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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강림주일] 오순절과 성령강림 (겔 37:1-6, 행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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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과 성령강림 (겔 37:1-6, 행 2:1-4)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2천 년 전 오늘 세상에 성령이 강림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며 두려움의 삶을 살던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기다렸다가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간절히 기도하며 기다렸습니다(행 1:4). 그때 10일 만에 강하고 바람 같은 소리가 나더니 성령이 임하셨습니다(행 2:1-4). 

그 후 그곳에 있던 제자들에게 변화의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성령은 소리는 있고 힘과 능력으로는 나타나는데 모습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때부터 성령을 설명할 때 바람과 같다고 한 것입니다. 구약성경 요엘서 2장 28절에는 “성령을 부어 주리라”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요엘 선지자가 기원전 800년경에 예언한 것이 신약시대에 와서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세 위를 갖고 계십니다. 이 세 위는 서로 다르지만 본질은 하나입니다. 이 세 위가 서로 일체를 이루는 것을 삼위일체라고 합니다. 또한 헬라어로 성령을 프뉴마(pneuma)라고 합니다. 이는 거룩하신 영이라는 뜻입니다. 이 성령이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비둘기 같이 임하셔서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광야시험 중에도, 각종 기적을 행하실 때도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예수님의 사후에 이 세상에 오셔서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역사하십니다. 예수님은 눈으로 보이게 오셨지만 성령님은 눈에 보이지 않게 오셔서 섭리하시고 역사하시고 운행하시며 활동하셨습니다. 그렇게 2천 년 전 오늘,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셔서 오늘까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오늘을 성령강림주일이라고 합니다. 

오순절의 의미 

오순절은 헬라어로 펜테코스트(Pentecost)라고 합니다. 이는 “50일의 제삿날”이라는 뜻입니다. 이 오순절에는 4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맥추감사절입니다. 유대인들은 여름 보리를 거둔 후 첫 곡식을 드리며 맥추감사절을 지켰습니다(출 23:16). 새 곡식을 주심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소제를 드린 것입니다. 이렇게 하루만 드리는 감사절을 맥추절이라고(출 23:16)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 날은 유월절이 지난 50일째 날이라 해서 오순절이라고도 불렀습니다. 또한 유월절이 지난 7주후 다음날이어서 칠칠절이라고도(레 23:15-16) 했습니다. 

두 번째는 십계명 돌비를 받은 날입니다. 유대인들이 출애굽 해서 시내광야에 도착한 때가 3월(출 19:1)이었는데 그 날이 출애굽한 지 50일째였습니다. 그날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이 적힌 돌비를 받았습니다. 그 계명 속에는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맺은 계약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고 너희는 내 백성이다.” 이것이 계약 내용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이날을 감사절로 지켰습니다. 영적 말씀을 받은 날로 지킨 것입니다. 

세 번째는 성령이 강림하신 날입니다. 2천 년 전 오늘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던 제자들에게 성령이 강림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며 기다렸다가 성령을 받으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모여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분명 그냥 기도한 것이 아니라 몸부림치며 했을 것입니다. 성령받기 위함뿐만 아니라 자신의 미래가 너무 불투명했기 때문입니다. 살다보면 이렇게 절박할 때가 오게 됩니다. 사람들은 그때 진정으로 기도하며 진정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그래서 그때 잊고 있었던 것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세계 2차 대전 때 영국이 프랑스군을 지원하고자 29만 명의 대군을 출격시켰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프랑스군이 독일군에게 완패를 당했습니다. 그래서 영국군도 전멸위기 상황에 처하게 되며 급하게 도버해협을 건너 후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독일군은 영국군을 전멸시키기 위해 총력으로 그 뒤를 쫓아왔습니다. 이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군대에 쫒기는 상황과 같았습니다. 

영국에서는 그 소식을 듣고 도울 수 있는 방안을 검토했지만 전혀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때 영국 국왕 조지 5세가 다음과 같은 방안을 선포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께 기도하는 길뿐입니다. 모든 국민은 영국군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이 얼마나 축복입니까?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영국 국왕이 백성들에게 기도의 날을 선포하는 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때로 환란이나 절박함은 재앙이 아니고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때 영국 국민이 기도할 때 그냥 형식적으로 기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몰살당할 위기에 있는 29만 명 속에 내 아들들이 들어 있는데, 내 조카가, 내 동생이, 내 형이, 내 손자가 들어있는데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겠습니까? 그런 기도는 반드시 응답됩니다. 위기의 때에 드려지는 기도, 내 이기적인 기도가 아닌 공동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됩니다. 그것이 성경의 약속입니다. 그때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영국군이 도버해협을 건널 때는 더 없이 좋던 날씨가 독일군이 건널 때 갑자기 돌변했습니다. 그래서 애굽군대가 그랬듯이 갑작스런 폭풍우로 인해 독일군대는 대파를 당했습니다. 

