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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브람, 아브라함 (창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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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람, 아브라함 (창 17:1-9)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창 17:1-9).

1. 여호와 하나님께서 흙으로 온갖 들짐승과 새를 만드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 이끌고 가셨습니다. 아담이 각 생물들을 부르는 것이 바로 그 생물들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여기 하나님께서 직접 피조물의 이름을 짓지 않으시고 그 권한을 아담에게 위임한 것은 아담이 만물보다 뛰어나다는 것, 인간의 우월성을 인정해 주셨다는 뜻입니다. 

더욱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아담, 즉 인간으로 하여금 그 이름을 짓게 하시므로 창조 사역을 완성하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만물보다 우월한 인간의 이름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이름이 없는 인격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름은 한 개인의 존재를 집약한 것으로 이름을 통해 그 개인의 생이 시작되며, 비록 한 개인이 죽어간다 하더라도 이름을 통해 자손의 삶 속에서 대대로 살아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름은 그 사람 전체의 특질과 성품을 나타내는 것이며 그 사람의 인격과 생애를 예감할 수 있게 합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녀의 이름을 통해 자신들의 소원을 표현하며 그 아이의 인격을 예언하기도 합니다. 특별하지만 아이가 출생할 당시 우연한 사건이나 특별한 환경을(출2:22) 반영한 이름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야곱의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난산 끝에 아들을 낳고 죽게 되었는데 라헬이 죽기 직전 그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고 지었습니다. ‘슬픔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창35:18) 그가 죽게 되어 그의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그러나 야곱은 그 아들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그 어미의 슬픔을 되새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 아들의 이름을 ‘베냐민’이라고 바꾸어 불렀습니다. ‘베냐민’은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이 아들은 내게 매우 소중하며 내 오른쪽에 앉아서 축복을 받고 내 오른손에 들린 지팡이처럼 내 노년을 지탱해 주리라.’는 뜻입니다. 그런가 하면, ‘야곱’이 있습니다.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쌍둥이를 낳았는데 먼저 나온 아들은 붉고 전신이 털옷같아서 ‘에서’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머리, 팔, 안색 등이 붉다는 것은 혈기 왕성함을 표현한 것으로 ‘에서’의 성격에 걸맞은 것입니다. ‘에서’가 이렇게 붉은 몸을 지니고 있어서 ‘붉다.’는 뜻을 지닌 ‘에돔’이라는 별명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신생아의 외모가 기이하게 붉은 털로 싸여져 있다는 것은 ‘에서’의 성격이 열정적이고 동물적인 기질과 야성적이고 육욕적인 성품을 예견케 해주는 것입니다. 

에서는 그 이름대로 후에 들판을 돌아다니는 사냥꾼이 되어 아버지가 즐기던 고기를 대접하여 아버지 이삭의 사랑을 독점했습니다. 그리고 동생으로 태어난 ‘야곱’은 태어날 때 기이하게도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다 해서 그 이름을 ‘야곱’이라고 이름지었습니다. ‘발뒤꿈치를 잡는다.’는 뜻의 ‘야곱’은 또한 ‘속이다’, ‘불의로 남의 뒤를 친다’(창27:36) 등의 뜻이기도 합니다. 이 ‘야곱’이 형 에서가 심히 피곤하고 배고픈 것을 이용해서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의 명분을 양도받게 됩니다. 그리고 아버지 이삭이 임종이 가까워지자 장자인 에서를 불러 축복하고자 합니다. 이삭은 에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창27:3-4) 그런즉 네 기구 곧 화살통과 활을 가지고 들에 가서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내가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와서 먹게 하여 내가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

그렇게 해서 에서가 사냥을 나간 사이 야곱이 형 에서의 모습으로 위장하고 아버지 이삭을 속여 장자의 축복을 받아버립니다. 아버지 이삭은 모르지만 이미 형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팔아넘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사냥 나갔던 에서가 돌아와 별미를 만들어 아버지께 드리고 장자의 축복을 해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삭은 이미 장자의 축복을 해버렸기 때문에 에서에게 장자의 축복을 이중으로 할 수 없다며 이렇게 말합니다. 

(창27:35) 이삭이 이르되 네 아우가 와서 속여 네 복을 빼앗았도다

그러자 에서가 통곡하며 말합니다.

