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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온전히 바치는 마음 (막 12:4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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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히 바치는 마음 (막 12:41-44)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후 붙잡히셔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어느 날 예수님께서는 다시 성전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시다가 사람들이 헌금하는 모습을 잘 지켜보실 수 있도록 헌금함을 마주 보는 곳에 자리 잡고 앉으셨습니다. 뭔가 의도하신 바가 있었음을 느끼게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전이란 “여인들의 뜰”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한 여인이 들어와 헌금을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거기서 여러 부자가 많은 헌금을 하는 것을 보셨습니다(본문 41절). 그리고 한 가난한 과부도 와서 헌금을 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한 헌금은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였습니다(본문 42절). 

“렙돈”은 예수님 당시 로마 제국의 동부 지역이었던 팔레스타인에서 통용되는 동전 중 가장 작은 것이었습니다. 렙돈은 로마 제국의 서부지역에서는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들어있는 복음서의 저자는 두 렙돈의 가치가 어느 정도 되는지를 서부에서 사용되던 화폐인 “고드란트”로 다시 언급한 것입니다. 즉 두 렙돈은 한 고드란트에 맞먹는 가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렙돈은 잘 알려진 화폐단위인 “데나리온”의 육십사 분의 일에 해당되는 돈이었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대체로 한 근로자의 하루 임금에 해당하는 돈이었습니다. 평균적으로 식구가 네 명인 한 가정의 하루 생활비에 상응하는 돈이었습니다. 계산을 쉽게 해보기 위해서 한 데나리온을 오늘날 우리 돈으로 십만 원으로 잡는다면 그 당시의 한 렙돈은 약 천오백 원 정도가 됩니다. 십만 원의 육십사분의 일은 정확히 1562원50전입니다. 그러니까 두 렙돈이면 그저 삼천 원 정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한 근로자의 하루 임금을 오만 원으로 잡는다면 두 렙돈의 가치는 천오백원 정도로 작아질 것입니다. 그러니까 라면 두 봉지 정도밖에 살 수 없는 돈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과부의 헌금하는 모습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시고는 뜻밖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본문 43절) 그리고는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를 설명하셨습니다. 앞서 헌금한 부자들은 다 풍족한 가운에서 헌금을 했지만 그 과부는 가난한 가운데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본문 44절). 

예수님께서는 지극히 적은 돈을 헌금으로 바친 그 과부가 다른 어떤 부자보다도 헌금을 많이 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자들은 넉넉히 살면서 남아도는 돈에서 헌금을 했지만 그 과부는 자기가 살기에도 모자라는 가운데서 가진 모든 것을 다 털어 헌금함에 넣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과부는 가난한 가운데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다”는 것은 그녀에게는 그날그날 먹고 살 돈 외에는 일체의 여유 돈이나 저축이나 예비비나 여차하면 처분할 수 있는 부동산 같은 것도 없었음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헌금할 때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헌신적으로 했느냐 즉 얼마나 희생했느냐 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헌금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바쳤느냐가 아니라 바치고 나서 얼마나 남아 있느냐 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부자들은 헌금을 많이 했지만 그들에게는 여전히 훨씬 더 많은 재산이 있었던 것입니다. 

외관상의 액수만 보면 부자들이 훨씬 더 많은 헌금을 했지만 가진 것 또는 남은 것과의 비율로 보면 그 과부여인이 비교도 할 수 없이 큰 헌금을 했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있는 것을 다 바쳤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헌신을 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몸과 마음을 다 바쳐 헌금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일부러 헌금함 맞은 편에 앉으셔서 사람들의 헌금하는 모습을 지켜보시다가 한 과부가 헌금하는 것을 보시고는 제자들을 부르셔서 말씀하신 것은 이 가르침을 주시기 위하여 의도적이고 계획적으로 기회를 엿보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생활비 전체 곧 모든 소유를 바친 그 여인의 행동은 대책 없이 무모한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그 행위는 하나님에 대한 그녀의 절대적 신뢰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 여인은 자기의 생활비 전부를 헌금함에 넣으며 그리고 나서 어찌 살 것인가 하는 염려를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겼던 것입니다. 그때까지 지켜주시고 살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그 하나님께서 또 계속해서 책임지시고 먹고 살 수 있게 해주실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으며 자기에게 있는 것으로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것을 온전히 바치기를 기뻐하는 믿음의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바치는 헌금의 액수를 보시지 않고 많든 적든 물질을 바치는 우리의 마음을 보신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는 그 과부의 예를 들어 가르치려 하신 것입니다. 새 성전 건축을 위하여 헌금을 작정하는 우리에게서도 하나님께서는 그 액수보다 우리의 헌신하는 마음, 희생하는 마음,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하며 삶의 염려를 온전히 하나님께 의탁하는 마음을 받으시기를 기뻐하실 것임을 깨우쳐주시는 것입니다. 

작년에 우리의 태국선교사이신 김장원 목사님이 전해주신 일화를 못 들으신 분들이 많은 것 같아서 다시 한 번 옮깁니다. 현대판 신데렐라 이야기 같은 실화입니다. 오래전 태국의 북부 (우리 교회의 메수어이 한태기독교교육센터가 있는) 치앙라이 주의 어느 시골마을에 조그만한 교회가 하나 있었습니다. 이 교회에는 이십여 명의 성도가 있었고 대부분이 어린아이였지만 담임전도사와 함께 아주 은혜롭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던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 예배당이 너무 낡아 비가 올 때면 지붕에서 주룩주룩 빗물이 떨어져 예배를 드릴 수 없었습니다. 

