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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약속을 기억하십니까? (왕상 2:3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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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을 기억하십니까? (왕상 2:36-46)

태국에서 방영된 CF입니다. 86세인 츄 할아버지는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손수 수프를 만듭니다. 그리고는 뱀부 바이올린과 자신이 만든 수프를 가지고 20km 떨어진 아내의 묘를 매일 찾아갑니다. 수프를 아내 묘 앞에 놓고는 아내의 묘 앞에서 바이올린 연주를 합니다. 그리고는 집으로 돌아옵니다. 츄 할아버지는 이같은 일을 56살부터 30년간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반복했습니다. 

그가 86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매일 그렇게 한 이유가 있습니다. ‘생명이 다할 때까지 그녀에게 매일 아침 수프를 만들어 주고, 그녀가 좋아하는 노래를 연주해 주겠다.’고 한 약속 때문입니다. 이 약속 때문에 그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수프를 끓여서 20km나 되는 먼 길을 걸어가서 아내의 묘 앞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수없이 많은 약속을 하며 살아갑니다. 하루에도 수십번의 약속을 하기도 합니다. 자기 자신과의 약속, 가족과의 약속, 친구와의 약속, 직장에서의 약속, 하나님과의 약속 등등, 우리는 약속하며 살아갑니다. ‘인간은 약속할 수 있는 동물’이라는 독일 철학자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의 말처럼, 우리는 약속할 수 있고 약속하면서 삽니다. ‘약속할 수 있는 존재’라는 말은 자신이 한 약속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존재라는 뜻이고,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 말은 또한 약속을 해놓고서 그 약속을 어기는 경우가 많이 있음을 경고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얼마나 약속을 잘 지키십니까? 작은 약속 하나일지라도 그 약속에 성실하게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이 인생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 한분을 소개해 드립니다. 초이스 인재경영개발원 최종택 원장입니다. 

그는 어린 시절 가난 때문에 가족과 헤어져 혼자 살아야 했습니다. 영양실조로 한쪽 눈을 실명한 그는 고등학교 1학년 1학기를 다니다가 학교를 중퇴하고 밀양에서 서울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 때 서울로 올라가면서 그는 친구 두 명과 약속을 했습니다. 25년 후에 헤어지던 그 자리에서 다시 만나자고 말입니다. 그리고는 그 약속을 적은 작은 쪽지를 교환했습니다. 당시 17살이던 그는 약속대로 25년 후에 아내와 두 아이를 데리고 25년 전에 헤어진 그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서 약속 장소로 내려갑니다.
  
여러분, 나머지 두 친구도 25년 전의 약속을 기억하고 그 자리에 나왔을까요? 지난 25년 동안 연락 한 번 한 적이 없었고 만난 적이 없었던 친구들이 17살 때 헤어지면서 했던 그 약속을 기억하고 그 자리에 나왔겠습니까? 25년 만에 내려간 만남의 장소에서 세 친구들은 감격적인 재회를 하게 됩니다. 그는 그 일을 계기로 해서 작은 약속 하나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는 지난 25년 동안 써온 일기장을 다시 읽어보면서 지금까지 자기 자신과 한 약속이 무엇이었으며, 그 약속들을 어떻게 지켰는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동안 숱한 고생을 해야 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1학기 중퇴의 학력에 한쪽 눈을 실명한 채 아무 연고도 없는 서울로 홀로 올라온 이후, 직장에서 미친 듯이 일하다가 스트레스로 나머지 한쪽 눈까지 이상이 올 정도로 힘든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매일 저녁 일기를 쓰면서 일기장 속에 넣어 둔 그 쪽지, ‘25년 후에 헤어지던 그 자리에서 다시 만나자’는 그 쪽지를 볼 때마다, 그 약속을 반드시 지키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을 했습니다. 그런 꿈과 자신과의 약속을 철저하게 지키겠다는 그의 신념이, 그리고 그를 좌절하지 않게 만들어주었던 신앙이 지금의 자신을 있게 했음을 뒤늦게 일기장을 다시 읽으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자신의 경험을 근거로 해서 『하루 약속』이라는 제목의 책을 쓰게 되었고, 지금은 여러 기업체에서 자기계발에 대한 강의를 하는 최고의 강사가 되었습니다. 

