감정을 잘 조절하고 관리를 했습니다. 요셉도 사람인데 어찌 마리아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가 일어나지 않았겠습니까? 당연히 배신감도 생기고, 분노의 감정도 치솟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목수 요셉의 위대한 점은 요셉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감정대로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목수 요셉은 자기의 감정대로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치솟는 분노의 감정을 따라서 행동하지를 않고 문제가 된, 약혼자인 마리아의 입장을 생각했습니다. 목수 요셉이 배신감을 따라서, 또는 치솟은 분노를 따라서, 감정대로 행동을 했다면, 당장 마리아의 부정한 행동을 이웃에게 알려서, 율법대로 마리아가 돌에 맞아 죽도록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요셉은 이런 경우에도 성급하게 화를 내거나, 분을 폭팔시킨 것이 아니라 이런 문제의 결말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을 했습니다. 분노하지 않고 생각하는 과정을 통하여 목수 요셉은 배신감과 분노의 욕구를 극복하고 이겼습니다. 요셉은 자신이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자신과 마리아에게 최선의 길인가? 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나름대로 그 방법을 찾은 것입니다. 요셉이 찾은 방법은 마리아의 임신을 가지고 소란을 떨지 않고 조용히 마리아와의 관계를 끊고자 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목수 요셉에게서 이 점만은 분명하게 배워야만 할 것입니다. 어떤 일이든지 사람이 이왕 벌어진 일에 대하여, 깊히 생각하지 않고, 감정만으로 대하면, 결국은 상대방도 망하지만, 문제는 나도 망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마음에 일어난 분노와 미움과 배신감을 잘 다스리면서, 문제를 해결하는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찾아야만 합니다. 목수 요셉은 배신감으로 인한 극한 분노의 감정을 잘 다스리고, 감정대로 처리를 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비하신 마음을 의지하여 당한 일을 처리하고자 했습니다. 자신과 마리아 모두에게 상생하는 방향의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그 결과 비록 소극적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가만히 마리아와의 관계를 정리하고자 했습니다.    

성경을 보세요, 삼상 25장을 보면, 다윗은 사울 왕에게 쫓겨다닐 때에, 자신이 많은 도움을 준 나발이란 사람에게서, 자기와 부하들에게 필요한 양식을 얻으려고 부하를 보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은 양의 털을 깎는 날이, 가장 인심이 후한 날이기 때문에, 바로 그런 날에 나발의 도움을 받고자, 부하를 보낸 것입니다. 그런데 나발은 다윗의 부하들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해주기보다는, 오히려 모욕을 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다윗은 이 은혜를 모르는 사람인 나발의 처신에 분노하여, 나발을 치기 위해서 부하들을 이끌고 가는데, 이 사실을 안, 지헤로운 여인인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이, 중간에서 다윗의 가는 길을 막아서 겨우 다윗의 분노를 진정시킨 기사가 나옵니다. 이런 점을 보면서 분노를 다스리는 점에서는 목수 요셉이 자신의 조상인 다윗을 능가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래서 지혜자는 잠 16:32절에서 말하기를,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지혜자의 말은 ‘성을 빼앗는 장수 보다 자신을 이긴 사람이 더 큰 승리를 거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2) 목수 요셉은 육체의 욕구를 이겼습니다.

본문 24-25절을 보면, 마태는 기록하기를,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서, 주의 천사가 말한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그러나 아들을 낳을 때까지,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다. 아들이 태어나니, 요셉은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요셉이 마리아의 입장를 이해하고, 마리아를 데려왔다고 할지라도, 요셉이 정욕을 참지 못하여, 마리아와 동침을 했더라면 예언자 이사야가 사 7:14절에 예언한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라는 예언을 사람이 믿게 하는데, 많은 어려운 점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목수 요셉은 정욕을 잘 참고 견디었으며, 하나님의 선하신 구원계획과 섭리를 완전하게 이루는데, 한 몫을 잘 감당한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분노를 이기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인간의 육체의 욕구를 이기는 것도 감당하기 힘든 싸움입니다. 그런데 목수 요셉은 그것을 잘 극복하고, 하나님의 계획을 온전하게 성취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성경을 보세요,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인 다윗 왕도 육체의 욕망을 이기지 못해서 큰 실수를 범한 적이 있습니다. 다윗은 수많은 전쟁에서, 용감하게 싸워서 적군을 물리치고, 성을 빼앗고, 자신의 성을 방어하는 데는 성공을 했지만, 자신 마음을 지키는 데는 실패를 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고, 충성스런 부하인 우리아의 아내와 그만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 죄를 지었고, 자기의 지은 죄를 감추기 위하여, 충신인 우리야란 장군을 살해하도록 군대장관인 요압에게 살인할 것을 명령하는 죄를 짓고 맙니다.