(창27:36) 에서가 이르되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함이 합당하지 아니하니이까. 그가 나를 속임이 이것이 두 번째니이다. 전에는 나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이제는 내 복을 빼앗았나이다. 또 이르되 아버지께서 나를 위하여 빌 복을 남기지 아니하셨나이까.

두 번씩이나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에서 ‘야곱’이란 이름이 그에게 합당하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이름은 그 사람 전체의 특질과 성품을 나타내며 그 사람의 인격과 생애를 예감할 수 있게 하기도 합니다. ‘야곱’은 훗날 얍복 나루터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축복하지 아니하면 천사를 놓아주지 아니하겠다며 씨름 끝에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게 태어나게 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야곱’의 이름을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라는 뜻인 ‘이스라엘’이라는 영광된 새 이름을 얻게 됩니다.

(창32:27-28)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이름이 영원한 하나님 나라 생명책에 녹명(錄名)되었음을 믿고 그 이름에 합당한 거룩한 성도의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빌 4:3,계 3:5,계 21:27)


2. 야곱의 경우와 같이 유대인들에게 새로운 이름이 주어진다는 것은 그의 생에 중대한 변화가 있었음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시고 “(창12:1-3)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으로 그가 복의 근원이 되리라고 약속하실 때, 아브람의 나이는 75세였습니다.(창 12:4) 

그 후 가나안 땅 기근으로 식량을 구하러 애굽에 내려갔다가 아내를 잃을 뻔 했던 일, 점점 소유가 많아지자 조카 롯과 동거하기가 어려워 친족간 화목을 위해 모든 좋은 곳을 롯에게 양보하고 헤어진 일, 그리고 롯이 사로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목숨 걸고 쫓아가 롯과 그의 가족, 친척들, 빼앗겼던 재물까지 모두 찾아왔던 일 등 많을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큰 민족을 이루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이 이루어질 징조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자녀 출생에 대해 하나님께서 계속 침묵하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아브람은 영적으로 침체(沈滯)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침체에 빠진 아브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창15:1)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그 어떠한 환난이나 위험 가운데서도 아브람을 안전하게 보호해 주는 힘과 능력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방패가 되어주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는 말씀은 하나님은 모든 축복의 근원이시며 아브람에게 약속하신 복을 반드시 성취시켜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이에 아브람이 하나님께 여쭈었습니다. ‘주 나의 하나님, 주께서는 저에게 무엇을 주시렵니까? 저에게는 자식이 아직 없습니다. 저의 재산을 상속받을 자식이라고는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 뿐입니다. 주께서 저에게 자식을 주지 않으셨으니, 이제, 저의 집에 있는 이 종이 저의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 세월은 무심하게도 자꾸 흐르기만 하는데 자식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자기 집에서 태어나 자란 가장 신임받는 종 엘리에셀을 자신의 후사(後嗣)로 하나님께 추천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심으로 약속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 아이는 너의 상속자가 아니니라. 너의 몸에서 태어날 아들이 너의 상속자가 될 것이니라. 하늘을 쳐다보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라. 너의 자손이 저 별처럼 많아질 것이니라.” 그 후 아브람은 10년이 지나도록 그의 아내 사라가 잉태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사라는 생명을 잉태케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役事)를 기다리지 못하고 성급하게 판단을 내립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언제까지나 기다릴 수 없고, 자신을 돌아보니 자녀를 잉태하기에는 너무 불가능한 나이이고, 그래서 자신의 재산과 같은 몸종 젊은 하갈을 생산수단으로 삼아 자손을 일으키겠다는 것입니다. 

아브람도 아내 사라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 결국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자신들의 생각과 방법으로 이루려는 교만한 행동이었습니다. 이 때가 아브람의 나이 86세였습니다. 그로부터 13년이나 지난 99세 때, ‘큰 민족을 이루리라.’고 약속하신 후 25년이 지나는 때, 자손에 대한 소망이 완전히 단절된 절망적인 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보겠습니다.