자기와의 약속에 철저했기에 그는 다른 사람과의 약속에도 철저했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성공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 반대의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시므이라는 사람입니다. 시므이는 두 번에 걸쳐 큰 은혜를 입은 사람입니다. 

그 첫 번째는 다윗 왕에게입니다. 다윗 왕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 때문에 급하게 예루살렘을 떠나야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자식의 반역 때문에 왕좌를 버리고 떠나야 하는 다윗은 그 몰골에서도 비참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자식에게 반역을 당했다는 것이 너무 큰 부끄러움이었기 때문에 다윗은 예루살렘을 떠날 때에 머리를 풀어헤쳐 얼굴을 가렸습니다. 그리고 신발조차 신지 않고 감람산 길을 통해서 급하게 도망가야 했습니다. 

그렇게 얼마 가지 않아 바후림이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 시므이가 나타났습니다. 시므이는 사울 왕의 친족입니다. 사울 왕의 친족인 이 시므이는 다윗을 굉장히 싫어했습니다. 다윗이 사울 왕을 죽이고 왕의 자리를 찬탈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예루살렘을 떠나 도망을 가자 속이 시원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윗을 향해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피를 흘린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를 이어서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기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이므로 화를 자초하였느니라.”(사무엘하 16:7-8) 

시므이는 다윗을 향하여 ‘가거라 가거라’라고 외쳤습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욕이자 저주입니다. ‘가거라’라는 말은 약속의 땅을 떠나 이방인의 땅으로 가버리라는 말입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을 하나님께서 주신 영원한 기업으로 생각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는 약속의 땅에 살 자격이 없는 놈이야’ ‘너는 이방인과 다름없는 놈이니까 이방인의 땅으로 가버려’ 그런 뜻이 담겨 있습니다. 
  
시므이가 그렇게 저주하자 다윗과 함께 가던 다윗의 신하들이 ‘이 죽은 개만도 못한 놈이 왕을 저주할 수 있느냐’고, ‘당장 저 늙은이를 죽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당연한 말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죽이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잘못을 이 시므이를 통해서 책망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후 반역을 일으켰던 압살롬이 죽자 다윗은 다시금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에 가장 두려운 사람은 시므이입니다. 다윗이 다시금 왕좌에 오른다면 도망할 때 저주했던 자신을 가만둘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도망갈 때에는 급한 마음에 자신을 죽이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이제 왕좌에 오르면 자신을 죽일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은 시므이가 가장 먼저 다윗 왕을 찾아갔습니다. 자기 지파인 베냐민 사람 천 명을 데리고 요단강 건너편까지 가서 다윗 왕과 그 일행이 요단강을 편하게 건널 수 있도록 나룻배도 준비해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다윗 왕이 나타나자 다윗 왕 앞에 엎드려 용서를 구했습니다. 물론 그 때도 다윗의 신하들은 시므이를 죽여야 한다고 말했지만, 다윗은 그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시므이에게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까지 해 줍니다. 

이제 다윗이 왕이 죽고 그 아들 솔로몬이 왕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솔로몬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유언을 합니다. 

그게 오늘 본문 바로 앞인 열왕기상 2:1절 이하에 나옵니다. 다윗의 유언 가운데 하나가 시므이에 대한 것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시므이에게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했기에 그를 죽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죄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 너는 지혜로운 사람이니까 네가 그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를 잘 알 것이다. 그의 백발이 피 가운데 스올에 내려가게 하라.’(열왕기상 2:8-9) 

‘피 가운데 스올에 내려가게 하라’는 말은 죽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죽었고, 솔로몬은 왕이 되었습니다. 
  
아버지 다윗 왕의 유언을 듣고 왕이 된 솔로몬이 시므이를 불렀습니다. 아버지의 유언대로 한다면 당장에 시므이를 죽여야 합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시므이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약속을 받아냅니다. 본문 36-37절입니다.

‘네가 예루살렘에 사는 것은 허락한다. 그런데 예루살렘을 떠나 기드론 시내를 건너는 날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할 것이다.’ 