그때 그 모습을 본 영국군은 도착 후에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날 승리한 이유는 기도의 날을 선포하고 모두가 간절하게 중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제자들이 얼마나 절박하게 기도했겠습니까? 그 기도는 분명 회개의 기도였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절박하면 회개 기도하게 됩니다. 자신들의 무능과 교만됨과 원수맺음과 죄지은 것에 대해 회개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회개를 좋아하십니다. 회개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성령이 임하십니다. 성령 받는 조건이 바로 먼저 회개하는 일입니다. 제자들은 그날 자신들의 무능함과 추함과, 교만, 몰이해와 불신을 철저하게 회개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날 오순절 날에 성령이 강림하셨습니다.

네 번째는 교회 탄생일입니다. 성령강림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고백하며 모여서 예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임 공동체를 교회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신앙인들이 모인 공동체로서 그 모임을 의미합니다. 오늘 교회가 공식적으로 탄생하게 된 날이 바로 오순절 날입니다. 구약시대의 언약 공동체라는 것도 바로 교회 개념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이 교회개념을 총회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 총회를 히브리어로 카할(신 9:10, 10:4, 18:16)이라고 하는데 그 때에는 백성들이 다 모였습니다(출 19:5-6). 그들은 정기적으로 년 3차례 유월절 때, 맥추절 때, 수장절 때(출 23:14-17) 모였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구약시대에는 카할, 즉 언약 공동체라고 불렀습니다. 신약시대에 와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성령강림 하신 후 그를 주로 고백하고 믿는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이 공동체를 교회라고 불렀습니다. 이 공동체는 혈육공동체도 민족공동체도 아닌 예수와 연합된 성령이 내주하시는 공동체였습니다. 그래서 신약공동체 일원은 모두 형제이고 자매였습니다. 

이 공동체는 혈육공동체나 민족공동체 차원을 넘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사도행전 2장처럼 네 것 내 것이 없이 서로 나누고 함께 하며 섬기며 하나 되었습니다. 이렇게 성령강림 후에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후대에 이 날을 “메시야가 완성된 날”이라 해서 “화이트 선데이(White Sunday)”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그날에 하얀 드레스를 입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날이 교회가 탄생한 날이고, 그리스도인이 세례 받음으로 영적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는 부활절과 오순절에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성령을 보내심 

성령을 보내심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선교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제일의 목표와 관심은 세상구원입니다.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제일 먼저 한 일은 복음을 전하고 증거한 일입니다. 제자들은 성령을 받고 목적과 할 일을 발견하여 내 양을 먹이라는 뜻을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하고 다녔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는 베드로가 성령을 받은 후 설교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 날 베드로는 유대교의 역사와 하나님의 예언이 성취된 것을 일목요연하게 설교했습니다. 그랬더니 3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회심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때부터 오순절은 기독교의 절기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성령은 시대마다 준비된 사람들을 선교하게 만듭니다. 성령이 입을 열게 하시고 전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장 8절에는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나라도 그렇게 복음을 받은 선교사들로 인해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성령의 보내심은 선교가 제일목적입니다. 

두 번째는 희망입니다. 당시는 절망의 시대였습니다. 그렇기에 성령의 오심은 희망이었습니다. 에스겔서를 보면 그 당시는 민족의 압제 생활로 미래가 막막하고 암담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조차 없었고 현실은 너무 비참했습니다. 그때 성령은 그를 이끌고 골짜기로 가서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거기에는 버려진 해골들이 있었습니다. 그 모습은 이스라엘의 현재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성령의 바람이 불어오자 마른 뼈들이 움직이더니 군대를 이루었습니다. 

그렇게 환상을 본 에스겔은 백성들을 향해 외쳤습니다. “이제 회개하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실 것이다.” 요엘서에서 요엘도 외쳤습니다.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고 너희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라.” 이사야도 외쳤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을 것이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 하여도 피곤치 아니하며 걸어가도 곤비치 아니하리라.” 성령은 능력의 영이고 소망의 영이며 새 힘과 새 길을 여시는 희망의 영이십니다. 

세 번째는 연합입니다. 성령은 일치와 연합을 이루시는 영이십니다. 성령이 강림하실 때 가장 먼저 나타난 변화는 하나를 이룬 일이었습니다. 먼저 언어의 통일이 이루어졌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는 12개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다락방에서 함께 기도를 했습니다. 그들은 서로 언어가 달랐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자 그들이 통일된 방언으로 기도했습니다. 이는 바벨탑 사건 이후 처음으로 이루어진 언어의 통일이었습니다. 또한 뜻의 일치도 이루어졌습니다. 그곳에 12개국에서 온 사람들이 모였으나 모두 한뜻을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전도에 매진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이 강림하는 곳에는 언제나 하나 됨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교회 공동체가 가져야 할 사명은 바로 하나를 이루는 일입니다. 성경도 하나 됨의 아름다움을 강조합니다. 시편 133편을 보면 형제의 연합을 말씀합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함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이는 오늘 교회가 지향하여야 할 목표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시편 133편은 성전에 올라가며 불렀던 노래의 가사입니다. 12지파로 흩어졌던 형제들이 한곳으로 모여듭니다. 