(창17:1-9)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자신을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아브람에게 소개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연법칙을 초월하여 자신의 약속을 성취시키는 무한한 능력을 소유하고 계시는 분이심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가 더디게 생각되어 절망하고 있는 아브람에게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비록 늙었고 그 아내 사래가 90이 다 되어가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얼마든지 ‘열국의 아비’,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위를 완전하게 하라,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사래의 일거수일투족과 그 품은 생각을 모두 알고 계심을 깨닫고 매사에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는 신앙과 그분의 약속과 말씀을 따라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비록 몸이 메마른 뼈들처럼 되어간다 할지라도 두 번 다시 젊은 여종을 통해 자손을 얻으려고 생각하거나 입양할 생각(엘리에셀)을 하지 말고 약속하신 바를 믿고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람과 사래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래에게 복을 주어 아들을 낳아주게 하리라고 거듭 말씀하심에도 웃으며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창17:17-18)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그리고 하나님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며 푸념을 털어놓았습니다. 사라도 나중에 그 나이에 아들을 낳으리라는 하나님 말씀을 듣고 속으로 웃고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창18:12) 고 말합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창18:13-14)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사라가 낳게 될 아들의 이름까지 ‘이삭’이라고 지어주시고 그와 영원한 언약을 세우시고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창17:19)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누구든지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가 되리라는 것입니다.(갈4:28) 이렇게 해서 아브라함이 나이 100세, 사라의 나이 90세에 그토록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들, 이삭을 낳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해서 다 그의 자녀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약속을 통해 낳은 사람이라야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인정하십니다. 이것은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약속의 자녀라야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다는 말입니다.’(롬9:7-8) 성도 여러분은 비록 혈과 육으로 태어났지만 예수 그리스도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축복이 약속된 약속의 자녀가 되심을 믿고 사시기 바랍니다.(갈3:9)


3. 하나님께서 절망 중에 있는 99세의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창17:1)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고 말씀하시고 그 언약의 말씀을 확실하게 이루시기 위해 행하신 것이 바로 ‘아브람’과 ‘사래’의 이름을 개명(改名)해주신 것입니다.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사래’를 ‘사라’로 개명해주셨습니다. 이제 한 가문의 조상이 아니라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될 것을 약속하시는 개명입니다. 다시 말해 ‘믿음의 조상’이 되리라는 개명입니다. 이를 히브리서11:8-19에서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히11:8-19)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심을 받은 데서부터 그 후손들이 믿음으로 본향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어느 날 가버나움에 가셨는데 그곳 주둔군 백부장 하나가 예수께 와서 간구합니다. ‘주님, 내 종이 중풍으로 집에 누워서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하고 말씀하시자 백부장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님, 나는 주님을 내 집에 모셔 들일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말씀만 해주십시오. 그러면 내 종이 나을 것입니다. 나도 상관을 모시는 사람이고, 내 밑에도 병사들이 있어서, 내가 이 사람더러 가라고 하면 가고, 저 사람더러 오라고 하면 옵니다. 또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고 하면 합니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놀랍게 여기셔서, 따라오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8:10-1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누구든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들어가겠으나, 비록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처하는 유대인들일지라도 믿음을 가지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을 가진 사람들만이 진정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갈3:7) 예수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사람들, 그리고 어떠한 유혹이나 환난에도 예수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한 성도, 믿음을 끝까지 깨끗하게 지킨 성도들에 ‘흰 돌’을 주시고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새겨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2:17을 보겠습니다. 

(계2:1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흰 돌’은 경기에서 승리한 자에게 우승의 기념으로 주어지는 상패입니다. 그러므로 ‘흰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어떠한 시험과 역경에서도 신앙을 끝까지 깨끗하게 지킨 사람들에게 주는 상급이며, 영광스런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케 하는 상급을 뜻합니다.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의 이름이 새 이름으로 하나님 나라 흰 돌에 새겨진 것을 믿으시고 그 새 이름이 흐려지지 않도록 끝까지 믿음으로 승리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은 후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광야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그 길을 인도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출33:12-13)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내게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이에 하나님께서 “내가 친히 가리라. 그리고 네가 구하는 모든 것을 이루게 하리라.” 고 말씀하시면서 그 이유를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알기 때문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출 33:1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안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탄생에서부터 그의 모든 출생과 성장과정, 그리고 광야에서의 생활과 연단 등 모세에 관한 모든 것을 다 아신다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특별히 모세를 선택하시고 사랑하며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 대해 자기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대면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출33:11)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성도 여러분, 예수 믿음으로 약속의 자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 나라 ‘흰 돌’에 여러분의 ‘새 이름’이 새겨질 만큼 하나님께서 성도 여러분의 이름만으로 익히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성도 여러분의 이름만으로도 약속된 모든 축복이 이루어지는 복된 삶이 되시도록 그 누구보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신앙생활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약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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