‘기드론 시내’는 예루살렘 동쪽이 있는 시내입니다. 시드론 시내를 건넌다는 것은 예루살렘을 빠져나간다는 것을 말합니다. 기드론 시내를 건너 예루살렘을 떠나는 날에는 반드시 죽게 될 것이라고 경고를 했습니다. 오늘로 말하면 가택연금을 시킨 것입니다. 이것은 시므이가 받은 또 한 번의 은총입니다. 다윗의 유언대로 한다면 시므이는 당장에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솔로몬 왕은 아버지의 유언을 어겨가면서까지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 죽이지 않고, 가택연금으로 형벌을 낮추어주었습니다. 솔로몬의 경고에 시므이는 기쁘게 약속했습니다. 왕께서 말씀하신대로 하겠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3년이 지났습니다. 시므이의 종 가운데 두 사람이 시므이의 집을 탈출해서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도망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자신의 집에서 일하던 종들이 도망쳐 가드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시므이는 당장 가드로 가서 도망친 종 둘을 잡아옵니다. 시므이가 종들을 잡아오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빠져나갔다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솔로몬이 시므이를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약속을 어긴 것에 대한 책임을 물어 시므이를 사형에 처하고 맙니다. 

시므이가 왜 예루살렘을 빠져나가기로 결심했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가 3년 전에 솔로몬 왕과 한 약속을 잊진 않았을 것이란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그가 예루살렘을 빠져나갔다가 온 것은 아마도 두 가지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그 첫 번째는 순간적인 분노를 참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집에 있던 종 두놈이 도망을 쳐 가드에 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시므이의 마음에 순간적으로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리고는 ‘그 놈들을 가만두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는 직접 나귀를 타고 가서 그 종들을 붙잡아옵니다. 시므이는 직접 가지 않아도 됩니다. 그가 솔로몬과 한 약속을 기억한다면 자신이 갈 수도 없고, 가서도 안 됩니다. 다른 종들을 보내서 잡아오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속에 일어난 분노가 그로 하여금 솔로몬 왕과 한 약속을 잊게 만들었습니다. 그 분노가 자신이 죽게 된다는 사실조차 잊게 만들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 분노가 일어나면 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한 약속을 종종 잊어버리고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도 우리 마음속에 일어난 분노 때문입니다. 우리가 약속을 할 때는 지키겠다는 생각으로 약속을 합니다. 약속을 할 때 ‘안 지켜도 돼’ 그렇게 생각하면서 약속을 하진 않습니다. 반드시 지키겠다고 약속을 했는데도 약속을 지키지 못하거나 약속을 지키지 않는 이유는 우리 마음에 일어나는 격한 감정, 특히 분노 때문입니다. 자신에 대한 분노, 상대방에 대한 분노, 심지어는 다른 누군가에 대한 분노가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분노감정을 잘 조절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서 분노가 일어나지 못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건 자연스러운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분노를 어떻게 조절하고 절제할 것인가는 우리 스스로 훈련을 통해서 터득해가야 합니다. 
  
그 분노는 단순히 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에 멈추지 않고, 때로 그 분노가 우리로 하여금 범죄에 빠지게 만들기도 하고, 시므이에게 죽음을 불러온 것처럼 우리에게도 치명적인 결과를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므이가 약속을 어기고 예루살렘을 빠져나간 두 번째 이유는 솔로몬 왕과 한 약속을 가볍게 여기고 왕에게 받은 은혜를 악용했기 때문입니다. 시므이가 한 행동으로 한다면 그는 벌써 죽임을 당해야 마땅합니다. 다윗 왕에게도 그렇게, 다윗 왕의 유언을 받은 솔로몬에게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는 다윗에게도, 솔로몬에게도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목숨을 건지는 은혜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 은혜가 별거 아닌 것처럼 생각해버렸습니다. 이번에도 별일 없을 거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솔로몬 왕과 한 약속을 가볍게 여겨버렸습니다. ‘설마 죽이겠어’ 그런 생각을 했겠지요.
  