그래서 예배드리러 줄지어 올라갑니다. 그때 이 시로 하나 됨을 꿈꾸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형제가 연합함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마치 보배로운 기름이 아론의 수염타고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1-3).” 이는 임직식 장면을 연상한 표현입니다. 기름은 제사장이 임직식 때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헐몬산의 이슬은 모든 식물이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생명수를 말합니다. 이는 땅을 비옥하게 해 주는 생명수입니다. 즉 형제가 함께 한마음으로 연합하여 살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공동체는 하나를 이루기 위해서 서로 노력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명령이고 뜻입니다. 그렇기에 분열과 갈등을 서로 막아야 합니다. 그래야 개인도 살고 가정도 살고 사회도 살고 나라도 살고 교회도 살고 기업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사시대에는 백성들이 타락하였고 하나님을 떠나 서로 분열하였습니다. 그 결과 나라가 망했습니다. 솔로몬의 타락으로 이방신을 수입하였고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나라가 남북으로 둘로 분열되어 망하게 되었습니다. 분열은 망하게 되는 길입니다. 그렇기에 교회공동체는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복음서 가운데 하나 되라는 메시지를 여러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잃은 양 비유(눅 15:3-7)는 이탈한 양 한 마리 때문에 99마리 양들이 고난 받는 모습을 역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마리 양 때문에 나머지 99마리가 불편합니다. 길 잃은 양 한 마리가 나머지 전체에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잃은 동전 비유도(눅 15:8-10) 그렇습니다. 잃어버린 동전 하나 때문에 나머지 9개가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습니다. 탕자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족 중 한 사람이 이탈하거나 낙오하거나 병들면 모든 가족에게 아픔을 주게 됩니다. 이는 모두 공동체 정신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공동체를 세우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오늘 개신교회는 분열이 심합니다. 그런데 그 이유를 성찬에 두는 신학자도 있습니다. 대부분 교회는 일 년에 두세 번 성찬식을 합니다. 그것도 떡은 잘게 썰고 포도주는 작은 잔에 각각 나누어 줍니다. 성찬식은 원래 주님과 연합됨을 확인하고 지체됨을 확인하는 예식입니다. 그래서 이전 성만찬은 큰 떡에서 떼어먹고 큰 잔에서 나누어 마셨습니다. 그래야 주님 몸에서 우리 모두가 지체됨을 확인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신학자 본회퍼는 “성도의 공동생활”이라는 책에서 “영적 공동체 안에서는 인간과 인간의 직접적인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조했습니다. 그 말은 교회 공동체에서 예수가 없이 인간만 있는 공동체는 존재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모든 공동체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중재됩니다. 누군가를 도울 때도 내가 가진 것이 많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형제의 약점을 고치고 치료하는 것도 오직 주님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내가 형제의 약점을 고치겠다고 비판하고 지적하는 것은 형제의 상처만 크게 할 뿐입니다. 그냥 우리는 공동체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고, 내 아픔을 치료하고 고쳐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만약 갈등을 일으키는 사람이 있다 해도 내가 고치려고 하기보다 주님이 고쳐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어떤 방법으로라도 그를 고쳐주십니다. 그것이 공동체의 유지법입니다. 

나의 이야기

성령이 내 인생에 임재하시는 것은 가장 큰 복입니다. 그렇기에 성령의 임하심은 나의 이야기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 입에서 고백하고 증거할 수가 있습니다. 또한 내가 변화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의 삶에 변화가 생깁니다. 내 의지가 아닌 성령의 힘으로 사역하고 살고 일하게 됩니다. 그때 나를 초월하고 가족을 초월하고, 내 것을 초월하게 됩니다. 또한 때로 나를 포기하고 희생도 하게 됩니다. 

이는 성령의 힘으로만 가능합니다. 또 내가 성령의 사람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조화의 주인공, 일치의 주인공, 화해의 주인공, 행복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에는 불화의 요인의 근성과 뿌리가 다 들어 있습니다. 또한 욕망과 투기, 탐욕과 음란함의 뿌리도 들어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성령만이 다스릴 수 있습니다. 성령만이 그 뿌리를 뽑을 수 있습니다. 그때 내가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세상에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이 성령을 힘입으십시오. 이 성령에 흠뻑 취하십시오. 그리고 성령이 주시는 지혜와 은혜로 살아가십시오. 그때 우리 모두 주님의 충실한 제자들이 될 것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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