하지만 목수 요셉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기 위하여, 육체의 욕망을 이겼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잘 믿음생활을 하고 있다고 간증을 할지라도, 육체의 욕망을 이기지 못하면, 여러분의 삶을 통하여 결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롬 8:5-8절에서 로마 교인에게 말하기를,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세상에서는 많은 사람이 육체의 욕망을 이기지 못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를 구체적으로 들어보면, 육신의 욕망인 술을 참지 못하여, 주님의 뜻대로 살지 못합니다. 썩어질 육신만을 사랑하고 귀중하게 여기는 까닭에, 게으름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웁니다. 이처럼 육신이 좋다는 대로만 살면, 영도 망하고 육신도 망합니다. 절제하지를 않고, 육신의 욕망대로만 살아가는 사람은 이처럼 몸과 영이 함께 망하고 맙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아무리 하고 싶어도, 육신의 욕심만을 위한 것이라고 판단이 되면, 그것을 절제하는 생활을 통하여 결국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을 택하고, 하나님과 연합하면서, 모든 일을 도모하고, 목수 요셉처럼 아름다운 삶의 열매를 맺는데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3) 목수 요셉은 세상의 소문을 이겼습니다.

그렇습니다, 목수 요셉은 세상의 악한 소문을 이기고 승리한 사람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온갖 악플을 이기고 승리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가끔 연예인들이 자살했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그 가운데는 연예인이 악플을 이기지 못해서, 자살했다는 소문도 들립니다. 그런 경우에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본문에 나오는 마리아는 신랑을 맞이하기도 전에, 아이를 가졌으니, 세상에 소문이 어떠했겠습니까? 소문의 대상이 되는 마라아도 문제지만, 마리아의 남편이 되는 목수 요셉이 받을 스트레스 또한 만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세상의 소문에 끌려 가거나, 소문 때문에 요동하지를 않았습니다. 요셉은오직 천사의 말만 믿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목수 요셉은 약혼자 마리아는 사람을 통하여 임신한 것이 아니고, 거룩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다는 주님의 천사가 전해준 말씀만 믿었습니다. 세상에 도는 온갖 악한 소문을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이겨낸 것입니다. 세상 전문가들의 말을 오직 하나님의 말씀 하나만 가지고 이긴 것입니다. 

요셉은 다윗보다 더 큰 싸움에서 이겼습니다.
목수 요셉은 자신의 분노와 육신의 욕망을 이겼습니다.
착한 양심의 소유자인 요셉은 마리아에 대한, 그리고 자기 자신에 관한 온갖 악한 소문을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의지함으로써, 이겼습니다.
요셉은 배신한 사람을 선하게 대하고자 정성을 다하다가 다윗 왕의 후손으로서 마땅하게 자기의 영예를 지켰고, 뿐만 아니라 천사로부터 ‘다윗의 후손’이라고 불리워지는 명예를 얻었습니다.

지금 여러분에게는 ‘예수의 형제’라는 영예로운 호칭이 주어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 3:35절에서 분명하게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2:11절에서  말하기를,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신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히브리서 기자의 말은 나사렛 예수께서는 여러분을 당신의 형제라고 부르시고, 형제와 자매로 부르는 것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믿으시면 아멘)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모두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형제와 자매로 부르는데 거리낌이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어떤 악플이 여러분을 괴롭힌다고 할지라도 요동하지 말고 모든 것을 알고 정확히 계시는 그리스도 예수만을 의치한 채 담대한 여러분이 될 것을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목수 요셉이 비록 세상에서 특별하게 가진 것은 없지만, 다윗 왕의 후손으로서 다윗 왕을 능가한 일을 해낸 것처럼, 여러분도 예수 형제자매답게 이제부터는 전혀 하늘을 향해서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목수 요셉이 다윗 보다 큰 싸움에서 승리한 것처럼 여러분도 다윗보다 더 큰 싸움인 정욕과의 싸움, 여러분 자신과의 싸움에서 넉넉하게 승리해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 소문과 악플에 휘둘리거나 요동해서는 안됩니다. 모든 것을 정확하게 알고 계시는 주님만을 의지한 채, 성급한 판단을 하거나, 어리석은 말과 생각에 마음을 주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을 빼앗는 싸움보다, 자신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분노를 다스리는 싸움이 더 큰 싸움입니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분노를 다스리지 못한 사람은, 마음도 빼앗기고, 눈에 보이는 적에게서 빼앗은 성까지도 빼앗기게 됩니다. 무서운 기세로 여러분을 틈만 있으면, 사로잡으려는 모든 악한 영의 세력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굳게 서서 대적을 하면서,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서 물리쳐야만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성령이 충만하여 모든 분노와 미움과 시기와 질투하는 마음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라면 모든 육신의 욕망을 물리치고, 오직 성령의 소욕을 따라서만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허욕을 버리세요, 오직 예수만 깊히 생각하고 바라보세요, 겸손하게 성령의 뜻만을 찾고, 성령의 소욕만을 따라서 행동하세요, 정직한 마음으로 성경말씀을 읽으시고, 상고하고, 깨달은 대로 실천하세요. 깨끗함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세요, 나와 가족을 위해서만 이 아니라 이웃을 위하여, 사회적인 약자를 위하여 나라를 위하여, 북한에 있는 동족을 위하여, 남북한에 존재하는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세요. 그리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 모든 악한 소문과 사상을 이겨낼 수 있고, 거짓말을 분별하는 능력을 얻고, 세상 공중권세를 잡은 마귀와 싸워서 승리합니다. 

이처럼 악한 영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때에 천사가 여러분에게 ‘예수의 형제 자매여!’라고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 모든 사람의 마음에 들어가도록, 너희의 이웃에게 사랑과 용서를 베풀라고 하실 것입니다. 이제부터 그런 사명을 감당하는데 정성을 다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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