우리가 약속을 잘 지키지 못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약속을 너무 가볍게 생각합니다. ‘이것쯤 지키지 않는다고 별일 있겠어.’ 그렇게 생각합니다. 만일 약속을 정말로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그 약속을 어길 수 있겠습니까? 그 약속을 어기면 나에게 엄청난 피해가 온다면 그래도 그 약속을 쉽게 어길 수 있겠습니까?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安昌浩, 1878-1938) 선생이 중국 상하이에서 독립 운동을 할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안창호 선생이 한 동포의 집에 들렀습니다. 이튿날이 그 집 아이의 생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 그는 그 아이에게 생일 선물로 인형을 사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가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의 훙커우 공원에서 일본군에게 폭탄을 던져 일본군 총사령관인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대장 등을 암살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일로 인해서 일본 경찰은 독립운동을 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잡아들이기 위해 삼엄한 경비를 서고, 상하이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지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독립 운동을 하던 사람들은 모두 몸을 피해야 했습니다. 
  
상황이 그렇게 되자 안창호 선생을 모시던 사람들은 그에게 빨리 몸을 피할 것을 권했습니다. 그런데 안창호 선생은 그 아이에게 인형을 선물로 사주겠다는 약속을 지켜야 한다며 몸을 피하지 않고 한사코 그 아이의 집에 가겠다는 것입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지금은 일본군이 거리 곳곳을 지키고 있으니, 선물은 다음에 전해도 되지 않느냐?’고 설득을 했지만, 그는 단호하게 거절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 아이에게 오늘 선물을 주겠다고 약속했네. 나는 평소에 ‘장난으로라도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오. 꿈에라도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오.’ 라고 말해 왔는데, 어떻게 약속을 어길 수 있겠나?” 그리고 안창호 선생은 선물을 기다릴 아이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 선물을 들고 그 아이의 집으로 가다가 일본 경찰에게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나에게 상황이 불리해지거나 내게 불이익이 주어질 때 약속을 파기하기도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약속을 나중으로 미뤄도 된다고 합리화해버립니다. 
  
그건 비단 사람에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하나님께 한 약속에 대해서도 우리의 상황이 달라졌다고 약속을 파기하기도 하고, 약속을 미루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시편 15편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그러면서 스스로 대답하는 중에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서원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약속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은 내게 해로울지라도 반드시 지키는 자가 주님의 은혜의 성산에 거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게 어찌 하나님께만 해당되는 것이겠습니까? 내게 손해가 될지라도 약속을 지키는 것이 신실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회사에 손해가 될지라도 고객과의 약속을 지키는 회사가 신뢰받는 기업이 되고, 그런 기업이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게 해로울지라도, 내게 손해가 될지라도 약속한 것을 지키는 사람은 신실한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게 되고, 그런 사람은 결국 성공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선 당장 손해가 된다고 약속을 어기고 남을 속인다면 그 사람은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시므이는 솔로몬 왕과 한 약속을 어겼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그는 목숨을 잃어야 했습니다. 비록 마음에 분노가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는 솔로몬 왕과 한 약속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러면 노년에 그런 비참한 꼴을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솔로몬 왕과 한 약속을 결코 가볍게 생각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비록 솔로몬 왕이 자신에게 큰 자비와 은혜를 베풀어주었다 하더라도, 그 은혜를 가볍게 생각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은혜를 받은만큼 그것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하신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도 우리 스스로 한 약속을 지키길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하신 약속을 단 한 번도 어기신 적이 없으십니다. 아브라함에게 ‘400년 동안 이방에서 객이 되어 이방인들에게 괴롭힘을 당한 후에 큰 재물을 안고 나올 것’(창세기 15:13-14)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대로 400년 동안 애굽에서 노예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를 보내셔서 그들을 이끌어 내셨습니다. 죄악과 우상숭배로 하나님을 떠나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70년 후에 다시 돌아오게 하겠다.’(예레미야 25:11)고 말씀하시더니, 정말로 70년 후에 페르시아 왕 고레스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고국으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끊임없이 메시야를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시더니 마침내 ‘때가 되었을 때 당신의 독생자를’(갈라디아서 4:4) 이 땅에 메시야로 보내주셨습니다. 
  