전도사님은 성도들과 회의를 하여 교회를 신축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전도사님이 다른 교회로 사역지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주로 어린 아이들로 이루어진 이 교회 성도들 가운데 열입곱 살 먹은 어린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 소녀는 교회학교 교사였습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기도회도 하고 매일 아침마다 성전에 가서 기도를 하는데 “교회를 건축하게 해주세요.” 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매일같이 기도하던 어느 날 그 소녀는 하나님으로부터 “네가 하라.” 하시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무심코 지나쳤지만 기도할 때 마다 “네가 하라.”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마음에 들리곤 했습니다. 

그 소녀는 “저는 할 수 없잖아요? 나이도 어리고, 돈도 없고, 배운 것도 없고, 힘도 없잖아요? 하고 싶지만 제가 어떻게 합니까?” 하며 하나님에게 항변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신문잡지를 보는 중에 “눈을 삽니다.” 하는 광고가 나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처음에 생각 없이 지나쳤는데 다시 그 광고를 보게 되어 자세히 읽어보니 어느 안과병원에서 눈을 산다는 광고였습니다. 그때 그녀의 마음에 “성전건축 네가 하라”는 생각이 들어서 며칠 기도 끝에 결심하고 읍내에 있는 그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의사 선생님을 만나 눈을 팔기 위해 왔다고 하니까 의사가 깜짝 놀라면서 “어떻게 그렇게 예쁜 어린 소녀가 눈을 팔려고 하지?” 하며 물었습니다. 그 소녀는 교회를 건축하기 위해 돈이 필요해서 그런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의사는 더 놀라며 묻기를 “도대체 교회가 무엇인데 눈까지 팔아서 건축을 해야 되냐?” 하며 한 주간 시간을 줄 테니 더 생각해보고 정말 눈을 팔 것이라면 다시 오라고 돌려보냈습니다. 의사는 그 소녀를 돌려보내고는 그때까지 전혀 알지 못하고 지내온 교회에 대한 궁금증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멀리 있는 한 교회를 찾아가 목사를 만나고 교회에 대하여 물어보았습니다. 그 의사의 방문과 질문을 받은 목사는 교회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면서 예수님에 대해, 죄와 복음과 영생과 천국 등에 관해 말해주게 되었습니다. 복음에 대하여 듣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로 그 의사는 교회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일주일 후에 그에게 눈을 팔러 왔던 소녀가 다시 찾아왔습니다. 의사가 그 소녀에게 “아직도 눈을 팔아서 성전건축 할 생각을 바꾸지 않았니?” 하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 소녀는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의사가 소녀에게 말하기를 “눈은 팔지 않아도 된다.” 하면서 그 교회 성전건축을 자기가 해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 동네에 성전이 건축되었고 그 의사도 예수 믿게 되었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그 의사는 그 소녀를 자기 집에 데려가서 학비와 생활비를 대주며 대학공부까지 시켜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그 소녀가 그 의사의 아들과 혼인해서 지금 아주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합니다. 교회 건축을 너무나 간절히 소원하여 기도하던 가운데 “네가 하라.”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는 그 일에 자기 눈까지 팔며 온전히 바치고자 한 한 소녀의 갸륵한 마음에 하나님께서도 감동하셔서 놀라운 역사로 응답해주신 것입니다. 

“네가 하라.” 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우리 새문안교회의 모든 성도들의 마음에 메아리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며 기도할 것이 아니라 내가 정말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고 있는지, 내가 진정 온전히 바치고 있는지, 사실은 바치려면 바칠 수 있는 것이 얼마든지 있지만 이런 염려 저런 염려 때문에 또는 이런 계산 저런 게산 때문에 아직도 움켜쥐고 내놓을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 나는 아닌지를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돌아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새 성전건축은 하나님께서 하시려면 얼마든지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전을 지으시는데 돈이 모자랄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단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최선을 다해 기쁨으로 내놓는지를 보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기만 하면 그러고 나서 모자란 것은 그것이 얼마가 되든지 하나님께서 다 해결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닫고 있으면 하나님께서도 만복의 창고 문을 열지 않고 게실 것입니다. 이제는 때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온전히 바치느냐를 보시며 상상도 못하게 베푸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아 누릴 영광스러운 기회를 흘려보내는 교우들 한 사람도 없기를 바랍니다. 태국의 소녀에게 행하신 그 기적 같은 일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행하시려고 기다리고 계시다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작정하는 헌금액의 크기를 보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마음의 크기를 보십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헌신하려고 하는 우리의 마음의 크기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가 감당하고자 하는 희생의 크기입니다. 우리의 삶의 염려를 얼마나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는가 하는 신뢰의 크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부러 성전 안 헌금함 맞은 편에 앉으셔서 헌금하는 모든 사람을 유심히 지켜보셨습니다. 부자들도 보시고 과부여인도 보셨습니다. 그들이 헌금을 얼마나 하는지 훤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는 부자들이 많이 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두 렙돈 밖에 헌금함에 넣지 못한 여인이 그 누구보다도 헌금을 많이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각자가 헌금하는 것도 다 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한 헌금의 액수도 일일이 다 알고 계시지만 그 무엇보다도 헌금에 임하는 우리의 마음을 꿰뚫어보고 계십니다. 남들은 얼마나 하는지 기웃거릴 필요 없습니다. 그 일은 주님께 맡기고 우리는 각자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힘쓰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큰 영광을 드러내시기를 기도합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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