독생자를 메시야로 보내주신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영광을 받는 자리로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멸시를 받으셔야 하고, 고난을 받으셔야 합니다. 이 땅에 오신 메시야 예수님은 인간에게 배신을 당해 결국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습니다. 하나님에게도, 그리고 예수님에게도 그것은 엄청난 고통이고 희생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하신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 주님을 믿으면 구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을 믿기에 오늘 우리가 이 예배의 자리에 와서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예수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약속 때문에 우리가 십자가 구속의 은혜로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약속을 지키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신다는 것이 고통이고 너무 힘이 들기 때문에 그 약속을 파기하고 ‘약속을 없던 일로 하자’ 그러셨다면 우리는 여전히 지옥 백성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약속을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께 한 약속이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신앙생활해 오시면서 하나님께 약속한 것을 기억하십니까?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키고 계십니까? 혹 우리 가운데 하나님과 한 약속이 없다고, 생각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실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나 최소한 한 번쯤은 약속을 했습니다. 세례 받을 때에 ‘모든 죄악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본을 따르기로 서약’했고, ‘교회의 관할과 치리에 복종하고 교회에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며 교인으로서의 의무와 권리를 바르게 행사하기로 서약’하셨습니다. 기억 나십니까? 혹 잊지 않으셨습니까? 그 약속대로 잘 살고 계십니까? 
  
그것 뿐만이 아닙니다. 직분을 받을 때에도 약속을 했고, 새해가 되면 새 마음으로 결단하면서 약속한 것이 있습니다. 기도할 때에도 종종 하나님께 서원하면서 약속을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에게도 우리는 자주 약속합니다. 그런데 그 약속을 얼마나 지키며 살고 계십니까? 

미국 하워드 장군(Oliver O. Howard, 1830-1909)의 이야기를 여러분 들어보셨지요? 그는 신앙이 돈독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가 서부해안 지구 사령관을 맡게 되자 그의 친구들이 그의 영전을 축하하는 환송 만찬회를 열기로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초대장을 보냈고 대통령까지 축하 전문을 보내왔습니다. 그리고 하워드 장군을 깜짝 놀라게 해 주려고 모든 준비를 다 끝낸 후에 맨 마지막으로 그에게 알렸습니다. 그런데 그 날이 수요일 저녁이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하워드 장군은 친구들의 축하를 기뻐하면서도 ‘선약이 있다’고,  ‘그 날은 곤란하다’고 대답했습니다. 친구들은 난감해졌습니다. 저명한 인사들에게 초청장까지 다 보냈고, 기꺼이 참석하겠다는 확답까지 받아 논 상태에서 그 축하연을 취소하거나 미룰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워드 장군에게 ‘당신이 선약을 미루거나 취소하면 안 되겠느냐?’고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매주 수요일 밤에는 꼭 교회에 가서 주님을 만나겠다고 약속을 했다네. 나는 하나님과 한 그 약속이 세상 그 어떤 약속보다 중요하기에 그 약속을 깨뜨릴 수가 없네.” 
  
하는 수 없이 친구들은 그 축하연을 하루 미뤄 목요일 저녁에 하기로 했고, 그런 결정을 한 하워드 장군을 어느 누구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신실한 사람이라고 존경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약속은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신뢰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그 약속이 중요하겠거든, 하나님과 한 약속은 얼마나 중요하겠습니까? 지금까지 우리가 하나님께 한 약속을 조용히 회상해 보십시다. 하나님과 한 약속이 전혀 없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았거나 하려는 의지가 없던 사람일 것이고, 아니면 하나님과 한 약속을 별거 아닌 것으로 여긴 사람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신 약속을 단 한 번도 어기신 적이 없습니다. 당신이 고통을 당하고 희생해야 하는 순간에까지도 말입니다. 우리 주님 역시 우리와 하신 약속을 늘 지키십니다. 그 약속을 우리가 믿기에 우리는 늘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으며 담대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주님께 약속을 지켜야 할 차례입니다. 하나님 앞에 신실한 성도의 모습은 우리의 약속을 기억하고, 그 약속을 지키며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한 약속 가운데 지금 기억나신 것이 있으십니까? 내게 손해가 될지라도 지키십시다. 그러면 그 손해를 하나님께서 반드시 보상해 주십니다. 아니 우리가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당한 손해보다 몇 곱절 더 우리에게 베풀어 주십니다. 사람과의 약속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때로 우리에게 손해가 될지라도 하나님과 한 약속, 사람과 한 약속을 잘 지키는 신실한 성도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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